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지방해양항만청에서 건국 60주년 독도등대 10주년을 맞이하여 독도의 중요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일 명예등대장을 전국에 10명을 공모햇는데 응모한바 다행히 본인이 선발되여 2명 1조로 편성 5개조로 나누어 1박 2일 일정으로 독도등대장을 체험 했는데 그때 체험한 사진을 여기 올립니다. 독도를 한번도 가보지 봇하신분은 독도등대의 생활상과 독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수 있을것이며 독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
포항지방해양항만청 에서는 독도명예등대장 101며명분의 등대장 체험사진과 체험기를 모아 책차를 발간 하였는데 독도에 대하여 간결 하면서도 상세하게 많은 사진(천연색)을 넣어 97p분량의 책자를 발간 하였느데 전국 국가기관및 자치단체 (도, 시군 민원실) 및 교육기관 (초, 중 ,고 , 대학 )에 교육용으로 배포 되였으니 독도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분은 위 기관 민원실등에 가시는 길이 있으며 한번 보시면 상세하게 독도를 안내 하고 있습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독도야 잘 있었느냐? (독도 명예등대장 체험기)
독도 명예등대장 손 중 락
1.독도 명예등대장 응모
2008. 8. 7자 매일신문에 “독도 일일 등대장 모십니다“ 일반인 대상 주1회 ”우리 땅 지킴이체험“ 이란 제하에, 포항지방해양항만청은 건국 60주년 및 독도유인등대 10주년을 맞아 국토의 최동단 독도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우리 땅 독도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독도등대 일일 명예등대장 체험행사“ 를 실시한다고 보도 하였다.
선발인원은 전국 총 5명으로 제한, 너무나 작은 인원임으로 응모해도 선임될 확률이 거의 없을 것 같아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낙선 될 때 되더라도 한번 응모나 해 보자고 결심하고 ”독도등대 일일 명예등대장 신청서“ 를 작성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어느 날 아는 분으로 부터 “독도일일 명예등대장 선임” 발표가 매일신문에 보도 되었다고 하면서 축하한다고 하기에 그 순간 하늘을 나는 듯 기뻤다. 즉시 확인한바 “독도등대 1일 명예등대장 선발자 명단” 이란 제하에 마지막 5회 차 10월 20일, 체험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너무나 소수인원을 선발하다 보니 불공정 할 수도 있겠다는 나의 예감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는 이 나라도 살맛나는 공정한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 했다.
그 뒤 들은바 에 의하면 당초 선발 예정 인원은 5명으로 확정 되어 있었으나 지원자가 너무 많아 당초 선발 인원을 배로 늘려 여러 차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2배수로 10명을 선발 하였다고 했다.
체험일정은 9.22~10.21까지이며 2명1조로 편성하여 기상등을 감안 1주일에 1개초씩 1박2일 일정으로 독도에 입항 하도록 되어있고 나는 5회차 (10.20~21) 마지막조에 체험일로 확정 되어 있었다.
2.독도에 대한 나의 추억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일본 고위 각료들의 연일 망언이 이 따르고 있고 또 역사교과서 왜곡 등으로 우리 국민들의 감정이 그 어느 때 보다 고조 되고 있는 이 마당에 경상북도에서 지사님이 참석한 가운데 각 애국단체들이 모여 대대적인 8.15 행사를 독도 선착장에서 독도등대와 독도경비대를 환하게 불을 밝힌 체 일본을 강력히 규탄하는 모습을 보니 50 여 년 전 25세 때 피 끓는 젊은 나이에 말로 형용 할 수 없고 지금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애로와 난관을 극복 하면서 독도경비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동료 한사람은 (고 허학도) 안전사고로(추락) 순직한 한바 도 있고 또 경비원 한사람은 근무 중 발병하여 응급가료가 요구되는 중환자였으나 동절기라 파도가 높아 선박을 접안 할 수 없어 긴급후송을 못하여 여러 날 지체 후 울릉보건소로 이송 하고보니 응급조치가 너무 늦어 손 한번 못 쓰고 곧 순직한 바도 있다. 지금과 같이 헬리곱터가 없는 시절이라 독도경비 근무 중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긴급 수송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에 속수무책 이였다.
당시 독도경비는 형언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온갖 애로와 난관을 극복 하면서 때로는 목숨마저 담보하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이 외로운 바위섬 독도가 우리국토 이기 때문에 외침(外侵)으로부터 꼭 지켜 내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한마디 불평불만 없이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성실히 수행 했든 그때를 회상하니 불현듯 독도를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졌다.
나는 올해 75세이다. 농촌에서 참으로 불행한 시대에 태여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 되었고 한글을 겨우 익혀 중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했고 피란 다니다가 공부도 제대로 못한 채 고교에 진학 하였으나 학제가 변경 되여 9월에서 3월로 바뀌는 바람에 겨울방학 지나자 한 학년 올라가고 전쟁의 와중에서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에 당시 18세의 어린나이에 육군에 입대 2년 복무하고 제대 하였으나 농촌 형편이 어려워 복학을 포기 하였다.
당시는 6.25 전쟁 중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고 치안 수요는 많았으나 일자리는 전무한 시대였다. 마침 거리에 경찰관 공채 공고 벽보를 보고 응시한바 합격되어 경찰전문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영천서 경무과에서 근무 하든 중 미지의 세계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어느 누구도 희망 하지 않는 오지 중 오지인 울릉도 근무를 한번 체험 하고 싶어 희망하여 울릉경찰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울릉도민의 생활상은 참으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울릉도 처녀가 시집가기 전 까지 쌀 다섯 되를 못 먹고 시집간다고 하였다. 울릉도는 서면 태하동 일부를 제외하고 논농사가 전무하고 95% 이상이 비탈진 산자락에 밭농사뿐이고 주식은 강냉이가 대부 분이였다. 그나마 식량이 절대 부족한 현상으로 많은 주민이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연명 하는 형편 이였다..
전기와 수도도 없고 병원 하나 반듯 한 것 없고 교통도 육로는 도로가 개설 되어 있지 않아 험준한 산 준령을 넘어 도보로 걸어가야 하고 그나마 울릉도는 동절기는 눈이 많이 와서 육로가 두절되는 것이 일쑤이고 해상은 항구마다 대부분 방파제와 접안시설이 없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배를 띄울 수 없어 해상교통도 두절되기 일쑤여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수송수단이 전무한 아주 열악한 환경 이였다.
