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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들머리. ‘물이 긴 고을’ 장수(長水)로 간다. 장수의 산하는 심원하다. 산줄기가 끝없이 첩첩 이어진 강원도 땅과 얼핏 비슷해 보이는 풍광이지만, 강원도의 그것에 비해 한결 부드럽다.
무진장-. 전라북도 동부 산간 고지대에 있는 무주·진안·장수 세 고을을 이렇게 일컫는다. 이 산간 고지대는 기후는 물론이요, 언어도 전라북도의 여느 고을과는 조금 다르다.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인데, 장수읍의 해발은 약 400m 정도 된다. 무주읍이 200m요, 진안읍이 300m이니, 장수는 무진장 고원에서도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도 꽤 위쪽에 있는 편이다. ‘해피 700m’임을 내세우는 강원도 평창 역시 대관령면을 포함한 전체 평균고도가 그렇다는 말이고, 중심지인 평창읍 소재지는 해발 300m가 조금 넘을 뿐이다.
장수 지역만 답사할 목적으로 접근할 경우 수도권에서 내려오는 이들은 대부분 장수를 북쪽부터 훑어보게 된다. 지금은 중부고속도로에 포함된 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의 덕유산 나들목을 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가면 곧 장수 고을 계북면에 들어서게 된다. 이 고속도로가 없었더라면 장수까지 이렇게 수월하게 접근하진 못했으리라. 예전처럼 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금산·무주를 거쳐 왔으면 시간 반은 더 걸렸을 터.
장수 고을로 들어서자마자 양악리 입구 도로변에서 동쪽의 남덕유산 기슭으로 들어간다. 전북 의병들의 근거지였던 토옥동계곡 가는 길이기도 한 이곳 길가엔 정인승기념관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예전엔 동쪽의 남덕유를 올려다보며 그냥 지나치던 곳인데, 한글학자 정인승 박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2005년에 들어선 뒤 방문객들의 발길이 조금 잦아졌다.
정인승 박사는 장수를 빛낸 열 분의 인물 중 한 분이다. 이참에 장수를 빛낸 인물부터 먼저 짚어보자. 장수에서는 ‘2덕(德), 3절(節), 5의(義)’라 하여 열 분을 ‘장수를 빛낸 인물’로 꼽는다. 예전엔 ‘3절’만 내세웠는데, 이후 장수의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재조명하면서 ‘2덕’과 ‘5의’가 추가되었다. 그만큼 장수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다는 뜻이겠다.
열 분의 이력을 간단히 들춰보면, 먼저 2덕은 방촌(尨村) 황희(黃喜·1363-1452)와 정신재(靜愼齋) 백장(白莊·1342-1418)을 말한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정승으로 칭송받고 있는 황희는 이곳 장수 출신이다. 장수읍 선창리의 창계서원은 황희 정승을 주벽으로 모시고 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에게 학문을 익힌 백장은 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을 세운 태조와 태종이 그를 집현전 대제학으로 불러들였으나 응하지 않자 장계면 삼봉리로 유배를 보냈다. 장계면 금덕리 호덕 마을에 그의 묘소가 있다.
이제 오래 전부터 장수의 자부심을 빛내던 3절을 알아볼 차례. 3절은 의암 주논개(朱論介·1574-1593)가 중심에 우뚝 서있고, 충복(忠僕) 정경손(鄭敬孫), 순의리(殉義吏) 백씨(白氏)가 뒤를 잇는다.
‘충절의 여신’으로 추앙 받는 주논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코흘리개도 알고 있는 인물. 장수가 고향이라 이후에 들를 논개사당이나 논개생가에서 할 이야기가 많다. 정경손은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장수향교를 지킨 인물이고, 백씨는 고을 현감을 모시고가다 현감이 말에 떨어져 죽자 자신도 같이 목숨을 버린 인물로서 타루공원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우리나라엔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고 지금도 많지만, 사실 향교는 답사할 때 그다지 인기 있는 공간은 아니다. 대부분 6·25전쟁 이후 복원한 건물인데다 거의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향교의 주건물인 대성전이 보물로 지정된 곳은 이곳 장수향교(보물 제272호)를 비롯해 나주향교(보물 제394호), 영천향교(보물 제616호)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장수향교가 지금까지 무사히 전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정경손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했다. 당시 향교지기였던 정경손은 향교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아 경전을 외우며 의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베고 가라!” 이 기개에 감복한 왜군은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물러났다. 향교 앞에 이 분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5의는 백용성(白龍城·1864-1940) 조사, 전재(健齋) 정인승(鄭寅承·1897-1986) 박사, 그리고 의병대장인 전해산(全海山·1879-1910)·문태서(文泰西·1880-1913)·박춘실(朴春實·1875-1914)을 말한다. 이 분들은 모두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활동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 불교화정책에 저항하였다.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는 그의 생가다.
전해산 의병장은 이웃 임실 출신의 유학자. 1908년 고종의 밀조를 받아 대동창의단을 구성했고, 노획한 무기로 전남 중서부 지방을 장악한 후 전북 장수에서 거병 준비하다 체포돼 1910년 사형 당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수천의 군중이 모여 의병장의 장례를 치를 때 장군의 상여가 집 앞 냇가를 건너가자 의병장 부인 김해김씨는 방으로 들어가 음독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의병장의 유해는 다시 냇가를 건너왔고, 부인과 함께 쌍상여로 장례를 치르니, 충신열녀를 보내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번암면 원촌 마을에 의병장 부부의 묘소가 있고, 번암중학교 앞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문태서 의병장은 1908년 고향인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한 인물.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였다. 장수 출신인 박춘실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무주·진안·장수 등지에서 60여 차례의 교전을 벌이며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9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대구형무소 벽을 부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계북면 양악리 입구 도로변에 문태서·박춘실 두 분 의병장을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제 계속 길을 짚어가자. 계북과 장계의 경계인 집재 고갯마루를 지나다보면 장계 분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장계가 제법 작지 않은 고을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사실 장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장수와 독립된 하나의 현이었다. 장계에서 천천면을 지나 13번 국도를 타면 길은 물줄기를 끼고 이어진다. 장수 읍내엔 논개사당과 장수향교 등의 답사처가 있다. 장수군청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지도나 안내책자 등 자료를 얻을 일이 없으면 잘 들르게 되지 않는 곳이 바로 군청이다.
그러나 장수군청은 언제 봐도 멋지다. 의암송(義巖松·천연기념물 제397호)이란 멋들어진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청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400년쯤 되는데, 16세기 후반에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가 주논개와 함께 심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번에 보니, 수평으로 뻗은 의암송 중간 가지에 떨어진 솔씨가 싹을 틔워 자라고 있어, 장수군민들의 작은 화제가 되고 있었다. 군청 왼편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역시 최경회가 옹달샘 주변을 정비하고 심은 것이 자라났다는 전설을 얻었다. 이 은행나무 덕분에 장수군청은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늦가을에 더욱 돋보인다.
