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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주>
<산하고인>
<테이크쉘터>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
<게임의규칙>
<새로운삶>
<키리시마가동아리활동그만둔대>
<친애하는당신>
<아가씨>
<첩자교The Bridge of Spies>
<터미널>
<프랑코포니아>
<우리들>
<부초>
<환상의빛>
<나를찾아줘Gone Girl>
<설리>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해피엔드>
<나,다니엘블레이크>
<현기증>
<거울>
대개 본 순서대로 정리했다.
<안녕하세요> (오즈야스지로,1959)
오프닝의 공간활용이 인상적이었다. 미닫이문들이 열고 닫히며 포개지는 반응숏들이 한 마을을 둘러싼 공기까지 그려내는 그림들을 보았다.
결말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뒤져보면 생각나긴 하는데, 퍼뜩 떠올렸을 때 바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애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다소 불경한(..) 21세기 잉여식의 감상이 그 위를 덮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주> (이준익,2016)
지나치게 세트느낌이 나는 후반부 체포장면을 제외한다면 좋은 기억이 많은 작품이다. 낭송장면이 특히 그런데, 햇살이 비치는 동경 전차의 내부와 함께 <사랑스러운 추억>이 읊조려지는 장면이 가장 먼저 기억난다. 초반부에 기차에서 보이는 수묵화같은 바깥 전경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밀정>(김지운,2016)의 그것보다 더 좋았다. <밀정>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지나친 레퍼런스들이 집중을 방해하는데, 특히 <킹스맨>을 참고한 것이 분명한 역사내 총격장면은 좋지 않다고 느꼈다. <동주>는 이준익의 오리지널이라 할 만 하다. 그의 영화들 중에서도 이 작품이 그런 느낌을 가장 강하게 주었다. (<안녕하세요>와 달리 이미 알고 있었던 결말인데도 새삼스럽게) 비극적인 마지막이 극장 바깥의 현실과 겹쳤기에 더 그런 마음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산하고인> (지아장커,2015)
TV드라마(비율)에서 자신만의 화폭으로, 그러다 다시 모바일드라마(비율)로.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대사가 모바일드라마 쪽에 많은데도, 그 부분의 이질감 때문에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보긴 힘들 듯 하다. 감독이 이 핏기없는 미래를 견딜 수 있겠냐고 물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좀 멀리 떨어진 지역의 극장까지 찾아가서야 기어이 봤다는 것 등 개인적인 기억이 남다른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꼭 지아 장커의 최고 걸작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테이크쉘터> (제프니콜스,2011)
장엄한 사이코드라마이면서, 변칙적인 리듬의 좀비묵시록이기도 하다. 두 갈래가 겹쳐드는 ‘쉘터’에서의 후반부는 작년에 본 장르영화 중 최고였다.
<부산행>도 나름 재미있었다. 전반부까지는 피가 끓었다, 고 써 둔다. 다만 지금 다시 <부산행>을 본다면 굳이 극장에서 보고 싶진 않은데, <테이크쉘터>는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 (코언형제,2007)
간결한 리듬으로 보는 사람을 옥죄어오는 신자유주의식 공포드라마. 다만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에는 미국 남부식의 보수성이 당면한 배경으로 깔려있는데, 영화화되면서 그게 확률게임이라는 공포에 저항하는 핵심처럼 받아들여질 위험이 살짝 보였다. 다시 말해 좋은 답변이 담겼다기보다, 그 형식미가 빼어나다.
