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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타르코스 Aristarchos of Samos [ 그리스, BC 310경~230. ]
지구도 하나의 행성으로서 태양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별들은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다.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는 월식 중 달의 표면에 드리워진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옳게 추론했다. 그리고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있었던 1,80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행성의 배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갈리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태양 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한 사람”이라고 했지 태양 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또한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 달, 태양, 세 천체의 상대적인 크기와 거리를 계산해 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계산과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시대 상황을 참고한다면 그 계산 방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리스타르코스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아리스타르코스의 우주 체계는 그 시대를 너무 앞선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대나 중세의 과학수준으로는 지동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건물에서 돌을 떨어뜨린다고 가정하자.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지구는 우주 공간을 비스듬하게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돌이 떨어지는 동안에도 건물이 동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공은 건물의 서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공은 빌딩 밑으로 곧바로 떨어진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은 아리스타르코스를 미치광이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지동설은 아리스타르코스 동시대인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2. 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 of Cyrene [리비아. BC 276경 -BC 194경]
기원전 276년~기원전 194년 리비아의 큐레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 연극평론가이자 천문학자이다. 당시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를 “베타”(즉 2번째)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손댄 분야는 그의 모두가 확실한 ‘알파’였다.
지구가 ‘조그만 세계’라는 인식을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거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알레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으로 근무 중 어느 날 파피루스의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음을 본다. ‘남쪽 변방 시에네 지방, 나일강의 첫 급류 가까운 곳에서는 6월 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짓날에는 한낮에 가까이 갈수록 사원의 기둥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고 정오가 되면 아예 없어졌으며 그때 깊은 우물 속 수면 위로 태양이 비춰 보인다.’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있다는 뜻이다. 평범한 일들을 실험정신이 강한 과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의미를 두고 유심히 봄으로써 세상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 막대를 수직으로 꽂고 6월 21일 정오 그림자가 생기는지를 조사했다. 결과는 '그림자가 생긴다'였다. 같은 시각에 시에네의 막대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데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지구의 표면이 곡면이라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두 그림자의 길이 차이를 통해 두 지역이 지표상으로 7도 떨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구 둘레 전체는 360도 이고, 7도는 전체의 50분의 1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사람을 시켜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 걸어가게 한 후 그 거리를 보폭으로 쟀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 거리가 800킬로미터라는 것을 알게 됐다. 800킬로미터의 50배이면 4만 킬로미터, 이것이 바로 지구의 둘레인 셈이다. 2,200년 전의 실험치고는 대단한 성과다. 그가 사용한 도구는 막대기. 눈, 발,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하고자하는 실험 정신이 전부였다. 따라서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행성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한 인물이다.
히파르코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시절 별자리 지도를 작성하고 별의 밝기를 추정하였다.
3. 프톨레마이오스 Claudius Ptolemaeus [ 이집트. AD 83년경 - 168년경 ]
오늘날 사이비 과학이라 할 점성술을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것을 수집 정리하였다. 점성술은 관찰과 수학, 철저한 기록과 엉성한 생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이 묘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발달했다. 개인 점성 사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약 2000년 전에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람의 언행이 행성과 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키, 얼굴, 성격, 게다가 선천적인 장애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긍정적인 업적은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줬고, 별의 밝기를 기록하여 목록을 만들었고 지구가 왜 구형인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 그리고 행성 운동의 모형을 개발하여 하늘의 신호를 해독하고자 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전 수천 년 전부터 이집트에서는 화성의 역행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모형은 중세 과학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그로부터 1,000년 동안 과학의 진보를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다”는 가설이 있기까지 맹위를 떨쳤다. 그의 지구 중심 우주관인 천동설은 1,500여 년 동안 인류에게 거짓을 가르친 셈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혜성이 전쟁, 가문, 그리고 불안한 분위기를 가져오는 장본이이라고도 생각했다.
4. 히파티아 Hypatia
수학자, 천문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약탈당하고 파괴될 때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순사한 여류과학자.
