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의 옷차림
조선시대 선비의 옷차림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선비 정신인 기개와 검약, 품위 있고 단아한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선비의 옷차림은 풍속화나 초상화에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쉽게 알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회화 가운데 선비의 모습을 찾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조선전기의 인물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가 있고 특히 안동 지역의 인물들인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와 의성김씨 문중의 김진(金璡, 1500~1582)의 초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선비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옷차림에 대한 기록으로는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단편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복식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는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에서 형태는 물론, 옷감과 큼직한 정도를 알 수 있다. 초상화에 보이는 조선시대 인물은 크게 관복(官服)을 입은 모습과, 평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 평상복에는 유학자의 법복(法服)인 심의(深衣)를 입은 모습과 편복용 포(袍)종류를 입은 모습으로 구별된다. 조선 전기나 후기의 차림새의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모자와 옷 등이 달라졌을 뿐이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옷의 종류가 크게 변화되므로 이 시기를 기준으로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평상복에서 예복을 살펴보되, 머리를 정리하고 품위를 나타내는 모자 종류와 입는 옷, 신발을 포함한 장신구 등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I. 조선전기 복식
의성김씨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학봉집(鶴峯集)』에는 임진왜란 전 당시 남자 복식류에 정자관과 동파관·종립·사립·죽립 등의 관모가 있고, 심의·도포·직령(直領)·철릭·방의 등의 옷이 있었으며, 홍금(紅錦)이나 청금(靑錦) 등으로 만든 금대(錦帶)와 홍색과 흑색의 실 띠인 도대(絛帶)가 연거복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대략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연거 시 착용하였던 옷들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남자들은 기본 차림으로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은 후 종아리에는 행전(行纏)을 쳤다. 그 위에 방의나 주의(周衣)·액주름[腋注音]·철릭·직령·답호·단령 같은 상의류를 입었다. 이 가운데 방의나 주의와 액주름 같은 옷은 저고리 위에 덧입는 상의류의 일종이며, 철릭·직령·답호·단령 등은 상의류보다 길이가 좀 더 길고 옷의 부피도 풍성한 포류(袍類)이다. 조선 전기의 포류는 크고 풍성하며, 깃에도 깃 2개를 연결한 듯한 장식 바느질선이 있는 이중 깃이 많다. 솜을 넣은 옷은 조선 후기보다 두껍다. 버선을 신었으며, 바지 위에 행전을 하여 외출 시에는 몸을 간편하게 하였다.
1. 관모류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머리에 쓰는 모자는 옷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모자를 쓰지 않고 맨상투 바람에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혼인을 하지 않은 총각은 머리를 땋아 내렸지만 관례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루고 어른이 된 성인 남자는 상투를 튼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모자는 유행의 변화도 어느 것보다 빨랐으며, 중국에 가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관모를 수입해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후 이마에는 관자를 단 말총 망건을 두르고 머리를 더욱 정갈하게 하고 남자 어른의 상징인 모자를 쓸 준비를 한다. 망건에 장식하는 관자라는 것은 망건에 달린 당줄을 걸어서 머리에 꼭 조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인데, 눈 옆의 관자라는 부분에 달리게 된다. 관자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에 차이가 있었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옥과 금으로 만든 관자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각 장식이 많은 것 보다 단순한 것을 신분 높은 사람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여러 형태의 관자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1) 갓갓은 남자들이 외출할 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모자였다. 직령이나 철릭·답호 등과 같은 옷에 갓을 쓰고 외출을 하였다. 갓은 머리 위에 올라가는 모자 부분과 햇볕을 가려주는 테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에는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 모자를 만들었지만 점차 말갈기 털로 만든 말총갓이 유행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곱게 짠 갓을 쓸 수 있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좋은 갓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제한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갓은 모자 부분의 끝이 둥근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모자 끝이 평평한 것과는 좀 다르다. <그림 1>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로 토홍색 직령으로 짐작되는 포에 모자 끝이 둥근 갓을 쓰고 있다. <그림 2>는 1537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 기간 중에 그렸다고 하는 농암 이현보의 초상화인데 갓을 쓰고 토홍색 단령을 입고 있다. 관리로서 단령을 입을 때는 본래 사모(紗帽)라는 관모를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외직(外職)인 경우에는 단령에 갓을 쓰기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그림 3>에서 볼 수 있듯이, 의성김씨 종가에는 그보다 35년 뒤인 1572년에 그린 것이라고 하는 김진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이현보의 초상화에서보다 좀 더 높아진 갓을 볼 수 있다. 초록색의 직령을 입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초상화에서 갓을 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갓의 모양은 남성들의 유행이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는 아이템이었던 만큼 각 시대의 유행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안동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16세기 말의 갓 유물도 볼 수 있다.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유품이라고 하는 갓이 한 점 전시되어 있다. 끝이 뾰족한 형태로 꽤 높은 편인데 김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갓과 흡사하다. 갓에 달린 갓끈 장식은 남자들이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대나무에서부터 마노나 산호, 호박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시 하회마을의 충효당에서 멋진 갓끈 유물들을 만날 수 있으며, 당시 할아버지들이 어떤 사치를 즐기셨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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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김시습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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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농암 이현보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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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김진 초상화 | 2) 복건심의와 함께 쓰는 모자로, 보통 검정색 비단으로 만든다. 한 폭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폭건(幅巾)이라고 한다. <그림 4>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천 원짜리 지폐에서 이 모자를 볼 수 있다. 바로 이황 할아버지가 머리에 쓰고 계신 것이 복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집(退溪集)』에는 이런 글이 있다. 김취려가 퇴계에게 복건과 심의를 보내왔는데 복건이 승건 같다고 하면서 정자관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퇴계는 내내 복건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돌 잔치하는 아기들이 색동두루마기를 입고 이것을 쓰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쓰는 모자 종류였고, 특히 유학자들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모자였다. 앞이마 쪽에 맞주름을 잡고, 귀 닿는 정도에 양쪽으로 끈을 달아 머리 뒤쪽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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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있는 이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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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김흠조 묘 출토 소모자 (영주 소수박물관 소장) | 3) 소모자(小帽子)평상복과 함께 사용되었던 모자이다. 보통 비단 6쪽을 이어 모자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아래는 약 12~15cm의 테를 만들어 연결하거나, 직사각형 옷감을 연결하여 양쪽 모서리만 접어 넣어 바느질한 형태도 있다. 계절에 따라 솜을 넣은 모자도 있다. <그림 5>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장인 판결사 김흠조(金欽祖, 1462~1528) 묘에서 출토된 소모자이다. 안동대학교 박물관 전시실에서 고성이씨 이응태(李應台, 1556~1586) 묘에서 출토된 소모자를 만날 수 있다.