공무원 특히 경찰관은 육지에서 전입 희망자가 전무하여 현지에서 특채에만 의존 했으며 울릉도 근무 희망자가 없어 육지와 교류는 전무한 실정 이었다.
당시 사회는 혼란하고 국력이 독도경비 문제까지 손을 쓸 겨를이 없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순철 (울릉읍 도동거주)씨가 뜻 있는 젊은이를 규합 자발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정부의 아무런 지원 없이 어렵고 힘든 독도경비근무를 수행타가 휴전이 되고 점차 사회질서가 회복 되어 가면서 독도경비가 민간에서 경찰로 이관, 울릉경찰서에서 담당 하게 되었다.
당시는 경찰관 6~10명이 윤번제로 독도경비를 하였는데 근무여건이 얼마나 열악한지 형언 할 수 없었다. 지금과 같이 선박이 접안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지정된 교체기간에 제대로 교체가 이루어 지지 못해 1주일이상 때로는 10여일이상도 지연되기가 일수였다.
당시 나는 25세의 젊은 나이였고 또 독신 이였기 때문에 동료 및 선배 등 가사형편상 만 부득한 사정이 있는 분의 독도경비 근무를 대신한바 여러 차례 있어 만 2년간 울릉도 근무 중 절반이상, 일 년을 넘게 독도근무를 했다.
교체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못하면 식량이 떨어져 죽을 끌어먹은 적도 한두 번 아니었다. 또 부식도 떨어 저서 간장만으로 맨밥을 먹은 적도 있고 날씨가 좋은 여름철에는 바위에 붙은 따개비를 따서 죽을 써 먹은 적도 몇 번 있었다.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 죽을 써서 먹어나 한두 끼 굶는 것은 문제없으나 가뭄이 들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식수가 없어 쌀이 있어도 밥을 해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지금과 같이 바닷물을 정수한 수도시설이 없어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만 비가오지 않아도 식수가 모자라 애로가 많았다.
경비막사는 독도(東島) 정상에 집 높이만큼 땅을 파서 허름한 목조건물로 15평 정도에 조그마한 방 한 칸과 창고와 마루 겸 식당 하나 그리고 조그마한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지상에 그대로 건축 하면 강풍에 목조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땅을 파서 지붕이 동도정상 높이와 같게 하여 바람이 지붕 위를 스쳐 지나도록 건축 하였고 부엌 한쪽에는 비가 오면 지붕위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저장하는 물탱크를 만들어 놓아 그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식수로 사용했다.
가믐이 심하여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없어 세수는 엄두도 못 내고 양치질도 못하고 때로는 밥도 해 먹을 수 없게 된다. 서도(西島)에는 물골이 있어 항상 물이 나오는 곳이 있으나 운반 수단이 전무 했다. 그러므로 독도의 빗물 한 방울은 생명수이다.
여름철은 방충망 시설이 없어 날 파리와 모기 등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하고 겨울이면 폭설과 폭풍으로 방안에 같혀 있어야만 했다. 위생시설은 전무하고 화장실도 없다 화장실을 철사 줄로 단단히 묶어 만들어 놓으면 밤사이 강풍에 날아가 버리고 흔적도 없다.
밤에는 방안에 호롱 불 한개 뿐이다. 해가지면 어두워 천지를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강풍소리와 파도소리뿐이다. TV도 라디오도 당연이 없는 시대였다 조그마한 발전기 한 대가 있으나 아침저녁으로 두 번 발전 하여 본서에 경비근무 이상 유무만 무전으로 타전한다. 만약 이 발전기가 고장 나면 통신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에 발전기는 생명과 같이 아끼고 철저히 정비한다.
그리고 동도 해안에서 경비 막사까지의 통로가 지금 같이 쉽게 오를 수 있는 계단식 통로가 없고 안전시설이 전무하여 조그만 방심 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만다. 고 허학도 추락 순직 이후에도 추락 순직은 계속 되였고 현재까지 계6명이 추락, 순직 한바 있어 안타까운 마음 금 할 길이 없다.
그 당시 독도 경비근무자의 주 부식비는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지급되는 수준과 동일하게 책정 되였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당시 장비로는 기관포 1정 (케레바 50) M1 소총 몇 정이 전부였다.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정(순시선)과 일본 어선들이 수시로 독도 앞바다에 출현하기 때문에 조금만 허점을 보이기만 하면 곧 상륙할 듯하다. 때로는 코밑 까지 가까이 진입을 시도한다. 그 때는 핸드 마이크로 퇴각명령을 하고 몇 번 명령해도 퇴각하지 않을 시는 기관포를 발사하여 퇴각시키기도 몇 차례 있었다. 다시 독도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일본 경비정 후미에 구멍을 몇 개 뚫어 준적도 있다. 그 뒤로는 독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이따금 멀리 떨어져서 독도를 관측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 열악한 독도, 인적 없는 외로운 섬, 이 섬에도 기상이 좋은날 아침 해가 뜰 무렴 해안선을 순찰을 하면, 서도((西島) 옆 남쪽 가제바위 위에, 어떤 때는 서도 동북쪽 가제바위 위에 수많은 가제 (물개, 바다사자)들이 단잠을 자고 있고 그중 한 놈은 반듯이 보초를 서고 있다. 때로는 수많은 가제들이 무리를 지어 독도 주위 바다 위를 송아지 울음소리와 비스한 소리를 내며 때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은 독도 경비대원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관경으로서 참으로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살아진지 오래라고 한다. 어떻게 하든지 가제가 다시 돌아 올수 있게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동도 (東島)) 앞바다는 공해라고 하며 때때로 국적을 알 수없는 큰 화물선들이 어디로 가는지 지나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소련으로 가는 배라고 하였다.
이 외롭고 쓸쓸한 열악한 바위섬에도 2월 하순쯤, 봄이 오면 수천 만 마리의 괭이갈매기들이 날아와 독도 섬과 주위 바다를 뒤 덮는다. 이때부터 괭이 갈매기는 짝 짖기를 시작 한다.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된 괭이갈매기는 4월로 접어들면 독도의 산기슭에 알이 수북 싸이게 된다. 그 알은 5월초부터 새끼를 부화 시키고 우리경비원들의 발이 닿지 않는 바위틈에 많은 갈매기들이 알을 낳아 품고 있고 얼마쯤 지나면 깊은 골자기에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 갈매기 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어미를 기다리며 까우 까우 애처롭게 울고 있다.