5.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 폴란드.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1543년 가톨릭 성직자였던 그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는 아주 색다른 가설을 내놓았는데 대담하게 지구가 아닌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태양은 태양계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1616년 가톨릭 교회는 그의 저술을 금서로 1835년까지 묶였다. 마르틴루터는 그를 “벼락 출세한 점성술사” “이 바보가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 분명히 쓰여 있듯이, 여호수아가 멈춰라하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 라 하였다. 교회 교리의 틀을 벗어나는 사람은 구교도이든 신교도이든 구별없이 굴욕, 세금, 추방, 고문,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했던 시대이다. 하늘은 천사와 악마가 사는 곳이며 신의 손이 영롱한 행성의 천구를 돌리는 곳이다. 모든 자연 현상 바탕에 물리법칙이 있다는 생각은 그 시대 과학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용감하고 고독한 분투 덕분에 현대과학에 혁명의 불이 일기 시작했다.
6. 튀코 브라헤 Tycho Brahe, [ 1546년 12월 14일 ~ 1601년10월 24일 ]
고국을 버린 덴마크 귀족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주위에는 항상 아첨꾼과 소란스러운 사람들로 북적였다.
“튀코 브라헤는 비할 데 없이 부자지만 재물을 활용할 줄 모른다. 튀코 브라헤가 소유한 어떤 기구라도 나와 내 가족의 전 재산보다 더 비싸다”라고 케플러는 말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관측의 귀재였다. 그의 관측 자료는 케플러가 행성의 타원 궤도 운행의 원리를 발견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케플러와 자주 다투고 화해도 자주 한 사람이며 로젠버그 남작이 베푼 만찬에서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기 보다 예의를 차리느라” 지나치게 용무를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고 한다.
죽기 전 케플러에게 방대한 관측 자료를 물려준다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밤은 가벼운 혼수상태에서 시를 짓는 사람처럼‘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 라고 했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그리고 현세의 권력자와 교회의 권위자들만이 연금술이나 점성술, 천문학 같은 신비한 지식을 안전하게 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같은 지식을 일반인들에게 알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이치에 닿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과학자들의 매우 오래되고 위험한 발상을 그도 그대로 하고 있었다.
7.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 이탈리아. 1564년 2월 15일~1642년 1월 8일]
온갖 검열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받던 유럽인들에게 네덜란드는 이상향이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고문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라고 강요받던 과학자 갈릴레오에게 라이덴 대학교는 교수직을 제의한다. 네덜란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갈릴레오는 네덜란드 사람이 설계한 스파이글라스를 개조하여 그의 첫 번째 망원경을 만든다(1609년). 이 망원경을 통하여 태양의 흑점, 금성의 위상변화, 달의 운석공, 목성 주위의 4개의 위성 갈리레오 위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1610년). 토성의 고리를 처음 발견하였으나 그의 망원경에는 토성 양편에 대칭으로 삐죽하게 붙은 물체로 보여 귀처럼 생겼다고 기술하였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천문학적 주장과 관련된 종교적 갈등을 1615년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편지를 통해 털어놓는다. “ 몇 년 전 소인은 천체관측을 통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은 매우 색다른 것이었고 또 거기서 유도되는 결론이 학계의 공식 입장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지만 학자들로부터 감내하기 어려운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가 자연과학의 지식체계를 뒤집으려는 모종의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마치 제 손으로 그러한 것들을 하늘에 올려다 놓은 양 많은 이들이 저를 극렬하게 매도하였습니다. 새로운 발견이 과학의 연구, 성과, 성장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지지하며 주창했다. 케플러와 함께 그런 용기는 그 당시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데카르트는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논문 내용을 두고 “교회의 권위에 맞서서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비굴했다.
갈리레오는 1633년 가톨릭으로부터 이교도 신앙을 가졌다는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불온 문서 배포로 생애의 마지막 8년을 그의 집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다. 천체 연구에 망원경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8. 요하네스 케플러 Kepler, Johannes [ 독일. 1571. 12. 27 ~1630. 11. 15 ]
개신교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고집이 세고 독립심이 강하고 두뇌가 명석했다.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신이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케플러에게의 신은 공명정대하고 정의의 구현만을 외치는 분노의 신이 아니라, 코스모스를 창조한 권능의 신이었다. 소년의 호기심은 두려움보다 강하여 세상의 종말에 대해 배우고 싶어 했다. 감히 신의 의중을 헤아려 보고자 했으며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오만한 갈등은 고대과학을 접하면서 “기하학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기하학은 천지창조의 본보기였다.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 라고 말한다.
