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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경찰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과산
果 山 차 성 만
0. 떠오르는 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하여, 몽고의 간섭과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왕은
백성들의 몽고식 머리 모양인 변발을 고치게 하고, 무신 정권 때 설치했던 실제 권력 기구인 정방도 폐지하였
다. 고려의 내정에 간섭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없앴고, 친원파인 기철의 무리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들어 공민왕은 침전에 들어 앉은 채, 아무 말없이 노국 공주의 초상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였다. 지
난 2월 노국 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숨지자, 왕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만 것이다. 왕은 노국 공주 생각으로 침
식(寢食)을 모두 잊고, 정사(政事)도 멀리 하고 있었다. 오로지 노국 공주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2년전에 김용 등이 자신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내세우려고 자신이 있던 흥왕사를 급습했을 때 ...
그때 노국 공주는 당당한 태도로 버티고 서서, 왕인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던가...
더우기 공주는 몸에 태기가 있어, 조정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각 사찰에서 드린 불공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신하들은 모두 고심 끝에 새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신하들은 왕에게 위로가 될 것 같
아, 왕을 모시고 옥천사에 들려서 공주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곳에서 수행한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은 편
조라는 중을 만나게 되었다.
옥천사라는 절의 머슴이 낳은 아들인 편조는 왕의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고, 이름을 신돈으로 바꾸었다.
어느날 왕의 시중을 들던 신돈이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대 이름은 무어라 하는가?"
"반야라 하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어찌 공주를 쏙 빼어 닮았을고.... "
왕은 노국 공주를 닮은 반야와 쉽게 사랑에 빠졌고, 이 틈을 이용하여 신돈은 국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안으로 고려 왕실은 나날이 부패하여갔고, 밖으로는 명나라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아직도 고려는 원나라 영향권에 있었으며, 조정은 망해가는 원나라에 의지하려는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
었다.
왕은 친원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최영과 이성계를 그들에 대한 대항마(對抗馬)로 이용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최영은 조정에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이성계는 변방에서 외적과 싸우는 일로 전전하였다.
27세의 젊은 이성계는 남쪽에서 출몰하던 왜구를 격퇴하는 등 전공을 쌓아, 고려에서 주목받는 관리로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 나타난 이성계의 모습은 마치 몽골 사람처럼 앞 머리는 깎고, 뒷 머리
는 땋아내린 체두 변발을 한 오랑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이성계의 활약은 놀랍기만 하였다. 그는 동북면 도원수로서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방의 요양성을 함락하였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자비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자춘의 아들인 성계는 1335년 화령부(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은 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영흥의 천호(千戶)였던 최한기의 딸 최씨에게서 성계는 태어났다. 이자춘의 나머지 두 부인은 하인으로
아내가 된 사람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씨로서 이름은 내은장이며, 소생으로는 서장자(庶長子)인 원
계이다. 그리고 부인 김씨가 있는데, 이름은 고음가이며 소생은 화(和 후에 의안대군)이다.
원계(후에 완산군)는 성계보다 5살이 위였고, 화는 성계보다 5살이 아래였다. 이들은 함께 전장을 누비
면서, 우애가 돈독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담대하고, 활쏘기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주었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은 주원장이 명나라 태조를 자칭하며, 한족(漢族)의 자존심을
찾기 위하여 몽고족인 원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만주 지역에서도 여진족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려
고, 힘을 키우고 있던 시대였다.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고향인 영흥에서 사냥을 하다가, 8세의 어린 여진족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의 용
모는 준수하였고, 행동이 민첩하였다.
"너는 뭐하는 아이인데, 산에 홀로 왔느냐? 부모님은 계시냐?"
"저는 산에서 나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악무 목왕(岳武 穆王)의 후손
입니다."
"네가 진정 남송(南宋) 시대의 충신이었던 악비 장군, 바로 악무 목왕의 후손이란 말이냐?"
