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9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경기를 하는 구기종목. |
|
|
LG 트윈스와 현대 유니콘즈의 프로 야구 경기장면 | 미국에서는 연간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양대 프로 리그인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경기를 관람하며, 7개월에 걸친 시즌은 월드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룬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양대 리그의 우승팀이 7전4선승제로 경기를 갖는데, 미국 내 1억 이상의 인구가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등 국가적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선수들은 야구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여기며, 1900년 이후 보관해오고 있는 야구기록들은 여전히 야구 팬들에게 주요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야구는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다른 구기종목에 비해 많은 팬을 갖고 있다(→ 스포츠 기록 : 야구).
|
|
|
1744년부터 영국에서는 방망이와 공으로 하는 경기에 관한 많은 책자가 나왔으며, 특히 영국 어린이들의 놀이에 관한 서적인 〈아이들의 책 The Boys Own Book〉의 2판에는 라운더스라는 경기가 기술되었다. 라운더스는 베이스가 있는 다이아몬드형 내야, 안타, 파울 등 근대 야구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으며, 주자를 공으로 맞춰 아웃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야구와 달랐다. 미국 야구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열성적인 미국 팬들에게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미국의 야구가 영국의 라운더스라는 경기에서 나왔다는 설을 불쾌하게 여겼던 스포츠 용구 제조업자 A. G. 스폴딩은 1904년 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사위원회는 야구가 1839년 쿠퍼즈타운에서 A. 더블디 장군에 의해 고안되었고 야구는 올드캣이라는 미국 어린이들의 놀이에서 기원한다고 보고했다. 이 설이 1939년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 그 신빙성은 희박해졌다. 1845년 가트라이트는 경기규칙을 공식화하는 단체를 설립했다. 그 규칙의 상당 부분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는데, 수비가 주자를 공으로 맞춰 아웃시킬 수 없고 태그 아웃시켜야만 하게 되면서 하드볼을 야구에 사용했다. 뉴욕 시의 여러 야구 클럽들은 이 규칙을 채택했고, 소프트볼을 사용한 라운더스식의 경기도 보스턴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인기있는 경기로 행해졌다. 이 두 형태의 야구는 각각 뉴욕 야구, 보스턴 야구로 불리다가 남북전쟁중 뉴욕 야구가 일반화되었다.
|
|
프로 야구는 1865년경 몇몇 팀들이 우수 선수들을 고용하면서 탄생했다. 1869년 최초의 프로 팀인 신시네티 레드 스타킹스가 창단되었고, 이후 많은 아마추어 팀들이 프로팀으로 전향했다. 1871년에는 내셔널 프로 야구선수협회가 설립되었으나 5년 후 해산되었고, 뉴욕 시와 보스턴 등 8개 도시를 대표하는 팀으로 구성된 내셔널 프로 야구 클럽 협회가 새로운 경기연맹으로 창립되었다.
|
1881년 내셔널 리그에서 방출된 팀들과 내셔널 리그에 소속되지 않은 팀들로 구성된 아메리칸 협회가 설립되었고, 이후 여러 팀들을 합병하여 1899년경 아메리칸 협회는 최대의 경기연맹으로 성장했다. 내셔널 리그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1893년에는 미국 중서부 팀들을 중심으로 웨스턴 리그가 설립되었다. 웨스턴 리그는 연고지를 동부로 옮기면서 아메리칸 리그로 명칭을 바꾸었고, 내셔널 리그로부터 많은 스타플레이어를 스카웃했다. 1903년 여러 경기연맹들은 선수의 이적,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 간의 팀의 이동 등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한 경기연맹이 같은 도시에서 2개의 팀을 보유할 수 없고, 다른 연맹들의 동의없이 두 연맹간에 한 팀의 운영권을 이전할 수 없도록 했다. 이 1903년의 합의에서 월드 시리즈가 만들어졌고, 3명으로 구성된 미국야구위원회가 창립되었다. 월드 시리즈는 1905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데, 메이저 리그의 양대 경기연맹인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우승 팀 간에 7전4선승제로 펼쳐진다.
|
1920년대 미국 스포츠의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야구에는 뉴욕 양키스 출신의 베이브 루스라는 스포츠 영웅이 나타났고, 대공황기였던 1930년대에도 메이저 리그 야구는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35년에는 신시네티에서 최초로 야간경기가 펼쳐졌고 1960년대에는 야간경기가 대중화되었다. 최초의 야간 월드 시리즈는 1971년에 행해졌다.
