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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면은 본래 군위군(軍威郡)에 딸린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인데, 조선조에 소소본면(召召本面) 또는 석본면(召本面)이라 하여, 대흥, 농암, 상소, 하소, 부황, 호암, 상량, 달천, 어의, 모로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그 뒤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석본면(石本面) 또는 석을본면(石乙本面)의 서경, 괘겸, 평지, 산법, 화계, 상원, 안령의 7개 동리와 화곡면(花谷面)의 위성, 사촌, 대량, 달목, 낭성, 백현, 보촌, 복성, 율리, 사지, 두개, 수철의 12개 동리와 구미시 산동면(山東面)의 신흥, 상개, 오류의 동리를 병합하여 소보면(召保面)이라 하고 서경, 평호, 신계, 산법, 송원, 대흥, 봉소, 봉황, 내의, 위성, 보현, 복성, 사리, 달산의 14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제6542호에 의하여 구미시 산동면의 도산동을 편입하였고, 대흥동은 군위읍으로 재편되어 현재 14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위치는 군위군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읍과 의성군 봉양면, 남쪽은 구미시 장천면과 산동면, 서쪽은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북쪽은 의성군 비안면과 구천면과 경계를 이룬다.
[얌대, 양바우, 양암]내의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조 숙종 때 최윤길이란 학자가 이 곳에 와서 보니, 마을 앞에 바위가 둘 있다는 데서 불려졌으며, 부락 앞 두 절벽으로 된 바위에 수 백년 전 동암, 서암이란 각석이 있어, 윗 부락을 상량, 아랫 부락을 하량이라하며 전 부락명을 양암이라고도 한다. 덤 밑 소 위쪽에 남양 홍씨의 양암정이 있다.
[대포 大逋·大砲]아랫 얌대 중하류편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장대봉에 대포를 놓고 쏘았다하여 대포라 한다. 그 마을 앞을 대포들이라 하며 이 곳에 옛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웃얌대, 상양, 상량, 상우동]양바위가 있다고하여 양암이라고 하며, 양암 위쪽에 있다는 뜻에서 상량이라고 불려졌다.
[아랫얌대, 하양, 하량]1592년 임진왜란 시 비안에서 피란온 영일 정씨가 개척했다 한다.
[언실, 어이동, 어의동]옛날 봉황이 날아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봉황내의(鳳凰來儀)에서 나온 이름인데 내의(來儀)하는 거동이 옷이 펄렁거리는 모습과 같다 하여 언실(於依)이라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부족 국가로 두모국(豆毛國)이 있었는데이 동리의 황씨 부인이 조복을 왕에게 헌사하였다 하여 언실이라고도 한다.
[웃언실,상어, 상어의, 어의]언실 위쪽에 있는 마을로 1620년에 진(眞)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주하였다. 그 당시 마을 앞에 강이 있고 숲이 있어 고기집 형태와 같다 하여 어의(魚儀)라 하였다.
[아랫언실, 하어, 하어의]언실 아래쪽에 위치하며 주로 남양 홍씨와 연안 김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양지마, 양촌]웃언실 북쪽에 있어 동쪽의 음지마을에 대하여 이렇게 불렀다.
[음지마, 음촌]웃언실 동쪽에 있으며, 안동댐 수몰 가구 3가구가 들어와 살고 있다.
[진재, 장현(長峴)]길고 험한 골짜기 재 밑에 있다고 하여 진재라 하였다.
[모로골, 모르골, 모로실, 모로(毛老), 모로(慕魯)]1570년 은상윤이란 선비가 개척했다. 임진왜란 때 마을 뒤 골짜기 새빛이란 곳에서 피난하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 하여 모로라 칭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노(魯)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두렁, 두란, 달목] 달산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뒷산에 망월소(望月所)가 있는데 정월 대보름날 달을 보고 놀았다고 한다. 그 밑에 동네가 있으므로 달산동이라 칭한다. 일설에 따르며 1200년 전 이씨와 김씨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고을 원이 승마(乘馬)하여 오는 것을 이 곳에서 하마(下馬)하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엄문]달산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영월 엄씨가 많이 살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법주거래, 법주]엄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법주사 입구에 형성된 부락이라 해서 명명된 것이다. 법주사는 당초 선산군 도리사보다 큰 절이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의 모양이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그 중 뱃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유는 배 밑을 뚫는 것과 같아 파선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기와도 올리고 샘도 판다.
