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의 붉은 장미> - 우디 앨런
영화(예술)은 삶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가? 영화(예술)은 삶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경제는 불황에, 남편은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 세실리아의 유일한 도피처는 영화관이다. 좋아하는 영화를 극장에서 5번 연속으로 보고 있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톰이 스크린에서 실제로 튀어나온다. 예술이 삶에 더 깊숙이 침투하며 상호작용하는 순간이다. 톰은 오직 당신을 위해 스크린에서 뛰쳐나왔다며 고백을 하고, 데이트를 즐긴다. 톰은 세실리아에게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전쟁, 실직과 같은 암울한 상황이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영화 속 세계, 유토피아로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스크린 속 세상은 정말 돈이 넉넉하고 사랑과 음악과 탄산이 가득한 장소였다. 다음으론 세실리아에게 톰을 연기한 길이 찾아온다. 길 또한 세실리아와 사랑에 빠지며 할리우드로 떠나자고 한다. 유토피아로 가자는 두번째 제안이다. 세실리아는 선택해야 했다. 달콤한 허구의 유토피아인가, 미지의 유토피아인가? 그녀는 그저 현실이란 이유로 길을 선택하고, 길은 세실리아를 배신하고 혼자 떠난다. 현실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 같은 나날이 지나버리고 그녀는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온다.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엄청난 냉소 속 낭만이었다. 우디 앨런은 예술은 결국 현실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허나 그렇게 선택하는 현실엔 유토피아나 기적 같은 일 따윈 없음을, 전방위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결국 영화는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헤테로피아, 도피처 정도일 뿐이지만, 그정도면 되지 않냐고 또한 묻는다. 영화 속 모든 데이트 장면들은 가슴이 두근거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예술과 삶,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영화도둑일기>라는 책에서 시네필은 대학생때 가장 많이 태동하고, 졸업과 취직 후 자취를 감춘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실존의 고민이 앞설 때 예술이 삶에 낄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직업으로 삼아 삶과 결부시키는 방법 또한 있긴 하겠으나, 위에서 말했든 현실에 말처럼 되는 유토피아는 없다. 사실 고민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순리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말들이 그저 슬프게 느껴졌다. 현재 내 삶에서 영화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부하나 이 열정이 촛불의 심지같이 영원히 타오를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고로, 나는 실존과 존재 의의에 영화를 결부하기 위한 예술의 존재 의의에 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정성일 평론가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 말했다. 영화는 하나의 가상의 세계이자,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수많은 영화들의 방식들이 서로 반박하고 겹쳐질 때 이는 곧 한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되어 세상은 영화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술의 존재 의의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예술은 방향을 제시하고 끝없이 사유하게 하는 것으로 이 의미에 기여하며,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단순 오락성, 도피성의 예술도 물론 좋다. 허나 그 이상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나는 평생 이렇게 즐거운 것을 놓기 싫다.
<이창> - 알프레드 히치콕
<사짧필>과 유사한 관음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감독이 히치콕이다 보니 장르적 요소가 들어가긴 했으나, 창문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처음은 할 일이 없는 무료함에 시작했다지만 갈수록 추리문제를 해결하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파헤친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제프뿐만 아니라 리사 또한 사건 해결에 열의를 보여가는 모습을 보며 관음에 점점 중독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응당 해야한 일을 한 것이지 왜 오락적으로 비판하냐 반문할 수도 있다. 허나 중간에 강아지가 죽고 이웃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있다. 나는 <이창>이나 <사짧필>의 네모난 창문이 현대의 스마트폰 액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이창>을 볼 때, 1차원적으로 커튼도 치지 않았는데 이걸 관음이라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비유를 이해한다. 우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우리의 모습을 밖에 보여주게 된다. 물론 창문 앞 에서로 한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더더욱 문제이다. 우린 남의 전부를 보지 못하지만, 판단한다. 창문 앞에서 일부의 장면들만, 보고 싶은 대로 보며 도파민을 좇는다. 남에게 진실된 관심을 가지진 않는다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짧필>의 토멕의 사랑도 다시 보게 되었다. <이창>과 <사짧필>에는 단순히 보기만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벗어나 ‘스크린’ 속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제프는 몸싸움을 하다가 거의 다 나은 깁스를 더 하게 되었다. 이걸 남의 이야기를 오락적으로 소비하는 관음에 대한 철퇴라 본다면 토멕이 다시 보인다. 토멕은 마그다에게 전화를 걸어놓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우체국에 불러서도 그저 관찰한다. 관음을 넘어 현실에서의 교류에서조차 그녀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일종의 아이돌이나 우상같이 소비한다 느껴졌다. 그 이후의 일련의 토멕이 상처 입는 과정은 이에 대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비판과 같다 느껴졌다. 마그다의 사랑은 제쳐 두고서라도 말이다.
잠시 언급했지만 ‘본다’라는 것은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과 동치될 수 있기에, 영화속에서의 ‘본다’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여지가 많아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영화 속에서 네모의 프레임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 자연스레 <이창>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