케플러는 평생 점성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혼돈 안에 어떤 규범이나 법칙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 속에 있는 조화를 드러내지 않을까? 자연이라는 책이 케플러라는 단 한 명의 독자가 나타나기까지 1,00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1589년 튀빙겐대학시절 사고와 자유의 해방을 만끽하면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교수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내포된 위험한 신비를 케플러에게 알려주었다. 얼마 후 오스트리아의 한 중등학교 교사를 하였으며, 천문과 기상현상에 관한 책력을 제작하여 별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신께서 모든 동물들에게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셨듯이 천문학자에게는 점성학의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하였다.
케플러 시대에 알려진 행성은 지구를 포함하여 여섯 개 뿐이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전부였다. 케플러는 행성이 왜 하필이면 여섯 개 뿐이어야 하는지 고민하였다. 행성이 스무 개이면 어떻고 백 개이면 어떤가? 행성들은 왜 코페르니쿠스가 알아낸 바로 그 간격을 유지하며 도는가? 케플러는 아무도 갖지 않았던 태양계 구조의 근본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찾아낸 행성 간 거리가 잘못된 것이라 판단한 그는 당시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관하여 누구보다 정확한 관측 자료를 다루는 튀코 브라헤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로부터 툭툭 던져지는 자투리 자료만 얻어 듣는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으로 튀코 브라헤는 죽기 전 자신의 관측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다.
그의 관측 자료도 케플러의 가설을 설명해 주지 못함을 알고 갈릴레오에게 망원경으로 행성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갈리레오, 튀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도 모두 행성이 운동하는 길은 원이라고 못 박았다. 최상의 모습으로 창조된 신의 피조물을 감히 불완전하다고 여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원은 완전한 것이며 타원은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다).
튀코 브라헤가 남긴 화성 궤도 관측 자료를 3년간의 분석 끝에 화성의 원형궤도에 해당하는 정확한 수치를 찾았다고 좋아하다. 그러나 나머지 2개의 관측 자료와는 케플러의 예측값이 8분이라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고 “거룩한 분의 섭리로 우리는 튀코 브라헤라는 성실한 관측자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관측 결과는 .....이 계산의 오차가 8분이라고 판단해 줬다. 하늘이 주시는 선물은 감사히 받아들여야 마땅하거늘 ........내가 8분의 오차를 모른 체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내 가설을 땜질하는 식으로 고쳤을 수 있다. 바로 이 8분이 천문학의 완전 개혁으로 이르는 새로운 길을 내게 가르쳐 줬던 것이다.” 라고 하며 자신의 실험적 측정값을 과감히 수용하는 용기를 보였다. “어디나 조화로운 비율이 장식처럼 박혀 빛나는 이 우주이지만, 그러한 조화의 비율도 경험적 사실에 반드시 부합해야 한다.”
케플러는 이로써 행성의 원 궤도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수많은 계산을 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가 처음 만들어 낸 타원의 공식을 이용하여 계산한 결과 튀코 브라헤의 관측 값과 일치를 이룬다.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살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아, 나야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케플러는 이렇게 해서 화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할 때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 궤도를 따라 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609년). 만약 튀코 브라헤가 케플러 보고 화성보다 훨씬 원운동에 가까운 금성의 움직임을 연구해 보라고 했더라면 영영 행성의 진짜궤도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케플러는 행성운동의 근본원인이 자기력의 작용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중력 또는 만유인력의 개념을 예견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류사에서 최초로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다.
케플러의 제 1법칙 : 행성은 타원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태양은 그 타원의 초점에 있다.
케플러의 제 2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동경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넓이를 휩쓴다.
케플러의 제 3법칙 : 행성의 주기(행성이 궤도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를 제곱한 것은 행성과 태양사이의 평균 거리를 세제곱한 것에 비례한다. 즉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일 수록 더 천천히 움직이되, 그 관계가 P²=a³을 정확하게 따른다.