악비 장군은 금군(金軍 금나라 군사)을 무찌른 공이 있었으나, 반대파의 모함으로 죽은 정절(貞節)의
의인(義人)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성계는 자칭 악비 장군의 후손이라는 말에 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네가 악비 장군의 후손이라면, 어째서 이곳에 와서 돌아다니느냐?"
"나의 7대 조모는 여진 사람이었습니다. 16세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에 들어가, 금나라 장수인
올출 휘하에 예속되었습니다. 금군은 송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할머니는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로가 된 그녀는 우연히 달 밝은 밤에 야경(夜警)을 알리며, 징을 치면서 노
래를 불렀습니다. 그때 악비 장군은 포로가 어린 여자인 것을 알고 데리고 갔었는데, 몇 달 후에
악비 장군의 시중을 들던 그녀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악비 장군이 역적으로 모함을 받
고 죽게되자, 그녀는 다시 이곳으로 도망와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대대로 여진
땅에서 살게 된 저의 7대조 할머니였습니다."
이성계는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곁에 두고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의 본명은 퉁두란이고,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된 이지란이었다. 이지란은 이성계 휘하의 부하 장수로서, 후에 이성계와 함께 많은 전공
(戰功)을 세웠다.
0. 회군의 깃발
나랏 일에 소홀하였던 공민왕이 불운하게 암살을 당하고, 고려는 새롭게 우왕이 즉위하였다. 주변 강대 국가
로 성장한 명나라에서는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영토로 삼겠다는 뜻을 고려
조정에 전해왔다.
이 지역을 요동 반도라고도 하는데, 남만주 요하 동쪽 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조정에서는 원나라의 요청으로
거국적인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 동원의 움직임이 거세게 논의되었다.
시중 최영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은 원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군사 동원을 주장하였고, 정몽주. 이성계. 정도전.
차원부 등은 군사 동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수(守)문하시중에 올라서, 조정에서 점차 영향
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북쪽 변방인 함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정도전이 그곳까지 찾아온 일이 있었다. 정도전은 친원파인
이인임 일파에 의해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지 석 달쯤 지나서였다.
"장군이 거느리는 군사들로 그 동안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해 하실 일들이 많으시겠지요...."
정도전은 내친 김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놓으면서, 그곳에서 며칠을 쉬었다. 그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
처럼, 온 힘을 다하여 이성계에게 바짝 다가가려 하였다.
그가 떠나면서 이성계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을 때, 이성계는 그에게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삼봉, 그 동안 유배 생활하느라 고생이 많았소. 다시 복직이 되도록 조정에 추천을 하겠소.
잠시 기다렸다가 그대의 뜻을 활짝 펴보시오...."
이때 이성계의 나이는 48세였고, 정도전은 41세였다. 그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인(武人) 기질을 흠모하게 되
었고, 관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성계 장군을 통하여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넓은 들, 하늘 아래 초목이 자라고
긴 강은 띠처럼 성을 돌아 흐르네
장군이 이 땅에서 억센 오랑캐 꺾어
장수 소임 거듭 생기는데도 아직 검은 머리구나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 동원으로 조정이 찬반으로 갈라져 있을 때, 이성계는 잠자리에 늦게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꿈이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모든 집의 닭들이 일시에 울었고, 모든 집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그는 다 찌그러진 집안에서 서까레 셋을 등에 지고 힘들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긴 이성계는 고을에서 꿈 풀이를 잘 한다는 늙은 할멈을
찾아갔다. 그 늙은 할멈은 꿈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매우 좋은 꿈을 꾸셨군요. 제가 감히 해몽을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안변부 설봉산에 한 승려가 있는데, 토굴에서 벽을 보면서 수도한지 9년이 되었답니다.
당신이 가서, 지성으로 물어보시지요."
이성계는 안변을 지나다가 마침 설봉산 토굴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굴문 밖에서 절을 하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승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께서는 어째서 오셨습니까?"