장수군청을 벗어난 뒤 장수향교 대성전의 단아한 자태를 감상하면, 이제 논개를 만나 뵐 차례. 장수군청 남쪽에 있는 논개사당은 들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공간이다. 가녀린 여인이 어찌 그런 장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지난 10월 논개축제 때 새로 모셨다는 논개의 영정이다.
올해 장수 의암사와 진주 의기사에 있는 논개사당의 표준 영정이 바뀌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예전엔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이 그린 영정이 두 사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이 영정이 전라도와 경상도 곳곳에서 수난을 당했다. 김은호 화백의 친일행적 시비 때문이었다.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진주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 영정을 강제 철거하면서 전북 지역에서도 의암사에 있는 논개 영정 교체를 요구했던 것. 결국 2006년 1월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는 합동으로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를 현상 공모하게 된다.
그런데, 김은호 화백의 친일 시비를 떠나 눈 밝은 사람은 이전 영정이 남원 광한루의 춘향 영정과도 빼닮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남원 광한루의 춘향 영정은 김은호 화백이 1939년 당시 조선권번의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제작했는데, 1955년 제작한 논개 영정은 이 춘향 영정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김은호 화백이 춘향 영정을 기초로 하여 논개 영정을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암사에 들어서니 논개의 새로운 영정이 길손을 반겨준다. 묵념 후 자세히 올려다본다. 예전의 예쁘장하기만 하던 기생이 아니다. 미모는 물론이요, 제법 귀부인다운 품위에 눈빛의 기개까지 전체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이전의 영정과는 천지차이였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었다는 이 논개 표준영정은 충남대 교수인 윤여환(52) 화백의 작품이다. 윤 화백은 충남대 홈페이지에 올린 제작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논개 영정의 얼굴은 신안주씨(新安 朱氏) 용모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되었습니다. 2006년 1월부터 주논개(朱論介)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얼굴연구소’에 의뢰해, 신안주씨 여자의 얼굴 특징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했는데, 논개의 생장지인 장수지역(장수읍과 함양군 서상면, 전북지역 등)을 중심으로 신안주씨 문중을 촬영, 150여 군데의 얼굴을 계측 분석하여 신안주씨가 가지고 있는 동일 형태의 용모 유전인자를 추출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형을 찾았습니다.’
김 화백은 당선된 후에도 수차례의 얼굴 형태와 의상, 가체머리 등을 수정·보완하며 다시 2년의 산고 끝에 2008년 2월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지난 10월에 있었던 논개축제 때 논개의 표준영정을 이곳에 모신 것이다.
기왕에 최근 바뀐 영정이니 좀 자세히 들여다보자. 윤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얼굴화장은 고대 여인들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행한 ‘진수아미’라는 미용법이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해 주변 잔털을 뽑아내는 미용법인데,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잘 나타낸다. 윤 화백은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 전기 하연 부인상, 운낭자상 등 조선 여인들의 얼굴도 대부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아 논개 얼굴도 이 미용법을 따랐다고 한다.
또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과 복식, 그리고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 문양을 한 의상복원은 안동김씨 묘 출토복식(1560년대)과 양평의 변수(1447-1524) 묘 출토복식·목각인형 주악상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복식이 여름옷인 까닭은 논개의 거사일이 하절기이기 때문이다. 가녀린 여인이 왜장을 유인하여 열손가락에 힘을 다해 껴안고 함께 강에 투신하는 데 큰 역할을 한 10개의 큼직한 옥가락지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논개의 자세다. 예전 영정이 ‘간택’을 위해 예쁘게만 보이려고 노력했던 기생이라면, 새 영정은 의거를 앞두고 왜장을 향해가는 긴장감이 내면에 묻어난다.
논개의 새 얼굴까지 익혀뒀으니 이젠 장수 읍내를 벗어나도 서운하지 않을 터. 19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린다. 금강 발원지로 가기 위해서다. ‘물길이 길다’는 뜻을 지닌 장수라는 지명에서 볼 수 있듯 이 고장은 금강의 발원지다. 발원지 부근은 수분치(水分峙)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대동여지도에도 이렇게 표기되어 있다.
금강은 낙동강·한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금강의 공식적인 발원샘은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897m) 중턱의 ‘뜬봉샘’이다. 이 샘물은 금강의 첫 실개천인 강태등골을 이루며 마을 앞에서 원수분천과 만나 장수읍을 적시고, 천천을 끼고 가다 장수를 벗어난다. 이후 비운의 혁명가 정여립이 머물던 진안의 죽도를 휘감은 뒤 전북과 충청도 땅을 관통하며 북류하다 군산과 장항 사이에서 서해안으로 흘러든다.
물길은 395.9km, 약 1,000리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남으로는 금남호남정맥·금남정맥, 북으로는 한남금북정맥·금북정맥에 안겨 있는 금강의 유역면적은 9,810㎢에 이른다.
현재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 고갯마루엔 수분송(水分松)이라는 이름을 얻은 소나무 한 그루가 지나는 길손을 굽어보고 있다. 수분치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은 운명을 따라 각각 남쪽 섬진강이나 북쪽 금강으로 흘러든다. 그래서 수분송에 떨어진 빗줄기들의 운명은 어디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명확히 갈린다. 수분송 맞은편, 원수분 마을 입구의 승강장 왼쪽으로 난 길로 찾아 들어가면 뜬봉샘으로 갈 수 있다. 수분치에서 뜬봉샘까지는 걸어서 2km 정도 들어가야 한다.
수분리는 ‘물뿌랭이마을’로도 불린 흔적이 있다 하니 옛날 주민들도 이곳을 발원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뜬봉샘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다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전한다. 뜬봉샘이란 이름은 옛날 이 산에서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제가 우리나라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뜸을 놓았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경우는 ‘뜸봉샘’이 된다. 요즘은 뜬봉샘이라 하는데, 봉황이 비상한다는 의미의 ‘뜬봉샘’(飛鳳泉)으로 해석한다. 이 길손의 생각은 우리말 어원으로 살펴본다면, 뜬봉이나 뜸봉은 모두 ‘샘물이 뚬벙뚬벙 떨어진다’는 뜻을 지닌 의성어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화려한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이 산하에 애정이 조금 깊은 이들이라면 이곳 장수에서 뜬봉샘을 찾는다. 이 길손도 10여 년 전 뜬봉샘을 처음 찾았다. 당시 자그마한 나무팻말 몇 개가 인도해서 가본 뜬봉샘은 주변의 아늑한 풍치가 제법이었다. 금강의 발원지라고 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남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가 그 이름처럼 신비롭고 웅혼한 서기가 넘친다면, 뜬봉샘 역시 그 이름을 닮은 순진한 새악시 같은 소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 가보니 생태 답사지로 꾸미려는 듯 아랫마을부터 샘까지 나무계단을 깔아놓고, 군데군데 계류를 관찰할 수 있는 조망대까지 갖춰놓았다. 물론 주변 숲은 짙어 생태 체험지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것은 뜬봉샘 그 자체였다. 냇가의 자갈로 축대를 둥그렇게 쌓아 샘을 조성했는데, 수량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발원지가 갖는 청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원지라 하면 분명 그 샘물을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하건만 도저히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전엔 옹달샘이었는데, 큰비가 내릴 때마다 샘이 훼손되자 아예 이렇게 튼실하게 조성하게 된 것이라 한다.
