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임오군란의 국제적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임오군란은 조선 내부의 상쟁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 역학의 반영이기도 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은 결국 청 군대의 진주로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에 압송되어 갔습니다. 임오군란의 발생은 일본의 진출에서 시작하였으며, 그 귀결은 청의 종주권의 강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가 작용하였습니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할 때, 동아시아 국제상황은 미증유의 격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은 마침내 동아시아에까지 다다랐고, 일본은 수백년 봉건 무사들의 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적 군사국가로 탈바꿈하여 서구 열강과 경합에 나섰으며, 세계 최고(最古) 최대의 제국 중국은 열강들의 침탈에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국제역학의 거대한 파도는 고종의 치세를 덮쳤고, 결국 고종은 나라와 함께 침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제1,2차 아편전쟁으로 청 제국의 무기력은 증명되었습니다. 청은 여전히 만주를 그 영토로 하고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지만, 그 세력은 쇠잔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신흥 제국인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되었고, 청은 그의 권역을 지키려는 최후의 노력을 합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하여 강제 개항되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굴욕을 당했으나, 곧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고 아시아 대륙 진출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일본 조야에서는 일찍이 한국을 정벌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비등하였지만, 혁명 지도부는 먼저 대만과 류큐(琉球國: 오키나와)에서 청의 태세를 시험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영국과 세계 패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면서(이른바 ‘Greate Game’)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의 진출에 서둘렀습니다.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흑룡강) 이북의 지역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할양받아 마침내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면서 만주를 압박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은 먼저 북방에서 마주쳤습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문제입니다. 러시아와 일본은 1855년 최초의 조약을 맺어 사할린은 양국이 공동 관리, 쿠릴열도에 관하여는 홋카이도 근해 4개의 도서, 즉 에토로후 섬(択捉島), 쿠나시리 섬(国後島), 시코탄 섬(色丹島), 하보마이 군도(歯舞群島)는 일본의 영토로 하고, 그 위부터 캄차카 반도에 이르는 섬들은 러시아의 영토로 하는 데에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서 러시아와 일본 주민들의 혼거(混居)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언제 어떻게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빌미로 러시아가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습니다. 동북아 전체를 고려하면서 일본은 북방 문제에 대하여는 러시아에 조금 양보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75년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에 넘기고, 다만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이 영유하는 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지도 설명 : The Kuril Islands with Russian names. Borders of Shimoda Treaty (1855) and Treaty of St. Petersburg (1875) shown in red. Since 1945 all islands northeast of Hokkaido have been administered by Russia.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Kuril_Islands_dispute
그렇게 북방에서 러시아와의 분쟁의 소지를 정리한 일본은 바로 조선 진출을 서두릅니다. 1876년 일본은 윤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조선을 강제 개항시켜 한반도를 선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완고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지만, 새로운 시대 견문에 조금 더 밝았던 고종은 쇄국이 가능치 않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강화도조약의 조선 측 책임자 신헌은 일본의 근대 무력에 압도당하였습니다. 신헌의 보고를 들은 고종 또한 일본에 대적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나아가 조선의 종주국 청 역시 조선과 일본의 무력 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청은 고종에게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라며 수교를 권고하였습니다(송병기, 근대한중관계사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85, 14-23쪽).