이성계가 꿈 이야기를 하자, 비로서 중은 돌아앉아 눈을 뜨면서 바라보았다.
"모든 집의 닭이 일시에 운다는 것은 높은 직위에 올라갈 형상이요,
모든 집에서 한꺼번에 절구질하는 소리가 난 것은 나라(기동箕東)를 얻을 형상이요,
허물어진 집 속에서 서까레 세 개를 짊어진 것은 임금 왕(王) 자(字)로서 군왕이 될 형상입니다."
이렇게 꿈을 풀어서 설명한 승려는 바로 무학 대사였다. 그리고 무학은 이성계에게 이런 화두를 던졌다.
"모사재인(謀事在人)이나, 성사재천(成事在天)입니다...."
무학의 말은 이성계가 군왕(君王)의 야심을 갖게 하는 주문(呪文)처럼 들렸다. 이성계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학이 건넨 화두를 곰곰히 생각하였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
대업의 성사 여부는 사람에게 달렸고, 세상의 일들은 사람이 도모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성계는 이색, 정몽주, 원천석, 차원부, 정도전 등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들을 하나, 둘씩 만났다. 이
성계가 먼저 정몽주를 만났을 때,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는 그는 요동 정벌의 부당함을 단호하게 말
하였다.
"장군께서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군사적 모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정몽주는 전쟁을 피하고, 외교를 통한 해결책을 모색해보자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평산의 수운암동에는 차원부가 고려 시국의 민망함을 느끼고, 주역을 읽으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있었다.
차원부 역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당대 명성을 떨치던 성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성계는 평산으로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운암동으로 차원부를 찾아갔다. 방에서 매화를 치던 차원부는 이성계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차원부는 평소에 지녔던 자
신의 소신을 설명해나갔다.
"요동 정벌이 불가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소국이 대국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도 부적당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여서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습니다."
차원부는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의 4대 불가론(四大 不可論)을 종이에 적어주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이성계의 질문에 차원부는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왕께 상소를 올리셔야겠지요."
"허나 상소를 올려도 왕께서 응하시지 않는다면...."
"하오면 승산없는 전쟁을 강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기회를 보아 개경으로 무사히 돌아오심도 계책일
듯 합니다.... "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중신들을 대신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최영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이성계의 상소는 거부되었다.
1388년 2월 왕은 8도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세자와 왕족들은 한양 산성으로 보내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하였다. 이해 4월 왕은 최영을 8도 도통사로 삼고, 좌군 도통사에 조민수, 우군 도통사에 이
성계를 임명하였다.
요동 정벌군 38,000여명은 개경을 출발하여 평양에 도착하였다. 때이른 장마로 연일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행군하는 길은 진창으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8도 도통사 최영은 후방에서 지휘하기로 하고, 병사 5,000여명과 함께 평양성에 잔류하였다. 조민수.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3만여명의 병사들이 국경에 다다르니, 압록강은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장마 빗속을 연일 쉬지 않고 행군을 해오니, 병사들중에는 몰래 도망치거나 환자가 발생하기도 하였
다. 고향에 홀어머니와 처자식들을 두고 온 딱한 사정이 있는 병사들도 있었고, 강제 징집으로 불평하는 자
들도 많았다. 군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고, 날씨마져 궂은 상황에서 실제 전투에 투입할 수 있
는 병력은 실제로 3만명도 되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 정벌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때는 음력 5월이었
다.
이성계는 여러 악조건을 감안해보고, 현지 사정을 소상히 왕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성계는 고심끝에
요동 정벌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최영 장군과 왕은 이성계의 주장을 거듭 거부하였고, 오히려 요동 정벌을 독촉하고 나섰다.
아무런 대책이 떠오르지 않자, 이성계는 군사 작전을 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작전 협의를 하였다.
"전쟁에서 요행이나 우연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갑짜기 동원된 오합지졸의 병사들로 싸워야 한다니...