2. 장신구
1) 허리띠조선 전기에 출토되는 허리띠의 특징은 명주 등의 옷감으로 만든 것과 비단실로 끈목을 짜고, 그 아래에는 금종이나 운모 등을 넣은 술을 장식한 실띠가 있다. 문헌에는 도아(絛兒) 또는 광다회대(廣多會帶)라고 한다. <그림 6>은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응태 묘 출토 광다회대이다. 또 경상북도 영주시 소장의 김흠조 묘에서 출토된 광다회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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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광다회대(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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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염낭(이응태 묘 출토) | 2) 주머니조선 전기 남자의 장신구 가운데 주머니가 있다. 주머니 염낭은 주로 둥근 모양으로 ‘두루주머니’라고도 하는데, <그림 7>은 경상북도 안동의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비단으로 만든 염낭이다. 명주로 만든 허리띠에 달려 있었는데, 술이 달린 매듭 장식이 있다. 출토 당시 주머니 속에는 죽은 이가 누구인지 그 비밀을 풀어 줄 편지 10여 장과 빗이 들어 있었다.3) 신발기록에는 피초혜(皮草鞋)·삽혜(靸鞋)·초혜(草鞋)·승혜(繩鞋) 등 다양한 명칭이 보인다. 특히 안동대학교 박물관에는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그림 8>의 특별한 미투리를 소장하고 있다. 이는 병든 31세의 남편을 위해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짠 미투리이다. 그리고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큼직한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9>의 이 가죽신발은 분투(分套)라고 하는 것인데 비가 오는 날 신발이 젖지 않도록, 또 추운 날 발이 시리지 않도록 신발 위에 덧신는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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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이응태 묘 출토 미투리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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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분투 (충효당 소장) |
3. 복식
1) 저고리와 두루마기조선시대 전기의 남자 저고리는 오늘날의 남자 저고리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착용하면 엉덩이를 가리는 정도로, 남자들의 긴 저고리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겹저고리, 솜저고리, 누비저고리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속옷 위에 저고리 대용으로 입었던 평상복이었다.2) 바지조선 전기의 남자 바지는 오늘날 남자 바지와는 형태가 다르다. 요즈음 바지는 밑이 막힌 사폭바지라고 하는 것을 입는데, 그 당시에는 밑이 막혀 있는 것도 있고 밑이 트인 것도 있다. 당시 남자는 여자와 같은 바지를 입었다. 입는 순서는 밑이 막힌 바지를 먼저 입고 그 위에 밑 트인 바지를 입었다. <그림 10>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밑이 트인 바지이며, <그림 11>은 밑이 막힌 바지이다. 바지 길이가 짧은 반바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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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밑트인 바지(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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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밑막힌 바지(이응태 묘 출토) | 3) 버선과 행전바지 위에 면이나 삼베로 만든 버선을 신고 행전을 착용하여 활동을 간편하게 하였다. <그림 12>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제비행전’이다. 요즈음의 고리바지처럼 발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인데 이 유물 역시 안동대학교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4) 방의조선 전기에는 네모난 깃인 방령(方領)이 달린 옷이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방령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록에 방의라는 것이 있으니 같은 옷으로 짐작된다. 길이는 110cm 내외로 대체로 앞이 길고 뒤가 짧은 전장후단형이 많다. 그리고 <그림 13>에서 볼 수 있듯이, 비단 중에서도 무늬가 있는 좋은 옷감을 흔히 사용하였다. 포 위에 덧입어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레이어드룩’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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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제비행전(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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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방령(석주선기념박물간 소장) | 5) 답호곧은 깃의 반소매 형태의 포이다. 직령과 옷 모양은 같으나 소매길이만 짧다. 철릭 위에 겹쳐 입으며 위에는 단령을 덧입기도 한다. <그림 14>는 김흠조 묘에서 출토된 답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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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답호 (김흠조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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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직령 (이응태 묘 출토) | 6) 직령답호와 같은 모양으로 단지 소매만 길다. 당시 남자들의 대표적인 외출복이었다. 김진의 초상화에 보이는 초록색 포가 직령이다. 깃에 장식 선을 한 번 더 바느질한 이중 깃이 달려 있으며, 깃의 반 정도 되는 너비의 동정이 달려 있다. 직령의 옆선에는 큰 무(길의 옆에 붙은 자락)가 달리지만 옆선이 트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입은 옷이 보인다. <그림 15>의 유물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직령이다. 이 유물 역시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7) 철릭조선시대 전기 남자 무덤에서 출토되는 옷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철릭은 조선 전기 남자들의 평상복이었다.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이 옷은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된 옷으로 요즈음의 주름이 잡힌 여자들의 원피스와 비슷하지만 남자들이 입었던 옷이다. 0.2cm 정도로 잡은 철릭의 주름은 섬세함의 극치를 보인다고 할 수 있으며, 소매도 긴 것이 있지만 활쏘기 편하도록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탈착식 소매가 달린 것도 있다. <그림 16>는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철릭이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인 변수(邊脩, 1447~1524) 묘의 철릭처럼 허리에 여러 줄의 선 장식이 있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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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철릭(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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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액주름(이응태 묘 출토) | 8) 액주름겨드랑이에 주름이 잡혀 있어 ‘액주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길이는 일반 포보다는 약간 짧다.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림 17>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응태 묘의 액주름이다.9) 배자(背子)남자 웃옷의 일종으로, 저고리나 포 위에 입는 간편복으로 소매가 없는 우리나라 조끼의 일종이다. 어깨는 붙어 있으나, 겨드랑이 아래는 트여 있으며, 앞이 뒤보다 짧은 것이 많다. 보통 고름이나 매듭단추로 여민다.10) 단령(團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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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이응태 묘 단령 | 단령은 관리들의 옷으로 깃이 둥근 모양[團領]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전기 중종 이후에는 두 가지 색상의 단령이 있었다. <그림 2>의 농암 이현보의 초상화에 보이는 붉은 색 단령은 관리가 집무 시에 입는 옷인데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띠고 있다. 그리고 안동 정상동에 있던 이응태 묘에서는 <그림 18>의 아청색 단령이 출토되었다. 아청색 단령은 흑단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단령은 세종 때에 만들어진 제도에 의한 것으로, 일종의 예복이며 관리들은 왕과 만나는 조회에 이 옷을 입었다. 관직이 있는 자는 결혼할 때 공복(公服)을 입도록 규정하였으나 관직이 없는 자가 혼례를 치룰 때는 흑단령을 입도록 하였다. 대신 관원들이 사용하는 사모와 품대 대신에 검은 갓을 쓰고 실띠[絲帶]를 둘렀다.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혼례에 허용하는 것을 섭성(攝盛)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제(私祭) 때에도 예복의 일종이었던 흑단령을 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II. 조선후기 복식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 전기 선비의 일반 복식은 바지·저고리·철릭·직령·답호·단령·배자 등이다. 이러한 옷들은 17세기 임진왜란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전기에 평상복과 융복(戎服)으로 입혔던 철릭은 임진왜란과 청과의 전쟁 동안 공복으로 착용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으나 전쟁이 끝난 후로는 점차 문무관의 융복과 무관복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또한 단령 안에 입었던 답호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소매가 긴 직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직령은 평상복으로도 입혀졌으나 도포라는 옷이 사대부의 편복용 포로 보편화되면서 상례에서 사용되는 등 그 용도가 전기에 비해 다소 위축되었다. 남자의 바지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밑 트인 바지와 밑 막힌 바지로 여자 바지와 차이가 없었으나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현재의 한복 바지인 큰사폭과 작은사폭, 그리고 마루폭으로 구성된 사폭바지로 바뀐다. 이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 군인들의 바지를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외 도포가 유생들을 중심으로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옷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포에 대한 기록은 이미 명종 때 보이고 유물도 16세기 후기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더욱 보편적으로 착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자들은 착용할 수 없는 옷이었다. 1653년에 사망한 경기도 포천의 김확(金穫) 묘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도포가 다량 출토되었다. 기록에서도 홑도포 외에 겹도포가 등장하며 색상도 다홍색·초록색·아청색 등 다양한 색상의 도포를 확인할 수 있다. 예복으로 입히는 흰색, 즉 소색의 모시 도포만을 아는 이들에게는 좀 충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조 대 이후 도포의 색상도 청색과 백색이 즐겨 자리하게 되었다. 길복으로는 청색 도포를 입도록 하였다. 예복이 되면서 겹도포는 점차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홑도포가 남게 되었다. 지금도 안동에서는 문중의 제사를 지낼 때 갓에 도포를 입은 어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사대부의 초상화 중에는 심의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전기보다는 착용 사례가 증가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착용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심의를 잘 입지 않는다는 기록도 적지 않다.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과 전래되어 오는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선비의 복식은 소박하고 검약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옷감은 소박하나, 안감은 비단을 사용하여 일반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서민들을 배려한 흔적도 보인다. 선비의 장신구로는 안경·허리띠·부채 등이 있으며, 신발은 흑혜(黑鞋)나 태사혜·운혜 등을 즐겨 신었다.