오늘날 말로 표현하자면 케플러는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 셈이다. 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했고, 자신의 돈으로 자기의 생각을 책으로 출판하였으며, 공상과학 소설까지 썼다. 케플러는 태양 이외 다른 별들은 행성계를 거느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9. 하위헌스 Christiaan Huygens [ 1629년 4월 14일 - 1695년 7월 8일 ]
‘태양 아닌 자신들만의 중심 별 주위를 각기 궤도 운동하는 행성들이 우주에 수없이 많을 것’이라고 인류사에서 처음 생각하고, 우주에 우리와 다른 형태의 생물이 존재하리라고 주장을 편 조르다노 브루노와 함께 갈리레오가 철저하게 비판 받던 이탈리아와 달리 네덜란드의 하위헌스는 이들의 주장을 모두 지지하면서도 온갖 찬사를 다 받고 살았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많은 훌륭한 사람들과 접하며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다양한 언어, 회화, 법률, 과학, 기술, 수학, 음악들을 동시에 접하며 이에 능하게 되었다. “전 세계가 나의 고향이며, 과학이 바로 나의 종교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위헌스는 충분히 끓인 물에서도 미생물이 서서히 증식하는 현상을 관찰하고, 미생물들은 충분히 작아서 공기 중에 떠다닐 수 있으며 떠다니다 물에 내려 앉아 번식한다고 설명함으로써 생명의 자연발생설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런 하위헌스의 추측은 2세기의 긴 시간이 지난 뒤 파스퇴르에 의해 확인된다.
하위헌스는 5미터 길이의 망원경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에라토스테네스를 이어 지구 외의 다른 행성의 크기를 측정한 첫 번째 인물이며 금성이 구름으로 완전히 뒤덮혀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추측한 천문학자였다. 화성의 표면 특징을 지도로 그려 남겼으며, 그러한 표면 특징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화성의 자전주기가 지구와 비슷하게 24시간 정도라는 것까지 측정했다. 갈리레오가 발견하였으나 자세한 모양을 설명하지 못한 토성 고리 모양을 그는 토성이 여러 겹의 고리로 둘러싸여 있고, 그 고리가 토성 표면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가 처음 확인하였다. 1659년 출판한 “토성계의 상세도”에서 토성 고리의 모양이 변하는 이유를 지구와 토성의 상대 위치의 변화로 옳게 설명하였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도 발견하였다. 그는 점성술이란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위헌스는 지구가 하나의 행성으로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네덜란드의 보통 사람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는 지동설을 두고 “이해력이 좀 부족하거나 인간이 만든 헛된 권위의 미신에 완전히 사로잡힌 이들”만 제외하면, 모든 천문학자들이 받아들이는 학설이라고까지 이야기 했다.
하위헌스는 우주 저 너머에도 태양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 그러한 별들이 우리의 태양계와 같은 행성계를 거느리고 또한 그 행성들에는 생물이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행성들을 단지 거대한 사막과 같이 아무런 생물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지구에게 모종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 추론은 신이 아무 목적 없이 행성을 만들어 놓을 리가 없으므로 행성에도 반드시 거주민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위헌스의 시대는 아직 진화론이 나오기 전이다. 빛은 바다의 파도처럼 진공을 지나가는 파동의 일종이라고도 생각했다.
10. 뉴턴 Newton, Sir lsaac [ 영국. 1642. 12. 25~1727. 3. 20]
“빛이 물질인가, 아니면 현상인가?” “인력이 어떻게 진공을 가로질러 작용할 수 있는가?”와 같은 비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젊어서부터 많이 고민했다.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삼각법에 대한 책을 읽고 그리고 의문이 생겨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를 읽고 그리고 2년 후 미적분을 발명한다. 빛에 관심 많아 거울에 비친 태양의 상을 들여다보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기도 했다.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은 얼마 없었고 강의를 들어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해하는 학생이 없으니 그분의 강의는 벽에다 대고 하는 것이다”라고 그의 하인이 말할 정도로 이미 케플러의 학생들처럼 자기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뉴턴은 움직이는 물체는 어떤 다른 것의 영향을 받아 가던 길을 벗어나지 않는 한 계속 그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성질이 있음을 즉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이 보기에 만약 어떤 힘이 달을 지구 쪽으로 잡아당겨 지속적으로 운동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달도 직선으로 날아가 버릴 듯싶었다. 그러나 어떤 힘이 계속해서 달을 지구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달은 거의 원에 가까운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 뉴턴은 이 힘을 중력 (重力)이라고 불렀고, 거리를 두고도 작용하는 힘, 즉 원격 작용이 가능한 힘이라 생각했다. 지구와 달은 직접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구는 항상 우리 쪽으로 잡아당긴다.