좌군 도통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도 명나라의 수십만 대군들과 전투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더우기 조민수와 이성계
의 주력 부대인 3만여명이 위화도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고, 최영의 군사 5,000명이 평양 후방에서 대기
하는 형세였다.
좌우 도통사 조민수와 이성계는 서로 뜻이 맞아서,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요동 정벌군이 위
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개경으로 돌아가는 데는 크게 방해될 것이 없었다. 평양에서 대기하던 최영의 군
사는 5천명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요동 정벌군 3만여명을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병사들이 개경에 당도하자, 최영은 간신히 서둘러서 궁궐로 피신하였다. 최영은 왕
과 왕비를 궁궐안 팔각전으로 모시고 갔다. 그곳에서 일흔 살을 넘긴 최영은 백발과 흰 수염을 흩날리며
대항하였으나, 명분만으로 다수의 무장한 상대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때 이성계의 부장인 곽충보가 군사들을 이끌고 팔각전으로 먼저 들이닥쳤다. 만월대 궁전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군사들에 의해 이미 장악된 상태였다.
잠시후 곽충보가 최영 장군을 포박하여 끌고 나왔다. 최영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면
서, 8도 도통사의 기개로서 그들을 향하여 외쳤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반역을 거두고, 그대들은 애국 충절의 의기(義氣)로 돌아가라!"
이성계는 민망한 얼굴로 최영에게 말하였다.
"내가 거사를 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소. 나는 장군을 돕고자 했으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낸들 어쩔 도리가 없었소. 게다가 조신들의 공론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장군께서는 야속하게 생
각하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시요."
그날로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켰고, 우왕도 왕위에서 내쫓겨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차기 왕을 옹립
하면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의견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조민수와 이색의 주장에 따라, 창왕이 9살의 나
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해 12월 들어 귀양가 있던 최영 장군은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죽으면서 진실을 토로하는 유언을 남겼다.
"조민수와 이성계의 무리들이 우왕의 목을 베고, 신하가 임금을 죽인 죄(以臣弑君의 罪)를 면하려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조작하였다. 우왕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허황된 증명은 결코 맞지
않다. 천첩인 반야와 궁인 한씨가 강제로 "우왕은 신씨"라고 증언한 사실은 거짓이라고, 원통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간다면 저들의 야욕은 하늘을 찌를 것이고, 창왕의 앞길도 명백해질 것이다.
끝내는 역성혁명(易姓 革命)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의도가 자명하지 않은가?
송도의 유신(遺臣)들이 동굴 속에 숨어서라도 무고당했음을 절규할 것이다. 너희들은 우왕이 왕씨이
고, 신씨가 아님을 믿고 있으리라....
만일 내게 죄가 있다면 나라에 충성한 죄일 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었거나,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결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0. 암중모색 (暗中摸索)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색이 창왕을 옹립하자, 이성계는 내심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성계
일파인 정도전 등이 이듬해 11월 전제(田制) 개혁과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하며, 조정의 핵심을 향하여 공
격에 나섰다.
전제 개혁은 문란해진 토지 제도를 고쳐서, 세금을 더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이에 기득권을 가진 귀족. 승려
등 권문세가의 구 세력들은 토지가 줄어드는 것에 극력 반대하였다. 조정의 실세인 시중 이색 등의 강경한 반대
로 개혁은 쉽게 단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정도전 등은 폐가입진을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주장으로
계속 조정의 실세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왕씨 일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며, 창왕을
끈질기게 압박하고 나섰다. 이를 기회로 삼아서 병권(兵權)을 쥐고 있는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창왕을 폐위
시키는데 드디어 성공하였고, 이는 조민수와 이색의 추종 세력들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것을 의미하였다.
고려 제20대 왕으로 신종의 7세손 정창군이 공양왕으로 등극하자,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살해되었다.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와 이색도 또한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을 받고, 각기 유배보내졌다.
정적 조민수가 제거되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론자들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한다는 역성 혁명론(易姓
革命論)을 다시 강하게 주창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등은 역성 혁명론에 반대하며, 고려 왕실을 유지하며 개혁
을 하자는 온건주의 이론을 펼쳤다.