|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많은 선수들의 참전으로 경기의 질이 다소 낮았으나 전후 우수선수들이 팀에 복귀함에 따라 야구경기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선수들은 자신들의 고용조건을 개선하려 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1946년 미국야구조합이 설립되었다. 길드는 메이저 리그 최소연봉 5,000달러, 선수연금기금 설립 등의 개선안을 만들어냈고, 선수연금기금은 주로 월드 시리즈, 올스타전 등의 텔레비전 방송권 판매로 충당되었다.
|
계속되는 야구경기의 성공적인 흥행은 여러 팀의 태동과 리그의 성장을 가져왔다.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는 각각 1953, 1954년부터 여러 팀들의 리그 가맹권이 이전되었고, 또 새로운 리그 가맹권이 여러 팀들에 부여되어 양대 리그는 1960년대말경 10여 개 이상의 소속 팀을 갖게 되었다. 154경기였던 시즌 경기는 1961년에는 162경기로 확대되었고, 1960년대말경에는 양대 리그가 각각 동부와 서부 지역 리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양대 리그 우승 팀 간에 펼쳐지는 월드 시리즈는 정규 시즌의 연장으로 10월말로 늦추어졌고, 각 리그 우승 팀은 지역 리그 우승 팀 간의 플레이 오프전에 의해 결정되었다.
|
메이저 리그가 1903년 노사합의를 이루었을 때 현재의 마이너 리그 구조가 형성된 이후 마이너 리그는 메이저 리그 유망주의 발굴장소가 되었다. 191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인 B. 리키가 2군 합동운영제인 '팜시스템'을 고안해 선수를 자체 양성했고, 여러 메이저 리그 팀들이 이를 뒤따랐다. 6개 등급으로 구분되었던 마이너 리그는 1949년 절정에 달해 메이저 리그의 2배의 관중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저 리그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면서 마이너 리그의 인기는 떨어졌고 이와 함께 마이너 리그 연맹수도 59개에서 1980년대말에는 4개 등급 17개로 줄어들었다.
|
1885년 쿠반 자이언츠의 창단을 시작으로 많은 흑인 프로 팀이 생겨났고, 1920년 이후 니그로 내셔널 리그의 설립 등 흑인야구도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과거 백인으로만 구성되었던 팀으로 흑인선수들이 점차 이적함에 따라 니그로 리그의 인기는 낮아졌다. 인종간의 벽을 깨고 최초로 메이저 리그 선수가 된 흑인은 1947년 재키 로빈슨이었다. 이후 행크 아론, 조시 기브슨 등 걸출한 스타가 배출되었고, 여러 선수가 야구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
1953년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메이저 리그 야구선수협회가 설립되었다. 1966년 협회 이사가 된 M. 밀러는 선수들의 계약상 권리와 이익을 규정했고, 불공정 중재에 대한 불만처리위원회를 설립했다. 당시 메이저 리그 선수의 최소연봉은 1만 달러였고, 1969년경에는 평균 2만 달러가 되었다. 1953년 미국연방대법원은 야구가 독점규제법의 대상이 아니라는 1922년 판결을 재확인했다. 이후 계약기간 중인 선수는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다는 유보조항이 확고한 야구의 법적 기반이 되었으나, 1970년 이에 대한 소송사건이 연방법원에 제소되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외야수였던 C. 플러드는 구단이 자신의 동의없이 자신을 트레이드시켜 독점규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은 1953년의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1972년에는 미국야구사에 있어 최초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86개 정규 시즌 경기를 취소시켰던 이 파업은 선수연금기금의 확대로 종결되었다. 1976년은 선수들에게 전례 없는 승리의 해였다. 중재인이었던 P. 세이츠가 선수의 계약이 구단에 의해서 연장될 수 없다는 1879년 판례를 찾아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유보조항을 뒤엎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구단주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무위로 끝났고, 이후 유보조항에 수정이 가해져 자유계약제가 1977년부터 시행되었다. 즉각 여러 명의 선수들이 자유계약제의 혜택을 받았고, 이로 인해 선수들의 몸값이 상승하게 되었다. 선수들의 보수가 증가함에 따라 각 구단의 방송권 판매가도 상승했다. 팬들의 관심도 계속 증가해서 1980년대말에는 기록적인 관중이 동원되었다. 1994~95년 시즌에 일어난 파업은 234일간 계속되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장기 파업으로 기록되었다. 이 파업으로 1994년에 669경기가, 1995년에 252경기가 각각 취소되었고, 프로 야구 출범 이래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가 취소되었다. 이 여파로 각 도시와 주가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1995년에는 최저 관객수를 기록했다.