1. 관모류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일상복과 더불어 관모류가 사용되었다. 선비들은 집에 있을 때에도 상투에 망건을 갖추고 반드시 관모류를 착용하였다. 조선 후기 초상화, 풍속화에 보이는 관모류에는 탕건·상투관·복건·갓·사방건·와룡관·정자관·유건 등이 있으며, 그 외 관모류의 장식품으로 관자·동곳·풍잠·옥로·갓끈 등이 있다.1) 머리 장식품조선 후기 남성들의 머리 장식품은 조선 전기에 비해 다양해진다. 우선 조선 전기에는 보이지 않던 풍잠이 망건의 앞쪽에 다는 장식품으로 등장하였다. 갓이나 관이 걸쳐져 흘러내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玳瑁)나 호박 등으로 만들었다. 1911년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황현(黃玹, 1855~1910) 초상화에 희미하게 정자관(程子冠) 아래 풍잠이 착용된 망건이 보인다.그리고 동곳이라는 것이 있다. 동곳은 상투를 고정하는 작은 비녀이다. 또 상투를 장식하는 작은 관으로 상투관이라는 것이 있다. 헝겊에 흑칠을 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2) 탕건말총으로 짠 것으로 망건 위에 쓰는 간단한 모자이다. 앞은 약간 수그러져 있고, 뒤는 높게 턱이 진 형태이다. 집에서는 평상복에 탕건만 사용하기도 하고, 갓이나 사모의 받침 모자로 착용하기도 한다. 김득신의 「투전」 속에는 탕건을 쓴 남자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 <그림 19>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사대부 편복 초상화인데, 높은 탕건 아래로 풍잠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다.3) 복건선비의 최고 예복으로 생각했던 심의와 주로 함께 사용되었다. <그림 20>에서 볼 수 있듯이 김득신의 「노상알현」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에서 갓에 복건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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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 풍잠과 탕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9,p.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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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복건에 갓 쓴 모습 (중앙일보사,풍속화,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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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갓끈 (이와여자대학교 박물관1999,p.85) | 4) 갓과 갓끈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갓의 모자 부분은 높아지고 테는 넓어졌다. 그러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집정 이후 옷차림의 간소화 정책에 따라 모자 부분은 낮아지고 테는 좁아졌다. 갓은 보통 말총으로 만든 후 베를 바르고 그 위에 검은 옻칠을 하여 사용하였다. 비가 오면 형태가 망가져서 소매 속에는 항상 우산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갈모라고 하는 모자를 가지고 다녔다. 갓에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갓끈을 다는데, 직위에 따라 옥·마노(瑪瑙)·산호 등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대나무·구슬·옷감 등도 사용되었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갓끈을 <그림 21>에서 볼 수 있다.5) 방건네모난 모양으로 생긴 관모의 일종으로, 말총으로 짜거나 옷감에 흑칠을 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편복 포와 함께 착용하였다. <그림 22>은 김홍도의 「서당도」에 보이는 훈장의 모습으로 방건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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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 방건 (중앙일보사, 풍속화,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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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 와룡관(경기도 박물관,먼나라꼬레,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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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4. 정자관 (중앙일보사,인물화,1993) | 6) 와룡관삼국지의 제갈량이 평소에 와룡관을 즐겨 썼기 때문에 와룡 선생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제갈건’이라고도 불리었다. 포류에 함께 착용하는 관모의 일종이다. <그림 23>은 이준용(1870~1917)의 사진인데, 망건과 탕건 위에 와룡관을 착용하고 있다. 관이 매우 성글어서 뒤에 있는 병풍의 그림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7) 정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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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유건 | 정자관은 송나라의 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즐겨 썼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말총으로 짜며 중심에 산(山)형이 온다. 2층, 3층 관이 있다. <그림 24>은 정자관에 심의를 입은 황현의 모습이다. 8) 유건유생들이 많이 착용하였던 건의 일종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검정색 베를 양쪽으로 접어 윗부분을 꺾어 만든 것이다. 지금도 <그림 25>에서 보이는 것처럼, 안동지역에서는 흔히 향사 등의 행사에서 유건 쓰신 어른을 만날 수 있다.
2. 신발류
신발은 주로 태사혜나 흑혜를 신었다. 또 비가 올 때는 징신이나 나막신 등을 신었으며 바지 위는 행전과 버선이 있다.
1) 운혜와 태사혜, 흑혜 운혜나 태사혜는 남녀가 함께 신었던 신발의 명칭이다. 정선(鄭歚, 1676~1759)이 그린 「독서여한(讀書餘暇)」에서는 남자의 운혜(雲鞋)가 묘사되어 있다. 신코와 발등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방건(方巾)을 쓰고 흰 포를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든 여유 있는 모습에서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를 만날 수 있다. <그림 23> 역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이안의 초상화인데 심의에 운혜를 신고 있다. 태사혜는 가죽이나 비단으로 몸체를 만들고, 그 위를 비단으로 쌌다. 신의 코와 뒤축에 구름의 귀 모양 같은 문양이 있는데, 이 문양을 태사문(太史紋)이라고 한다. 풍속화와 유물에 보이는 태사혜는 검정색이나 녹색 계통이 많다. 이 신발은 날씨가 맑은 날에 신는다고 하여 마른신이라고도 하였다. 흑혜는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주로 신는 신의 일종으로, 검정색 가죽으로 만들었다. 심의와 함께 신는데, 발등에 가는 흰색 가죽으로 묶는 끈이 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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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운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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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7. 태사혜 (단국대학교 2004,p.19) |
2) 버선과 행전 버선은 현재 버선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요즈음의 버선은 수눅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으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수눅선이 곧다는 것이 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전은 바지 위로 종아리 부분에 착용하는 것으로 무릎 아래에서 끈을 매서 조인다. 바지자락의 펄럭임을 막는 수단으로 먼 길을 간다든지 간편함이 요구될 경우에는 반드시 행전을 둘렀다. 행전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이는 「춘향가」에서 확인된다. 하나는 ‘제비행전’이라는 것인데 요즈음의 고리바지처럼 발바닥 아래로 끈이 돌아가도록 아랫부분이 뾰족하게 생기고 그 끝에 끈이 고리처럼 달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행전’이라는 것으로 원통형으로 생긴 것인데 행전으로는 보편화되어 있는 형태이다. 행전의 윗부분 종아리 뒤쪽에는 발을 넣을 수 있게 트임이 있으며, 트임의 위쪽 양끝에는 묶을 수 있는 끈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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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제비행전 (경기도박물관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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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9. 통행전 (이대박물관 1995,p.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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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 제비행전 착장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1999) |
3. 장신구
1) 주머니양복이 우리 옷에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 옷에는 양복처럼 옷에 부착된 주머니가 없었다. 그러므로 주머니는 허리에 차고 돈이나 기타 물건들을 담아 가지고 다녔다. 형태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림 31>처럼 귀가 뾰족한 ‘귀주머니’와 <그림 32>처럼 둥근 모양의 ‘염낭’이라고도 하는 ‘두루주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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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귀주머니 (이대박물관 1995,p.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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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두루주머니 (국립중앙박물관 2002,p.209) | 여자나 어린이용 주머니에는 특히 자수 장식을 많이 하였으나 남자의 것에는 장식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유물로는 장식적인 것이 많이 남아 있으나 풍속화에 나타나는 남자 주머니는 장식 없는 수수한 것이 많이 보인다. 2) 안경안경은 우리나라에는 17세기경 전래되었다고 하며, 정조가 특히 안경을 꼈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원군 때는 안경을 사용하지 않게 하기 위한 금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 초상화나 민화 중에는 심의를 입은 선비가 안경을 착용하거나, 서안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 있어 안경의 착용이 널리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 33>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안경은 둥근 모양이며 대모(玳瑁) 테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안경은 가운데를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안경을 담아 두는 안경집은 상어 껍질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가죽으로 만든 것 등이 많으며 간혹 옷감에 글귀를 수놓은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신구에서도 선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구한 말 당시 유행하던 대모 테의 안경을 <그림 34>의 황현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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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 안경집과 안경 (예나르 2002,p.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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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 황현의 초상화(일부) (중앙일보사, 1993,p.142) | 3) 허리띠허리띠는 옷감을 만든 허리띠와 비단 실로 짠 도아(絛兒)가 있다. 도아는 사대(絲帶), 술띠, 실띠라고도 하는데 띠의 양끝에 술이 달렸다. 조선시대 후기의 것은 주로 딸기술 위에 금사로 가락지매듭으로 장식된 것이 많다. <그림 35>처럼 딸기술을 장식하여 호패를 달았던 호패끈도 있다. 도아의 단면의 모양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그림 36>에서 볼 수 있듯이, 둥글고 가는 것을 세조대(細絛帶)라고 하고 납작하고 넓은 것을 광다회대(廣多會帶)라고 하였다. 그리고 벼슬에 따라 띠의 색깔을 달리 하였다. 신분이 높은 자는 주로 홍색이나 자색을, 그리고 신분이 낮은 자는 청색이나 녹색을, 국상이나 집안의 상 중에는 흰색의 띠를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래되고 있는 유물은 다양한 색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 사용하는 허리띠는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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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 호패끈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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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6. 세조대와 광다회대 (단국대학교박물관 2004,p.187) | 4) 부채와 선추(扇錘)선비들의 장신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부채를 들 수 있다. 겨울철에도 부채 들기를 좋아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인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부채에는 선추를 다는데, 이는 벼슬하지 않은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선추는 선추 장식의 몸에 해당하는 주체와 매듭장식 그리고 술이 있다. 선추의 주체는 옥·비취·호박·상아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조각하고 장식하였으며, 때로는 나침반, 이쑤시개 같은 실용적인 물건이 사용되기도 한다. 매듭은 주로 동심결 매듭이 사용되며, 술은 방울술이나 딸기술이 사용되었다. <그림 37>과 같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5) 장도세조 대에 주머니와 함께 장도도 함께 차고 다녔는데, 장도는 은으로 만들었으며, 젓가락도 함께 들어 있어 실용성을 겸한 장신구였다. <그림 38>은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은장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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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7. 선추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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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8. 장도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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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식