삼군도총제부 우군 총제사가 되어 군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역성 혁명론의 대표자로서, 그는 자신의 권한을
막강하게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는 정몽주, 김진양, 차원부 등은 이성계가 병석에 누워있는 틈을 이용
하여 정도전을 탄핵하였다.
"정도전은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家系)가 불명확하다. 정도전의 외조모는 승려와 천민 여자 사이에서 태어
난 서얼이다...."
당시 4얼(四蘖)이라 하여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등이 지목되었다. 이들의 비밀을 폭로한 사람은 대간
(臺諫)이었던 차원부였고, 탄핵을 주도한 이는 정몽주였다. 이로인해 정도전은 정몽주와 원한의 골이 매우 깊
어졌다.
서얼이라는 이유로 유배된 정도전은 정몽주 등에 대한 원한을 적지(謫地) 예천에서 깊이 삭이고 있었다. 이
윽고 정도전은 이방원 등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몽주에 대한 회유책 등 몇 가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어느 날 이방원은 정몽주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정담을 나누게 되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분위기는
어느덧 취흥으로 무르익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하여가(何如歌)로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려보세
정몽주는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는 이방원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으나, 왕권을 바꿔보자
는 역성혁명론에는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변함없는 충절을 단심가(丹心歌)로서 응수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뒤에서 모사(謨事)를 꾸민 정도전은 강직한 정몽주의 성품으로 보아, 정몽주는 개국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
을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사(大事)를 도모하는 데 있어, 정몽주는 다만 걸림돌이 될 뿐이
었다.
그날 밤 정몽주는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선죽교를 건너다가, 이방원의 수하들에게 무참히 격살되고 말았다.
고려 왕실을 지키려던 충신 정몽주는,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였다.
정몽주 등이 제거되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50여명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였다. 그때
는 1392년 7월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으며, 그가 고려 조정에서 무인으로 활약한지 어언 30여
년이 지난 때였다.
그해 8월에는 어전에서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개국 공신 배극렴이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먼저
개진하였다.
"평시 같으면 큰 아들로 세자를 정해야 하나, 지금은 국가 창업의 비상 시국입니다.
개국에 공이 많은 제5왕자 방원을 세자로 정해야 마땅할 줄로 아옵니다...."
그날 어전에서는 세자 책봉 문제로 갑론을박을 하다가, 결말을 짓지 못하고 회의가 끝났다. 이날 배극렴의
주장이 계비 강씨에게 까지 알려지게 되자, 강비는 태조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낳은 7남 방번을 세자로 삼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다음날 어전에서 세자 책봉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강비 소생의 방번을 세자로 삼자는 의견이 나오자, 공
신 배극렴과 조준 등이 다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방번은 그 위인이 왕위에 적절치 않사옵니다. 반드시 강비 소생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면, 8남 방석이
나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하여 태조는 마침내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정하게 되었다. 세자가 책봉되자, 세자를 옹위하고 있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한편 정도전 등 실세(實勢)들에게 밀리고 있는 하륜. 조준 등은 왕위 계승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이방원 등
과 밀착하여, 반전(反轉)할 기회를 틈틈이 엿보게 되었다.
또한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개국에 동참하지 않은 고려의 옛 신하들은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었다. 이들중에는 황희, 차원부 등이 있었다.
0. 골육상잔(骨肉相殘)
어느 날 이방원의 심복인 하륜이 외직인 충청 감사로 임명되어, 그를 전별하는 연회가 열렸다. 그 자리
에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기생 설화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재치가 있었고, 음탕한 놀이도 잘 받아 넘겼
다. 연회 도중에 하륜이 기생 설화를 불렀다.
"설화야, 이리 오너라."
설화가 미소를 지으며, 하륜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듣자하니 설화는 뭇 남자들과 잘 논다지."
