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의 경기 제자인 김성태(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역임)는 자신이 중학 3학년이던 1940년에 김교신이 경기에 부임했다고 전한다. 김성태는 중학 1학년 때(1938년)만 해도 공부 시간이나 교사 앞에서는 일어를 썼지만, 학교 안에서 동무들끼리의 사적인 대화에서는 우리말이 용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것이 2학년 때(1939년)부터 학교 안에서 우리말을 쓰다가는 처벌을 받기 일쑤였고, 이 무렵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까지 일본어로 하라고 족쳐댔다고 전한다. 중일전쟁(1937년) 이후 악랄하게 고삐를 죄어가던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성태는 이런 시절에 김교신이 훨씬 편안할 사립학교 양정을 그만두고 공립인 경기로 온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김교신의 1940년 10월 24일 〈일기〉에는, 경기중학에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 일행이 방문해 학교 현관에 나치 기(旗)까지 걸고 환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독일은 1940년 6월 파리를 점령하고 페탱을 내세워 비시에 괴뢰정부를 수립했고,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건너가 프랑스에 남아있는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며 독일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의 남은 목표는 영국이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8월부터 영국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아시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지구 양쪽에서 추축국의 기세가 끝없이 올라가던 시절이었다.
김교신은 사립학교보다 감시가 심했던 공립학교에서, 게다가 강압의 고삐가 날로 조여들던 이 시기에 일본어 수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교묘하게 우리말을 사용하거나 사용하도록 유도했고, 학생들도 이를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신은 경기중에서 수업 중 중국지리를 가르치면서 ‘중경(重慶)’이 나오자 삼국시대 제갈량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면서 유명한 저의 ‘출사표’를 다음 시간까지 ‘우리말 또는 일본어로’ 암송해 올 것을 명했다.
심양 땅 이야기가 나오면 도연명을 말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외게 했는데, 한문은 일본식으로 읽으면 진미를 모르니 '우리말 한문'으로 외라고 권했다. 매달 《성서조선》 발행 때마다 총독부 경무국을 드나들면서 익힌 검열 회피의 교묘한 기법을 수업 시간에 활용한 것 아닐까.
김교신의 칠촌 조카이자 양정 25회 제자인 김이희(金俐熙)는 김교신이 수업 시간에 일어를 전적으로 안 쓰고 우리말을 더러 쓴 일로 6개월 만에 경기를 떠났다고 전한다. 구체적으로는 학생 중에 김교신의 우리말 사용에 항의하는 자가 있어 분연히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김교신은 그러지 않아도 식민지 관료를 희망하는 수재 학생들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김교신은 확고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다.
수업 중 왜 국어(일본어)를 쓰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학생에 맞서는 교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조선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경기중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등사범학교 선배로서 자신을 초빙한 이와무라 교장의 입장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할 수도 없었다. 이와무라는 1968년 서울에 와서 경기 제자들과 함께 20여 년 전을 돌아보면서, 김교신을 경기에 초빙한 경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김교신은 민족혼이 있는 분으로 진정한 교육자라는 소신에 지금도 변함이 없으나, 그 때 김교신을 영입해놓고 총독부, 고등경찰 등에 해명 다니느라고 혼났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교사에게 덤빈 학생의 내면을 상상해보자. 그들 또한 충성스러운 ‘황국 신민’을 자처하며 일본인의 시선을 내면화했을 것이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힘 있는 자의 편에 서는 영리한 처세법을 익혔으니 광복 후 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엘리트로 자랐을 것이다. 권력과 금력을 찾아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엘리트들 상당수가 이런 성장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