선 후기 선비의 복식은 저고리, 바지 위에 포류를 입었다. 포류는 임진왜란 이후 다양하게 발전되어, 창의류(소창의·중치막·대창의·학창의), 심의, 도포, 주의(두루마기·광수주의), 등이 있다. 포류 위에 입는 옷으로 답호·전복이 있으며, 평상시에 저고리 위에 또는 포 위에 입는 간편복으로 배자가 있다.1. 기본적인 저고리·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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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9. 밑트인 사폭바지 | 저고리는 조선 전기와 후기를 통해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속옷에 해당하는 적삼(赤衫)이나 한삼(汗衫)을 입고, 그 위에는 저고리, 또는 소창의라고 하는 장유(長襦)를 입고 그 위에 다시 중치막(中致莫) 등의 포 종류를 입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것은 남자 바지이다. 조선 후기에 오늘날의 남자 바지와 같은 사폭이 있는 바지로 정착되었다. 사폭바지 중에는 <그림 39>의 이익정 묘의 바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밑이 트인 바지도 있다.2. 포류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 남자들의 외출복인 포가 매우 다양해졌다. 포류는 대부분 깃 모양이 곧은 깃이기 때문에 앞에서 보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포의 구분은 무(길의 옆에 붙은 자락)의 유무와 트임, 그리고 옷의 가장자리에 선이 있는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1) 도포선비의 대표적인 옷으로 알려진 도포는 16세기에 기록과 유물이 나타나며,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더욱 보편적으로 입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40>는 안동댐 건설 중 이장한 홍극가(洪克家, ?~1670)의 묘에서 출토된 도포이다. 중요민속자료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도포는 현재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옷의 형태는 <그림 41>에서 볼 수 있듯이, 앞자락의 옆 무가 뒷자락 안으로 들어가 고정된 형이다. 몸체에 붙은 안자락은 긴 트임이 있어, 말을 탈 때나 자리에 앉을 때 구김을 방지할 수 있어 선비로서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옷이다. 조선 말기 이후에는 옥색이나 흰색의 홑도포가 많지만, 17세기의 출토 복식에서 보이는 도포는 자주색이나 남색, 초록색 같은 짙은 색상의 겹도포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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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0. 홍극가 묘 도포 (1670년, 안동대학교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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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도포 펼친 상태 (안동대학교 박물관) | 2) 심의심의는 <그림 42>에서 볼 수 있듯이, 선비들이 즐겨 입었던 예복이었다. <그림 43>에서 볼 수 있는 심의는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 조선 후기에는 수의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저고리[衣]와 치마[裳]가 붙은 포 형태의 옷으로, 하늘과 땅을 상징하며, 치마는 12폭으로 1년을 상징한다고 한다. 옛날부터 심의 형태와 의미에 관한 많은 철학적인 해석이 있었다. 흰색의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만든 홑옷으로 깃·수구·도련에는 검정색 선(襈)을 둘렀다. 깃은 곧은 깃이 많으나, 네모난 깃[方領]도 있다. 머리에는 복건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자관이나 방건, 심지어는 모관(毛冠)을 쓴 경우도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허리에는 검정색 선을 두른 대대(大帶)를 두르고 그 위에 오색의 비단실로 짠 ‘채조’라고 하는 허리띠를 둘렀다. 신은 흑혜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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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2. 심의 (이화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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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3. 심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3) 학창의곧은 깃에 섶선과 밑단, 수구 등에 흑선을 두른 흰색이나 남색의 포이다. 옷의 형태는 대창의와 같으나, 도련과 수구(소매 끝)에 검정색 선이 둘러져 있다. 말기에는 흰색은 제복 받침옷으로 중단 대신 착용되었으며, 남색은 조복 아래의 받침옷으로 착용되었다. 4) 창의대창의라고도 하는데 <그림 44>처럼 소매가 넓고, 뒷길에 트임이 있는 옷이다. 관리의 관복 받침옷으로도 입혔으며 선비의 외출복으로 착용되었다. 허리에는 세조대 등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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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4. 창의(부벽루,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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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5. 중치막 (신윤복<溪邊佳話>) | 5) 중치막옆이 트인 옷으로 소매가 넓다. 선비의 간편한 외출복으로 착용되었는데 허리에는 띠를 두르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히 보인다. 혜원의 풍속화나 단원의 풍속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또한 예복을 입을 때 받침옷으로 착용하기도 했으며, <그림 45>처럼 활을 쏠 때도 입었다.6) 소창의깃은 곧은 깃이며, 소매는 좁고, 허리 아래부터 트인 옷이다. 조선시대 초기, 중기에는 남자들의 저고리였으나, 후기에 와서 간편복으로 집에서 일을 할 때와 같은 용도에 사용되었다. <그림 46>처럼 긴 고름이 달려서 한 번 몸통을 감아 고름을 묶는 유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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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6. 소창의(안동대박물관소장 2005) | 7) 주의(周衣)(1)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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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7. 두루마기 (1639년, 수덕사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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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8. 두루마기(개화기) | <그림 47>에서 볼 수 있듯이, 두루마기는 소매는 좁고 곧은 깃에 무가 있으나 트임이 없는 옷이다. 두루 막혀 있다는 것에서 ‘두루마기’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894년 갑오의제 개혁 때, 두루마기에 답호를 입는 차림이 궁중 출입을 하는 예복으로 되었고, <그림 48>에서 볼 수 있듯이, 개화기 이후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남자들의 외출복으로 사용된다. (2) 광수주의(廣袖周衣)일반적으로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은 옷이지만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는 광수주의라고 하였다. 곧 넓고 큰 소매의 두루마기이다. 경기도 하남 출토의 의원군 이혁(1664~1722)의 묘에서도 주(紬)로 만든 <그림 49>의 광수주의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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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9. 광수주의(1722년, 경기도박물관 소장) | 8) 답호와 전복조선 후기의 답호와 전복은 소매가 없는 긴 상의로 포류 위에 덧입는 옷이었다. 조선 전기의 답호는 철릭 위에 덧입는 옷으로, 직령과 같은 형태의 반소매 옷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탐릉군 묘에서 출토된 <그림 50>의 답호를 보면 소매 없는 옷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19세기 후반에는 답호와 전복의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본래는 깃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사용되던 명칭이 아닌가 짐작된다. 1894년 갑오의제 개혁 때는 궁중을 출입하는 예복으로 두루마기와 답호, <그림 51>과 같은 전복이 입혀졌으나, 그 다음 해부터는 더욱 간소화되어 두루마기만 입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예복으로 사용된 답호, 전복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돌장이 옷에서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입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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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0. 답호(1731년, 석주선기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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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 전복(김병의 일가 유물) | 6) 마고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이다. 마고자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시에 입고 온 청나라의 마괘(馬褂)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입혀졌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청나라의 마괘는 장포(長袍) 위에 입는 옷으로, 마고자가 전래된 즈음의 사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두루마기 위에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52>은 이연응(李沇應, 1818~1879)의 묘에서 출토된 대금형 상의로 마고자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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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2. 대금형 상의 (경기도박물관 소장) | 7) 배자와 조끼배자는 저고리나 포 위에 입는 조끼로 보통 앞이 뒤 보다 짧은 것이 많다. 깃은 없거나 원삼 형 깃, 또는 사각형 깃 모양이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는 트여 있어서 앞뒤를 끈으로 연결하거나, 매듭단추로 앞뒤를 여몄다. 김홍도의 「설야연적도」에는 <그림 53>처럼 포 종류 위에 배자를 입은 사람이 보인다. <그림 54>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후기의 배자 유물이다.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조끼는 답호나 배자이나, 조선시대 말기 양복이 들어오면서, 남자의 정장인 베스트(vest)가 한복 저고리 위에 입혀지게 되었다. 조끼는 주머니가 달려 있어 실용성에서 많이 입혀졌다. <그림 55>의 조끼는 영친왕이 어렸을 때 입었던 조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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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3. 배자 (설야연적도, 김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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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4. 배자 (석주선기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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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5. 조끼 (고궁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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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안동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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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 | 2010년도 6기 수료식 사진 20
조선시대 선비의 옷차림
조선시대 선비의 옷차림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선비 정신인 기개와 검약, 품위 있고 단아한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선비의 옷차림은 풍속화나 초상화에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쉽게 알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회화 가운데 선비의 모습을 찾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조선전기의 인물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가 있고 특히 안동 지역의 인물들인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와 의성김씨 문중의 김진(金璡, 1500~1582)의 초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선비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옷차림에 대한 기록으로는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단편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복식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는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에서 형태는 물론, 옷감과 큼직한 정도를 알 수 있다. 초상화에 보이는 조선시대 인물은 크게 관복(官服)을 입은 모습과, 평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 평상복에는 유학자의 법복(法服)인 심의(深衣)를 입은 모습과 편복용 포(袍)종류를 입은 모습으로 구별된다. 조선 전기나 후기의 차림새의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모자와 옷 등이 달라졌을 뿐이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옷의 종류가 크게 변화되므로 이 시기를 기준으로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평상복에서 예복을 살펴보되, 머리를 정리하고 품위를 나타내는 모자 종류와 입는 옷, 신발을 포함한 장신구 등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I. 조선전기 복식
의성김씨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학봉집(鶴峯集)』에는 임진왜란 전 당시 남자 복식류에 정자관과 동파관·종립·사립·죽립 등의 관모가 있고, 심의·도포·직령(直領)·철릭·방의 등의 옷이 있었으며, 홍금(紅錦)이나 청금(靑錦) 등으로 만든 금대(錦帶)와 홍색과 흑색의 실 띠인 도대(絛帶)가 연거복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대략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연거 시 착용하였던 옷들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남자들은 기본 차림으로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은 후 종아리에는 행전(行纏)을 쳤다. 그 위에 방의나 주의(周衣)·액주름[腋注音]·철릭·직령·답호·단령 같은 상의류를 입었다. 이 가운데 방의나 주의와 액주름 같은 옷은 저고리 위에 덧입는 상의류의 일종이며, 철릭·직령·답호·단령 등은 상의류보다 길이가 좀 더 길고 옷의 부피도 풍성한 포류(袍類)이다. 조선 전기의 포류는 크고 풍성하며, 깃에도 깃 2개를 연결한 듯한 장식 바느질선이 있는 이중 깃이 많다. 솜을 넣은 옷은 조선 후기보다 두껍다. 버선을 신었으며, 바지 위에 행전을 하여 외출 시에는 몸을 간편하게 하였다.