푸른 바다 위를 시원스럽게 나는 어미 갈매기도 소리쳐 우는데 독도는 정말로 갈매기를 위하여 생긴 섬인 듯하다. 하루 종일 갈매기 울음소리에 해가 뜨고 해가 진다. 8월 중순 되면 독도는 이미 가을로 접어든다. 이 하늘에는 더 이상 괭이갈매기를 볼 수 없게 된다. 성난 태풍이 한 두 차례 지나면 독도는 여름 기운을 말끔히 씻어 내고 잠시 가을 속으로 접어들다가 독도근해 오징어 조업하든 어선들도 모두 귀향하고 쓸쓸한 독도에는 경비대원만 홀로 남게 된다. 11월이 되면 북쪽에서 한류가 내려오고 한류는 겨울을 불어와서 진눈깨비가 독도 위를 나부끼게 된다.
눈이 자주 오는 독도에는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겨울철 독도는 하얗게 눈 덮인 백설의 세계로 변 할 때는 독도의 설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강풍이 불기 시작하게 되면 독도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고 외로움은 더해 가고 내년 2월 중순경 괭이갈매기가 새로운 둥지를 틀기 위해 날아드는 그때가 하염없이 그리워진다.
독도에서 사계절을 체험해 본바 있는 나에게는 독도가 내 생애에 최고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 하고 있다. 폭설과 강풍만 있는 겨울철은 외로움이 뼈 속 까지 숨어든다. 지금과 같은 접안 시설이 없어 조금만 파도가 일어도 제때 교대가 이루어 지지 못 했으며 20일간 교대근무가 일주이나 10여일이지나 지나서 교대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크고 성능이 우수한 경비정이 아니라 10톤 미만의 조그마한 선박으로 교체 하다 보니 조금만 파도가 쳐도 고통스러운 뱃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말로 이루 형언 할 수 없는 온갖 어려움만 겪었든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꼭 한번 이번 기회에 독도 명예등대장에 선임 되어 그동안 독도가 얼마나 변 했는지 꼭 체험 하고픈 마음이 남달리 간절했든 것이다.
3.독도등대 명예등대장 체험
상상외로 일기가 순조로워 예정 되로 4회 차 까지 마치고 드디어 마지막 5회 차인 내가 독도 명예등대장 체험을 하게 되였다 일정은 10월 20일! 나와 한조는 문종흠 전직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서 국고가관이 확고하시고 교육자로서 남다른 애국심을 간직 하신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10월 20일 08:00 포항해양항만청 해양교통시설과장실에서 박광훈 과장님으로부터 약30여 분간 항만청의 일반현황과 해양교통시설 소개, 등대박물관 운영현황, 항로 표지시설 및 장비현황, 독도항로 표지현황에 대하여 자세한 소양교육을 받았다.
항만청은 어민 외는 직접 생활에 관련이 없기에 때문에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자세히는 몰았다. 뒤 늦게나마 국가 업무 중 아주 중요한 업무를 담당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항만청의 중요임무를 보면, 항로표지의의 설치운영 및 유지보수, 사설항로표지의 설치허가 및 지도 감독, 유인등대정비 및 해양문화공간 조성, 항로표지용품의 수급 및 보급, 항로표지선의 관리 운영, 등대박물관의 육성 및 지도감독 등 참으로 다양하고 해양업무에 없어서는 않될 꼭 필요한 업무를 담당 하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업무현황과 등대장 소양교육을 받고 곧 바로 회의실에서 전 직원 참석 하에 권준영 청장님으로부터 독도등대 명예등대장 임명장 과 기념패를 받고 청장님 및 명에등대장 각각 인사를 마치고 바로 여객 터미널널로 이동 승선 수속 후 예정대로 썬플라워호에 승선 10:30 포항항을 출항했다.
마침 내가 앉은 선실 앞에 대형 TV에서 DVD 상영을 하는데 “평화의 섬 독도“ ”아름다운 섬 독도“ ”독도는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입니다‘ (한글판 영문판)라고 하고 있다.. 포항 울릉 독도에 운항 하는 여객선 이용객을 대상으로 독도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과 역사의식을 심어 주기 위하여 포항지방해양항만청에서 배포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용은 독도 관련 홍보로서 최근 일본의 교과서 왜곡 및 미국의 독도 표기 원산회복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독도가 지리적, 역사적, 국제법상 근거에 따른 명확한 우리 고유영토 라는 것을 확실히 알리려주는 귀중한 내용이었다.
포항청 홈페이지 (http:⁄⁄pohang.mltm.go.kr) ”독도는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입니다.“ (한글판. 영문판 )라고 띠워져 있어 여객선 이용객 뿐 아니라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독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중요성을 홍보하는 ”독도알림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였다.
13:30에 울릉도에 도착 하선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14:30 울릉 출항 독도 행 한계례호에 승선 후 1시간 30분만인 15:30분에 독도에 도착 김성도 독도리 리장 과 박영식 독도등대장님의 영접을 받고 등대로 이동하여 독도등대장님 으로부터 독도등대현황을 프리핑 받았다. 독도항로표시관리사무소 현황을 요약 해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반현황
-행정구역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30-3번지
-등대위치 : ( N 37˚ 14.4' , E 131˚ 52.1' )
-육지와의거리 : 포항→ 울릉도 도동항 217km, 후포→ 울릉 도동항 159km,
동해→ 울릉도 도동항 161km, 휴전선→ 울릉 도동항 118km,
울릉 도동항→ 독도 87.4km
-면 적 : 161.14㎡ (국토해양부 소유면적 187.554㎡)
동도면적 : 73.297㎡ (22.172평), 높이 98.6m (둘레 22.172km)
서도면적 : 88.740㎡ (26.844평) 높이 : 168.5m (둘레 2.6km)
기타도서 : 89개 : 25.517㎡ (71719평)
-주요연혁 - 1954.08.10 : 최초점등(철탑조)
- 1967.07.08. : 등탑개량(백원형콘크리트조 4.3m)
- 1972.12.08 : 우리나라 최초로 태양전지 설치(6V, 5.04W)
- 1987.09.28. : 등명기교체(FA 251→251mm 회전식등명기)
- 1995.08.25. : 등탑개량 (백원형 콘크리트조 8.3m)
- 199812.10. : 유인등대로 광력증강(KRB670)
(2). 항로표지 시설현황
① 항로표지기능
-광파→등명기 KRB-670, 상용전구 HQY-150, 등질 FW10s, 등고 104m,
부동광도(cd) 214만 유효광도 113만, 광달거리(마일) 지리5 광학41 명목25,
-전파→전파기기RACON, 추력 0.6W, 발사부호 K(―ㆍ-), 발사주기 24시간발사 (ON20s, OFF 40s), 통달거리 10마일.