<게임의 규칙> (장르누아르,1939)
전체적인 구도가 빼어나다. 면밀히 계산되었음이 분명한 건축적 구도가 중반부에 정확히 포개어져 뒤집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후 종반부에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는 정신적인 쇼크를 안긴다. ‘인간혐오’ 계통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삶> (필립그랑드리외,2002)
다소 폭력적인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것이 고독과 상처의 끝에 취하는 것임을 굳이 이해시키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카메라를 뒤흔들며 토해낸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요시다다이하치,2012)
오합지졸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세계들. 퀴퀴한 동아리방 냄새를 맡는 것 같다. 그 방의 주인공이었건 아니건 그런 걸 추억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
<친애하는 당신> (아피찻뽕위라세타쿤,2002)
작년에 본 작품들 중 가장 빼어난 형식미가 담긴 작품이다. 어떤 패기마저 느껴졌다. 올해들어 <엉클분미>를 보았고 역시 좋았으나, 왠지 지아 장커의 <소무>처럼 이 작품이 자꾸 생각났다. 여전히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
<아가씨> (박찬욱,2016)
1장의 김태리 씨는 누구와도 바꾸지 않겠다. 전체적으로는 탐미적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차라리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유치할 순 있으나 (다른 어떤 작품들처럼) 사악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첩자교> (스티븐스필버그,2015)
<친애하는 당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작품이고 <아가씨>가 가장 유쾌했던 작품이라면, <첩자교>는 작년에 형식적으로건 정서적으로건 가장 많이 기댄 작품이다. 남은 평생을 단 한 국가의 영화만 선택해서 볼 수 있다면 나는 결국 미국영화를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would it help?' 역시 계속해서 선택해 되뇌일 주문이 되었다.
<터미널> (스티븐스필버그,2015)
<첩자교>가 있기에 이 작품은 명단에 넣지 않으려 했으나, 작년에 ‘개인적인 판타지로서’ 가장 많이 기댄 작품은 <터미널>이기에 외면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이방인에게 위안을 주는 이 판타지의 몇몇 장면들과 설정, 음악, 연기 등을 가끔씩 약 빨듯이(..) 흡입하곤 했다.
엄격하지 못한 태도로 비칠 지도 모르겠으나, 차라리 더 나아가서, 나는 작년에 화제가 된 <비밀은 없다>(이경미,2016) 역시 <내부자들>(우민호,2015)의 성역할을 뒤바꾼 정도의 판타지로 봤다. 그게 어디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니 내 취향도 존중해 달라. 또한 제이슨 본 시리즈도 판타지로서 좋아하는데, <제이슨 본>(폴그린그래스,2016)이 전작들에 비해 둔중한 액션씬들을 보이긴 했으나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제이슨 본이 높은 곳에서 추락해 길바닥에 널브러지자 지나가던 행인이 무려 ‘괜찮아요?’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CCTV감시망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흔적을 남기지 않던 제이슨 본에게서, 나이가 들자 어쩔 수 없이 피곤한 이방인의 맨살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프랑코포니아> (알렉산더소쿠로프,2015)
소쿠로프의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늘 그의 작품들에 어떤 위태로운 예술성이 담겨있다고 느껴왔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물들을 폐허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그 스산함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다(소쿠로프에 비하면 <새로운 삶>은 양반이다). 그나마 <프랑코포니아>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대중친화적인 화법으로 얘기한다. 다소 의아해서 극장에 갔다 온 며칠 후 <러시아방주>를 다시 보았다. 두 작품간의 극명한 차이가 그제서야 보였는데, <러시아방주>에서 겨울궁전을 풀샷으로 찍은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프랑코포니아>에서 루브르는 풀샷은 물론이고 3d모델링 등 각종 이미지를 동원한 원경으로도 등장한다. 그 이유를 <프랑코포니아>에서 2차대전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폐허를 회고하는 감독의 독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소쿠로프는 <프랑코포니아>를 자신 나름의 친절한 가이드북으로 인쇄해 마무리지은 반면, <러시아방주>는 아예 끝나지 않는 꿈으로 남길 바랐던 것 같다.
<우리들> (윤가은,2016)
촬영현장이 궁금했던 작품이다. 세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야외에서 아역배우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한 부분이 놀라웠다. 역시 기사를 읽어보니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그것이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촬영진들이 극기훈련캠프의 조교들보다 백 배는 낫다.