1. 관모류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머리에 쓰는 모자는 옷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모자를 쓰지 않고 맨상투 바람에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혼인을 하지 않은 총각은 머리를 땋아 내렸지만 관례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루고 어른이 된 성인 남자는 상투를 튼다.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모자는 유행의 변화도 어느 것보다 빨랐으며, 중국에 가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관모를 수입해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 후 이마에는 관자를 단 말총 망건을 두르고 머리를 더욱 정갈하게 하고 남자 어른의 상징인 모자를 쓸 준비를 한다. 망건에 장식하는 관자라는 것은 망건에 달린 당줄을 걸어서 머리에 꼭 조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인데, 눈 옆의 관자라는 부분에 달리게 된다. 관자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에 차이가 있었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옥과 금으로 만든 관자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각 장식이 많은 것 보다 단순한 것을 신분 높은 사람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여러 형태의 관자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1) 갓갓은 남자들이 외출할 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모자였다. 직령이나 철릭·답호 등과 같은 옷에 갓을 쓰고 외출을 하였다. 갓은 머리 위에 올라가는 모자 부분과 햇볕을 가려주는 테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에는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 모자를 만들었지만 점차 말갈기 털로 만든 말총갓이 유행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곱게 짠 갓을 쓸 수 있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좋은 갓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제한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갓은 모자 부분의 끝이 둥근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모자 끝이 평평한 것과는 좀 다르다. <그림 1>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로 토홍색 직령으로 짐작되는 포에 모자 끝이 둥근 갓을 쓰고 있다. <그림 2>는 1537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 기간 중에 그렸다고 하는 농암 이현보의 초상화인데 갓을 쓰고 토홍색 단령을 입고 있다. 관리로서 단령을 입을 때는 본래 사모(紗帽)라는 관모를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외직(外職)인 경우에는 단령에 갓을 쓰기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그림 3>에서 볼 수 있듯이, 의성김씨 종가에는 그보다 35년 뒤인 1572년에 그린 것이라고 하는 김진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이현보의 초상화에서보다 좀 더 높아진 갓을 볼 수 있다. 초록색의 직령을 입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초상화에서 갓을 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갓의 모양은 남성들의 유행이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는 아이템이었던 만큼 각 시대의 유행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안동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16세기 말의 갓 유물도 볼 수 있다.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유품이라고 하는 갓이 한 점 전시되어 있다. 끝이 뾰족한 형태로 꽤 높은 편인데 김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갓과 흡사하다. 갓에 달린 갓끈 장식은 남자들이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대나무에서부터 마노나 산호, 호박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시 하회마을의 충효당에서 멋진 갓끈 유물들을 만날 수 있으며, 당시 할아버지들이 어떤 사치를 즐기셨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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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김시습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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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농암 이현보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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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김진 초상화 | 2) 복건심의와 함께 쓰는 모자로, 보통 검정색 비단으로 만든다. 한 폭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고 하여 폭건(幅巾)이라고 한다. <그림 4>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천 원짜리 지폐에서 이 모자를 볼 수 있다. 바로 이황 할아버지가 머리에 쓰고 계신 것이 복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집(退溪集)』에는 이런 글이 있다. 김취려가 퇴계에게 복건과 심의를 보내왔는데 복건이 승건 같다고 하면서 정자관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퇴계는 내내 복건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돌 잔치하는 아기들이 색동두루마기를 입고 이것을 쓰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쓰는 모자 종류였고, 특히 유학자들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모자였다. 앞이마 쪽에 맞주름을 잡고, 귀 닿는 정도에 양쪽으로 끈을 달아 머리 뒤쪽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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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있는 이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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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김흠조 묘 출토 소모자 (영주 소수박물관 소장) | 3) 소모자(小帽子)평상복과 함께 사용되었던 모자이다. 보통 비단 6쪽을 이어 모자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아래는 약 12~15cm의 테를 만들어 연결하거나, 직사각형 옷감을 연결하여 양쪽 모서리만 접어 넣어 바느질한 형태도 있다. 계절에 따라 솜을 넣은 모자도 있다. <그림 5>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장인 판결사 김흠조(金欽祖, 1462~1528) 묘에서 출토된 소모자이다. 안동대학교 박물관 전시실에서 고성이씨 이응태(李應台, 1556~1586) 묘에서 출토된 소모자를 만날 수 있다.