뉴턴은 케플러의 제3법칙을 이용하여 인력의 세기를 수학적으로 추정했다. 지구가 사과를 잡아당겨 떨어뜨리는 바로 그 힘이 달이 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도록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는 힘이었다. 그 당시 발견된 목성의 달들이 목성의 주위는 궤도 운동하도록 만드는 힘도 바로 목성의 중력임을 밝혔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성립하는 범우주적 성격의 법칙이기 때문에 만유인력 (萬有引力)의 법칙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 튀코 브라헤의 모든 관측결과는 뉴턴의 중력법칙 하나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이론 법칙이다.
뉴턴은 “혜성은 매우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리는 일종의 행성이다” 이렇게 혜성을 둘러싼 미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혜성 운동 규칙을 예고하자 그의 친구 에드먼드 핼리가 1531년, 1607년, 1682년에 출현했던 혜성들이 모두 같은 혜성으로 76년마다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758년 정확하게 나타나 이 혜성을 핼리혜성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
11. 윌리엄 허셀 [ 영국. 1792. 3. 7 ~1871. 5. 11 ]
18세기 말 영국의 궁정음악가이며 천문학자. 별들의 분포를 지도로 작성했다. 이 지도에는 은하수의 띠가 흐르는 평면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든지 비슷한 수의 별들이 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지구가 은하수 은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허셀의 오류는 궁수자리 방향에 있는 많은 양의 미세 고체 입자들 때문이다. 이 입자들은 별빛을 흡수 산란하여 실재보다 별이 적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2. 월리스 Wallas, Alfred Russel [ 영국. 1823. 1. 8 ~1913. 11. 7]
월리스는 화성에 생명 거주의 가능성이 있다는 로웰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화성은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어디를 가든지 빙점이하라고 지적했다. 그의 온도 계산에 따르면 화성 표면의 바로 아래는 영구 동토층으로 뒤덮혀 있어야 했다. 대기는 로웰이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희박하며 충돌 구덩이들이 달에서처럼 사방에 널려 있어야 했다.
“운하를 통해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적도를 지나 물을 옮기겠다는 지적 존재가 아니라 광인 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무모한 계획이다. 확실히 장담하건데 단 한 방울의 물도 남김없이 증발해버리거나 수원지에서 160킬로미터도 채 못가서 땅에 스며들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라고 로웰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로웰이 사용한 24인치 망원경과 같은 수준의 망원경으로 화성의 ‘운하’를 관찰하였으나 월리스는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로웰의 생각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1869년 수에즈운하, 1893년 코린트운하, 1914년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고 여러 운하와 관개용 수로들이 많이 시기였다.
13. 로웰 Percival Lawrence Lowell [ 미국. 1855년 3월 13일~1916년 11월 12일 ]
미국 보스턴 출신. 대규모의 천문대를 설립하고 화성 생명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외교관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1877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스키아파렐리가 화성의 지구 대접근 시기에 화성의 표면을 자세히 관찰하고 한두 개의 직선들이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화성의 밝은 지역 여기저기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카날리”라 불렀다. 이탈리아어로 'canali'는 경로가 가늘고 길게 파인 홈을 의미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지적 존재가 설계한 구조물’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운하 'cannal'로 번역되었다. 1892년 시력을 잃어가던 스키아파렐리가 화성관측을 그만두자 자기가 대신하기로 하고 시상이 좋은 애리조나주 플랙스테프라는 곳에 천문대를 짓고 화성의 표면을 스케치 했다.
그물 같은 것은 극관에서 녹아내린 물을 적도 지방으로 수송해주는 거대한 용수로 시스템이라고 믿었다. 행성 전역에 걸쳐 관개시설이 돼 있는 이 행성에 지구인과 아주 다른 그리고 더 오래되고 더 현명한 종족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화성의 어두운 지역이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은 식물의 성장과 쇄락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는 화성이 지구와 아주 닮았다고 믿었다. 화성의 기온이 약간 낮은 편이긴 하지만 영국 남부처럼 지낼만한 정도로 상상하였다. 대기는 비록 희박하지만 호흡하기에는 충분하고, 물이 전반적으로 귀하겠지만 운하망이 잘 짜여져 있어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을 화성 전역에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분해능이 1,000배나 뛰어난 매리너 9호에서 찍은 위성 사진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가 몇 년씩 똑같이 그린 화성 지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발견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은 감정이 연루되면 스스로를 기만하기도 한다.
