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포천에 위치한 모부대에 일이있어 가는 길에 의정부와 포천의 경계에 위치한 축석령의 의정부지구전투기념비를
방문했습니다. 원래는 홍경호님과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사업상 급한 일이 생기셔서 같이 못가서 아쉬웠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방문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 했으나 이곳에 오니 초가을 날씨가 찾아왔고 길에는 농작물을 말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
었습니다. 원래는 이길이 철원 포천 의정부 서울로 이어지는 길이었으나 교통량의 증가로 큰길이 나면서 대부분의 차량은
큰길로 가고 이길을 지나는 차량은 뜸하게 있습니다. 의정부와 포천의 경계부분에 있는 축석령은 문외한인 제가 봐도
북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충지로 안양과 수원의 경계인 지지대 고개나 수원과 오산의 경계인 죽미령 처럼 방어선을
친다면 적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축석령은 직선으로 펼쳐진 길이 아니고 구부러진 길이다
보니 적의 전차를 공격하기 적당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축석령 전적비 설명도엔 동란당시의 개략적인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사진의 글씨가 작고 스텐레스라 빛이
나다 보니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당시 포병학교 교도대 (현재는 8사단 50포병대대)가 적전차에 맞서서 M3 105mm곡사포를 직접조준하게 된 상황과 특공대
를선발해 도로에 방열을 하여 적전차를 격파했으나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전적비 까지의 길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서울과 경기북부를 지나는 많은 차량의 모습이 아래로 보이지
만 이곳은 너무도 조용하고 소박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의 모습입니다. 당시 김풍익 중령의 계급은 소령이었습니다. 전사 후 한계급 승진했습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지만 남쪽을 향한 동상과 북쪽끝은 향한 비석이 인상적입니다. 깃발과 당시 포병의 개인화기인 카빈을
볼 수 있습니다.
88년 당시 이 기념비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분들의 대략적인 설명으로 당시엔 포병학교가 광주에 위치하여 전투병과학교 산하
포병학부였고 그곳에도 김풍익 중령의 동상이 있는데 지금은 장성으로 이동하여 다시 배치했는데 저도 광주에서 특기병교육 받
을 때 이분의 동상앞을 지나다니기도 했고 초군반 장교분들 임지에 갈때 이곳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김중령의 임관기수는 느리지만 입대전의 경력(일본군 장교)을 참고하여 진급이 빨랐습니다.
지금 8사단 예하의 50포병대대는 김중령의 모교인 당진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상도를 동판에 새긴 것으로 김풍익 중령이 적전차를 격파하는 장면인데 이 그림 말고 또다른 그림이 있는데
책과 동판에 이 그림을 새겼습니다.
당시의 전사자 명단인데 열한분 중 다섯분은 알 수 있는데 나머지는 무명용사이고 현충원에 위패는 있겠지만 유골은 근처
산에 매장되어 찾을 수 없었답니다.
비석 뒷부분의 헌시입니다.
우연인지 하늘엔 치누크헬기가 낮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서울로 되돌아 가는길 북쪽으로 향하는 국군의 전차대대 행렬을 볼 수 있습니다. 육중한 무게에 굉음을 내며 내달
리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작은 곡사포 105mm를 직접조준하여 적과 맞선 군신 김풍익 중령과 포병학교 교도대 병력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동란 초기 우리포병이 사용한 M3 105mm곡사포로 이것이 우리군 최대의 화력이었습니다. 미군의 경우는 보병연대급에 있던
화포로 공수부대에서도 운용한 화포로 당시 미군은 이 장비를 도태한 것으로 보이고 우리군과 대만군(사진에서 본적이 있습니
다.)등에 공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전 고제헌님이 유럽에 출장가셔서 구석구석 촬영해오셨는데 우리나라엔 사천에 한문 남아있는 장비로 포병 투혼의 상징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올려주신 고제헌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M101 105mm곡사포는 당시 미군이 오산죽미령에서 처음 사용했고 동란초기엔 이렇게 작고 약한 대포를
이용하여 북한 인민군을 춘천에서 박살내고 강릉에서 격전을 하고 육박전을 하고 전포대 요원들을 폐쇄기를 분해하여 사용
불능으로 만들어 후퇴를 하고 문산에서 적과 맞선 이용전소령,노재린 소령(야전포병가의 작사작곡가이며 육사동기생이면
월남한 청년장교분들)은 끝까지 적과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고 포병학교의 교도대장 답게 김풍익 중령은 서울을 조기 점령
하려고 했던 북한인민군의 전차에 맞서 직접조준사격으로 격파를 하고 장렬히 대대 병사들과 산화했습니다.
적 전차가 나타났던 장소로 추정됩니다.
김풍익 중령이 지휘하고 포대장 장세풍대위(중령추서)가 인솔하여 적전차를 향해 대포를 쏜 곳으로 추정합니다. 이길을 따
라 가면 의정부 시내가 나오고 바로 서울 미아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양한 평가들이 있을 것이고 혹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탄생한 영웅을 미화한다고 볼 수 있으나 군인
의 임무를 막중히 수행하다 산화한 것에 대해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글 읽어 주신분께 감사드립니다. 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