2. 장신구
1) 허리띠조선 전기에 출토되는 허리띠의 특징은 명주 등의 옷감으로 만든 것과 비단실로 끈목을 짜고, 그 아래에는 금종이나 운모 등을 넣은 술을 장식한 실띠가 있다. 문헌에는 도아(絛兒) 또는 광다회대(廣多會帶)라고 한다. <그림 6>은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응태 묘 출토 광다회대이다. 또 경상북도 영주시 소장의 김흠조 묘에서 출토된 광다회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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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광다회대(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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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염낭(이응태 묘 출토) | 2) 주머니조선 전기 남자의 장신구 가운데 주머니가 있다. 주머니 염낭은 주로 둥근 모양으로 ‘두루주머니’라고도 하는데, <그림 7>은 경상북도 안동의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비단으로 만든 염낭이다. 명주로 만든 허리띠에 달려 있었는데, 술이 달린 매듭 장식이 있다. 출토 당시 주머니 속에는 죽은 이가 누구인지 그 비밀을 풀어 줄 편지 10여 장과 빗이 들어 있었다.3) 신발기록에는 피초혜(皮草鞋)·삽혜(靸鞋)·초혜(草鞋)·승혜(繩鞋) 등 다양한 명칭이 보인다. 특히 안동대학교 박물관에는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그림 8>의 특별한 미투리를 소장하고 있다. 이는 병든 31세의 남편을 위해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짠 미투리이다. 그리고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큼직한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9>의 이 가죽신발은 분투(分套)라고 하는 것인데 비가 오는 날 신발이 젖지 않도록, 또 추운 날 발이 시리지 않도록 신발 위에 덧신는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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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이응태 묘 출토 미투리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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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분투 (충효당 소장) |
3. 복식
1) 저고리와 두루마기조선시대 전기의 남자 저고리는 오늘날의 남자 저고리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착용하면 엉덩이를 가리는 정도로, 남자들의 긴 저고리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겹저고리, 솜저고리, 누비저고리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속옷 위에 저고리 대용으로 입었던 평상복이었다.2) 바지조선 전기의 남자 바지는 오늘날 남자 바지와는 형태가 다르다. 요즈음 바지는 밑이 막힌 사폭바지라고 하는 것을 입는데, 그 당시에는 밑이 막혀 있는 것도 있고 밑이 트인 것도 있다. 당시 남자는 여자와 같은 바지를 입었다. 입는 순서는 밑이 막힌 바지를 먼저 입고 그 위에 밑 트인 바지를 입었다. <그림 10>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밑이 트인 바지이며, <그림 11>은 밑이 막힌 바지이다. 바지 길이가 짧은 반바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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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밑트인 바지(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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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밑막힌 바지(이응태 묘 출토) | 3) 버선과 행전바지 위에 면이나 삼베로 만든 버선을 신고 행전을 착용하여 활동을 간편하게 하였다. <그림 12>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제비행전’이다. 요즈음의 고리바지처럼 발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인데 이 유물 역시 안동대학교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4) 방의조선 전기에는 네모난 깃인 방령(方領)이 달린 옷이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방령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록에 방의라는 것이 있으니 같은 옷으로 짐작된다. 길이는 110cm 내외로 대체로 앞이 길고 뒤가 짧은 전장후단형이 많다. 그리고 <그림 13>에서 볼 수 있듯이, 비단 중에서도 무늬가 있는 좋은 옷감을 흔히 사용하였다. 포 위에 덧입어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레이어드룩’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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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제비행전(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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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방령(석주선기념박물간 소장) | 5) 답호곧은 깃의 반소매 형태의 포이다. 직령과 옷 모양은 같으나 소매길이만 짧다. 철릭 위에 겹쳐 입으며 위에는 단령을 덧입기도 한다. <그림 14>는 김흠조 묘에서 출토된 답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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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답호 (김흠조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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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직령 (이응태 묘 출토) | 6) 직령답호와 같은 모양으로 단지 소매만 길다. 당시 남자들의 대표적인 외출복이었다. 김진의 초상화에 보이는 초록색 포가 직령이다. 깃에 장식 선을 한 번 더 바느질한 이중 깃이 달려 있으며, 깃의 반 정도 되는 너비의 동정이 달려 있다. 직령의 옆선에는 큰 무(길의 옆에 붙은 자락)가 달리지만 옆선이 트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입은 옷이 보인다. <그림 15>의 유물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직령이다. 이 유물 역시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7) 철릭조선시대 전기 남자 무덤에서 출토되는 옷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철릭은 조선 전기 남자들의 평상복이었다.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이 옷은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된 옷으로 요즈음의 주름이 잡힌 여자들의 원피스와 비슷하지만 남자들이 입었던 옷이다. 0.2cm 정도로 잡은 철릭의 주름은 섬세함의 극치를 보인다고 할 수 있으며, 소매도 긴 것이 있지만 활쏘기 편하도록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탈착식 소매가 달린 것도 있다. <그림 16>는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철릭이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인 변수(邊脩, 1447~1524) 묘의 철릭처럼 허리에 여러 줄의 선 장식이 있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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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철릭(이응태 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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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액주름(이응태 묘 출토) | 8) 액주름겨드랑이에 주름이 잡혀 있어 ‘액주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길이는 일반 포보다는 약간 짧다.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림 17>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응태 묘의 액주름이다.9) 배자(背子)남자 웃옷의 일종으로, 저고리나 포 위에 입는 간편복으로 소매가 없는 우리나라 조끼의 일종이다. 어깨는 붙어 있으나, 겨드랑이 아래는 트여 있으며, 앞이 뒤보다 짧은 것이 많다. 보통 고름이나 매듭단추로 여민다.10) 단령(團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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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이응태 묘 단령 | 단령은 관리들의 옷으로 깃이 둥근 모양[團領]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전기 중종 이후에는 두 가지 색상의 단령이 있었다. <그림 2>의 농암 이현보의 초상화에 보이는 붉은 색 단령은 관리가 집무 시에 입는 옷인데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띠고 있다. 그리고 안동 정상동에 있던 이응태 묘에서는 <그림 18>의 아청색 단령이 출토되었다. 아청색 단령은 흑단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단령은 세종 때에 만들어진 제도에 의한 것으로, 일종의 예복이며 관리들은 왕과 만나는 조회에 이 옷을 입었다. 관직이 있는 자는 결혼할 때 공복(公服)을 입도록 규정하였으나 관직이 없는 자가 혼례를 치룰 때는 흑단령을 입도록 하였다. 대신 관원들이 사용하는 사모와 품대 대신에 검은 갓을 쓰고 실띠[絲帶]를 둘렀다. 신분에 맞지 않는 복장을 혼례에 허용하는 것을 섭성(攝盛)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제(私祭) 때에도 예복의 일종이었던 흑단령을 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II. 조선후기 복식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 전기 선비의 일반 복식은 바지·저고리·철릭·직령·답호·단령·배자 등이다. 이러한 옷들은 17세기 임진왜란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전기에 평상복과 융복(戎服)으로 입혔던 철릭은 임진왜란과 청과의 전쟁 동안 공복으로 착용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으나 전쟁이 끝난 후로는 점차 문무관의 융복과 무관복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또한 단령 안에 입었던 답호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소매가 긴 직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직령은 평상복으로도 입혀졌으나 도포라는 옷이 사대부의 편복용 포로 보편화되면서 상례에서 사용되는 등 그 용도가 전기에 비해 다소 위축되었다. 남자의 바지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밑 트인 바지와 밑 막힌 바지로 여자 바지와 차이가 없었으나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현재의 한복 바지인 큰사폭과 작은사폭, 그리고 마루폭으로 구성된 사폭바지로 바뀐다. 이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 군인들의 바지를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외 도포가 유생들을 중심으로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옷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포에 대한 기록은 이미 명종 때 보이고 유물도 16세기 후기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더욱 보편적으로 착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자들은 착용할 수 없는 옷이었다. 1653년에 사망한 경기도 포천의 김확(金穫) 묘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도포가 다량 출토되었다. 기록에서도 홑도포 외에 겹도포가 등장하며 색상도 다홍색·초록색·아청색 등 다양한 색상의 도포를 확인할 수 있다. 예복으로 입히는 흰색, 즉 소색의 모시 도포만을 아는 이들에게는 좀 충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조 대 이후 도포의 색상도 청색과 백색이 즐겨 자리하게 되었다. 길복으로는 청색 도포를 입도록 하였다. 예복이 되면서 겹도포는 점차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홑도포가 남게 되었다. 지금도 안동에서는 문중의 제사를 지낼 때 갓에 도포를 입은 어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사대부의 초상화 중에는 심의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전기보다는 착용 사례가 증가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착용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심의를 잘 입지 않는다는 기록도 적지 않다.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과 전래되어 오는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선비의 복식은 소박하고 검약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옷감은 소박하나, 안감은 비단을 사용하여 일반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서민들을 배려한 흔적도 보인다. 선비의 장신구로는 안경·허리띠·부채 등이 있으며, 신발은 흑혜(黑鞋)나 태사혜·운혜 등을 즐겨 신었다.
