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한 사람들(7)
※약력란에 장수초등학교 약력이 빠졌군
파주 새얼학교
교장: 금창구
주소: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428-1
전화:958-7003
◇약력
△38년 7월3일 경북 안동군 북후면 출생
△58년 안동사범부속고등학교 졸업
△58년 경북 영일군 죽북초등학교 근무
△65년 경북 영주군 영주초등학교 근무
△74년 영주군 안정남부초등학교 주임교사
△78년 경북 봉화군 동면초등학교 교감
△80년 서울 한국구화학교 교감
△85년 서울 교남복지학교 교장
△87년 서울시교육청 특수교육 장학사
△91년 서울정진학교 교장
△97년 경기도 파주새얼학교 교장
1999.02.13, 00:00
[청빈한 사람들 (7)]
파주 새얼학교 금창구 교장
학교 축사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교장선생님.
정신지체아 특수교육 기관인 경기도 파주새얼학교의 금창구(琴昌九·62)교장은 5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자취를 한다.
학교에서 마련해준 사택을 사양하고 학교 축사를 개조해 숙소를 만들었다.
2년 남짓한 교직생활을 남들은 편히 보내라고 만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편하게 살기보다는 그 비용을 아껴 남을 돕는 것이 더 보람있는 삶이고 단칸방 자취생활이 나에겐 더 어울린다”는 것이 이유다.
금교장은 어릴적 겪었던 가난의 고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북 안
동군 북후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산에서 솔잎을 따 20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가 장에 가져다 팔아야 했다.
배움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해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자취생활은 너무나 풍족하다.
금교장은 집안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다시피했으나 당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경북지방 명문으로 꼽히던 안동사범부속중학교 시험에 응시,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 시험 성적표를 가져와 아버지에게 눈물로 호소,진학할 수 있었던 그는 교장선생님에게 “꼭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후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자취생활을 하며 쌀을 아끼기 위해 점심은 건너뛰고 죽으로 저녁을 때우기 일쑤였다.
방학 때는 집안 농사를 거들며 틈틈이 논바닥에 책을 펴고 공부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안동사범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58년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교사 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곳은 경북 영일군의 죽북초등학교.이후 10개 초등학교와 5개 특수학교를 옮겨다녔다.
61년 영일군의 두마초등학교 재직 때 학부모들에게 하루에 한 숟가락
의 쌀을 따로 모으는 `절미운동'을 장려해 1년뒤 모은 쌀로 재봉틀 8
대를 구입,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했다.또 월급을 아
껴 모은 돈으로 운동장에 평행봉과 시소 등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당시 금교장은 하반신 장애이었던 이 학교 교장선생님을 매주 등에 업
고 다니며 병원치료를 도왔다.
63년 경북 영주군 안정남부초등학교로 전근한 금교장은 참담한 교육현장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빗물을 식수로 쓸 정도로 가난했던 이 마을의 실상을 접하고 영일군 교육감에게 애절한 편지를 보냈다.
학생들이 하루에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주린 배를 움
켜쥔 채 얼음장 같이 차가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당시 여건상 큰 도움을 받지 못하자 금교장은 어린 학생들을 직접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와 밥을 해먹이며 가르쳤다.
이후 영주군 영주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그는 본격적인 연구교사의 길을 걸었다.12년 동안 연구주임교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장애인 학생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게 돼 72년 특수교사자격증을 땄다.
80년 장애인 특수학교에 처음 근무할 때는 주위사람들은 물론 가족의 반대도 심했다.당시 여중생이던 딸은 아버지가 장애인 교사라고 놀림받아 매일 울면서 집에 왔다.
그러던 딸(30)이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애인학교인 한국경진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항상 말없이 조용히 지내는 학생이 있어 알고보니 청각장애아였다”며 “교실 맨 앞에 앉혀 그 학생에게 관심을 보인 결과 6개월만에 한글을 깨쳤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금교장은 언어장애인학교인 한국구화학교와 교남복지학교를 거치면서 장애인 교육을 위한 특수교사 지도서를 편찬했고 표준 수화사전을 만들었다.
87년 서울시교육청 특수교육 전담 장학사로 부임한 그는 장애인과 일반학생의 통합교육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장애인 교육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금교장이 교직생활 42년 동안 모은 재산은 서울 신림4동의 40평짜리 단독주택이 전부.지금 몰고 다니는 승용차는 지난해 운전면허를 취득한 기념으로 자식들이 할부로 구입해 준 것이다.
그는 평생 얼마 안되는 월급의 절반 가량은 항상 학생들을 위해 써왔다.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들을 해마다 2~3명씩 자취방으로 데려다 함께 생활하며 가르쳤다.
이같은 학생돕기 사업은 계속돼 지금도 서울 거여동의 신아원,화곡동의 소망의집 등 정신박약아 수용시설에 지정 후원자로 매달 금품을 보내고 있다.
금교장은 “교직생활에 대해 크게 후회되는 것은 없으나 이곳 저곳 옮겨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던 가족에게 가장 미안하다”
며 “나를 닮아 자린고비 생활이 몸에 밴 아내가 자식들의 속옷을 기워입힐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제자 가운데 육사에 진학,현재 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는 제자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학비를 지원해준 학생들은 많지만 그 제자는 가난하면서도 늘 밝은 모습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금교장은 그 제자가 장군으로 진급하면 한쪽 어깨의 별을 떼내 자신에게 달아주기로 했다며 그날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금교장은 얼마전 새로 부임한 초임교사에게 오랫동안 교사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방법을 강의했다
.
“정상학생이건 장애학생이건 무엇을 가르치기에 앞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교사가 가져야 할 첫번째 자세입니다” 그의 42년 교직생활에서 나온 경험이었다.
★내가 본 금창구 선생님★
“금창구 교장선생님은 매사에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합니다.교장이지만 일선 평교사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뜻을 학교운영 전반에 반영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년 동안 금교장을 곁에서 지켜봤던 서울시교육청 특수교육담당 김희연 장학관(49)은 금교장을 합리주의자라고 말했다.
김장학관은 70년 경북 영주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를 알게 됐다.본인도 장애인 특수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금교장은 특수교육 분야에서 자신보다 항상 앞서 나가 본받을 점이 많았다고 평했다.
초임교사 때 보이스카우트 지도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장학관은 78년 금교장의 보이스카우트 교사 기본연수과정 교육을 맡았었다.당시 그는 학생들에 대한 금교장의 애틋한 관심을 직접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금교장은 경북 봉화군 동면초등학교 교감이던 당시 2백여명에 가까운 전교생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어려운 학생들의 가정환경은 물론 개개인의 버릇,장래 희망까지 파악해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장학관은 80년 서울 소년의집 초등학교에서 처음 특수교육을 시킬 때 모든 일을 금교장과 상의했다.
김장학관은 “특수교육의 행정적 업무처리,교육과정 등 특수학교의 전반적인 운영에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며 “특히 그가 집필한 특수학교 교사용 지도서는 지금도 특수교육 교사의 필수 지침서로 불린다”고 말했다.
김장학관은 금교장의 소박하고 겸손한 생활태도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김장학관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깍듯해 미안할 정도”라며 “혼자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도 오래된 양복을 항상 깔끔하게 차려 입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장학관은 또 “그의 생활 자체가 철두철미하고 신중
해 주변이 항상 정돈된 모습”이라며 “컴컴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불을 켜지 않고도 쉽게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