잠시 다른 강들의 발원지를 떠올려보았다. 낙동강 발원지로 널리 알려진 황지는 태백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발원지인 너덜샘(은대샘)은 그야말로 청정하다. 남한강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 또한 주변 풍광이 제법이거니와 그보다 위쪽에서 흐르는 샘들도 앙증맞다. 섬진강 발원지인 진안의 데미샘도 순결함의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금강 발원지인 이 뜬봉샘만 탁한 것이다.
샘이 너무 커서 우물처럼 보이는 것도 큰 문제다. 또 주변에 자라고 있는 식물도 가만히 보니 원래 이곳에서 뿌리를 박고 살던 개체가 아니라 복원공사 때 외부에서 흘러든 개체 같이 보였다. 생태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뜬봉샘은 이렇듯 금강 발원지로서 2퍼센트가 아닌 98퍼센트가 부족하다. 발원샘은 인공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도시의 약수터나 마을의 우물과는 격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금강 물을 마시며 어린 시절을 보낸 길손은 너무 아쉬워 장수군청에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담당자 역시 이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2011년까지 뜬봉샘 부근을 차근차근 생태공원화할 예정이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조금만 가물어도 샘물이 탁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구상 중이라 했다. 길손은 그에게 낙동강·한강·섬진강 발원지 샘물 사진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몇 년 뒤 뜬봉샘을 다시 찾았을 때 물 한 바가지 떠서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었으면 정말 좋으련만.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디 예전의 앙증맞은 옹달샘으로 다시 태어나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갖고 수분치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 방면으로 내려선다. 이곳부터는 이제 섬진강 수계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금남호남정맥이 지나는 장수는 고을이 금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로 나뉜다. 즉, 장수읍 대부분과 장계·천천·계남·계북면은 금강 수계요, 산서·번암면은 섬진강 수계가 된다.
번암면은 장수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이다. 광복 후에만 이 부근에서 포수들이 총이나 올무로 잡은 호랑이가 다섯 마리나 될 정도였다. 장안산·백운산 부근은 숲이 짙어 근처 주민들은 어딘가에 호랑이가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호랑이에 놀란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호랑이에 먹힌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지지계곡은 정말로 깊고 깊은 산골이다. 하지만 얼마 전 도로확포장 공사가 끝나 무령고개를 통해 장계면까지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하긴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타고 지지계곡을 지나 무령고개를 넘어 논개생가로 간다. 길손이 이곳 장계면 대곡리의 주촌 마을에 처음 들렀던 것은 10여 년 전인 1990년대 중반의 어느 겨울, 명절 끝이던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장계 차부에서 주촌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두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폭설로 버스 운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차부에는 길손 말고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주민인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우리와 달리 ‘무진장’ 여유로웠다. 놀라울 정도였다.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도시에서 온 길손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나던 소형 트럭 운전사의 도움으로 대곡리 초입인 오동저수지까지 겨우 접근할 수 있었다.
깊고도 깊은 산골, 장수에서도 깡촌이던 대곡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년쯤 전이다. 논개의 부친인 주달문(朱達文) 진사가 건너편 범바위골이라는 마을에서 이주해 터를 잡고 서당을 차려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이곳을 주촌(朱村)이라 했는데, 주(朱) 진사가 사는 곳이란 뜻이다. 나중엔 주논개의 고향이란 뜻이 되었다. 원래 주촌은 지금 오동저수지 자리다.
1990년대 중반 오동저수지를 만들 때 주촌이 물에 잠기게 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사했는데, 군산으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고, 그나마 땅 한 뙈기도 못 구한 사람들은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논개생가는 저수지 옆 길가에 추레하게 복원되어 있었으나, 논개생가를 주씨의 선산이 있는 윗마을의 궐촌으로 다시 옮기면서 마을 이름도 주촌으로 바뀌었다. 지금 논개생가 마을의 내력이다.
당시 길손은 논개생가 마을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는데, 모든 이들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던가. 이번에 들러보니 논개의 고향인 주촌 마을도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옛날엔 투막집에 양철로 지붕을 올린 집이 대부분이었으나, 어느새 동화 속 나라 같은 정겨운 초가가 옹기종기 자리 잡은 전통마을로 바뀌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도 있었다. 실생활에 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연자방아·디딜방아도 있었고, 계류엔 물레방아도 보였다. 승용차 등 문명의 이기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조선시대 한 산골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현대화되지 않고 전통 마을로 조성되어 너무 다행스러웠다.
다행히 정겨운 마음은 여전했다. 이번에 마을에서 만난 열서너 살짜리 계집애는 낯선 이방인에게 꾸벅 인사부터 했다. 제법 단련된 길손이건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또 마을을 둘러보다 만난 할머니 역시 지나는 길손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무엇보다 변하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논개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주민들은 논개에게는 여전히 ‘님’이라는 존칭의 접미사를 꼭 붙였다. 하긴 이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웬만한 장수 사람들은 누구나 ‘논개님’이라 부르긴 하지만-.
대곡리엔 논개의 전설이 여기저기에 서려있다. 예전 이 골짜기에 있었다는 대용소(大龍沼)는 논개 탄생설화의 일종이다. 지금으로부터 사백수십 년 전, 주달문의 부인이 첫아이를 나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호상박하는 형상을 한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윗목으로 서너 발자국 걸어서 사방을 응시하는 등 꼴이 범상치 않았다. 주달문은 이 아이의 이름을 대룡(大龍)이라 이름 짓고 감추어 키웠다. 그러나 소문은 퍼져 구경 오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다. 이 일이 관아에 알려지면 나라를 망칠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주달문은 고민 끝에 아이를 다듬잇돌로 눌러 죽여 근처에 있는 소에 버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날개 돋은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 하늘을 한 바퀴 돌고는 그 소로 들어갔다. 그게 대용소다.
