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양산시보 제622호. 2024년2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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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徐炳熙, 1867~1909) … 경남 일원서 활약한 항일 의병장
상북 출신 을사늑약에 의병 항전
창원서 일경에 붙잡혀 43세 순국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영호(榮浩), 자(字)는 경운(敬運)· 경원(敬元)이다. 좌삼리는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1887년부터 1891년까지 서울에서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1902년부터 양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했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쇠하자 이를 한탄해 1907년 2월 서울로 상경,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고 군대 해산이 이뤄진 다음인 1907년 11월에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7년 말 해산 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윤정의(尹政儀)와 제휴해 의병항전을 벌였다.
1908년 5월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양산군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혔다. 1908년 8월,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 2월부터 의병장이 되어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함안군 군북면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했으며,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8월에는 부대원 5명과 함께 창원군 양전면 호라리에 사는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을 거두고, 9월에는 재무주사 1명 처단, 11월에는 의령·고성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상인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본 경찰 2명에게 붙잡혀 순국했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고,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국권 상실을 막고자 의병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좌삼리 97)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멸실되고 생가터와 기념비가 남아 있다.
서병희 부대와 같은 후기 항일의병은 일제의 주권 강탈을 늦췄으며, 향후에 전개될 국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서병희 의병장이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보낸 격문= “무릇 동양 삼국은 예로부터 정립의 형세를 이루고 인종도 황인종이니, 위급하면 서로 구제하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이웃해 있는 본정일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라가 멸망하는 이 마당에 모두가 죽을 마음만 있고 사는 즐거움이 없는 것은 천성의 자연한 이치이니 이를 누가 제지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중략) 오직 우리 의병은 귀국에서는 폭도라고 명칭하나 여러 나라의 공론이 있으니 의거와 폭도는 우리가 변명하지 않아도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개과천선할 뜻이 없다면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일본 상인들은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억울하게 죽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 서병희 의병장에 대한 일제 경찰의 평가= “수비대, 헌병, 경찰의 엄중한 수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 3년에 걸쳐서 의병으로 활동한 까닭을 탐구하건대, 위태하면 무기는 흙 속에 매몰하고 부하는 해산해 양민을 가장하고 혹은 변장해 시장에서 행상을 하는 등 엄격한 눈을 피하는 수단이 교묘한 데 기인한 것 같다.” / 자료 정리 지원 시립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