일본은 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이 청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규정을 넣게 되었을까? 일본은 정말 조선과의 평등한 관계를 목적으로 하였을까? 주지하듯이 강화도조약은 평등한 조약이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 해안에 대한 측량권을 얻었고, 또 치외법권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조선을 자주국이라고 한 일본의 저의는 조선을 청의 종주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일본의 침탈의 장애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청은 조선에 일본과의 수교를 권하고, 일본의 진출을 묵인하였을까? 당시 청은 한반도에서 일본과 분쟁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청은 신장(新疆)의 이리(伊犁) 지역에서 러시아와 분쟁을 겪고, 또 버마(미얀마) 접경 지역에서 영국 부영사 마거리(A. R. Margary) 살해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1874년에 이미 일본 메이지 정부는 표류한 류큐인들의 살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타이완을 침략한 적도 있었습니다. 청의 ‘봉신국(封臣國: vassal state)’ 조선에서 전쟁이 나면 청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인데, 이는 당시 청에게 큰 부담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청의 의중을 타진하였습니다. 이른바 종주국과의 담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은 모리 아리노리(森 有礼)를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북경에 파견하였습니다. 당시 외교를 담당하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과 교섭케 하였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청은 일본과의 분쟁을 가능한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속방인 조선을 침점(侵占)하지 않는 한 일본과 조선의 수호 관계는 청이 그것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이양자, 감국대신 위안 스카이, 한울 아카데미 문고, 2020, 27쪽), 조선은 비록 청의 속방이긴 하나 여태껏 정교(政敎)와 금령(禁令)은 조선이 스스로 주관하고 중국이 전혀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통상 문제로 조선과 담판하는 일은 하등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청 외교의 실권자 리훙장(이홍장: 李鴻章)은 운요호 사건의 원인은 일본이 조선의 영해에 무단히 들어가 측량을 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일본에도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일본은 조선과 수호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나, 만약 조선을 침략한다면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도 하였습니다(쉬완민, 전홍석/진전바오 역, 중한관계사, 일조각, 2009, 41쪽).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속방인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력은 더 이상 강고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한반도 진출에서 앞서 가게 됩니다. 고종은 일본을 창구로 하여 개화에 나서게 됩니다.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수신사를 2차례 파견하였습니다.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청국 주일공사관 황준셴(황준헌: 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받아 옵니다. 청은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방략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황준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위협보다 러시아의 위협을 더 중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청의 입장에서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통해 오랑캐를 통제함)를 생각한 것이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대외 문호개방 정책 뜻하는 것이며, 그 수혜국은 일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친일 개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의 보수 유림은 결사 반대에 나섰습니다. 일찍이 최익현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에 반대하여 ‘지부복궐소(持斧伏闕疏: 도끼를 지고 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림)’를 올려 유배형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제 다시 김홍집이 가져 온 <조선책략>에 대하여는 영남 유생 이만손이 중심이 되어 ‘만인소(萬人疏: 만명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한편 중국 청나라에서도 일본에 대한 견제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1879년 일본이 류큐국(琉球國: 오키나와)을 최종 병합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류큐는 대외적으로는 청의 봉신국이었고, 일본은 대내적으로만 류큐를 지배하여 왔는데, 이제 류큐를 일본 영토로 공식화한 것입니다. 강화도조약에서 보인 중국의 미온적 태도가 일본을 야심을 고무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경악하였고, 리훙장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부관 마젠중(마건창: 馬建忠)과 해군 제독 딩루창(정여창: 丁汝昌)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수교를 서두르게 합니다. 그 결과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어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제국들과도 차례로 조약이 체결될 것이었습니다(이매뉴얼 쉬,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 상권, 까치, 2013, 413쪽).
이렇게 고종의 개화정책은 일본과 청의 상호 견제와 경쟁 속에 계속되었습니다. 새로운 통치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혁 개방을 지휘하게 하였습니다. 영선사(領選使)를 청에 파견하여 근대식 병기의 제조와 사용법을 배우게 하였고, 앞서 보았듯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근대 문물을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이 일본 유학을 하게 됩니다. 군제도 개편하여 신식 정예부대로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 교관으로 일본인 소위를 위촉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에 따른 구 병졸에 대한 차별이 임오군란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은 단지 조선 내정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임오군란은 위정척사의 연장선상에서 배일운동이기도 하였습니다. 별기군의 교관이 살해당하고, 공사관이 습격당하는 등 일본인 여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기화로 조선에 군사적으로 진출하고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청나라로서는 이를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청은 더욱 많은 군대를 신속하게 출병시켰으며, 임오군란의 구심력이었던 대원군을 제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를 공고히 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