이는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있는 아기장수 전설유형 중 하나지만, 이 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전설은 논개 탄생의 예고편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어느 날 밤, 주달문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너의 조상인데 나의 집(幽宅)이 대장군좌라서 그 기운으로 장차 나라의 환란을 구할 장수를 보냈더니 네가 무지몽매해서 큰 인물을 잃었구나! 원통하다! 그러나 나의 기운이 남았으니 이번에는 여장수를 보내리라.”
이리하여 주씨 부인은 열 달 뒤 딸아이를 낳았으니 바로 논개였다. 그런데 태어난 때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즉 개해 개월 개일 개시였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를 낳았다’고 해서 논개라 했다. 논개는 ‘낳다’의 이곳 방언인 ‘놓다’와 술(戌)의 ‘개’를 합한 ‘개를 놓다’라는 뜻이다. 이 방언에서 대곡리가 행정구역으로 비록 전라북도이긴 하지만, 경상남도 함양과 가까운 탓에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고, 이미 10세 때 고상한 기품을 갖추었다. 논개가 13세가 되던 해 논개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토호 김풍헌을 찾아가 자신의 놀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개를 넘기려는 계략을 꾸몄다. 김풍헌은 백치불구인 자신의 자식을 장가보내기 위해 논개를 민며느리로 사오는 대가로 논개의 숙부에게 논 세 마지기와 엽전 삼백 냥, 당백포 세 필을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도망가자 주달무도 도망갔고, 김풍헌은 이들을 관아에 고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달무는 오히려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렸다. 결과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이 났다. 논개 모녀는 무죄 방면됐다.
이때 판결을 맡았던 장수현감이 바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최경회(崔慶會·1532-1593) 장군이다. 오갈 곳 없게 된 논개 모녀는 드난살이로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했다. 하지만 곧 현감 부인은 세상을 뜨고,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후 최경회가 고향에서 모친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 싸움에서 민관은 힘을 합쳐 싸웠지만 결국 성은 함락 당하고 말았다. 최경회는 장수들과 촉석루에 모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남강물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라는 시를 읊고 남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논개는 자결 대신 복수를 택했다.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용맹하기로 이름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10여 일간 내린 장맛비로 물이 넘실대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쇼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서 이름 날리던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해 저물어 가는 논개생가에서 충절을 깊이 새기고 길을 나선다. 대곡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원래 논개생가가 있던 오동저수지를 지나고 곧이어 26번 국도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처음 장수로 들 때 지났던 장계면 소재지. 거기서 장수 나들목으로 들어서면 곧 고속도로로 올라탈 수 있다. 그러나 장수까지 와서 어찌 육십령을 넘지 않으랴.
저물어 가는 육십령(六十嶺) 굽잇길을 오른다. 육십령, 고갯길 굽이가 60굽이인지, 안의 감영이나 장수 감영까지가 60리인지, 도적놈들 때문에 60명이 모여야 겨우 넘어설 수 있었는지 헷갈리지만, 구한말 바다 건너의 도적놈들이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릴 때 분연히 일어선 의병들은 호랑이처럼 이 육십령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 전투 당시 살아남은 장수 출신 의병들이 남강에서 건져 모셔온 논개의 시신도 이 육십령을 넘어 생가와 멀지 않은 함양 땅에 묻혔다.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논개가 중심을 이루는 장수 고을 답사는 육십령 너머 함양 땅에 있는 논개 묘소를 참배해야 완성된다. 육십령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고 멀리 장수 땅을 되돌아본다. 11월 중순의 육십령. 늦단풍도 끝물인지 백두대간을 스치는 바람결에 낙엽이 우수수 쏟아진다. 초겨울의 숨결이 참 서늘하다.
장수, 어떤곳인가
전라북도 동부 산간지대에 자리한 장수군(長水郡)은 동쪽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경계로 경상남도 함양군·거창군과 서쪽은 전라북도 진안군·임실군, 남쪽은 남원시, 북쪽은 무주군과 접한다.
무주·진안과 함께 전라북도 동부 산악권에 속하여 장수·장계 읍면 소재지의 분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산지이며, 동쪽 백두대간쪽이 특히 더 높다. 북동쪽의 계북면에 남덕유산(1,507m), 남동부의 번암면에 백운산(1,279m)이 솟아있고, 그 사이의 육십령(734m)을 통해 경상남도 거창군과 연결된다.
금남호남정맥은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계가 된다. 신무산(897m) 뜬봉샘(뜸봉샘)은 금강 발원지다. 이곳에서 발원한 금강은 장수읍과 천천면을 적시고, 무령고개에서 발원한 장계천을 받아들여 몸집을 키운 뒤 진안으로 흘러간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2∼13℃, 1월 평균기온 -3.5℃, 8월 평균기온 23.3℃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300mm 내외로 남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한다. 고원 형태의 내륙분지가 많아서 고랭지에 해당하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서늘하지만, 집중호우가 자주 발생한다.
지금의 장수군은 장수와 장계가 합친 것이다. 장수는 백제시대에 우평현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고택이라 하여 장계군에 속했다가 고려시대 이후 장수현이 되어 남원부에 소속됐다. 장계는 백제시대에는 백해군 혹은 백이군이라고 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벽계군이라 했다가 고려시대 이후 장계현이 되어 남원부에 속했다. 1896년 장수현과 장계현이 통합되어 장수군이 됐다. 1970년 장수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현재 장수읍·산서면·번암면·장계면·천천면·계북면·계남면의 1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북도의 동부 산악권에 속해 임야가 전체 면적의 76.4%를 차지하고 경지는 15.3%에 불과하다. 경지면적이 협소해 가구당 경지면적은 1.7ha로 영세하다. 또한 농업 이외의 산업부문도 발달하지 못해 이농현상이 매우 높다.
주곡농업 외에 잎담배·고랭지채소·과수재배와 축산업이 활발하다. 장수읍·계남면 등지에서 생산되는 장수사과와 번암감은 명성이 높다. 계북면 등지의 덕유산 기슭에서는 표고버섯·약초 등이 채취되고, 양봉도 성해 번암면에서는 전북 벌꿀 생산량의 6%를 생산한다. 무주·진안·금산에 접해 인삼재배도 활발하다. 축산업은 농가소득의 43%를 차지할 정도로 군민의 중요한 산업이다.