1. 관모류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일상복과 더불어 관모류가 사용되었다. 선비들은 집에 있을 때에도 상투에 망건을 갖추고 반드시 관모류를 착용하였다. 조선 후기 초상화, 풍속화에 보이는 관모류에는 탕건·상투관·복건·갓·사방건·와룡관·정자관·유건 등이 있으며, 그 외 관모류의 장식품으로 관자·동곳·풍잠·옥로·갓끈 등이 있다.1) 머리 장식품조선 후기 남성들의 머리 장식품은 조선 전기에 비해 다양해진다. 우선 조선 전기에는 보이지 않던 풍잠이 망건의 앞쪽에 다는 장식품으로 등장하였다. 갓이나 관이 걸쳐져 흘러내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玳瑁)나 호박 등으로 만들었다. 1911년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황현(黃玹, 1855~1910) 초상화에 희미하게 정자관(程子冠) 아래 풍잠이 착용된 망건이 보인다.그리고 동곳이라는 것이 있다. 동곳은 상투를 고정하는 작은 비녀이다. 또 상투를 장식하는 작은 관으로 상투관이라는 것이 있다. 헝겊에 흑칠을 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2) 탕건말총으로 짠 것으로 망건 위에 쓰는 간단한 모자이다. 앞은 약간 수그러져 있고, 뒤는 높게 턱이 진 형태이다. 집에서는 평상복에 탕건만 사용하기도 하고, 갓이나 사모의 받침 모자로 착용하기도 한다. 김득신의 「투전」 속에는 탕건을 쓴 남자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 <그림 19>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사대부 편복 초상화인데, 높은 탕건 아래로 풍잠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다.3) 복건선비의 최고 예복으로 생각했던 심의와 주로 함께 사용되었다. <그림 20>에서 볼 수 있듯이 김득신의 「노상알현」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에서 갓에 복건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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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 풍잠과 탕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9,p.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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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복건에 갓 쓴 모습 (중앙일보사,풍속화,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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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갓끈 (이와여자대학교 박물관1999,p.85) | 4) 갓과 갓끈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갓의 모자 부분은 높아지고 테는 넓어졌다. 그러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집정 이후 옷차림의 간소화 정책에 따라 모자 부분은 낮아지고 테는 좁아졌다. 갓은 보통 말총으로 만든 후 베를 바르고 그 위에 검은 옻칠을 하여 사용하였다. 비가 오면 형태가 망가져서 소매 속에는 항상 우산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갈모라고 하는 모자를 가지고 다녔다. 갓에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갓끈을 다는데, 직위에 따라 옥·마노(瑪瑙)·산호 등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대나무·구슬·옷감 등도 사용되었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갓끈을 <그림 21>에서 볼 수 있다.5) 방건네모난 모양으로 생긴 관모의 일종으로, 말총으로 짜거나 옷감에 흑칠을 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편복 포와 함께 착용하였다. <그림 22>은 김홍도의 「서당도」에 보이는 훈장의 모습으로 방건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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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 방건 (중앙일보사, 풍속화,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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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 와룡관(경기도 박물관,먼나라꼬레,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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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4. 정자관 (중앙일보사,인물화,1993) | 6) 와룡관삼국지의 제갈량이 평소에 와룡관을 즐겨 썼기 때문에 와룡 선생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제갈건’이라고도 불리었다. 포류에 함께 착용하는 관모의 일종이다. <그림 23>은 이준용(1870~1917)의 사진인데, 망건과 탕건 위에 와룡관을 착용하고 있다. 관이 매우 성글어서 뒤에 있는 병풍의 그림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7) 정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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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유건 | 정자관은 송나라의 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즐겨 썼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말총으로 짜며 중심에 산(山)형이 온다. 2층, 3층 관이 있다. <그림 24>은 정자관에 심의를 입은 황현의 모습이다. 8) 유건유생들이 많이 착용하였던 건의 일종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검정색 베를 양쪽으로 접어 윗부분을 꺾어 만든 것이다. 지금도 <그림 25>에서 보이는 것처럼, 안동지역에서는 흔히 향사 등의 행사에서 유건 쓰신 어른을 만날 수 있다.
2. 신발류
신발은 주로 태사혜나 흑혜를 신었다. 또 비가 올 때는 징신이나 나막신 등을 신었으며 바지 위는 행전과 버선이 있다.
1) 운혜와 태사혜, 흑혜 운혜나 태사혜는 남녀가 함께 신었던 신발의 명칭이다. 정선(鄭歚, 1676~1759)이 그린 「독서여한(讀書餘暇)」에서는 남자의 운혜(雲鞋)가 묘사되어 있다. 신코와 발등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방건(方巾)을 쓰고 흰 포를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든 여유 있는 모습에서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를 만날 수 있다. <그림 23> 역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이안의 초상화인데 심의에 운혜를 신고 있다. 태사혜는 가죽이나 비단으로 몸체를 만들고, 그 위를 비단으로 쌌다. 신의 코와 뒤축에 구름의 귀 모양 같은 문양이 있는데, 이 문양을 태사문(太史紋)이라고 한다. 풍속화와 유물에 보이는 태사혜는 검정색이나 녹색 계통이 많다. 이 신발은 날씨가 맑은 날에 신는다고 하여 마른신이라고도 하였다. 흑혜는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주로 신는 신의 일종으로, 검정색 가죽으로 만들었다. 심의와 함께 신는데, 발등에 가는 흰색 가죽으로 묶는 끈이 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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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운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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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7. 태사혜 (단국대학교 2004,p.19) |
2) 버선과 행전 버선은 현재 버선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요즈음의 버선은 수눅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으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수눅선이 곧다는 것이 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전은 바지 위로 종아리 부분에 착용하는 것으로 무릎 아래에서 끈을 매서 조인다. 바지자락의 펄럭임을 막는 수단으로 먼 길을 간다든지 간편함이 요구될 경우에는 반드시 행전을 둘렀다. 행전은 두 종류가 있었는데, 이는 「춘향가」에서 확인된다. 하나는 ‘제비행전’이라는 것인데 요즈음의 고리바지처럼 발바닥 아래로 끈이 돌아가도록 아랫부분이 뾰족하게 생기고 그 끝에 끈이 고리처럼 달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행전’이라는 것으로 원통형으로 생긴 것인데 행전으로는 보편화되어 있는 형태이다. 행전의 윗부분 종아리 뒤쪽에는 발을 넣을 수 있게 트임이 있으며, 트임의 위쪽 양끝에는 묶을 수 있는 끈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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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제비행전 (경기도박물관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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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9. 통행전 (이대박물관 1995,p.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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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0. 제비행전 착장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1999) |
3. 장신구
1) 주머니양복이 우리 옷에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 옷에는 양복처럼 옷에 부착된 주머니가 없었다. 그러므로 주머니는 허리에 차고 돈이나 기타 물건들을 담아 가지고 다녔다. 형태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림 31>처럼 귀가 뾰족한 ‘귀주머니’와 <그림 32>처럼 둥근 모양의 ‘염낭’이라고도 하는 ‘두루주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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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 귀주머니 (이대박물관 1995,p.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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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두루주머니 (국립중앙박물관 2002,p.209) | 여자나 어린이용 주머니에는 특히 자수 장식을 많이 하였으나 남자의 것에는 장식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유물로는 장식적인 것이 많이 남아 있으나 풍속화에 나타나는 남자 주머니는 장식 없는 수수한 것이 많이 보인다. 2) 안경안경은 우리나라에는 17세기경 전래되었다고 하며, 정조가 특히 안경을 꼈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원군 때는 안경을 사용하지 않게 하기 위한 금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 초상화나 민화 중에는 심의를 입은 선비가 안경을 착용하거나, 서안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 있어 안경의 착용이 널리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 33>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안경은 둥근 모양이며 대모(玳瑁) 테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안경은 가운데를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안경을 담아 두는 안경집은 상어 껍질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가죽으로 만든 것 등이 많으며 간혹 옷감에 글귀를 수놓은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신구에서도 선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구한 말 당시 유행하던 대모 테의 안경을 <그림 34>의 황현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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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 안경집과 안경 (예나르 2002,p.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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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 황현의 초상화(일부) (중앙일보사, 1993,p.142) | 3) 허리띠허리띠는 옷감을 만든 허리띠와 비단 실로 짠 도아(絛兒)가 있다. 도아는 사대(絲帶), 술띠, 실띠라고도 하는데 띠의 양끝에 술이 달렸다. 조선시대 후기의 것은 주로 딸기술 위에 금사로 가락지매듭으로 장식된 것이 많다. <그림 35>처럼 딸기술을 장식하여 호패를 달았던 호패끈도 있다. 도아의 단면의 모양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그림 36>에서 볼 수 있듯이, 둥글고 가는 것을 세조대(細絛帶)라고 하고 납작하고 넓은 것을 광다회대(廣多會帶)라고 하였다. 그리고 벼슬에 따라 띠의 색깔을 달리 하였다. 신분이 높은 자는 주로 홍색이나 자색을, 그리고 신분이 낮은 자는 청색이나 녹색을, 국상이나 집안의 상 중에는 흰색의 띠를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래되고 있는 유물은 다양한 색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 사용하는 허리띠는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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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5. 호패끈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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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6. 세조대와 광다회대 (단국대학교박물관 2004,p.187) | 4) 부채와 선추(扇錘)선비들의 장신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부채를 들 수 있다. 겨울철에도 부채 들기를 좋아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인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부채에는 선추를 다는데, 이는 벼슬하지 않은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선추는 선추 장식의 몸에 해당하는 주체와 매듭장식 그리고 술이 있다. 선추의 주체는 옥·비취·호박·상아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조각하고 장식하였으며, 때로는 나침반, 이쑤시개 같은 실용적인 물건이 사용되기도 한다. 매듭은 주로 동심결 매듭이 사용되며, 술은 방울술이나 딸기술이 사용되었다. <그림 37>과 같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5) 장도세조 대에 주머니와 함께 장도도 함께 차고 다녔는데, 장도는 은으로 만들었으며, 젓가락도 함께 들어 있어 실용성을 겸한 장신구였다. <그림 38>은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은장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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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7. 선추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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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8. 장도 (담인복식미술관 1999, p.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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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식