② 부지 및 영조물 현황
-부지 161㎡, 등탑 원형콘크리트 높이15m(건립 98.12), 복합건물 철근콘크리트조 161㎡, (사무실 동력실 추전지실 숙소 등) 조수기 1일 3t 생산
-전원, 태양전지 7.7KW(43W×180ao) 발광 발전기 2대 (75KW,20KW)
③ 주요장비현황
등명기, RACON, 발전기, 태양전지, 축전지, 충방전조절기, 충전기, 인버터, 조수기 (1일3t 생산)
(3). 중요임무
-하행선박의 안전을 위한 광파. 음파표지 관리운영
-항행선박의 해상교통안전확보를 위해 등대고장. 기능자애시 긴급복구
-해양기상관측. 조업선박 운항정보 제공 등 해양수산전지기지 역할 수행
(위탁업무 :연안정지 해양관측 (1일1회)
(4). 근무체계
-근무인원 6명 2개조 3명식 1개월식 교대근무
-동해해양경찰서 경비정이용 교대
포항→울릉도 : 여객선 선플라워호 (117마일/3시간30분소요)
울릉도→독도 : 해경경비정 503호 (49마일/3시간소요)
(5). 독도형성
-약 5.000만전 화산분출, 적벽과 암초형성
-동도 서도와 89개 돌섬 및 암초로 형성
-해발 124~157m, 둘레 4.7km, 동도와 서도간 촤단거리 175m
(6). 기상 : 온난 다습하며 , 눈이 많이 내림 (강수량 10.300mm)
(7). 특기사항
- 독도의식생 : 천연기념물 336호 독도전역 천연보호구역
식물 : 섬괴불나무, 해송, 향나무등 22종
애향회, 푸른울릉독오가꾸기 등 7개 단체에서 수목 1만여주 식재
수산물 : 오징어, 저녹, 소라, 해삼, 문어, 새우, 미역, 김, 등
대화퇴, 독도어장 연간 오징어 생산량 6.230만톤
조류 : 바다제비, 슴새, 괭이괄매기, 집단 번식지
(8). 독도 시설물
-접안시설 80m (500톤급 1척),배후면적 840 진입로 99m
-경비시설 : 총2개소, 운반용 삭도, 숙소(막사 9개동, 레이더기지, 헬리콥터 착륙장
-어민관련시설 : 접안시설, 어민숙소, 해산물 건조장, 전마선 인양기
-도로시설 : 지정통로(길이 89m, 폭 0.5~0.8m),철제교량 (3개소)
-수자원시설 : 정수시설 ,정수탱크
-식품 저장시설 : 기름탱크 (4개소) 예비저장고(FRP, 19개소)
-기상 관측시설 : 자동 기상관측소(1개소)
-등대시설 : 유인등대 숙소 및 등탑)
-탑 : RD용 통신탑
-표석등 기타 : 위령비(5개소), 명패석(12개소), 안내표지판(2개소), 우체통(1개)
-기타 설비 : 통신시설, 발전시설 등이 있다. 위와 같은 현황 설명을 들은 후,
독도등대장의 안내로 등대 내 외부를 돌아보면서 실제로 등대장 체험에 들어갔다. 17:00 부터 축전지 전압측정, 솔라판 및 파리판 등 시설물을 점검 후 깨끗이 청소하고 기상 관측 방법숙지, 등명기 주기 및 초점을 점검한 후 각종장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저녁 식사 후 등대일상생활에 대한 토론과 의견을 교환한 후 20:30부터 01:00까지 DGPS, RACON, AIS 주기 광력 계기판 점검과 전파표지 작동상태확인, 등명기 섬광 검사를 실시하한 후 등대 내 외부 순찰을 마치고 근무를 2조에 인계했다. 05:30부터 06:00까지 등명기 소등 및 장비를 확인 하고. 축전지 비중. 전압 측정 주기, 광력. 계기판 등을 점검 후 근무일지를 작성하고 기상 관측하여 울릉기상대에 통보하고 동도정상에서 독도일출을 감상했다. 마침 기상이 좋아서 먼나 먼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 한국에서 제일 먼저 뜬 태양을 향하여 두 손 모아 잠시 이 나라가 또 다시 전 세계에 우뚝 설수 있도록 국운을 빌고 난후 일출 관경을 마음껏 사진에 담았다. 그 후 독도정상 주위를 답사하고 아름다운 독도 풍광을 감상하고 06:00부 터 07:00까지 발동 발전기 시운전. 태양전지판 및 파라핀 등 장비 및 식수를 점검하고 사무실 청소를 실시하였다.
07:30 아침 식사 후 동도 주위를 탐방한 후 09:00 기상관측 하여 울릉기상대에 통보하고 휴대품을 정리 하여 접안지로 이동하여 독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잠시 휴식 하다가 하룻밤 정들었든 독도리장, 등대원 및 등대장님과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상봉호에 승선 10:20 독도를 출발 섬을 한 바퀴를 돌면서 독도 주위를 선상에서 관람 하였다.
청정 해양의 황금어장이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독도를 바다 위 선상에서 가장 가깝게 관광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감개무량 하였다. 늠늠하고 우뚝게 솟은 독도등대의 등탑, 독도 경비대 막사 그리고 선명하게 암벽에 한국령(韓國領)) 이라고 색인 글씨, 탐건봉과 삼형제굴 바위 청장굴과 얼굴바위, 촛대바위, 한반도바위, 악어바위, 부채바위, 독립문바위, 그리고 가제바위, 그 밖에 크고 작은 이름 모를 바위 등을 바로 눈앞에 가까이에서 보았다, 참으로 오묘한 기암기석, 이 독도의 아름다운 풍광은 나를 사로잡았다. 동 서도를 한 바퀴 돌고나니 독도는 차츰차츰 눈앞에서 멀리 살 아저 가고 이윽고 망망대해를 항해 하다가 13:00경 울릉도에 도착 후 독도박물관을 돌아보고 도동 약수터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저동 항만청 숙소에서 하로 밤을 편히 쉬었다.