전라북도의 동부 산간지역으로 예로부터 교통이 불편한 고장에 속했다. 전주~장계, 남원~장계, 장계~무주 간의 국도와 팔랑치를 넘어가는 장계~거창 간 국도가 장계면 장계리에서 교차해, 군청 소재지인 장수읍보다 장계리가 교통 중심지가 되고 있다. 88올림픽고속도로가 군의 남부인 번암면 남부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북부의 계북면·장계면을 통과한다. 또 장수와 익산을 연결하는 익산-장수 고속도로가 천천면·장계면을 지나면서 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
남덕유산
덕유산은 최고봉인 향적봉(香積峰·1,614m)이 솟은 북덕유산과 남덕유산(1,507m)으로 나뉜다. 남덕유산은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상남도 거창군·함양군 경계에 솟아 있다. 북덕유산과 남덕유산 사이의 약 20km 구간에는 해발고도 1,300∼1,400m의 백두대간 주능선이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룬다. 덕유산 국립공원 사무소 063-322-3174~5.
장안산
장수읍·계남면·번암면 경계에 솟은 장안산(1,237m)은 백두대간의 영취산(1,076m)에서 갈라져 나온 금남호남정맥이 가장 먼저 빚은 산이다.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계남면을 적시고 금강 상류가 되고, 동서남쪽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백운천으로 흘러 섬진강 상류가 된다. 남서쪽의 덕산계곡, 남동쪽의 지지계곡 등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많아 인기가 높다. 또 가을철 동릉의 넓은 억새밭이 빼어나다. 인근엔 방화동 자연휴양림, 방화동 가족휴가촌 등이 있다. 1986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북동쪽의 무령고개(1,076m)에서 접근하는 등산 코스가 인기 있다. 입장료 어른 8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승용차 2,000원.
뜬봉샘
장수읍 수분리 금남호남정맥 신무산(897m) 중턱의 뜬봉샘(뜸봉샘)은 금강 발원지다.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다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은 곳이라는 전설도 전해온다. 뜸봉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날 이 산에서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水分峙) 고갯마루에서 서쪽의 원수분 마을을 지나 2km 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다. 마을 주차장에서 차를 대놓고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논개사당
장수읍 두산리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사당(전북기념물 제46호)은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의암사(義岩祀)라고도 한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촉석루 앞 바위에서 남강으로 투신했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는 의암이라 불린다. 지금의 사당은 호남절의록·호남삼강록·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1956년에 건립한 것이다. 한편, 1846년(헌종 12)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1974년 현 위치로 옮겼고, 1998년 경역을 확대했다. 입장료·주차료 무료. 전화 063-351-4837, 350-2561.
논개생가
장계면 대곡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신’ 주논개(朱論介)가 태어난 곳이다. 본래 생가가 있던 주촌마을이 1990년대 중반에 오동저수지로 잠기게 되자 좀 더 위쪽의 신안 주씨 선산 근처로 옮겨 생가를 복원하고 유적지를 조성했다. 이곳엔 논개생가를 비롯해 논개 동상과 사적불망비각, 논개 유허비, 논개 부친의 묘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입장료, 주차료 무료. 관리사무소 전화 063-352-2550, 350-2583
장수향교
장수읍 장수리의 장수향교(長水鄕校)는 1407년(조선 태종 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장수에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1686년(숙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공자를 비롯해 여러 성현에게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大成殿·보물 제272호)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장수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건축물이다.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전화 350-2224, 2225(향교 관리사 351-7945).
정충복비
장수읍 장수향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정충복비(丁忠僕碑·지방문화재자료 제38호) 조선시대 중기 사람인 정경손의 의로운 뜻을 기리고 있는 비석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한 부대가 이곳 장수지역에 침입하여 장수향교를 불사르려 하자 문을 굳게 닫고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들라’는 기개로 향교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으로 각지의 향교는 거의 소실됐으나, 장수향교만이 전화를 입지 않고 당시의 원형대로 보전되어 그 표본이 되고 있다. 정경손의 투철한 책임감과 향교를 지킨 의행을 기리기 위해 1846년(헌종 12) 장수현감 정주석이 이 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전면에는 ‘호성충복정경손수명비’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타루비
천천면 장판리 장척 마을의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는 타루비(墮淚碑·지방기념물 제83호)는 현감을 따라 순절한 통인(通引·관아에 딸려 잔심부름을 하던 벼슬아치)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1678년(조선 숙종 4) 당시 장수현감이 전주감영으로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 갑자기 꿩이 우는 소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현감이 절벽 아래의 배리소에 빠져 목숨을 잃자 통인은 자기의 잘못이라며 손가락을 깨물어 바위벽에 꿩과 말을 그리고, 타루 두 글자를 써놓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1802년 타루비, 1881년 순의비를 타루비와 나란히 세웠다.
합미성
장수읍 식천리 합미성(合米城·지방기념물 제75호)은 해발 800m의 산능선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약 1천 년 전 후백제 시대의 산성이다. 합미성이란 이름은 후백제 때 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당시 군사들이 이용하던 물을 땅속으로 보내던 수로관 시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320m, 높이는 바깥쪽이 4.6m, 안쪽이 1.6m. 현재 북서쪽과 남쪽의 일부 성벽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내린 상태다. 성터에서 3㎞쯤 떨어진 신무산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이 아닌 신무산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창계서원
장수읍 선창리 창계서원(創溪書院·문화재자료 제36호)은 조선의 가장 명망 있는 정승으로 칭송받고 있는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695년(조선 숙종 21)에 세워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다가 1955년에 중건했다. 방촌 황희를 주벽으로 하여 황수신·강백진·장용두 등을 배향했다. 현재 남아 있는 상현재(尙賢齋)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다. 이 서원은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구서원(舊書院) 터에 1948년에 세운 비가 남아 있다.
팔성사
장수읍 용계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팔성사(八聖寺)는 백제 무왕 때인 603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해감 스님이 창건했다. 그의 제자 7명이 모두 근처에 암자를 1개씩 지었는데, 팔성사라는 이름은 바로 해감과 그의 제자 7명에서 유래한다. 조선 초기에 폐사되자 부속암자 중 하나를 본 절로 삼았다. 1974년 비구니 법륜 스님이 대웅전을 복원했고, 1991년부터 극락전과 삼성각·성적선원 등을 건립하는 등 여러 번 불사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장수 양악탑
계북면 양악리 장수 양악탑(陽岳塔·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는 수방사(壽訪寺)터로 전하는 양악리 산기슭 밭 가운데에 서 있는 작은 5층탑이다. 여러 차례의 옮김과 세움을 반복하면서 탑의 일부 부재가 없어지고 손상도 심한 상태다. 탑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탑신부를 쌓았다. 1층 몸돌은 2층 이상의 몸돌에 비해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2층 몸돌에만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2층 이상의 지붕돌은 모두 위층의 몸돌과 한 돌로 되어있다. 지붕돌과 그 위층의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아올렸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며, 탑신 몸돌의 윗부분 너비를 좁혀 만든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신광사 대웅전
천천면 와룡리 성수산에 있는 신광사(新光寺)는 830년(신라 흥덕왕 5)에 무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헌종 6)에 현감 조능하가 수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도유형문화재 제113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주심포양식에 속한다. 지붕을 너새 또는 돌기와라고 불리는 넓적한 돌을 얹었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명부전, 칠성각 등이 있다.