14. 섀플리 Shapley, Harlow [ 미국. 1885. 11. 2 ~ 1972. 10. 20 ]
1915년 새플리는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은하의 외진 변방에 있다.”고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천문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코스모스에는 오직 하나의 은하, 즉 우리 은하수 은하만 있다고 믿었다. 칸트는 안드로메다자리에 보이는 M31이 수많은 별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은하일 것이라 는 구체적인 제안을 확실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는 이러한 나선형 성운에게 “섬 우주(Isaland universe)라는 멋진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에드윈 허블은 1924년 M31에서 변광성을 찾아내고 변광성들의 평균 겉보기 밝기와 원래 밝기를 비교하여 M31이 어림잡아 200만 광년 조금 넘는 매우 먼 거리에 있다고 규명하였다.
태양이 우리은하 중심에서 약 3만 광년 떨어진 곳의 은하를 가로지르는 면 근처에 있음을 계산했다. 헨리 N. 러셀의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1911년 많은 쌍성계에서 두 별이 서로를 가릴 때의 광도변화를 측정해 별의 크기를 구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30년 이상 표준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페이드 변광성(變光星)은 서로를 가리는 쌍성이 아님을 증명했으며, 이들이 맥동성(脈動星)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1914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윌슨 산 천문대의 직원이 되었다. 이곳의 152.4㎝(60인치) 반사망원경으로 우리은하에 있는 구상성단의 분포에 대해 연구했다. 이 성단은 수많은 별들이 밀집해 있는 무리로서, 어떤 것은 별이 106개나 있다. 그당시까지 알려진 100개의 구상성단 가운데 1/3은 궁수자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광성의 변화주기와 겉보기밝기로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새로 발견된 사실을 이용하여, 구상성단들이 궁수자리에 중심을 두고 구에 가까운 형태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성단들이 구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므로, 이들이 우리은하의 중심부를 형성한다는 결론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이 결론과 자신의 다른 거리자료로 태양이 우리은하 중심에서 5만 광년 거리에 있다는 것을 유도했다. 이 값은 나중에 3만 광년으로 보정되었다. 섀플리 이전에는 태양이 우리은하 중심 근처에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우리은하의 실제 크기를 계산한 그의 연구는 은하천문학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그밖에 다른 은하, 특히 마젤란 성운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은하들이 은하우주라고 하는 은하단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천문학교수, 나중에는 하버드 천문대 대장(1921~25)으로 있었다. 1952년 하버드의 명예대장과 페인좌(座) 천문학교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성단 Star Clusters〉(1930)·〈혼돈으로부터의 이탈 Flights from Chaos〉(1930)·〈은하 Galaxies〉(1943)·〈은하우주의 내부 The Inner Metagalaxy〉(1957)·〈별과 인간의…… Of Stars and Men……〉(1958) 등이 있다. (이상 브리테니커)
15. 허블 Hubble, Edwin Powell [1889. 11. 20 ~1953. 9. 28 ]
외부은하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천문학자인 조지 E. 헤일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수학과 천문학으로 학사학위(1910)를 받았고, 훌륭한 권투선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천문학과 운동을 그만두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로드 장학생으로 법률을 공부해 1912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13년 켄터키 주의 법조계에서 일했으나 곧 법률에 싫증을 느껴 그만두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마침내 천문학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위스콘신에 있는 시카고대학교의 여키스 천문대로 돌아왔다.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1917),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뒤 윌슨 산 천문대에 근무하면서 외부은하에 관련된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윌슨 산 천문대에 있는 동안 모든 성운(星雲)이 태양이 속한 거대한 항성계(恒星系)인 우리은하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1922~24)(→ 우주론). 또한 어떤 성운에는 주기(週期)와 절대등급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진 세페이드 변광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리·겉보기등급·절대등급에 대한 상호관계를 더욱 깊이 살펴본 뒤, 이들 세페이드 변광성은 수십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별들이 속한 성운들은 우리은하와 구별되는 다른 은하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1924년에 발표된 이 발견으로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외부은하의 존재를 발견한 뒤, 1926년부터 은하들을 모양에 따라 분류하고 은하를 구성하는 항성의 구성과 은하의 밝기형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은하를 연구하는 동안 허블은 1927년에 2번째 위대한 발견을 했다. 