|
야구가 시작된 이래 야구 관련 기록들은 팬들의 주요관심사가 되어왔으며, 몇몇 기록들은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홈런 부문에서 베이브 루스, 로저 매리스, 행크 아론, 맥과이어, 최다 안타에서 티 콥 페트 로스, 도루에서 머리 윌스, 루 블록, 리키 핸더슨 등이 대기록을 수립했다. 시즌의 연장과 인조잔디의 사용은 새로운 기록 수립에 일조하고 있다.
|
현재 4개 리그가 미국 마이너 리그에 속해 있는 멕시코와 야구를 국기로 하고 있는 쿠바의 경우 19세기말부터 조직적인 야구가 행해졌다. 특히 쿠바는 한때 미국 선수들의 춘계훈련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58년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 미국과의 야구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있다. 그외 파나마·푸에르토리코·베네수엘라 등지에서도 조직야구가 행해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1870년대 선교사들에 의해 야구가 도입되어 1930년대에 프로 야구가 생겼다. 현재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 각 6개 팀이 130여 경기를 치르고 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국에는 1905년에 야구가 처음 소개된 이래, 아마추어 경기로 발전해오다가 1949년 세계 아마추어 야구연맹에 가입하여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1982년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여 2002년 현재 9개 구단이 참가하여 해마다 한국 시리즈를 치르고 있다.
|
|
1870년 아마추어와 프로가 분리된 이후 아마추어 야구도 나름대로 발전해왔다. 1926년 미국 주니어 리그의 설립을 시작으로 1935년 미국 아마추어 야구연맹, 1939년 리틀 리그 등이 설립되었으며, 리틀 리그의 경우 1990년대초 현재 250만 명의 선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학야구의 경우는 현재 1,600여 대학이 미국대학체육협회(National Collegiate Athetic Association/NCAA) 산하에서 경기를 하고 있으며, 1972년부터는 미·일 대학대표 팀 간에 대학간 월드 시리즈가 펼쳐지고 있다.
|
|
야구는 각 9명, 지명타자가 있는 경우 10명으로 구성된 양 팀이 각각 9회에 걸친 공수로 승부를 가린다. 공격 팀에서 3명의 타자가 아웃되면 수비 팀이 공격기회를 갖는다.
|
|
메이저 리그에서 경기장의 크기는 홈 플레이트에서 파울 라인 끝의 펜스까지 75.00m(250피트) 이상이며, 1958년 이후의 경기장들은 파울 라인 양 끝과 중견수 뒤쪽 펜스까지의 거리가 각각 99.06m(325피트)와 121.92m(400피트) 이상으로 되어 있다. 투수판지역, 각 루 부근, 루 사이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잔디로 덮여 있고, 4곳의 루는 각 변이 27.4m(90피트)인 4각형(내야)의 꼭지점에 있다.
|
|
야구 경기장 | |
|
투수판과 홈플레이트 | |
|
|
| |
공은 코르크나 고무덩어리를 실로 감아 2조각의 가죽으로 덮어 싼 것이며, 원주 23.5㎝가량, 무게 142~149g이다. 방망이는 손잡이 부분이 가는둥근 나무막대기로 되어 있고 무게 제한은 없으나 길이가 1.07m를 넘어서는 안 되며, 굵은 부분의 직경이 6.99㎝(2.75인치) 이하이어야 하고, 프로의 경우 금속이나 다른 강화제가 섞인 재질이어서는 안 된다(아마추어의 경우 금속제 방망이가 허용됨). 글러브는 솜 등을 채워넣은 가죽으로 길이와 둘레가 각각 39.4㎝(15.5인치), 96.5㎝(38인치) 이하이어야 한다. 포수는 마스크·가슴보호대·정강이보호대 등의 보호장비를 착용하며, 주심도 이와 비슷한 장비를 착용한다. 타자는 귀까지 덮는 헬멧을 쓴다.
|
|
심판진은 주심과 3명의 루심으로 구성되며 게임을 관리한다. 주심은 스트라이크와 볼, 히트 바이 피치드 볼, 공격방해와 수비방해, 홈에서 주자의 세이프와 아웃 등을 판정하고, 각 루심은 각 루에서 주자의 세이프와 아웃을 판정한다. 모든 심판은 타자가 친 공의 파울·페어 여부를 판정하고, 어느 심판이든 투수의 변칙투구동작(보크)을 선언할 수 있다.