압계서원
산서면 학선리에 있는 압계서원(鴨溪書院·도문화재자료 제35호)은 고려의 명신 육려(陸麗)·임옥산(林玉山)·박이항(朴以恒) 3인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1789년(정조 13)에 세운 서원이다. 1798년 박이겸(朴以謙), 1799년 전설(全渫)을 각각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뒤 후손들이 제단을 만들어 제사만 지내다가 1958년 중건했다. 해마다 3월17일 향사를 지낸다. 산서면의 향약소(鄕約所)로도 사용됐다.
권희문 가옥
산서면 오산리에 있는 권희문 가옥(도민속자료 제22호)은 조선시대 고가(古家)다. 현 소유주의 10대 조가 광해군의 사화를 피해 오산리에 정착하면서 건립했다.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는 1866년, 사랑채는 1733년에 지었다. 안채·사랑채·아래채·문간채·바깥채·서쪽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농가로 바뀌어 집 대부분을 농사와 관련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옛 가옥의 중심은 사랑채인데 이 가옥은 안채가 중심이다. 이 가옥은 상류가옥이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어필각
산서면 오성리의 어필각은 1414년(태종 14)에 당시 청백리로 소문난 천곡 안성(安省·?-1421)에게 내린 장수 오성리 영락 12년 왕지(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를 보관하기 위해 1752년에 세운 건축물이다. 왕지란 임금의 명령이나 전달할 사항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안성은 1393년(태조 2) 청백리로 뽑혔으며, 지보주사·참지의정부사·강원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죽은 후 장수의 창계서원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어서각
번암면 노단리 어서각(御書閣·도문화재자료 제32호)은 영조가 장현경에게 하사한 친필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 23년(1799)에 세운 건축물이다. 장현경(張顯慶·1730-1805)은 1752년 과거에 급제해 춘추관기사관 겸 홍문관박사를 시작으로 춘추관, 기주관, 편수관 등을 역임했다. 건물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입구에 있는 철로 만든 홍살문과 삼문을 지나면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어서각이 있다. 가운데 칸에는 어서각이라는 현판과 건물 수리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죽림정사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白龍城·1864-1940)의 탄생 유적지이자 사찰이다.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 활동했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불교화정책에 저항했다. 경내에는 목조로 지은 생가를 비롯해 7여래탱화와 69조사탱화 등을 봉안한 용성교육관, 3존불보살상과 5탱화를 봉안한 대웅보전, 백용성 조사의 유품을 소장한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과 범종법고루 등이 있다.
정인승기념관
계북면 양악리 정인승기념관은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일생을 바친 애국지사이자 한글학자인 전재(健齋) 정인승(鄭寅承·1897-1986)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생가 근처에 사당과 함께 건립했다. 정인승 선생은 1897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태어나 조선어학회에 가입, 사전편찬회 회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일제가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1942년 10월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 옥살이를 했다.
의암송
장수읍 장수리 장수군청 앞에 있는 의암송(義巖松·천연기념물 제397호)은 16세기 후반기에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가 의암 논개와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소나무는 현재 수고 8m, 흉고 직경 3.2m의 노거수로 수령은 약 400년쯤 된다. 소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원줄기가 왼쪽으로 꼬여 수평을 이룬 모양새가 아름답다. 지상으로부터 3.5m 부분에서는 2개의 큰 가지가 남북방향으로 갈라져 있는데, 북쪽 가지의 지름은 약 80㎝이고 남쪽 가지의 지름은 약 50㎝이다. 그 위로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 형태를 이룬다.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
천천면 봉덕리 고금 마을 뒷산에 자라고 있는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396호)는 나이 500살로 추정되는 당산나무다.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6.13m의 크기다. 지상으로부터 약 1.5m까지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줄기가 갈라져 있다. 주간부는 내부가 비어있는 부분도 있으나 껍질은 깨끗하고 생육상태도 양호하며 수형도 아름답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와 번영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와룡 자연휴양림
천천면 와룡리의 와룡 자연휴양림은 계곡 분지를 이루고 있어 주위경관이 아름답고, 계곡물은 깨끗하고 차갑기로 유명하다. 숲에는 쪽동백·참나무·느릅나무·낙엽송·적송 등이 울창하고, 산막 시설은 더위를 느낄 수 없는 해발 650m 지대에 집중되어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여름뿐만이 아니다. 봄엔 각종 야생화가 만발하고, 가을엔 각종 산 열매와 단풍, 겨울엔 눈썰매장에서 눈썰매를 즐길 수 있는 사계절 휴양지다. 입장료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산막 사용료는 4평형 25,000원, 복합산막1식(13평) 70,000원, 6평형 45,000원(욕실 외부)·50,000원(욕실 내부), 10평형 60,000원. 비수기(9월1일~5월31일) 시설물(숙박시설포함) 30% 할인, 5일 이상 시설물 이용시 40% 할인, 숙박시설 사용시 입장료 50% 할인. 전화 063)350-2493, 063)353-1404 평일 09:00-18:00 www.jangsuhuyang.kr
방화동 가족휴가촌
번암면 사암리 방화동 가족휴가촌은 장안산 남쪽에 조성된 가족단위 국민휴양지다. 주요 시설로는 오토캠핑장 2곳, 야영장 3곳을 비롯해 모험놀이장·가족놀이장·체육광장·전망대 등이 있다. 등산로는 방화동 가족휴가촌~덕산계곡(용소)~범연동~장안산 정상 코스가 3시간 소요, 덕산계곡까지의 산책 코스는 1시간 소요.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야영장 사용료는 소형 텐트(5인 이하) 1일 5,000원, 대형 텐트(6인 이상) 1일 10,000원. 평상 사용료 1일 10,000원. 전화 350-2562~3, www.jangsuhuyang.kr/Banghwa2
방화동 자연휴양림
번암면 사암리의 방화동 자연휴양림은 장안산 남쪽에 조성된 휴양공간이다. 휴양림 시설들은 해발 500m 이상의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고, 사방으로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더운 여름철에도 기온이 낮고 계곡물은 차다. 또한 기암절벽, 다양한 수목 등 계곡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고 공기가 맑다. 통나무집, 산림문화휴양관 및 수련관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산림문화관 휴양관 12평형 80,000원, 16평형 10만원, 숲속의 집 18평형 15만원. 비수기(9월1일~5월31일) 시설물(숙박시설 포함) 30% 할인, 5일 이상 시설물 이용시 40% 할인, 숙박시설 사용시 입장료 50% 할인. 예약 장수군청 산림문화관광과 063-350-2562, 063-353-0855(평일 09:00~18:00), 홈페이지 www.jangsuhuyang.kr/Banghwa1
논개생가마을
장계면 대곡리의 논개생가마을은 400여 년 전 범바위골에 사는 주달문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새 터를 잡아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로서 이곳 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아래에 오동제를 막게 되어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자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유적을 옮기게 됐다. 해발 600~700m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논개를 낳기 위해 공을 드렸다는 성황당이 마을 지킴이로 남아있다. 매년 정초가 되면 조탑과 노송 앞에 제수를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주촌 마을은 현재 민속마을로 되어 있어 집들이 대부분 초가에 황토집으로 바뀌었다. 전화 063-350-2583~5, http://cafe.daum.net/nongaetown
장안 문화예술촌
계남면 궁양리 옛 장안초교에 조성된 장안 문화예술촌은 서예·서가·도예, 천연염색·한문학·국학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공간이다. 이들은 작품활동 외에도 도시와 농촌문화를 연결하는 ‘도농교류학습’, ‘장안산 도깨비축제’ 등을 비롯해 우리 문화 보급을 위하여 천연염색·도예·서예·서각 등 각종 체험 및 문화학습도 진행하고 있다. 063-352-4560, 010-4707-2493.