즉 은하들이 우리은하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은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 발견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엄청난 것이다. 그동안 정지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29년에 역시 허블이 발견한 것으로서 우주는 은하의 거리와 속도의 비가 현재 허블 상수라고 불리는 일정한 값을 갖고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허블의 생각은 옳았으나, 그가 계산한 상수값에 의하면 우리은하가 다른 모든 은하들보다 크며, 우주의 나이가 예상하고 있는 지구의 나이보다도 적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다른 천문학자들이 허블의 이론을 고수하면서도 결과를 수정하여 우주는 100억~200억 년에 걸쳐 일정한 속도로 팽창해 왔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허블은 천문학에 대한 업적으로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성운 스펙트럼의 적색편이 Red Shifts in the Spectra of Nebulae〉(1934)가 있으며 그가 죽은 후 1961년에 알랜 샌디지가 편집·출판한 〈허블 은하 도감 The Hubble Atlas of Galaxies〉이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은하를 관측했다. (이상 브리테니커)
16. 칼 세이건 Carl Edward Sagan ( 미국. 1934. 11. 9. ~ 1996, 12, 20, )
행성 표면과 대기의 상태,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 등을 비롯해 태양계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고, 정력적인 저술활동과 강연, 텔레비전 출연 등을 통해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자극했다.
1960년 시카고대학교에서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 천문대에서 천체물리학자로 있었다(1962∼68). 이후 그는 행성천문학보다는 외계생물체연구(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SETI) 계획에 참여했다. 1968년에는 코넬대학교 행성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미국이 수행한 금성과 화성으로의 무인우주비행 임무에 여러 차례 관여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생명의 기원 문제에 흥미를 느낀 세이건은 컴퓨터 모의실험을 통해 가스로 가득 찬 원시 지구의 대기에서 다양한 유기체 분자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했으며, 이것은 외계인 탐색이 설득력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73년 〈우주와의 접촉: 외계를 보는 시각 The Cosmic Connection : A Extraterrestrial Perspective〉이 출간되면서 명쾌한 서술과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대중적 과학 저술가이자 해설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1978년에는 〈에덴의 용들:인간 지성의 진화에 대한 고찰 The Dragons of Eden: Speculations on the Evolution of Human Intelligence〉(1977)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80년 방영된 텔레비전 연속물 〈코스모스 Cosmos〉의 공동제작자이자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핵무기 경쟁이 인류에게 제기하는 위협을 깊이 인식했던 그는 1980년대 핵전쟁의 환경적 영향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여 그런 재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논문을 공동집필했다(1983). 이 논문은 핵전쟁이 일어나면 대기가 차가워지는 '핵겨울'이 닥쳐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데, 이런 시나리오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했지만 '핵겨울'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으며 이 심각한 문제가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상 브리테니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자문위원으로 마리너, 보이저, 바이킹, 갈릴레오, 패스파인더 화성 탐사선 등의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특히 천문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세계 60여 개국에 방송된 《코스모스》와 이를 책으로 만든 《코스모스》를 저술함으로서 세계적인 지성이 되었다. 그의 30여 권의 저서 중, 《에덴의 용들》은 퓰리처상을 받았고, SF소설인 《콘택트》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사이비 과학에 반대하였고, 종교를 믿지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1996년, NASA의 새로운 화성 탐사 계획과 영화 《콘택트》 제작에 참여하던 중, 두 계획이 모두 완성되기 전에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때 종교를 믿기를 권유하는 가족에게, 단지 자기는 알고 싶을 뿐이라고 하여 끝까지 무신론자로 남았다.
1997년, 패스파인더 화성 탐사선이 화성 착륙에 성공하자 NASA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그를 기려 패스파인더 호를 '칼 세이건 기념기지'로 명명했다. (이상 워키백과)
칼 세이건은 죽을 때에도 주위에서 종교 귀의하라는 말을 거부한, 자기 철학에 충실한 과학자였다고 합니다.
※ 위의 글 대부분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옮겼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