다만 여전히 마지막의 봉합은 아쉽다. 아무리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세상을 담으려 했다 해도, 결국 그 부분은 창작자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옥을 긍정할 순 없지 않은가. 왜 잘 나가다가 촛불 켜놓고 편지 쓰라는 거야? <태풍클럽>(소마이신지,1984)을 다시 보고 싶다. - 생각해보니 <안녕하세요>의 결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던 이유에는 같은 땅에서 나온 이 작품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부초> (오즈야스지로,1959)
이 작품 역시 내용을 온전히 긍정하긴 어려웠다. 내용을 따라가기보단 화면구성에 집중해 보는 게 더 즐겁다. 그런데도 명단에 넣은 이유는, 이 작품이 지난 해 본 가장 에로틱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당신>과 <아가씨>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명암대비가 극명한 복도 장면은 두고두고 숨막히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환상의 빛> (고레에다히로카즈,1995)
역시 포함시킬 지 망설인 작품이다.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나는 이 감독의 열성팬이지도 않다. 다만 형식적인 부분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이 영화는 결국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영화이다. 거의 모든 장면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소년과 남자는 왼쪽으로 떠나가고, 소녀와 여자, 할머니는 비스듬히 가로놓인 오른쪽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조금씩 나아간다. 떠나간 남자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여자가 다시 한 번 예전의 신혼집을 방문할 때 카메라가 그전까지의 시야각과는 완전히 다른, 그 길의 오른쪽으로 나아간 곳에 자리잡고 화면을 보여줄 때 이 젊은 미망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 완연해진 해안가의 곡선을 진정한 삶의 위안의 표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곤 걸> (데이빗핀처,2014)
이 영화는 보자마자 명단에 들어왔다. 전지구적으로 도긴개긴상태에 다다른 스타워너비들의 욕망이 들끓는 SNS시대의 걸작이다. 이것을 ‘혐오시대’ 또는 ‘대상화시대’라는 다른 말로 바꿔도 상관없다. <조디악>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셜네트워크>에는 버금가는 리듬 역시 좋았다. 데이빗 핀처는 <조디악> 즈음부터 아예 핀처 리듬, 또는 핀처 룩이라 할 만한 자신만의 인장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야 핀처가 제작자로, 또 연출에도 일부 참여한 미국드라마 <하우스오브카드>시즌1을 해치웠는데, <곤 걸>과 컬러룩이 거의 동일했다. 화면의 색온도, 의상과 소품의 색상(아이보리 벽지, 푸른 빛 셔츠) 등에서. 전지구적으로 비슷해져가는 어떤 중산층(워너비) 모델링. 그 모델하우스 안의 지옥도를 현재 핀처만큼 잘 그려내는 사람은 없다.
<설리> (클린트이스트우드,2016)
주인공의 조깅만큼이나 성실한 리듬 안에 플래시백 장면들 역시 조화롭게 들고 난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웅변되는 것이 잘 살아온 개인의 힘에 대한 옹호라는 점이 다소 씁쓸하긴 하나, 이 리듬과 화면들, 그리고 ‘155명’으로 대표되는 그 어떤 당연함의 힘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2016)
다소 납작해진 세계 안에, 대상화의 시대에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질문들을 담았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번엔 감독의 (감광판에 대한 얘기가 담긴, 씨네21과의)인터뷰도 그만큼 좋고 풍부했다.
<해피엔드> (정지우,1999)
1990년대에 이르러 평준화된 삶의 양상 이후에 벌어지는 황폐한 치정극, 그래서 <접속> 다음에 <해피엔드>라는 걸 이제야 봤다. 오프닝타이틀, 대사 등도 매우 감각적이다. 나는 사실 정지우의 팬이라고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젠 입장이 바뀔 것 같다. <4등>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올해까지는 극장에서 볼 기회가 남아있지 않을까.
<나,다니엘블레이크> (켄로치,2016)
켄 로치의 시대극보다는 현대극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동네 펍에서 EPL을 보며 욕지거리를 드리블한 후 맥주거품으로 세레모니하는 사람들의, 당면한 문제를 당면한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소의 투박함이나 성역할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그것 그대로의 존재감으로 오래도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작품이다.