모든 타격은 홈 플레이트에서 행해지며, 공격 팀 선수가 스리 아웃 이전에 1·2·3루를 거쳐 홈에 이르면 득점하게 된다. 9명의 수비수 중 투수와 포수는 배터리가 되어 투수의 투구 때에는 각각 피처 마운드, 캐처 박스에 위치해야만 한다. 나머지 7명의 수비는 내야·외야에 포진하고, 위치에 대한 규정은 없다. 진루 및 아웃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3명의 타자가 아웃되면 공수가 바뀐다.
|
|
공격의 목표는 한 팀 동료가 1·2·3루를 거쳐 홈에 이르게 함으로써 많은 득점을 하는 데 있다.
|
가장 성공적인 타격은 홈런으로, 파울 선 안쪽의 펜스 밖으로 공을 쳐내는 것이다. 이때 타자와 각 루에 진루한 모든 주자는 다음 루들을 돌아 홈으로 들어오며, 홈으로 들어온 선수 수만큼 득점하게 된다. 홈런이 안 되는 경우 타자는 자신이 친 공이 수비수에 잡히지 않고 페어 지역 내에 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안타라고 하며, 수비실책 없이 타자가 아웃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루에 따라 1루타, 2루타, 3루타로 구분한다. 이 경우 각 루의 주자들은 가능한 한 많이 진루해서 득점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
한 타자에 대해 투수가 던진 공이 4번에 걸쳐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포볼의 경우로, 타자는 1루로 걸어나갈 자격을 얻는다. 이때 1루에 주자가 있으면 그 주자는 2루로 진루한다.
|
히트 바이 피치드 볼(hit by pitched ball)
투수가 던진 공에 타자가 타격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맞은 경우로, 타자는 1루로 걸어나가며 기존 주자가 있으면 그 주자는 2루로 진루하게 된다.
|
타자의 타격행위 중에 포수와 타자의 몸(글러브와 방망이 포함) 일부가 닿았을 경우로, 타자는 1루로 걸어나갈 자격을 얻는다. 이 경우 포수는 에러 판정을 받는다.
|
미스트 서드 스트라이크(missed third strike)
3번째 스트라이크된 공을 타자가 못쳤으나 포수도 공을 잡지 못한 경우로, 타자는 1루로 뛸 수 있으며 공보다 먼저 1루에 도착하면 세이프가 된다.
|
노 아웃 또는 원 아웃 상황에서 1루와 2루 또는 1·2·3루에 주자가 있을 때 타자가 내야에 떨어지는 플라이 볼을 친 경우로, 타자는 자동적으로 아웃이 된다. 이 규칙은 내야수가 잡기 쉬운 플라이 볼을 더블 플레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잡지 않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1895년 이후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타자가 번트한 경우에 그같은 상황이 되었으면 인필드 플라이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
인플레이 상태에서 타자의 타격과 무관하게 주자가 태그 아웃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비진의 허점을 틈타 진루하는 것을 말한다.
|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고 가볍게 공에 갖다대는 것으로, 타자는 보통 1루에서 아웃되나 주자를 다음 루로 보내기 위해 행해진다.
|
공격 팀 9명의 선수들은 타순에 의해 타격기회를 가지며, 한 게임 중에는 타순의 변경이 허용되지 않는다. 1·2번 타자는 보통 발이 빠른 선수들로, 특히 1번 타자는 안타·포볼 등에 의한 진루율이 높은 선수가, 2번 타자는 히트 앤드 런에 능한 선수가 적격이다. 3번 타자는 타격기술·타력·주력 등이 복합적으로 우수한 선수가 적합하며, 4번과 5번 타자로는 장타에 능한 선수가 좋다. 그뒤의 타순은 보통 그외 수비수들로 구성된다.
|
선수교체는 주심이 허용하는 한, 공격 팀이든 수비 팀이든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교체된 선수는 같은 경기에 다시 출장할수 없다. 또한 감독이 선수교체 없이 수비수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
|
수비의 목적은 상대 팀의 득점을 막고 공격기회를 되찾는 것으로, 아웃된 선수는 다음 타격순서 때까지 타격기회를 갖지 못한다. 일반적인 아웃 방법에는 스트라이크 아웃, 플라이 볼 아웃, 태그 아웃, 포스 아웃(봉살) 등이 있다.