익일 이른 아침 저동항의 황홀한 일출관경을 보고 어판장 오징어 손질 하는 아낙네들의 삶의 현장을 보고난 후 저동에서 도동 까지 굴곡이 심한 해안도로를, 비와 바람이조각한 아름다운 행남((杏南)산책로를 1시간 남직이 걸어서 도동항에 도착 했다.
울릉도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하나 더 생겼다. 이 산책로 개설에 많은 경비가 소요된 듯하다. 여러 개의 연육교로 이어 졌는데 아름답게 가설 되였다; 울릉군 홍보지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길로 이어진다고 했다” “인생행로처럼 구불구불 펼쳐진 이 길이 이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인생 로가 나이테와 같이 행남 해안산책로의 저 곡선과 닮았기에 때문이리라! 했다“
저동항에서 행남으로 이어지는 이 산책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해안의 비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행남등대에 오르면 저동항의 절경도 한눈에 만끽 할 수 있다. 행남은 저동 사이의 해안을 끼고 있는 촌락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에는 살구꽃을 볼 수 있는 따뜻한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 한구루가 있었다 하여 행남(杏南)으로 전래되고 있으며 청명한 날에는 등탑에서 정 동쪽으로 독도를 볼 수 있으며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촛대바위를 눈 아래로 볼 수 있고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985m) 정상을 볼 수 있다.
행남등대는 울릉도의 동쪽 끝단 (등고 108m)에 위치하며 1954년 12월 무인등대로 설치 운영하다가 독도근해 조업선박이 증가하여 연안표지시설의 필요성이 있어 현제의 위치에 광력을 증가 하여 1979년 6월에 유인등대화 하였다고 한다. 2007년 7월에 소규모 공원과 전시실을 가춘 자연친화적인 해양친수문화공간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등대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저동항은 국가어항으로 동해의 어업전진기지로서 새벽에는 울릉도 근해에서 밤새 낚은 오징어의 참맛을 볼 수 있으며 수평선 넘어 일출광경을 볼 수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울릉도, 독도 관광객에게 울릉도의 새로운 광광명소인 아름다운 행남 산책로인 이 길을 꼭 한번 도보로 답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울릉도 독도는 우리 땅! 국토수호의지와 민족정신 함양이라는 관념이전에 정서적으로 한국인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자태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국민이면 그 누구든지 독도에 한번 가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우리의 땅 독도를 알고 우리 영토를 지키려는 사람뿐 아니라 이 땅의 참된 아름다움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독도에 한번 가보고 난후 독도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기회가 있으면 또 한 번 가고 싶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두 번 세 번 꼭 가고 싶다.
공식일정은 너무나 짧은 1박 2일이였기기에 많은 체험을 하지 못하여 아쉬운 감이 많다. 그래도 이번에 더 없는 독도 명에등대장 체험을 하게 해주신 포항지방항만청 권준영 청장님그리고 박광훈 해양교통시설과장님 이번 체험행사에 적극 협조해신 박영식 독도등대장님 김준동 한대규 등댕원님 독도리 김성도 이장님 그리고 우리들을 일일이 보살펴주신 김제근 소장님 그 박에 관계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독도 명예등대장 체헙은 내 일생에 좋은 추억이 되었다. 기회 있을 때 마다 독도등대 체험사항을,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항만청의 고유 업무를, 그 중에도 독도경비와 독도등대의 역할과 중요성을 널리 홍보하여야 갰다고 마음에 다짐을 해 보았다.
4.아름다운 섬 우리 땅 독도
도독는 포항에서 울릉도 까지 117마일 (217km) 후포에서 울릉도 까지 86마일(159km) 울릉도에서 독도 까지 87.4km나 멀리 떨어져 있다. 독도 선착장 준공 기념비에 “대한민국 동쪽 땅 끝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숨결로 잠재우고 우리 한국인의 얼을 독도에 심었노라” 고 새겨져 있다. 넓은 태평양 바다를 등지고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해 조국의 밝은 빛을 알리는 독도! 청정바다의 청아한 자태로 홀로 서 있는 독도! 울릉군 홍보지에 의하면 “홀로 서 있다는 건, 슬픔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며 자신을 세워 나가는 존재의 방식이다.”고 하였다..
독도는 460만 년 전에 생겨난 섬이며 250만년 된 울릉도, 120만년 된 제주도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독도는 동해의 거친 파도와 맞서며 당당히 서 있기에 우리 민족에게는 자존의 상징이 되었다고 했다. 독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다. 하지만 오랜 침식작용으로 250만 년 전 두 개로 나뉘어졌다고 하며 그 주위에 크고 작은 89개의 부속 섬들이 형제처럼 정겹게 올망졸망 서 있다. 유리처럼 속 훤히 드려다 보이는 맑은 바닷물과 절묘한 형상의 기암기석이 마치 해상공원 같다.
독도는 청정해역의 황금어장이며. 빼어난 풍광을 지닌 해양 동식물의 보고이다. 동해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동도는 남쪽의 비탈길을 빼면 60도가 넘는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도의 독립문 바위와 주변에 크고 작은 암봉, 서도의 가제바위와 탐건봉 등은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기암 전시장처럼 보인다. 바다 섬이지만 섬기린초, 땅채송화, 괭이밥 등이 철따라 꽃을 피우고 수정처럼 맑은 바다에는 자리돔과 돌돔, 오지어, 문어 가오리 등 온갖 어종들이 살고 있다.