[홈거리, 홈골, 명곡(椧谷)]법주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홈들이 있는데 수철에서 나는 물을 배다리로 통하게 하여 농업 용수로 이용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경주 손씨가 토반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손씨가 많이 살았는데 성지도사가 이 곳을 지나가니 귀를 쇠고리로 달아 나무에 매다는 등 홀대하였다. 성지도사가 보복하기 위해 이 지형이 나비혈인데 날개에 돌탑을 쌓으면 부흥한다고 하였다. 그후 돌탑을 쌓으니 나비가 죽고 손씨가 망했다고 한다. 이 곳에 탑 쌓던 돌이 있었으나 하천 공사로 많이 없어졌다.
[새점, 쇠점, 수철]홈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쇠가 나는 곳이 있고 부락의 맞은편 조산이라는 산기슭에는 냉정수(冷淨水)가 당시 흔다고 하여 수철이라 이른다. 현재도 광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일설에는 무쇠점이 있었다 하여 쇠점이라고도 불려졌다.
[두개실, 두개곡, 두개리(豆介里)]엄문 남쪽에 있는 마을로 노(魯)씨들이 살았으며 남양 홍씨 재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민가는 없고 재실만 남아 있다.
[중간마을, 우무실(優無室), 도원(桃原)]도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걱정 없이 잘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곳에 복숭아 나무가 많다하여 도원이라고도 한다.
[원마, 원말, 개산]도산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때에 과거길 쉬어가던 원님집이 있었다고 칭하여옴.
[냄일, 새마을, 고부실(故甫室), 남일(藍一)]이 마을의 칠봉의 남방의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냄일이란 이름은 이 마을 서쪽 해평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에 옛날에는 산적이 나타나므로 밤에는 넘기 어려워 어둡기 전에 넘어야 되겠다는 뜻으로 내머리재가 내밀재로 그 가까이 있는 마을을 냄일로 불리워졌다. 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 혹은 새마을이라고 했으며 근처에 고부고개가 있어 고부실이라고 불리워졌다.
[새터]우무실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우무실에서 떨어져 나간 마을이다.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칭한다.
[칠풍, 칠봉]원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일곱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려 있다 하여 칠봉이라 칭하였다. 현재 강화 노씨들이 임진 왜란 때 피란와서 정착 거주하였으며, 입구에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보촌]보현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철광이 있다 하여 보촌이라 한다. 보촌 서쪽에시팡이(쇠팽이)곡이 있는데 일정 때 쇠를 팠다고 한다. 지금도 굴이 3개 남아 있다.
[힌티, 백현]흰재 목재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나무가 없을 때 산의 흙이 희게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흰재 목재는 의성군 구천면 조성리 신촌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점동네, 점촌]보현2리의 작은 동네다. 옛날에 이 곳에 옹기를 구웠다고 하여 점동네가 되었으며, 그 자취로 지금도 사기 그릇 조각이 남아 있다. 김해 김씨 조상의 효자각이 있는데 김해 김씨 조상이 시장에 갔다가 오는 길에 강변 얼음에서 솟아 나온 잉어를 조모 병환에 드리니 나았으므로 이 각을 세웠다고 한다.
[집리(楫里), 복성(福星), 복천(福泉)]본래 군위군 화곡면의 지역으로서 복샘이 있었으므로 복천, 복성, 집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밀양 손씨가 주성이었으나 지금은 김해 김씨가 주성으로 100여 가구가 되는 큰 마을이다. 복천에 따른 전설을 보면이 곳은 물이 귀한데 이 곳을 지나던 한 대사가 물을 청한즉 물을 주지 못하였다. 이에 대사가 샘터를 마을 중턱에 있는 고목옆을 가리켜 주었다. 부락민들은 그 날부터 고목을 베고 샘을 팠다. 마침 큰 바위를 들어내니 기이하게도 학 두 마리가 날아가 버렸다. 이로부터 동리가 차차 쇠하여졌고, 이에 노한 부락민들은 대사를 찾아가 죽였다고 하며, 대사를 묻은 자리를 '중구덩'이라고 한다.그 곳에는 황물이 나고 있다. 학이 날아간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바위를 용가메라고 부른다.
[독정(獨亭)]복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마을 옆에 정자가 외로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치래기, 황산동(荒山)]복성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부락 전후의 산이 거칠다 하여 황산이라고 하며 부락 뒷골에 황물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큰마아, 큰마을, 대촌]집리 일부로서 제일 큰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옛날에 고을의 원이 살았다고 한다.
[굴티, 구리팅]집리 일부로서 복성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구부러진 비탈에 비스듬히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 강이 흐르고 있다.
[은접문, 음지편, 은저문]집리 일부로서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산에서 집리로 넘어 오는 언덕 밑에 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응달쪽의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들가운지, 야중(野中)]복성 남서쪽 들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리말]황산동 내의 남쪽 강가에 있는 마을로 거리가 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산(中山)]복성 서쪽에 있는 마을로 복성동과 사리동 사이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중산이라고 한다.