"제가 누구의 청인들 거절하겠나이까."
"절조도 없는 계집이로군."
"하오나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는 천한 몸이기에, 어제는 왕씨를 섬기고
오늘은 이씨를 섬기는 늙은 정승과 노는 것이 잘 어울릴 듯 하옵니다."
설화는 다시 일어나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였다.
"어제는 이 집, 내일은 저 집으로 떠도는
정조없는 기생 팔자
어제는 왕씨 정승, 오늘은 이씨 정승되어
절조없는 사람들
한데 어울려 노는 것이 무엇이 서러우랴...."
설화의 빈정거림에 하륜은 놀란듯이, 방원의 옷자락에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자행하였다. 이방
원은 노하여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났다. 하륜은 겉으로 취한 체하고, 백배 사죄할 마음으로 방
원을 따라갔다. 하륜이 방원을 쫓아서 내당으로 들어가려하자,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원은 문
을 닫아버렸다. 한참 후에야 하인이 방원에게 고하여, 하륜은 방으로 들어가서 속내를 털어 놓
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왕씨들이 귀양가던 날,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무분별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으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방원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때 왕씨들은 변고를 겪게되자,
全씨, 田씨, 玉씨, 龍씨 등으로 변성하고 숨어 살게 되었다.)
하륜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군께서는 개국 이후 일선에서 조용히 물러나셨으나, 세자 방석을 옹립하고 있는
정도전 일파는 진법(陳法) 훈련을 하는 등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私兵)들을 모두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까? 왕자들이 사병을 모두
빼앗긴다면, 앞으로 힘없는 왕자들에게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방원도 대세가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하륜에게 물었다.
"사세(事勢)가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비책(秘策)이라도 있는가?"
"안산 군사(安山 郡事)로 있는 이숙번은 용맹과 지략이 이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별초군 3백명을 요긴하게 쓰도록 하십시요. 소신이 돌아올
시기를 기다려 거사하심이 지당하겠습니다."
"사세가 급박하다면, 1년 뒤에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
방원은 퉁명스럽게 하륜의 말을 가로채었다. 하륜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태조 7년(1398년) 8월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들이 궁궐 근정전앞 서쪽 숙소에서
함께 숙직을 하고 있었다. 이방원의 부인 민씨가 하인을 시켜, 이방원을 집으로 급히 불러 오
도록 기별을 하였다. 이방원이 곧장 집으로 돌아오자, 처남 민무구가 민씨 부인과 함께 그를
맞이하였다. 조금 있다가 처남 민무질도 찾아왔다. 민무구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주상의 병이 위중한
기회를 이용하여,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모두 궁궐로 불러들여서 없애려고 한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이방원은 다시 궁궐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민씨 부인이 옷을 붙
잡고, 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이방원은 동네 어구에 있는 군영앞에 말을 세우고, 처남
민무구에게 지시하였다.
"이숙번에게 무장을 갖추고,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신극례의 집에서
기다리라고 급히 전하시요."
잠시후 이방원 앞으로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민무구, 민무질, 이지란, 김사형, 조준 등 10 여
명이 모였다. 군사들도 10 여명을 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인 축시(새벽 2시경)에 이르자, 이방원이 동원한 군사들이 남은의 첩이 사는 집
주변을 포위하였다. 그 집에서 정도전, 심효생 등이 모여서 함께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동원된 군사들이 먼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정도전, 남은 등이 이웃해있는 민부
의 집으로 도망쳤고, 심효생 등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군사들은 주변 집들을 샅샅이 뒤져서, 정도전을 붙잡아 이방원 앞에 끌고 나왔다. 정도전은 손
에 작은 칼을 쥐고 있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그는 이방원에게 무어라고 애원하는 듯 하
였으나, 순식간에 "쨍"하는 칼날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자리에는 정도전에게
눌려 지내던 조준. 하륜 등도 곁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에도, 병중에 있는 태조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곧이어 한씨 소
생의 왕자들은 살아남은 중신들과, 세자의 처리 문제를 긴급히 논의하였다. 결국 세자 방석은
폐위되었고, 동복형인 방번과 함께 귀양보내졌다. 그들은 유배지에서 모두 살해되었다.