쪽빛 하늘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흙비들기, 솔개, 쇠가마우지, 노랑지빠귀, 슴새, 황조롱이, 물수리, 노랑지빠퀴 등이 화려한 군무가 선보인다. 봄철에는 수천만 마리의 괭이갈매가 독도의 하늘을 뒤 덮는다. 이처럼 독도의 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엇갈리는 황금 어장이며 해양 동식물의 보고이다. 그리고 독도 근해 해저에는 천연 가스등 지하자원이 무진장 매장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지만 당당한 섬을 닮은 형형색색의 맵시 있는 독도의 식물들은 제가 살고 있는 곳의 환경과 품성을 닮아간다. 독도에 자생 하는 식물은 풍파 때문에 숲을 이루지 못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단단하고 작지만 당당해 보인다. 쇠비름, 기린초, 주가리, 괭이밥, 쑥부쟁이, 등 60여종,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바위에 엎드려 저마다 아름다움과 향기를 뿜어낸다. 특히 섬제 비쑥, 해국, 땅채송화가 해안 절벽에 제각기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독도의 푸른 창공을 수놓는 독도의 조류! 독도는 수천 만리 먼길을 이동 하다가 지친 철새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구원의 섬이다. 60여종의 조류들이 서식 하거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중에 잠시 머무르곤 한다. 사방 200리에 독도를 제외 하고는 큰 섬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살아가는 괭이갈매기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풍성한 해양생태계의 보고! 독도의 해저생태계를 보면 수면 아래에 있는 땅의 크기가 울릉도의 6배에 이르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기에 푸랑크톤이 풍부하여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천혜의 황금어장인 독도의 바다에는 연어, 송어, 대구를 비릇 해 명태, 꽁치, 오징어, 가오리, 열어, 광어, 우룩이, 상어, 블락, 고래등 주종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오지어 집어등의 밝은 빛이 독도 주변 해역의 밤을 하얗게 밝히기도 한다. 해저의 바위에는 미역, 성개, 소라, 전복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독도는 동해 최전방의 어업 전진기지가 되고 있다. 묵호, 삼척, 울진, 포항, 강능 등지를 떠난 어선들이 오징어를 좇아 울릉도를 거쳐 독도로 모여든다. 명태 철에는 동해어선들은 물론 멀리 남해와 서해에서 찾아온 어선들이 독도의 밤을 대낮같이 밝힌다. 독도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할 뿐만 아니라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기 때문에 황금어장의 필수여건을 갖춘다. 연간 출어 어선은 1.000여척을 넘으며 연간 어획고는 약 2만 톤이 넘는다고 한다.
이때쯤 되면 독도 근해에는 일본의 어선들이 출현해 불법적으로 어업활동을 하여 말썽을 빚기도 한다. 일본은 이 독도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동해 최대 황금어장이 이곳에 있고 또. 최근 독도 근해 해저에는 천연 가스 등 지하자원이 무진장 매장 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 이리라!
10월 21일 독도 바다는 잔물결이 일렁이고 늘 운무가 가려 일출을 보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저 멀리 수평선 넘어 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심호흡을 크게 하여 독도 일출의 정기를 듬뿍 담아 보았다.
일반 관광객이 잠시, 30분정도 머무는 곳이 동도 선착장이다. 180억 원의 공사비를 들려 1996년 4월에 착공, 1년 7개월 만에 준공한 선착장은 50t급 배가 접안 할 수 있다. 배가 들어오는 입구 쪽에는 자동파고측정기 가 달려있고 선착장 중앙에는 독도경비대 물자수송용 케이블카가 설치 되여 있다. 독도등대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는 대한민국 동쪽 끝 땅이라는 폭 2.2m 크기의 접안시설 완공비가 있다. 접안시설은 독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이다. 접안장 동쪽을 보면 가파른 해안에 파이프라인이 설치 되여 있는데 경비대와 독도등대는 에너지의 일부를 태양열에 의존 하지만 아직은 대부분 석유에 의존 하고 있다.
동도에 있는 경비대와 등대가는 길은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내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계단이 없을 때는 험악하기 그지없는 가파른 등산로 였다. 과거 경비대원들은 이 험한 길을 쌀 포대와 그리고 부식과 화목을 둘러메고 경비대 막사까지 올랐다. 그러다 보니 힘든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부상을 당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1957년에는 대원 한사람이 부식을 나르다가 실족으로 벼랑에 떨어져 순직한 사례가 있었다.
등대로 가는 길 8부 능선 오른쪽에는 독도를 지키다가 순직한 허학도(1954년 추락사), 김영일(1957년 추락사), 이이출(1970년 추락사), 김영수1979년 추락사) 주재원 권오광(1982년 익사)등 경찰과관 전경대원 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6기의 비석이 일렬로 서있는데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독도가 건전하게 동해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위령비 앞에 고개 숙여 묵념을 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무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경비대 막사가 있고 막사 앞에는 빨간 우체통이 하나 있어 참으로 정겹다. 2003년에 세우고 “799-805란 우편번호도 받았으나 현제 이용 되지는 않고 상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정상 왼편에 독도경비대가 있고 경비대 3층 건물 옆에 한국령“((韓國領)이라고 한자로 바위에 뚜렷하게 새긴 글귀가 있는데 독도가 우리 땅임을 말없이 웅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경비대 막사 뒤 헬기장 옆 2층 슬래브 건물에는 바닷물 담수화시설 있는데 이 시설은 2007년 6월 두산중공업에서 설치하였다고 하며 바닷물을 길어 염분을 빼고 음용수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하루 100여명이 사용 할 수 있는 27t의 식수가 공급 된다고 한다.
독도등대는 독도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동도정상에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3층 건물에 흰색 페인트로 도색 되어 있어 보기에도 산뜻해서 아름다운 독도 풍광을 연출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등대건물 국기게양대 옆에는 KT의 대형 통신탑이 우둑 서 있으며 인공물이지만 독도의 풍경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고 있다. 이 위용 있는 통신탑 덕분인지 독도에서 휴대전화 통화는 전국 어디서든 잘 통화 되고 있다
이제 독도는 외롭지 않다. 독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 되고 있고 동도((東島) 정상에는 독도경비대원 43명이 주야간 철저히 경비하고 경비대 막사 옆에는 고성능 레이더가 24시간 독도 근해를 감시하며 동도정상에 우뚝 솟은 독도등대에는 3명이 항시 근무하면서 동해바다 해상안전이란 막중한 책임을 지고 묵묵히 등불을 밝히고 공해상의 수많은 선박의 항로를 인도 하고 있으며 독도 근해를 항해하는 모든 선박에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확실하게 알리고 있다.
그리고 서도(西島)에는 현제의 어업인 숙소가 있고 정부에서 동도 접안시설 착공과 함께 공사를 하여 1997년 11월 6일 현 시설을 준공하였다. 어업인 숙소는 철근 콩크리트 3층 형대식 건물로 지었다. 1층은 발전기실과 기름 탱크 시설이고 2층은 바닷물 담수시설과 화장실 그리고 샤워장에 방 한 칸, 3층에는 부엌 한 칸과 방 3칸이 있다.