장수 도깨비잔치마을
계남면의 장수 도깨비마을은 해발 45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리한 산간마을이다. 궁양리(궁평·양지 마을), 가곡리(곡리·평지 마을), 장안리(원장안·희평·괴목 마을) 등 3개 행정 리에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현지의 깨끗한 산촌 환경에서 고랭지 배추와 각종 채소류와 특용작물을 재배한다. 전화 063-352-5015, 0308. www.dokkebi.org
블루새들 리조트
천천면 월곡리의 블루새들(Blue Saddle) 리조트는 국내외 각종 승마대회 개최가 가능한 국내 최대의 승마시설과 23km의 외승코스 등 승마장을 중심으로 한 레저 공간이다. 실내 승마장(기초훈련장, 멀티승마장) 2동, 실외 승마장(기초체험장, 야외승마장) 2동, 원형 승마장(초보자 승마체험장) 2동을 갖추고, 총 170두의 말을 소유하고 있다. 부대시설로는 실내·외 수영장, 불가마 체온관리실, 스킨스쿠버 체험장 등이 있다. 유스호스텔은 객실 37실, 양식당, 한식당, 대강당, 연회장 3개소 등을 갖추고 있다. 전화 063-350-8000, www.bluesaddle.co.kr
논개 대축제
매년 10월 초에 의암공원 일원에서 열리는 의암 주논개 대축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논개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행사다. 이 축제는 주논개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촛불 진혼제를 시작으로 주논개 제례봉행, 논개선발대회 등이 이어진다. 또 인기가수 축하공연과 불꽃놀이, 레이저쇼, 난타공연 등이 이어진다. 부대행사로는 논개 점토아트와 논개 만화전시회, 장수사과 종이접기, 전통 민속놀이 체험 등이 열린다. 창작판소리 ‘논개’ 공연, 논개충절무 공연, 의암시화전, 논개고을 시낭송대회, 전국 한시백일장 등 예술행사도 펼쳐진다.
장수 경주마목장
장수군 명덕리에 있는 장수 경주마목장은 2007년 개장했다. 서울경마공원과 부산경남경마공원의 배후지원과 우수 국내산마 후기육성 강화를 위한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 목장은 내륙지역 생산농가 총괄지원을 통해 내륙 생산농가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주마의 훈련과 우량 종마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남덕유산 육십령을 끼고 있는 목장 내에는 마방 500개와 실내마장, 원형마장, 말 샤워장 등 무려 48동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특히, 평면 경사주로 1.6㎞와 언덕주로 1.5㎞가 조성돼 지구력을 요하는 경주마 훈련의 최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목장은 경주마 생산농가에 대한 생산지원 역할을 수행한다.
장수온천
번암면 죽산리에 위치한 장수온천은 알칼리성 유황온천으로 국내 유황온천 중 유황 함유량이 가장 많은 온천이다. 거대한 암반지대에서 분출되는 용출수는 온도 34.7℃, pH9.34로 피부염·류마티즘·당뇨병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음용수로 사용할 경우 위장병환자에게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입욕료 대인 5,000원. 전화 063-353-5566.
장수 사과
장수군 고랭지에서 나는 사과는 당도가 높으면서도 수분이 많아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품종별로 홍로는 추석 전인 9월 중순에 수확하며, 명월은 9월 말부터, 부사는 10월 말부터 딸 수 있다. 4월 말~5월 초에 열리는 사과꽃 축제 때는 염색·승마 체험 등도 할 수 있다. 장수읍 별헤는 마을(063-351-3201·star.invil.org)과 장계면 동동마을(063-351-3077·dongdong.invil.org)에서 사과나무 묘목을 분양한다. 그루당 가격은 8만~12만원.
장수 사과랑 한우랑 축제
매년 추석 무렵에 장수읍 의암공원과 장수사과시험포, 농촌체험마을 등에서 열리는 ‘한우랑 사과랑 축제’는 장수의 대표 특산물인 사과와 한우를 홍보하기 위한 행사다. 장수 사과는 일교차가 커 당도가 뛰어나면서 육질이 좋고, 고랭지에서 자란 장수 한우는 전국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장수읍 사과시험포와 정보화마을 등에서는 사과를 직접 따보는 수확체험 행사를 진행한다. 오미자농장에서는 농축액 만들기, 과실주 담그기 이벤트를 한다. 이외에도 장수 도깨비 체험, 비누방울놀이, 허수아비 만들기와 전통 음악과 비보이의 만남, 재즈댄스, 개그 콘서트, 통기타 음악회 등 문화행사를 다채롭게 진행한다.
길에서 만난 별미
장수의 별미는 한우다. 공기 맑고 물 좋은 해발 500m 이상의 청정 고지대에서 자란 장수 한우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강원도에 태백 한우가 있다면, 이곳 전라도엔 장수 한우가 있다. 현재 장수엔 약 2만 마리의 한우가 있다.
장수 한우는 평균 23~25개월간 사육한 640kg 이상의 최상품만 출하한다. 물론 국립농산물검사소로부터 각종 심사를 거쳐 품질인증을 받는다. 위생적으로 사육해 항생물질·합성항균제·성장호르몬제·농약 등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는다. 이렇듯 장수 한우는 청정한 환경 덕에 스트레스 요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각 부위마다 적당히 쫄깃하며 씹히는 맛과 고소한 향이 자랑이다.