0. 두문동의 혼(魂)
병중이어서 궁궐에서 일어난 내막을 파악하지 못했던 태조는, 나중에 세자와 정도전 등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상심하였다. 이방원 일파에 의해 고립되어있던 태조는 원
로들과 말벗이나 하려고, 원천석. 차원부. 무학 대사 등을 수소문하여 입궐하도록 명하였
다. 원천석은 원주 치악산으로 들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를 찾는 사람이 와도,
그는 절대로 만나주지 않았다.
무학 대사는 조선 초기부터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도성안을 드나들기가 더욱 불편해
졌다. 그도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修道)에 전념하면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차원부는 세상의 시름을 잊으려고, 송도 인근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
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공신 녹권과 정언(正言), 판전농시사 등의 벼슬
이 주어졌으나 거절하였다.
"차라리 다섯 말의 신 초(醋)를 마시며 살지언정, 조선의 벼슬은 받지 않겠다."
두문동은 고려의 마지막 유신(遺臣)들이 하나, 둘씩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한
다고 하여 붙쳐진 이름이었다.
차원부는 그곳 누추한 집에서도 편안히 거처하며, 음식은 사기 그릇을 덮을 듯 말 듯 알맞
게 먹으며 지냈다. 그는 고려 충숙왕 7년(1320년)에 출생하였으니, 나이는 벌써 70세를 넘
기고 있었다. 차원부는 매화를 치는 일과 시를 지으며 소일하며 지냈다.
강위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피리 소리 一聲江上笛
멀리 중천에서 비치는 달빛 아래 배로구나 千里月中舟
흰 갈매기는 나의 심정을 아느냐 모르느냐 白鷗知我否
나는 한가하게 푸른 마름풀 강가에 앉아있노라 閒坐綠瀕洲
어느날 두문동에 있는 차원부의 집에 태조가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사자(使者)는 그에게
입궐할 것을 왕명으로 전하자, 그는 정중히 거절의 뜻을 표했다.
"초야에 묻혀 있어, 세상을 잊은지 오래됩니다...."
그러나 매일 칙서를 보내며, 석달을 계속하여 사자가 방문을 하였다. 차원부도 더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어서, 하사한 도포도 입지 않고 초야의 의관 차림으로 한양 길을 떠났다. 물론 준
비된 역마도 타지 않은 채, 하얀 채찍을 잡고 푸른 노새를 몰고 갔다.
태조는 궁궐로 찾아간 차원부를 보자, 몸이 불편하면서도 기쁨으로 눈썹이 올라가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태조는 전상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편복 차림이었고, 몇 명의 시종이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옛날의 일을 회상하기도 하였고, 당면한 문제들을 의논하면서 정담을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어느날 궁궐 뒷뜰에 나가,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파씨를 뿌렸다. 그때 태조는 대군들의 왕위
순서를 정해야 되겠다며, 차원부에게 넌지시 의향을 물었다.
몹시 중대한 문제였으므로, 차원부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태조는 상심(傷心)에 쌓여,
괴로운 기색이 역연(歷然)하였다.
"세자를 잃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지, 여간 답답한 마음이 아니오."
차원부는 고심 끝에 당나라 때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답변하였다.
"옛날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는 창업에 공이 있는 진왕(이세민)을 황태자로
삼지 않고, 맏아들 건성을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이로인해 그 다음해에 형제끼리 서로
싸워, 이세민이 건성과 원길 형제를 모두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는 태종 이세민의 잘못이라고 하나, 당 고조의 책임도 있습니다. 시대가 태평할 때
에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에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
선으로 하여야 권도(權度)에 맞을 것입니다."