이 서도 어민숙소에는 독도 이장 김성도님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0-2번지 거주)내외와 울릉군 파견 직원 2명, 그리고 언론매체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한국 첫 독도 파견, 매일신문기자 전충진 님이 주재 하면서 늘 맛깔 나는 새로운 독도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서도는 동도와 151m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어 바람이 고요한 날이면 고함 소리가 들리는 거리지만 물결이 거친 날은 두 섬의 왕래는 엄두도 낼 수 없다.
김성도 이장님은 1970년대부터 최초의 독도주민인 최종덕 소유어선(덕진호 2.22톤)선원으로 서도에 거주 하면서 수산물 체취 등 공동 어로 활동을 해 오다가 1987년 최종덕씨가 사망 후 본인 소유어선 (명성호 2.08톤, 부영호 1.5톤)을 이용하여 서도에 상시 거주 하면서 본격적인 어로 활동을 하다가 1991년에 현제의 주소지에 주민등록을 등재 하였다고 한다.
독도에 처음 주민등록을 이전 하여 거주 한 사람은 최종덕씨 였다. 그는 1965년3월부터 해녀 5.6명과 함께 울릉도 주민으로 처음 독도에 들어가 어로 활동을 하면서 1968년 5월에 서도 해안가 바위 위에 토담을 지어 스레이트 집웅을 올려 집을 지었다.
그 후 1980년 일본이 독도영주권을 다시 주장 하고 나오자 “단 한명이라도 우리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1981년 10월 14일 독도사상 첫 주민등록을 옮기고 가족을 대리고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 했다. 당시주소는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67번지였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전부였다. 여름철 작업 인원이 많을 때는 생활하기가 불편해서 조금 덜어진 벼랑 끝에 집 한 체를 더 지어 해산물 건조장을 겸 해 썼다고 한다.
또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 수장법과 특수어망을 개발 하고 서도 중간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견 하는 등 많은 노력을 쏟으며 살다가 1987년 8월 23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86부터 사위 조준기 최경숙 내외가 한동안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기도 했다.
현제 독도에 거주하는 주민은 동도에 독도경비대원 43명 독도등대원 3명(6명 2교대)을 제외하고는 서도에 김성도 (독도호 선장) 김신열 부부와 편부경(여류시인)씨 그리고 울릉군은 2008년 5월부터 독도주민 및 방문객의 안전관리를 위해 독도관리소사무소에 6명을 2명씩 윤번제로 상주 시키고 있으며 이는 경비대나 등대원이 상주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서 행정직 공무원이 상주함으로써 한국이 독도의 실효적 지배에 한걸음 더 나아간 행보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도에는 현제 총6명이 거주하고 있다. 여류시인 편부경 씨는 남다른 독도사랑 실천으로 50여회 독도를 방문 하였고 2003년 11월19일 독도주민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편부경 씨는 한국 시인협회 독도지회장이시며 독도에 거주하면서 독도우체국 이란 시집을 출간 하였고 그 외 시집 “깨어지는 소리는 아름답다”. 엔솔로지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가 있다.
그리고 독도 사랑에 남다른 편부경 시인은 김성도씨 내와가 독도에 거주 하려 해도 조업에 필요한 배가 없어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민 모금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그 결과 20개 단체 158명이 모금운도에 동참 1.58t 연안복합어선 (허가번호 KN71-041102) "독도호“가 바다에 띠워 젔으며 후원자와 단체의 명판을 새겨 붙인 ”독도호“는 봄부터 초가을 까지 독도 근해에서 미역과 홍합과 문어 등을 잡고 있으며 ”독도호“에는 독도를 사랑하는 국민의 성금으로 건조되어 독도에 상주 하면서 독도를 지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1999년 일본인 호적등재 보도 이후 범국민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이 전개 되여 563세대 1.875명이 독도에 본적을 두고 있다.
그리고 울릉군의 관광객 입도 현황에 따르면 지난 항해 독도를 찾은 관광객이 12만 9천여 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울릉군에 따르면 지난 2008년 1년 동안 독도를 방문한 관광객은 입도와 선회를 포함해 모두 12만 9910명으로 집계됐다. 전년도 10만1428명보다 2만8000여명, 28%가 증가했다. 여객선과 헬기 ,해경경비함 등을 통해 입도한 인원은 10만2601명이었고, 기상 악화 등으로 입도를 못하고 선회한 인원은 2만7309명 이였다. 이들은 모두 독도 선착장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고 외치며 오가고 있어 이제 독도는 외롭지 않다.
입도 상황을 월별로 보면 날씨가 좋았던 5월이 2만 3135명으로 가장 많았고, 연말인 12월은 36명으로 가장 적었다. 울릉군 측은 일본의 계속되는 독도 도발로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데다 지난 2007년부터 독도 입도 제한인원이 하루 1880명으로 크게 늘어 관광객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울릉도는 지난 한해 관광객 수가 27만여 명으로 전년도 22만300여 명보다20%가량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울릉도 관광객은 비수기인 1월 3600명, 2월 3700명, 3월 12477명에서 성수기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하루1000명 이상씩 찾아 7개월 동안 23만2000여 명이 단녀갔다. 특히 5월은 4만7318명으로 하루 평균 1577명이 방문, 월중 최고치였다고 한다. 이제는 독도가 외롭지 않다. 독도입도 객은 모두 독도 선착장에서 또는 선상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고 독도가 떠나갈듯 큰 소리로 외치면서 오고가고 있어 독도는 외롭지 않다.
최근 매일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북도와 울릉군이 현지 사무소를 짓는다고 한다. 독도, 동도 접안시설 끝 지점, 경비대로 오르는 계단이 시작 되는 곳에 올해부터 3년간 100억을 투입하여 2011년까지 연건평 800㎡ 의 2층 건물로 환경을 회손 하지 않는 필로티 공법으로 건축한다고 한다.