[두모뜰, 두못들,두모(斗毛)]하소 서쪽, 내 건너에 있는 부락으로 고려시대 두모국이 이 곳에 객국하여 선정하던 자리로 지금도 도들머리산의 기슭을 파보면 토기류 등 옛 유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보아 두모국의 옛 이름이 두모뜰로 변하여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라 한다.
[상소(上韶)]봉소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오른다는 뜻으로 소보면의 본명으로 전해진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옛날 서씨 일가가 처음 들어와 번창하다가 성지(聖池)라는 못을 판 후 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김령 김씨가 주성이다.
[하소]봉소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상소와는 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력곡이라는 골이 깊어 천수답 시절에도 수리가 좋았다는 곳이다. 흥양 이씨가 주성이다.
[범바우, 범바위, 부황골, 부황골, 봉황동, 호암]동네 뒤의 바위가 범이 앉은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범바우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는 옛날 근처에 소소동과 구성동이 있었고 가까이에는 내의동이 있으므로 고서에 소소구성봉황내의라 하였다.
[달천(達川), 월천]봉황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 주위에 위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위천의 모양이 마치 달같이 흐르고 있음에 의한 명칭이다
[부헝이, 부엉이, 연곡(蓮谷)]봉황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로 연냉이골이 있는데 매우 긴 골짜기이며 골안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연곡이라 한다. 부헝이(부엉이)라는 전설은 옛날 두모국의 왕이 적국 장사에게 쫓기어 환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장상의 날세고용맹스러운 모습을 짐승에 비하여 부엉이라 불리워졌다 한다.
[가는뱀이, 율리(栗里), 사리(沙里)]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위천을 끼고 부락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넑은 갯편에 밤나무가 성하여 율리(栗里)이라 칭한다. 또 마을 앞내에 모래가 많았으므로 사리라고 한다. 연안 이씨가 주성을 이룬다.
[새기터, 사기터, 사지(沙只)동]사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기를 구웠던 곳으로 대흥 이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산법골, 산허리, 산법, 산월리]마을이 사방 산으로 둘러 싸였고 산의 형세가 반월과 같이 생겼다 하여 산월리라 불리워졌다. 일설에 신라 시대부터 산사가 있었다하여 산법이라 칭하였다. 동네 풀밭에 가운데 흔적이 남아 있다.
[아랫뜸]산법리 북쪽에 있던 마을로 1959년 전에는 10가구가 모여 살았으나 저수지 설치로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다.
[위 뜸]산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중뜸에서 약 700m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박씨가 주성을 이룬다.
[중 뜸]산법 중앙에 있는 마을로 남씨, 홍씨가 주성을 이룬다.
[돌밑(石下), 서경, 석영(石英)]본래 군위군 석본면의 지역으로 차돌이 있는 산 밑이 되므로 돌밑 또는 석영이라 불리워지다가 변하여 서경이라 한다. 삼국 시대에 상주국과 서경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서경국의 수도였다는 설도 있다. 대릉, 봉릉, 태봉이 있으며 풍령에는 석불이 남아 있다. 일선 김씨가 주성을 이룬다.
[이미골, 용수골, 용수곡, 용소, 용수(龍水)]서경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앞에 용수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용소라고 불리워졌다. 일설에 의하면 영천 이씨가 조상의 광중을 파다가 풍수가 풍령에서 백마를 탄 사람이 오기 전에 매장하라고 했다. 광중을 파던 중 석함이 나와 상쟁하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 석함을 깨니 잉어가 광중에서 나와 사라졌다. 그후 자손들이 잉어가 잘 살라는 뜻에서 못을 팠다. 이 못을 어(魚)못, 어미골, 또는 용소라 부른다고 한다.
[대송(大松), 오류동(五柳洞)]질매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로 이 마을의 형성은 1500년에 엄씨가 개척했다. 당시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대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소나무는 자취도 없고 면소재지로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경주 최씨가 주성을 이룬다.
[돌정자, 석정(石亭)]질매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북편 큰 바위에 정자나무가 서 있어 돌정자로 불리워졌다. 영천 이씨와 파평 윤씨가 주성을 이룬다.
[질매재, 안령(鞍嶺)]송원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1514년 홍나호라는 선비가 개척하여 안령이라 했으며, 1914년 송원리로 개칭되었다. 안령이란 명칭은 부락 동편의 고개가 말지르매(질매)같이 생겼다 하여불리워진 별칭이다. 여주 민씨가 주성을 이루며 중학교가 있다. 질매재 고개 옆에 말바위듬이 있고 건너에 당래(다랭이)라는 동네를 현재 달천이라 한다.