선 후기 선비의 복식은 저고리, 바지 위에 포류를 입었다. 포류는 임진왜란 이후 다양하게 발전되어, 창의류(소창의·중치막·대창의·학창의), 심의, 도포, 주의(두루마기·광수주의), 등이 있다. 포류 위에 입는 옷으로 답호·전복이 있으며, 평상시에 저고리 위에 또는 포 위에 입는 간편복으로 배자가 있다.1. 기본적인 저고리·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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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9. 밑트인 사폭바지 | 저고리는 조선 전기와 후기를 통해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속옷에 해당하는 적삼(赤衫)이나 한삼(汗衫)을 입고, 그 위에는 저고리, 또는 소창의라고 하는 장유(長襦)를 입고 그 위에 다시 중치막(中致莫) 등의 포 종류를 입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것은 남자 바지이다. 조선 후기에 오늘날의 남자 바지와 같은 사폭이 있는 바지로 정착되었다. 사폭바지 중에는 <그림 39>의 이익정 묘의 바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밑이 트인 바지도 있다.2. 포류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 남자들의 외출복인 포가 매우 다양해졌다. 포류는 대부분 깃 모양이 곧은 깃이기 때문에 앞에서 보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포의 구분은 무(길의 옆에 붙은 자락)의 유무와 트임, 그리고 옷의 가장자리에 선이 있는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1) 도포선비의 대표적인 옷으로 알려진 도포는 16세기에 기록과 유물이 나타나며,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더욱 보편적으로 입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40>는 안동댐 건설 중 이장한 홍극가(洪克家, ?~1670)의 묘에서 출토된 도포이다. 중요민속자료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도포는 현재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옷의 형태는 <그림 41>에서 볼 수 있듯이, 앞자락의 옆 무가 뒷자락 안으로 들어가 고정된 형이다. 몸체에 붙은 안자락은 긴 트임이 있어, 말을 탈 때나 자리에 앉을 때 구김을 방지할 수 있어 선비로서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옷이다. 조선 말기 이후에는 옥색이나 흰색의 홑도포가 많지만, 17세기의 출토 복식에서 보이는 도포는 자주색이나 남색, 초록색 같은 짙은 색상의 겹도포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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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0. 홍극가 묘 도포 (1670년, 안동대학교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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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도포 펼친 상태 (안동대학교 박물관) | 2) 심의심의는 <그림 42>에서 볼 수 있듯이, 선비들이 즐겨 입었던 예복이었다. <그림 43>에서 볼 수 있는 심의는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 조선 후기에는 수의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저고리[衣]와 치마[裳]가 붙은 포 형태의 옷으로, 하늘과 땅을 상징하며, 치마는 12폭으로 1년을 상징한다고 한다. 옛날부터 심의 형태와 의미에 관한 많은 철학적인 해석이 있었다. 흰색의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만든 홑옷으로 깃·수구·도련에는 검정색 선(襈)을 둘렀다. 깃은 곧은 깃이 많으나, 네모난 깃[方領]도 있다. 머리에는 복건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자관이나 방건, 심지어는 모관(毛冠)을 쓴 경우도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허리에는 검정색 선을 두른 대대(大帶)를 두르고 그 위에 오색의 비단실로 짠 ‘채조’라고 하는 허리띠를 둘렀다. 신은 흑혜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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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2. 심의 (이화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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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3. 심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3) 학창의곧은 깃에 섶선과 밑단, 수구 등에 흑선을 두른 흰색이나 남색의 포이다. 옷의 형태는 대창의와 같으나, 도련과 수구(소매 끝)에 검정색 선이 둘러져 있다. 말기에는 흰색은 제복 받침옷으로 중단 대신 착용되었으며, 남색은 조복 아래의 받침옷으로 착용되었다. 4) 창의대창의라고도 하는데 <그림 44>처럼 소매가 넓고, 뒷길에 트임이 있는 옷이다. 관리의 관복 받침옷으로도 입혔으며 선비의 외출복으로 착용되었다. 허리에는 세조대 등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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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4. 창의(부벽루,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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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5. 중치막 (신윤복<溪邊佳話>) | 5) 중치막옆이 트인 옷으로 소매가 넓다. 선비의 간편한 외출복으로 착용되었는데 허리에는 띠를 두르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히 보인다. 혜원의 풍속화나 단원의 풍속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또한 예복을 입을 때 받침옷으로 착용하기도 했으며, <그림 45>처럼 활을 쏠 때도 입었다.6) 소창의깃은 곧은 깃이며, 소매는 좁고, 허리 아래부터 트인 옷이다. 조선시대 초기, 중기에는 남자들의 저고리였으나, 후기에 와서 간편복으로 집에서 일을 할 때와 같은 용도에 사용되었다. <그림 46>처럼 긴 고름이 달려서 한 번 몸통을 감아 고름을 묶는 유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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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6. 소창의(안동대박물관소장 2005) | 7) 주의(周衣)(1)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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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7. 두루마기 (1639년, 수덕사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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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8. 두루마기(개화기) | <그림 47>에서 볼 수 있듯이, 두루마기는 소매는 좁고 곧은 깃에 무가 있으나 트임이 없는 옷이다. 두루 막혀 있다는 것에서 ‘두루마기’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894년 갑오의제 개혁 때, 두루마기에 답호를 입는 차림이 궁중 출입을 하는 예복으로 되었고, <그림 48>에서 볼 수 있듯이, 개화기 이후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남자들의 외출복으로 사용된다. (2) 광수주의(廣袖周衣)일반적으로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은 옷이지만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는 광수주의라고 하였다. 곧 넓고 큰 소매의 두루마기이다. 경기도 하남 출토의 의원군 이혁(1664~1722)의 묘에서도 주(紬)로 만든 <그림 49>의 광수주의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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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9. 광수주의(1722년, 경기도박물관 소장) | 8) 답호와 전복조선 후기의 답호와 전복은 소매가 없는 긴 상의로 포류 위에 덧입는 옷이었다. 조선 전기의 답호는 철릭 위에 덧입는 옷으로, 직령과 같은 형태의 반소매 옷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탐릉군 묘에서 출토된 <그림 50>의 답호를 보면 소매 없는 옷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19세기 후반에는 답호와 전복의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본래는 깃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사용되던 명칭이 아닌가 짐작된다. 1894년 갑오의제 개혁 때는 궁중을 출입하는 예복으로 두루마기와 답호, <그림 51>과 같은 전복이 입혀졌으나, 그 다음 해부터는 더욱 간소화되어 두루마기만 입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예복으로 사용된 답호, 전복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돌장이 옷에서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입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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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0. 답호(1731년, 석주선기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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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 전복(김병의 일가 유물) | 6) 마고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이다. 마고자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시에 입고 온 청나라의 마괘(馬褂)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입혀졌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청나라의 마괘는 장포(長袍) 위에 입는 옷으로, 마고자가 전래된 즈음의 사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두루마기 위에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52>은 이연응(李沇應, 1818~1879)의 묘에서 출토된 대금형 상의로 마고자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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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2. 대금형 상의 (경기도박물관 소장) | 7) 배자와 조끼배자는 저고리나 포 위에 입는 조끼로 보통 앞이 뒤 보다 짧은 것이 많다. 깃은 없거나 원삼 형 깃, 또는 사각형 깃 모양이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는 트여 있어서 앞뒤를 끈으로 연결하거나, 매듭단추로 앞뒤를 여몄다. 김홍도의 「설야연적도」에는 <그림 53>처럼 포 종류 위에 배자를 입은 사람이 보인다. <그림 54>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후기의 배자 유물이다.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조끼는 답호나 배자이나, 조선시대 말기 양복이 들어오면서, 남자의 정장인 베스트(vest)가 한복 저고리 위에 입혀지게 되었다. 조끼는 주머니가 달려 있어 실용성에서 많이 입혀졌다. <그림 55>의 조끼는 영친왕이 어렸을 때 입었던 조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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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3. 배자 (설야연적도, 김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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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4. 배자 (석주선기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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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5. 조끼 (고궁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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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월운님 좋은정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