차원부는 세자를 누구로 세울까하는 망설임을 끊어버리고, 심기를 편안히 가질 것도
당부하였다. 이에 태조는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이 정사를 맡아서 하지 않겠소. 늙고 병이 들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졌소. 그대가 짐이 위화도에서 군사적 결단을 내리도록 충고해줬듯이, 영원한 우정
으로 곁에 머물러 주시오."
차원부는 태조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현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며칠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차원부는 인사차 궁궐을 찾았다. 병석에 있던 태조는
그에게 장자를 세자로 삼을 것을 내비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방과(영안대군)가 세자로
책봉되어, 곧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차원부는 다시 노새를 몰고, 동대문 밖을 지나 고향을 향하였다.
누런 티끌은 막막하게도 맑은 하늘을 뒤덮었는데 黃埃漠漠漲晴旻
부채를 드니 서풍이 불어 더럽힐까 걱정되네 擧扇西風厭汚人
크게 사례하겠나니 저녁 구름은 비가 되어 多謝晩雲能作雨
더럽혀진 옷자락을 말끔히 씻어다오 半塗悛洗滿衣塵
차원부가 장단 부근에 도착할 무렵, 송도에 남아있던 조카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다.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차원부에게 긴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며칠 전에 누군가 두문동에 불을 질렀는데, 고려 유신(遺臣)들 모두가 가족과 함께
나오지 않고 몰살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온데 황희는 화를 면했다고 합니
다. 지금 두문동으로 가셔야 헛 일입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무사한거냐?"
"송도에 있는 인척들이 모두 송원까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원부는 한 마리 노새에 의지한 채, 봉황산 송원 마을에 이르렀다. 가족들 70 여명이
그의 귀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잠시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말을 타고 달려온 300 여명의 병사들이 길을 막고 그들
을 에워쌓았다. 그들은 일가족 80 여명을 원형으로 삥 둘러쌓더니, 대장인 듯한 자가
병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하였다. 그때 무장한 병사들은 칼을 휘두르며, 아무런 병
기도 들지 않은 차원부의 일가족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해나갔다. 병사들은 도주하는
가족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도륙을 낼 작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일가족 70 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가족과 함께 차원부는 세상을 떠났고, "제1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난지 며칠 되지 않는 날이었다.
차원부와 그의 일가족 및 두문동 유신(遺臣)들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
자, 금오산 아래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야은 길재 선생은 책상을 끌어내고 여러 개의
등불을 던지며 통곡하였다.
또한 벼슬을 버리고 광주 고원 강촌에서 은거하고 있던 조운흘도 무참한 죽음에 분개하
며,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통곡하였다.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에만 전념하던 무학 대사도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한탄하였다.
"왕자의 난으로 왕자들과 정도전. 남은 등이 무참히 살해되고, 차원부를 비롯한
두문동 현자(賢者)들이 또다시 엄청난 횡액을 겪었다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이를 저지른 무리들은 그 업보(業報)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들은 당장 보이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나, 천추의 원한을 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불행의 씨앗은 인과응보로 전하여지고, 악업(惡業)은 대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나무 관세음 보살...."
세종대에 이르러 집현전 학사들은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착수하였다. 최영. 정몽주.
이색. 차원부 등이 복권되었고, 여타 두문동 현인들의 위패도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두문동 현인들은 십의(十義 김수, 원천석, 우현보, 이양중, 김진양, 남을진, 조건 등)
와 십열(十烈 조승숙, 이종학, 임탁 등), 십건신(차원부, 김제, 민안부, 옥승귀 등),
구충(최영, 변안렬 등), 구정, 구효, 구일민 등으로 위패를 분류하였다.
조선의 개국으로 공신이 된 정승. 판서들은 정사(正史)에서 한 쪽을 화려하게 장식
하고 있으나, 충절과 지조를 지키다가 이슬처럼 이름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 관한 역사의 기록은 아예 삭제되었거나, 매우 미흡하게 남
아있다. 개국의 그늘에 가려서, 그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