장수 한우는 읍내 장수축산업협동조합(063-351-2022)에서 구입할 수 있다. 또 장수읍의 하늘가득장수(063-351-5757), 장계면의 한들회관(063-351-1491) 등 장수 한우 전문점에 들르면 속지 않고 장수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생등심 1인분(150g) 25,000원. 모듬(200g) 20,000원. 갈비탕 1인분 8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장계권 옛날 장계현 지역으로 장수 북쪽의 장계면·계북면·계남면 등 장수 북부권이다. 계북면엔 토옥동계곡·양악탑·정인승기념관, 장계면엔 정충신영정각·성관사 등이 있다. 계남면엔 장수의 대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논개생가와 주촌민속마을을 비롯해 경주마목장 등이 있다. 천천면 북쪽으로는 맑은 금강 물줄기가 흘러간다.
●장수권 장수 관광의 중심지로서 논개사당·장수향교를 비롯해 금강발원지 뜬봉샘, 절이 예쁜 팔성사 등이 자리한 장수읍이 중심이 된다. 장수읍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천천쪽으로 가다보면 타루비가 있는 타루공원, 블루새들리조트 등을 만난다.
●번암권 물 좋고 공기 좋은 장수에서도 대표적인 휴양지로 꼽힌다. 장안산 군립공원의 지지계곡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방화동 가족휴가촌과 방화동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 생가다. 압계서원·권희문 가옥·어필각 등이 있는 산서면도 이 권역에 넣는다.
일정짜기
●당일 장수는 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덕분에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면적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중심 명소만 둘러본다면 가능한 일정이다. 논개사당과 논개생가를 빼놓을 수 없다.
●1박2일 숙박은 와룡 자연휴양림, 방화동 가족휴가촌, 주촌 민속마을, 하늘내들꽃마을 등에서 하는 게 무난하다. 수도권 지역에서 접근했을 때의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중부고속도로 덕유산 나들목~정인승 기념관~장계~타루공원~장수 의암송~논개사당~수분치~뜬봉샘~숙박(방화동 가족휴가촌)~죽림정사~지지계곡~논개생가~주촌 민속마을~장수 경주마목장~장수 나들목~귀가
●2박3일 군립공원인 장안산, 팔성사를 품고 있는 팔공산 등 장수의 대표 산을 다녀올 수 있다. 봄날이라면 철쭉으로 유명한 백두대간의 봉화산을 빼놓을 수 없겠다.
교통
●자가운전
수도권 경부고속도로→비룡 분기점→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산내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3시간 소요>
영남권 대구→88올림픽고속도로→함양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30분 소요> / 부산→남해고속도로→진주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2시간~2시간30분 소요>
호남권 전주→익산-포항 고속도로 장수 나들목→장수 <40분 소요> / 광주→88올림픽고속도로→남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30분 소요>
충청권 대전→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대구→88올림픽고속도로→함양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4시간30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장수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4회(09:20~14:35) 운행. 장계 15,100원, 장수 17,100원. 4시간 소요.
광주→장수 광주종합터미널(062-360-8800)에서 매일 8회(06:10~16:50) 운행. 요금 8,500원, 2시간 소요.
전주→장수 공용터미널(063-270-1700)에서 매일 18회(06:30~21:30) 운행. 요금 6,000원, 1시간30분 소요.
대전→장수 동부터미널(ARS 042-624-4451)에서 매일 7회(07:55~17:50) 운행. 장계 7,600원, 장수 8,800원. 2시간30분 소요.
●현지교통
장수→장계 시외버스터미널(063-351-8889)에서 매일 5회(08:15~17:20) 운행. 요금 1,200원, 20분 소요.
장수→번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30분 간격(07:20~20:00) 운행. 요금 1,700원, 직행 20분, 완행 1시간10분 소요.
장계→논개마을 시외버스터미널(063-352-1514)에서 1시간 간격(06:40~19:10) 운행. 요금 950원, 40분 소요.
장계→장안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6회(07:20~18:20) 운행. 요금 900원, 40분 소요.
천천→와룡 자연휴양림 천천 정류소(063-352-0742)에서 매일 6회(06:30, 11:10, 13:40, 16:25, 17:40, 19:10) 운행.
번암→원사암(방화동) 번암 정류소(063-353-2614)에서 매일 4회(6:30, 10:45, 16:05, 20:10) 운행.
숙식(지역번호 063)
●장계권 논개생가가 있는 대곡리 주촌민속마을(353-5159)에 민박을 치는 집이 많다. 논개생가 앞에 논개생가식당(청국장·352-7777), 참숯가마가든(돼지삼겹살·352-????) 등이 있다. 장계리에 명성여관(351-0156), 귀빈모텔(351-0031), 하얏트모텔(351-1501), 명덕리에 남덕유산관광농원여관(352-5181), 계남면 장안리에 장수도깨비잔치마을(352-0308 http://dokkebi.org), 장안산관광농원여관(352-0308), 계남면 호덕리에 모텔승마(353-0555) 등이 있다. 폐교를 활용해 꾸민 하늘내들꽃마을(353-5185 http://slowzone.co.kr)은 숙박 손님에게 식사도 제공한다. 장계리엔 서울숯불갈비(돼지갈비·352-2933), 모정(돼지고기보쌈·353-0123), 조선명가(곱창전골·352-8292) 등 식당이 많다.
●장수권 장수읍 장수리에 광성여관(351-2317), 덕산장모텔(351-8880), 황토방모텔(351-0500) 등이 있다. 천천면 월곡리에 블루새들승마리조트(350-8000)를 비롯해 와룡 자연휴양림(353-1404 www.jangsuhuyang.kr/Waryong) 앞엔 박수철민박(353-0027), 이재연민박(352-0888), 전만기민박(353-0531) 등이 있다. 식당은 장수군청 근처엔 논개고을(오리훈제·삼겹살·351-7940), 하늘가득장수(장수한우·351-5757), 교촌식당(추어탕·351-2330) 등 식당이 많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엔 수분령휴게소(순두부백반·353-0041)가 있다.
●번암권 우선 방화동 가족휴가촌(350-2562~3)이 있다. 입구에 우경옥민박(353-5252), 박순숙민박(353-4486), 임종근민박(353-3595), 정대옥민박(353-3604) 등이 있다. 죽산리엔 장수호텔(353-5555)이 대표적이다. 번암면 소재지에서 최근 포장된 무령고개를 넘어가는 동화리엔 황금장여관(353-3158), 황인환민박(353-3158), 그리고 지지계곡에 유동욱민박(352-3616), 정대일민박(351-5722), 조일제민박(353-4564) 등이 있다. 식당은 국포리의 산상콘서트(산상정식·353-7070), 노단리의 동화댐가든(다슬기수제비·353-1034) 등이 있다.
*장수군청 문화관광과 063-350-2312
월간산/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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