|
스트라이크 아웃은 타자가 3번의 스트라이크를 치지 못한 삼진 아웃을 말하며, 스트라이크는 타자가 공을 헛치거나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경우, 파울 볼 등이 해당된다. 투스트라이크 이후의 파울 볼은 스트라이크로 계산되지 않으나, 번트에 의한 파울 볼은 스트라이크로 간주된다. 스트라이크 존은 타자의 어깨와 바지 상단의 중간쯤의 높이를 상한으로, 타자의 무릎상단을 하한으로 하는 홈 플레이트 정면 너비(43.18㎝ : 17인치) 위의 공간을 가리키는 가상지역을 말한다. 플라이 볼 아웃은 타자가 친 공이 땅에 닿기 전에 수비수가 잡은 경우이며, 태그 아웃은 주자가 다음 루에 도달하기 전에 공을 가진 수비수가 주자를 터치한 경우이다. 또 포스 아웃은 한 루에 2명의 타자가 있을 수 없다는 규칙에 의해 공을 가진 수비수가 주자를 태그하지 않고 루만 터치해도 되는 경우의 아웃을 말한다.
|
인텐셔널 패스(intentional pass)
투수가 전략적 이유로 타자를 1루로 진루시키는 고의 또는 경원의 볼 넷을 말하며, 1루에 주자가 없고 현재의 타자보다 다음 타자를 아웃시키기 쉬운 경우 이를 행한다.
|
|
|
좌익수·중견수·우익수로 구성되며, 내야를 넘는 중·장거리타를 주로 처리한다. 강한 어깨와 정확한 송구력이 외야수의 필수조건이며, 외야수들의 수비위치는 공격 팀의 타자에 따라 약간씩 조정되기도 한다.
|
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의 4명으로 구성된다. 때로 직선 타구를 잡아내기도 하지만 주로 땅볼을 처리한다. 주자가 있는 루의 내야수는 주자를 감시하는 역할도 해야 하며, 외야수들과 마찬가지로 공격 팀의 타자에 따라 수비위치를 조정한다. 먼저, 유격수는 가장 어렵고 힘이 많이 들며 땅볼의 처리 횟수가 많은 수비위치로, 뛰어난 민첩성, 넓은 수비범위, 빠르고 정확한 송구력 등이 요구된다. 2루수의 역할은 유격수와 비슷하지만, 유격수에 비해 1루에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1루로의 송구가 다소 쉽다. 3루수에게는 그다지 넓은 수비범위가 요구되지는 않지만 내야수 중 타자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반사신경이 뛰어나야 하며, 특히 번트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1루수는 다른 내야수들에 비해 다소 수월한 수비위치라고 할 수 있으며, 왼손잡이인 경우가 유리하고, 주로 장타력이 있는 선수가 맡게 된다. 1루수가 타자의 번트에 대비하는 경우 1루는 2루수 또는 투수가 맡게 된다.
|
배터리는 투수와 포수를 말한다. 투수는 투구력뿐만 아니라 수비수로서 번트, 내야 땅볼 등의 처리에도 뛰어나야 한다. 또 번트 등 위급시 1루수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포수는 경기 전체를 통해 투수의 투구를 잘 잡아야 한다. 캐처 박스 주변의 파울 지역과 내야에 떨어지는 플라이 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며, 주자의 도루에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포수에게는 플라이 볼의 방향을 감지해내는 능력과 주자의 도루를 저지할 수 있는 정확하고 빠른 송구력이 필요하다. 또한 포수는 수비수로서뿐만 아니라 게임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즉 투수의 투구를 타자에 따라 리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
1870년대에 리그 야구가 시작되면서 투수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투수의 컨트롤과 스피드는 경기에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현재 메이저 리그 각 팀 24명의 선수 중 보통 10여 명이 투수이다. 각 경기에는 이 가운데 1명이 선발로 나서고 나머지 선수는 구원투수로 대기한다. 구원투수의 역할은 1950년대 이후 중요시되었고, 강한 구원투수진 없이 우승 팀이 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투수가 목표한 지역에 공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보통 스트라이크 존이 투구시의 목표가 된다.