이 독도사무소 건물에는 입도객대피소, 식당 및 휴게소, 담수화 시설장소, 발전기(축전지) 및 기름탱크실, 간이소각시설 등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이시설이 완공되면 독도의 실효적 지배가 더욱 강화되는 것은 물론 현제 서도 어업인 숙소에 임시 마련된 사무소를 동도로 옮겨 관광객에 대한 안전관리와 유사시 안전대피시설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독도 서도 북서쪽 900m 암초지역에 한국해양연구원 동해연구소 (울진)에서 제주 이어도해양과학기지처럼 인공 구조물로 독도해양과학기지를 건설 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수심 40m의 암초 지역으로 터가 넓고 평탄해 해양과학기지 건설에 알맞은 곳으로 평가했다.
이곳에 각종 장비들이 설치돼 독도와 동해 전반을 관측 연구해 그 성과를 외국 등 학계에 보고 하게 되며 조선해(동해) 이름을 국제 학계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 할 것으로 기대되며 독도 주권을 확고히 하는데 큰 몫을 할 것이므로 마음 든든해 진다.
5.독도는 우리 땅 우리가 지키자.
독도가 우리 땅임을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명백한 사실이다. 독도박물관의 독도연혁자료에 의하면 지증왕13년 우산국(울릉도 독도)이라 하고 있고, 고려사 에는 우산(독도) 무릉(울릉)은 본래 두 섬이다 고 하였고, 조선 성종 김자주(김(金自周))가 가서보고 말하기를 삼봉도가 보인다고 하고, 고종 경자칙령 제41호에서 석도(石島))라 칭했다고 되어있으며 고종 병오 본군소속 독도(울릉군소속독도) 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연도 1930. 규격 22×34㎝)에는 팔도총도와 강원도 별도에 우산도(于山島-독도)와 울릉도를 표기하고, 강원도 울진현조에 울릉도와 우산도를 설명 하고 있다. 이 책의 지도는 1941년 동국여지승람 편찬당시 실려 있던 것으로 독도(우산도)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그리고 조선국지리도(연도 1592년 1872년 재모사 규격50×36㎝)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구끼 등이 제작한 지도이다. 팔도총도와 강원도별도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표기 하고 있다. 현제 발견된 일본 지도 중 우리식 명칭을 표기한 최초의 지도 이며 대마도를 우리영토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또 삼국 접양지도(연도 1785년 편찬자 임자평 규격76×10㎝)에 의하면 일보의 지리학 대가인 하야시((林子平)가 그린 지도. 조선해(동해) 한가운데 두 개의 섬을 죽도(울릉도 )라 하고 조선의 것 이라 부기 하였으며, 그 오른쪽 작은 섬은 독도를 그린 것인데 ,이 두 섬은 모두 조선 영토와 같은 노란색으로 칠 해저 있다.
또 조선전도 (연도 1846년 편찬자 김대건 규격 59×100)㎝에 의하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보다 15년 앞서 근대적 작도법에 의해 작성한 지도로서 울릉도와 우산도를 정확히 우리 영토로 표기 되어 있고 이 지도는 청나라 주재 프랑스 영사를 거처 1849년 프랑스로 옮겼으며 1855년 프랑스 리용 지리회보에 축소 수록 되었고 6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하며. 이 지도에는 독도가 울릉도 바깥쪽에 정확히 그려졌고, 지명이 비록 프랑스어로 표기 되었지만 우리의 고유명칭을 순수한 우리말의 발음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울릉도는 “Oulangto:로 독도는 ”Ousan" 즉 우산으로 표기 되어 있다. 또한 당시 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보를 바탕으로 동 아시아의 지도를 그리던 서양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서 서양세계의 지리적 인식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지도의 원본은 현제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조선동해안도(연도 1876년 편찬자 일본 해군수로부 규격 규격 65×103㎝)에 의하면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작성한 지도를 1876년 일본해군성에서 작전용으로 재발행한 것이다. 한반도 동해안의 포구와 해안선, 울릉도와 독도가 상세히 그러져 있다. 또 대일본분견신도(1878년 편찬자 산촌청조(山村請助) 규격50×37.5㎝)에 의하면 일본도 좌측 상단에 조선도를 그려 넣고, 일본과는 달리 단일 색체로 표기 하였는데 죽도(울릉도) 송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나타내고 있다.
최근 언론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일본인 독도가면 사형”이란 1838년 일본 고문서발견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19세기 당시 독도에 들어가면 자국 어민을 “해금령(海禁令)” 위반으로 처형하는 등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고문서가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문서는 18382월 당시 시네마현의 통치자인 “마쯔다이라가 하마다”가 각 어촌에 보낸 “어해서어제본장(御解書御諸本帳)”으로 죽도(당시울릉도의 일본식 명칭)에 들어가면 극형(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중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문서 내용을 보면또 1960년대 안용복 장군등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항의한뒤 일본 바쿠후(幕府)가 죽도와송도(당시 독도)에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해금령을 내렸지만 한 일본 어부가이를 어겼다가 사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해금령을 아기고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밀업을 한 요나고(米子)의 어선선주 카이즈야 하찌우에몬(會津屋八右衛門)을 처형한 뒤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촌의 촌장들에게 이 문서를 보내고 서명날인까지 받았다. 모두 4장으로 된 이 문서는 당시 일본 어촌 촌장의 서명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밖에도 독도는 우리 땅임을 입증 하는 자료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회 있을 때 마다 우리 땅 독도를 일본 측이 자기네 땅 이라고 거듭 되는 망언에 대하여 우리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성명서의 낭독이나 한때의 시위만으로 되풀이 되는 것은 끝없는 소모전 일뿐, 확실한 자료를 토대로 그들에 대항 하여야 한다고 본다.
일본 측 스스로가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못 박은 객관적 증거 자료가 더 공신력을 가진다. 우리의 정부나 사학자 그리고 온 국민이 대항 증거자료를 더 수집하고 대항 논리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가 시네마현 하마다 역사사료관에
서 이 문서를 발견 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밖에도 독도는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이 많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독도는 우리 땅이 분명하다. 신라 장군 이사부, 조선의 안용복장군의 숭고한 독도 수호정신을 이어 받고 독도의용경비대, 울릉경찰서 독도경비, 현제의 경북경찰청 독도경비대에 이르기 까지 6명의 순직 경찰관의 순고한 희생정신을 이어 받아 오늘도 이 순간 독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6.유비무한, 미리 대비하자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가 없는 많은 외침(外侵)을 당하였다고 한다. 유사 이래로 외침을 당한 사례를 전 서울대 유봉영 교수님의 논문 중에서 일부내용을 시대별 ,기간별, 방면별로 도표로 요약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