다시 본 작품들 중에서는 아래의 두 편이 기억에 남는다.
<현기증> (앨프리드히치콕,1958)
작년을 통틀어 한 편의 작품과 그것을 둘러싼 기억만을 남길 수 있다면 <현기증>을 선택하겠다. 추락을 예감하며 사는 삶을 위무하는 유약한 판타지를 역시 틈날 때마다 약 빨듯이(..) 들이켰다. 유일하게 정성일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어마무시한 내용들을 들었으나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은 분량상, 그리고 필력상 맞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가장 완성도높은 사악한 영화(물론 내가 엉성하게 간추린 표현이다..)’라는 표현만은 꼭지처럼 남는다. 어떤 작품들은 그 나이나 상황에 맞는 때가 와야 비로소 그 사악함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을 1년에 걸쳐 느낄 수 있었다. 네 번을 보았다. 극장에서 두 번, 집에서 두 번. 부분적으로 다시 돌려본 기억은 셀 수 없다. 당분간은 이 짓을 멈추고, 좀 더 달라진 후 다시 보고 싶다.
<거울> (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1975)
역시 극장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이전에 처음 봤을 때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여인을 통해 느낀 생과 사의 얄궂음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나중에 파일(..)로 부분부분 봤을 땐 초반부 화재 장면에서 자주 멈췄다. 작년 연말에 극장에서 그 기억들을 다시 이을 수 있었다. 불(빛)은 처음에 어머니와 함께 한 장면 안에서 불타오르다 조금씩 멀어지고, 노을로서 창가나 거울에 갇혔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비춘다. 그 비춤 안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은 결단인가 야만인가? 던져지는 수류탄. 내려친 도끼. 작은 실수들에도 전전긍긍하며 뒷목덜미만을 내비치는 것. 여전히 마지막 장면의, 어머니의 표정. 너도 별 수 없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그래도 죽음으로부터 유예하며, 나는 태어났어도 됐을지를 끊임없이 증명해 보는 것. 그 증명과정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감히 내가 알 수 없다. 사실 여전히 많은 장면들이 의문으로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초중반부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할머니(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 직전에 푸시킨의 시가 등장한다. 푸시킨보다 도스토예프스키-<까라마조프씨네형제들>에도 언급되는 한스 홀바인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를 읽으라는 뜻인가? 싶었으나 확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등등. 그래도 괜찮다. <현기증>이 달콤한 패배에 머무르도록 만드는 술 댓병이라면, <거울>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일깨우는 진한 커피 한 잔이다.
작년에 (다시) 극장을 다니면서 왠지 연말 목록을 10편만 꼽지는 않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었다. 엄격하게 선정한 목록이라기보다 ‘포식의 기록’(..)에 가까운데, 이번엔 이게 맞을 것 같다. 그래야 다음부터는 좀 더 추려내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하반기부터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바빠서 일을 못한다는 핑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3월 전에 썼으니 다행이다. 올해에는 적당한 평균지점을 찾고 싶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를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ps(2017.7.16)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김창우 역, 두레, 1997) 중 p.188
1979년 4월 16일 월요일 새벽 2시
모든 러시아의 천재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이 정신적으로 척박한 풍토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점에 관하여 깊이 사색하였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배출한 러시아를 '위대하고' '메시아적'인 미래를 갖고 있는 곳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중의 소리'로 느꼈으며, '황야에서 외롭게 외치는 소리'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들이 민중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면, 그 민중은 적어도 '위대한' 민중이어야 할 것이며, 그 민중의 나라 역시 위대한 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푸쉬킨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겸손했다. 자신의 글 '기념비'와 '차다예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푸쉬킨은 유럽을 위한 완충지대의 구실을 하는 나라로 미리 정해진 러시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푸쉬킨의 창조적 정신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반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고골리의 창조적 정신은 편안하지 않고 부조화스러우며 자신들이 환상적으로 꿈꾸었던 것들과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기꺼이 믿을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대상을 갖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푸쉬킨을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푸쉬킨에게 러시아는 절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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