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3일 헌인능
사적 194호 서초구 헌인릉길에 자리 잡은 헌인릉은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을 합쳐 이름 붙인 곳이다.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우거진 숲이 일품이며,
헌릉에는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습지가 있다.
3월 4일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지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화성시에서 화성8경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3월 8일 일원동 에코공원 마루 공원 대진공원
3월 17일 동구능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3월 23일 영릉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 장 씨의 쌍릉인 영릉이 있다.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2세에 한 살 위이며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 씨와 가례를 올려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볼모로 소현세자와 함께 선양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금주위, 동쪽으로는 철령위, 동북쪽으로는 여해부까지 따라다니며 몰락의 길을 걷는 명이 청에 의해 격파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청이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했고, 서역을 공격할 때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해 그를 보호했다.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영릉은 제4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 씨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이 잦았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했지만 세조 때 다시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해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중 하나라는 현재의 영릉이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1) 으로 합장했다. 한편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 석상, 장명등, 망주석, 문·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로 옮겨졌다.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합장릉인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병풍석 없이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 좌우에 망주석을 놓았는데 혼유석의 고석은 선대의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또한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3월 29일 건봉사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건봉사에는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현위치에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팔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 앞에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각비가 하나씩 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이 밖에도 건봉사에는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의승병봉기처이기도 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승병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810년(헌덕왕 2) 승전(勝詮)이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845년(문성왕 7)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1523년(중종 18) 보림(普琳)이 이 절과 보림암을 중수하였고, 1605년(선조 38) 유정(惟政)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으며, 혜능은 안양암(安養庵)과 적명암(寂明庵)을 중건하였다.
1673년(현종 14) 수흡(修洽)과 도율(道律)이 1,2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봉안했고, 1683년(숙종 9)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시주한 1,000금으로 불상을 개금(改金)하였다. 이 때 명성왕후는 불장(佛帳)과 탁의(卓衣)도 시주하였다.
1708년 능파교(凌波橋)의 비(碑)를 세우고 동대암(東大庵)을 창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 주지 채보(彩寶)가 구층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자 명성왕후가 천금을 내렸다.
1726년(영조 2) 석가치상탑비(釋迦齒相塔碑)를 세웠으며, 육송정 홍교(六松亭 虹橋)를 중건하고 비를 세웠다. 1754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상궁 이씨와 안씨를 보내어 석가상을 만들게 하고 팔상전을 세워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8월에는 영조가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내려 어실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99년 강원도 순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유정의 기적비(紀績碑)를 세웠고, 1802년(순조 2) 용허(聳虛)가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04년 왕비 김씨가 금 1,000금과 오동향로·오동화준(梧桐花樽)·양산 등을 내려 순조의 성수를 축하했다. 1805년 왕비 김씨는 나라를 위한 재(齋)를 올리고 병풍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였으며, 1828년 유정의 영각(影閣)을 지었다.
1851년 유총(侑聰)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65년(고종 2) 화은(華隱)을 청하여 강원(講院)을 개설하였는데, 이 때부터 대표적인 강원의 하나로서 많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1878년 4월 3일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이 때 학림(鶴林)이 불 속에 뛰어들어 팔상전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절감도 등을 꺼내었다. 1879년 개운사·중흥사(重興寺)·봉은사·봉선사(奉先寺)·용주사 등의 도움을 얻어 대웅전·어실각·사성전·명부전·범종각·향로전·보안원·낙서암·백화암·청련암을 중건하였다.
1881년 관준(寬俊)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하였고, 1885년 운파(雲坡)가 모연금으로 대웅전·관음전·명부전·사성전의 문을 개조하고 대웅전 후면을 돌로 쌓았으며, 1886년 명례궁(明禮宮)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888년 청련암과 대원암이 불탔으며, 1889년 인파(仁坡)·관준 등이 팔상전·진영각·노전·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91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소상재를 올렸고, 범운(梵雲)이 부처님 치아를 천안 광덕사에서 받아 와 팔상전에 봉안하였으며, 1894년 관준이 선원(禪院)을 만들었다. 1906년 사적비를 세웠고, 어산청범음계(魚山廳梵音契)에서 석가영아탑봉안비(釋迦靈牙塔奉安碑)를 세웠으며, 봉명학교(鳳鳴學校)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만일염불회를 회향한 뒤 의중(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열었다.
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30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9개 말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상해에서 신간 대장경 일부를 구입하여 봉안했으며, 1914년 소신대(燒身臺)에 31명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간성군에 포교소를 세웠다.
1917년 팔상전과 낙서암을 중수하였고, 1918년능허(凌虛)와 경해(景海)가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운파는 중종(中鐘) 5좌(坐)와 불기(佛器) 30좌를 비치하였다.
1919년 능허가 1,000원을 시주하여 불이문(不二門)과 영빈관·별실·문수교를 새로 세우고 산영교(山映橋)를 고쳤다. 1920년 인천 포교당과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세웠으며, 한암(漢巖)을 청하여 무차선회(無遮禪會)를 베풀었다.
1924년 사무소를 중수하고 극락전과 만일회의 부속건물 등을 중건하였으며, 1926년 불교전문강원을 설치하고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양성하였으며, 불상 7위(位)를 개금하고 장구사(葬具舍)를 세웠으며, 덕성(德性)의 주재로 제5회 만일염불회를 계승하였다.
6·25전쟁 때 이 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독성각·산신각·단하각·진영각·범종각·봉청루·보제루·대지전·동지전·서지전·어실각·어향각·동고·낙서암·극락전·만일원·보안원·선원·원적암·사무소·불이문·여관·장의고·성황당·수침실(水砧室) 등 총 642칸에 이르렀다.
중요 문화재로는 도금원불(鍍金願佛)·오동향로·철장(鐵杖)·대종·절감도·차거다반(硨磲茶盤) 등과 불사리탑 등 탑 8기, 부도 48기, 비 31기, 고승 영정 44점 등이 있었다.
또 부속 암자로는 보림암·백화암·봉암암·극락암·백련암·반야암·청련암·대성암·적명암·보리암·보문암·대원암·일출암·안양암·동대암·망해암 등이 있었다.
현재 고성 건봉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