|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투수의 위반행위로 투구 전 앞가슴높이에서 두 손으로 공을 잡지 않거나 투구동작에 들어갔으나 투구동작이 연속되지 않을 경우, 투구시 투구판에 발을 대지 않은 경우, 1루 주자가 루에 있을 때 견제구를 던지려다 안 던진 경우 등이 해당되며, 심판이 보크를 선언하면 모든 주자들이 1루씩 전진하게 된다.
|
투구방법(pitching repertoire)
1860년대 후반 이후 직구와 다른 여러 형태의 투구법이 개발되었지만, 여전히 강속구가 투구기술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투구능력의 기준이 되고 있다. 커브는 공에 회전을 주어 휘어들어가게 하는 투구법으로, 우완투수의 경우 좌측으로, 좌완투수의 경우 우측으로 공이 휘게 된다. 스크루 볼은 커브와 반대방향으로 공이 휘어들어가도록 하는 투구법으로 커브에 비해 공이 꺾이는 폭은 작아도 타자 가까이에서 자연스럽게 꺾여들어간다. 비교적 새로운 투구법인 슬라이더는 속구와 커브의 중간으로 그 장점들을 살린 투구법이며, 너클 볼은 공에 회전을 주지 않고 불안정하게 공기를 타고 들어가게 하는 투구법으로, 타자가 쳐내기 어렵지만 포수도 잡아내기 어려워 포수가 공을 뒤로 빠뜨릴 위험이 있다.
|
|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렛이 황성기숙청년회 회원들에게 처음으로 야구를 소개했다. 이듬해 2월 11일에 최초의 야구 경기가 황성기숙청년회와 덕어(독일어)학교 사이에 열려 덕어학교 팀이 승리했다. 이후 서울의 보성고등학교·오성학교·경신학교·배재학당 등 여러 야구 팀이 조직되어 1911년 11월에는 황성기숙청년회 팀이 처음으로 일본원정에 올랐다. 야구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 11월 4일부터 3일간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5개 학생 팀과 5개 실업 팀이 참가한 가운데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그 후 야구는 발전을 거듭했으나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경기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46년 3월 18일 조선야구협회의 창립대회가 열렸고 5월에는 조선학생야구연맹과 한성실업야구연맹이 결성되었다. 1948년 3월 13일에는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세계야구연맹 가입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1949년 세계 아마추어 야구연맹에 가입이 승인되어, 그 후 세계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1954년에는 8·15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원정경기에 나섰고, 1956년 10월 7일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착공되었으며, 1959년 6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4승 2패의 성적으로 2위를 거두었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6전 3승 1무 2패로 2위를 차지했고 이때부터 해마다 한·일야구교환경기를 갖게 되었다. 1965년 12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6전 3승 1무 2패로 2위, 1966년 8월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4위, 1967년 8월 22일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6전 3승 1무 2패로 2위를 차지했다. 1969년에는 제23차 대의원총회에서 대한체육회의 종합규칙에 의한 전면적인 규약 개정이 단행되었고, 이어 1956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말로 된 공인 야구규칙서가 발간되었다.
1971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5승 1무 2패로 8년 만에 정상을 차지했고, 1973년 1월 15일의 제27차 대의원총회는 협회의 영문호칭을 'Korea Amateur Baseball Association'으로 바꿀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11~12월 니카라과의 마나과 시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세계야구연맹총회에서는 쿠바 및 중앙·남 아메리카 3, 4개국이 주도하는 국제야구연맹을 탈피해 새로운 세계야구연맹을 창설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975년 6월 21부터 7월 1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1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7승 1무로 우승하고, 8~9월 캐나다의 멍크턴과 몬트리올에서 열린 대륙간 컵 국제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3승 4패로 3위를 기록했다. 한편 1976년 1월 4일과 4월 6일 2차례에 걸쳐 멕시코 시에서 열린 세계야구연맹과 국제야구연맹의 통합총회는 새로운 세계조직으로 국제야구연맹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1977년 11월 한국은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열린 월드 슈퍼 컵 세계야구대회에서 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야구에 출전해 2승 4패로 4위를 차지했다. 198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5승 6패로 8위였고, 9월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의 시범경기에서는 2승 2패로 4위를 차지했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는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아쉽게도 예선탈락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이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회에서는 일본에 콜드 게임으로 패하는 등 1승 6패의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그러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는 일본을 물리치고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연출했다. 프로 야구는 1982년 6개 구단으로 출범하여 2002년 현재 3개 구단이 늘어난 9개 구단으로서 한국의 야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1991년부터 한·일 슈퍼 게임을 개최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