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종호가 쓰는 대구의 근현대 진보운동 이야기
- 두 번째 이야기 / 10월항쟁 2,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대구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서 끝까지 애국적 지조를 지킨 민족주의자는 전국적으로 극히 드물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민족주의자 거의 대부분이 후기에 이르러 적극적 친일파로 전향하였고 그나마 남은 민족주의자도 해방 때 거의 대부분 이승만-친일파 연대세력에 편입된다. 그러나 대구에는 끝까지 지조를 지킨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해방 때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이 김관제, 채충식, 이선장 등이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시인 이육사, 이상화도 이들과 동지들이다. 백산 안희제, 경주 최부자 집(최전)도 이들의 후원자들이다.
이들은 멀리는 의병운동(왕산 허위선생)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의열단 등에 참여하였고 해외독립운동계열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던 장진홍열사와 함께 한 세력이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혹은 비합법적으로 심지어는 부자들에 대한 테러에 의해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해외 독립운동 진영에 보낼 만큼 적극적이며 전투적이었다.
건국준비과정과 10월항쟁에 참여
10월 대구항쟁은 식량, 친일 경찰, 토지개혁문제를 직접적 계기로 폭발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새로운 국가권력 형성 방안을 둘러싼 세력 간 충돌에서 비롯된다. 핵심적으로는 자주적 권력과 미군정 권력 간의 갈등이다. 갈등은 맥아더의 포고령으로 현실화 된다. 10월항쟁은 이러한 심각한 갈등의 결과이며 이 갈등의 폭발이다. 어떤 학자들은 10월항쟁으로 갈등이 심각해졌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모자의 책임론을 펼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정치적 주장을 하는 것뿐이다.
갈등의 한 축인 자주권력 세력들은 전국적으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일제강점기 말기),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북한 정권이 아니라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을 경과하면서 친일파 배제를 전제로 모든 민족세력을 규합해간다. 대구와 인근지역은 전국 최대의 독립운동 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전국의 축소판으로서 다양한 세력이 결집하여 건국운동을 활기차게 진행한다.
대구와 인근지역의 건국운동을 주도한 인물들, 즉 경북 건국준비위원회의 집행부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기독교사회주의자 그리고 친일을 하지 않았던 양심적인 유지로 구성된다. 이들은 대개가 대구 대봉동 학원가의 학생운동 출신들이다. 특히 실무 집행부인 청년들은 거의가 대구고보을 중심으로 하는 대봉동 학생운동 출신들이었고 상층 대표들은 1920년대 신간회에 참여하는 등 탄압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배 애국자들이었다.
이들 중 숫자는 적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세력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요에 못 이겨 ‘소극적 친일행위’를 한 경력 때문에 자괴감을 지니고 있었다. 경북건국준비위원회 집행부의 다수도 그러했다. 그런데 김관제, 채충식 등은 해방을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이한다. 감옥에 있었던 이들은 친일의 결점이 없었다. 때문에 아마 이들을 매우 존경했고 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의 대표로 추대하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해방 때, 전 민족적 결집을 위해서는 민족주의자들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가면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거의가 ‘적극적’ 친일파로 전향한다. 그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킨 애국자는 매우 드물었다. 이때 대구에는 김관제, 채충식이라는 소위 거물 민족주의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정치적 위상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이들은 매우 개방적이었다.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구분하지 않고 자주국가 수립에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이 명확했다. 오히려 이들이 지닌 ‘출신’과 ‘사회사상’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한 우익과 가까웠을 것이지만,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과는 절대로 손을 잡지 않았다. 이와 달리, 김관제와 함께 대구의 민족주의자의 양대 쌍벽을 이루었던 서상일은 이승만과 손을 잡는다. 이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소수의 민족주의 진영이 갈라지게 되었으며, 이들만이 최종적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명성을 얻었다.
남로로 까지 이어진 정치활동으로 가문은 몰락하고 그 정신만 역사에 남겼다
대구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과 결별하면서까지 남로당에 참여한다. 그들이 존경했던 여운형이 아니라 편협하다고 여겨졌던 박헌영에게로 가는 인간적 아픔도 감수한다. 이 역시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은 물론 가문도 몰락한다.
김관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유력하게는, 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총살당한다. 채충식의 아들 채병기는 대구형무소에 있다가 가창골에서 학살당한다. 채충식의 사위이자 이선장의 동생인 이규형은 역시 수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운좋게 살아 남았다. 살아남은 본인과 가족들은 계속되는 감옥생활, 탄압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며 가문이 몰락한다.
그러나 그 가문의 역사적 헌신은 끝나지 않았다. 채충식의 손녀 채영희는 연좌제의 억압과 극빈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은 10월항쟁유족회의 회장을 맡아 10월항쟁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앞장서고 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사랑방이자 건국준비위원회의 산실 복양당
과거에는 정치 사랑방이 있었다. 이곳에 애국자들이 모여 운동을 만들어 갔다. 그 대표적인 정치 사랑방이 약전골목에 있었던 김관제의 복양당(한의원)이다. 이곳에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건국준비에 관련된 인사들이 집결했다. 사랑방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통이 큰 애국자였던 서상일은 조양회관을 만들어서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조양회관은 해방 때는 애국적 우익의 집결처가 되었고 동지였던 김관제의 복양당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한다.
조양회관은 지금 망우공원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약전골목 복양당은 지금은 다른 건물로 바뀐 채 그 자리만 기억으로 남아 있다. 건국과 10월항쟁의 상층 집행부의 집결처이었던 옛 복양당한의원 자리에 이런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여기 이곳은 해방 때 경북의 애국자들이 모여 건국을 준비하던 곳이다’
정정합니다
지난 호 각주 4)의 최무학, 최문학이 ‘서울 출신이라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며 대구 달성군 출신으로 여겨진다.’를 ‘...경북 울릉군 출신이다.’로 수정합니다.
사진 1
약전골목 제일교회 맞은 편, 구 복양당한의원 자리 앞에 선 필자
사진 2
채충식 선생 유품전시회 앞에 선 손녀 채영희 선생, 가운데 채충식 선생
김관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