[장터, 시장]1958년 알령장을 개설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장터가 있다하여 장터라 하고 2, 7일에 장이 선다. 면 행정의 중심지로 우체국, 농협, 정류소 , 파출소 등이 있다.
[화일(花日, 華日)]옛날 방천에 복숭아꽃이 많아서 파일이라 불렸고 현 양조장을 중심으로 파일장터가 있었다. 농기구, 농산물이 팔리던 곳인데 64년에 없어졌다고 한다.
[웃말, 신계]신계리의 본동으로 구씨, 손씨가 주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상골]화일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의 위쪽에 있다하여 상골이라 한다. 박씨가 주성이다.
[낭자(浪子), 낭성(浪城), 위성]낭재가 낭자로 된 듯도 하며 옛날 이 곳에 성이 있었다. 부락 뒷산에 옛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잇어 유래된 마을이라 한다. 일설에는 큰 강이 마을 주위를 굽이쳐 흘러가는 모습이 마치 성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낭성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은씨, 박씨가 주성이다.
[대링이, 대량(大良)]낭자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어진 사람이 많이 나도록 하기 위하여 대량이라 불렀다 하고 혹은 장사가 많이 난다는 뜻에서 이름 지워졌다는 설도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삼면이 강으로 싸였고 일면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니 강 뒤에 산의 형세가 용 모양이다. 이를 용혈(龍穴)이라 한다. 북쪽이 용두(龍頭), 남쪽이 용미(龍尾)처럼 생겨 꼬리와 머리쪽에 두 고목이 심어져동신(洞神)으로뫼시어 모든 행운을 비는 제단으로 되어 있다. 또 이 마을은 각 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문중이 성하지 못하여 행세도 못한다고 한다. 형제만 나아야지 3형제 이상이면 한 집이 망하니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사촌(沙村)]위성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초기 약 450년 전 부락에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사촌이라 불려지고 있다. 이 곳에 절터가 있고 여기에서 기왓장이 나온다. 특히 자기도 출토된다. 옛날 청화산의 홍골산 중턱에서 판(소반)을 만들고 생활했음에 의하여 반자의 집터라고도 칭한다.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고 있다.
[화실(花實), 화곡(花谷)]위성리에 있는 가장 큰 마을로 부락의 뒷산이 매화처럼 전개되었다는 뜻에서 화실이라 불려졌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서편이 막히면 인물이 많이 난다 하여 인위적인 둑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 그 때의 노송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 뒷산은 높고 길며 위수(渭水)가 돌아서 흐르고, 진주인 유씨가 읊은 '위성조우색경록(渭城朝雨 輕鹿)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에서 위성(渭城)이라 했다. 위성에는 3대(臺)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삼대석(三臺石), 삼대목(三臺木), 삼대불(三臺佛)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옛날 면명은 화곡이다. 은씨가 주성을 이루며 이씨도 있다.
[황골, 황곡(荒谷), 한읍(韓邑)]화창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 고을이 있었다 하여 한읍이라 하다가 뒤에 황골이 되었다. 지금도 묵은 기와 조각이 밭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화창(花倉)]고려 시대에 창고가 있었다는 뜻에서 일명 華倉이라고도 하였으나, 지금은 花倉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고려 성종조에 의창을 설치하였을 시대에 창고가 있었다는 곳이라 한다. 옛날에 이 곳에 화창장이 있었으며, 서울에서 오는 봇짐 장사가 대구, 포항으로 가는 길에 여기에 장을 보고 쉬는 곳인데 주막이 있었다. 원래 여기가 소보면 면소재지였으나 지금은 송원리로 옮겨졌다.
[평지마을, 평지(平地)]평호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앞 뜰이 넓다 하여 평지마을이라 했으나 일제시대때 평호동으로 고쳐졌다.
[낫거리, 낙꺼리, 개겸, 괘겸(掛鎌)]평호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지세가 낫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 앞 산(용솟은 말레이)에 용천골이란 동굴이 있는데 약 80여명 수용할 수 있는 석굴로 옛날에 피난처였다. 그 굴 속에 샘이 있다. 경주김씨가 주성이다.
[우복동] 평호리 일부로 구미시 산동면과 인접해 있다. 평호리에서 넘어가는 고개가 마치 소가 앉아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우복동이라 칭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 주민 생활이 인근 주민들보다 풍부하게 생활하였다하여 복이 많은 동네란 뜻에서 부려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첫댓글 이거 어디서 퍼왔음둥????
군위 문화원 지역 지명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