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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야구선수 동생이다. 대학동기들은 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내가 도서관에 있으면 바로 그 때가 시험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였다-나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인데 다만 야구선수동생이라고 하면 그제야 나를 기억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중간고사에 대한 예의를 무참히 짓밟고 가족과 함께 부산의 야구장으로 가서 형의 대학부 경기를 본 일이 있다. 현재의 사직구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그 날 장외홈런을 날렸다. 후속 타자인 강기웅(형)이 또 홈런을 때렸고... 그 날 기분은 정말 좋았으나 나는 월요일부터 시작된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10등 정도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학교로 불려 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나 나는 야구 구경 간 이야기를 담임선생님에게 끝까지 숨겼다. 시험 좀 못 친 게 뭐 대순가.
형과 나는 다섯살 차이기 때문에 내가 고3 수험생이 된 1985년 형은 대학을 졸업하였다. 형은 대구에서 유니폼에 삼선이 멋있게 들어가 있으며 출생년과 졸업회수가 같은 고등학교를 거쳐 경산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으므로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삼성 라이온스는 당시 1루수인 형 대신에 외야수였던 모 선수를 1루수로 뽑았다.
집안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아버지는 3학년이 된 나에게 경찰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나는 파출소나 경찰서 앞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본 일이 있었으므로 별 생각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에 응시를 했고 황금같은 일요일에 사대부고까지 가서 치른 국, 영, 수 1차 시험에 통과하여 “서울신문”에 처음으로 이름이 실리기도 하였지만 결국 “신체검사”에서 부적격판정을 받았다. 당시 178센티미터에 67킬로그램이었으며 땡볕에서 하루종일 농구를 하고서도 졸지 않고 밤에는 성문종합 1장(Chapter)정도는 독파할 수 있는[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주체야독(晝體夜讀)이었다] 정도의 체력을 갖고 있었던 나로서는 아직도 납득이 잘 안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바와 같은 “국비 대학”은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에는 나는 이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은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철부지였으니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싶었고 아버지도 그것을 원했다. 내가 대학에 갈 때는 내신과 학력고사점수를 종합하면 전국에서 몇 등이나 되는지가 잔인하게 드러나는 시절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수능 성적 통지시에 전국석차를 알려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비판할 생각은 없으나 다소 어린 마음들을 서글프게 할 수 있는 면이 있음은 독자들께서도 수긍하시리라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나는 국립대학 외교학과에 갈 성적이 안되었다. 나는 영문학과를 가겠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거의 맞을 뻔 했다. 결국 법대로 가서 외교관 공부를 하면 된다는 주위의 감언이설에 속아 법대에 지원했다. 당시 나의 등록금과 첫 달 하숙비를 구하지 못하여 결국 어렵게 수협에서 100만 원을 대출받으셔야 했던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형은 신생 제7구단이라고 불렸던 빙그레이글스에 입단하였다. 형은 당시 받은 계약금으로 전세로 있던 현재의 본가 주택(지금 이 집은 대략 마흔 살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을 샀다. 그리고 나에게 한 달에 20만 원이라는 당시 지방에서 온 유학생으로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은 액수의 돈-하숙비가 13만 원 정도하던 때였다-을 매달 송금해 주었다. 형은 대학교 4학년 때 국가대표가 될 기회가 있었으나 대학교 후배들에게 타격연습용 투구를 해 주다가 그만 팔이 부러지고 말았고 결국 당시 아마추어만이 할 수 있었던 국가대표를 하지 못하였다. 동생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실업팀으로 가지 않은 형을 생각하면 나는 “엉덩이로라도” 공부를 했어야 했다. 미안해, 형!
나의 대학 2학년 때쯤 형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6게임 연속 2루타(“2-base hit 6 games in a row” 맞나?)를 쳤다. 팀은 당시 최고 승률을 기록 중이었다. 그 때 형은 당시 발행되던 야구 주간지에 수 페이지에 달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시집간 여동생이 빨리 집을 사고 법대에 간 동생이 빨리 판, 검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다. 누나를 먼저 결혼시킬 때에도 형은 누나에게 오빠 이상의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는데 학교에 가면 어김없이 터지는 최루탄 때문에-현재까지 나에게는 지독한 비염이 남아 있는데 나는 지금도 당시 개인사업자 소득 최상위권에 들었다는 사장이 운영하였던 삼양(?)화학의 최루탄을 주범으로 확신하고 있을 정도이다-학교가는 것을 상당히 꺼리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 폐가실에 대출신청을 하러 가는 것이 고작이었고 나무와 벽에 붙어 있는 집회 공고에 적힌 집회 시간이 되기 전에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왔다. 신문을 보고 오늘은 별 일이 없겠다 싶어서 학교에 일찍 가더라도 아침에 과모임을 하고 수업거부를 결의하고 나면 이내 갈 곳이 없었다. 2학기가 되기까지 나는 담배도 피지 않았고 당구장에도 가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바보같은 이유다. 학교가는데 익숙하지 않은 이런 나의 분위기가 1987년 대선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 그 중 가장 나쁜 일이었다.
전두환정권의 3S정책의 산물이라거나 호남민심무마용이었다는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의 지인들은 야구를 좋아하였고 나는 TV에 나오는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좀처럼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 어려웠다. 저학년 때 내가 외무고시와 행정고시를 응시하였던 것은 영어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고 당시로써는 1차 과목이던 헌법문제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시작한 공부-형법 각론은 이 때 처음 전체를 1회독 하였을 정도였으니-를 참 길게도 한 끝에 시험에 합격한 때에 형은 선수생활을 그만 둔 이후였다. 형은 프로야구 통산 14번째로 1,000경기 이상을 출장한 선수로 KBO에 기록되었다. 형은 시애틀 마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에서 코치연수를 했다. 당시 형은 메이저리거가 된 지 얼마되지 않은 박찬호(공주고 출신으로 한화 이글스로 입단할 수도 있던 선수이다. 고교시절에는 현재의 삼성의 노장진 투수보다는 다소 낮은 평가를 받았었다고 한다)를 만나 견제나 투구 템포 등에 관하여 조언을 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사실은 서로 객지 생활하던 중 만나서 여러가지 야구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인데 그냥 같이 있던 기자가 재미있으라고 그렇게 쓴 것이라는 것이 형의 진술에 따라 인정되는 사실이다.
형은 연수원에 들어가는 나에게 검사가 되라고 했다. 나도 검사가 되고 싶었고 처음엔 누구나처럼 스터디모임도 만들었다. 그러나, 연수원 분위기는 상당히 살벌하였다. 반 수업은 지정된 자리에서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뵙는 담임선생님께서 강의를 하셨기 때문에 비교적 재미(?)있었으나 자리를 이동하여 여러 반이 섞이게 되는 수업의 경우에는 도서관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하듯이-물론 나는 그런 적은 거의 없다-뜻있는 분들이 앞자리를 다 차지하였기 때문에 나는 주로 반장이나 조장형들과 뒷자리에 앉아서 사색을 하기가 일쑤였다.
나는 초기에 아침 수업 전에 진행된 영어강의를 들었다. 사실 내겐 연수원에서 제일 재밌는 수업이었다. 당시 연수원 부원장이시던 검사님께서는 일부러 가장 늦게 강의실에 들어오셨다가 5분쯤 일찍 강의실을 나가곤 하셨는데 아침마다 만학도(?)인 그 분을 뵙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김준호 연수생이 2년차에 들어 돌연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만 것이 내 잘못이 아닌가 생각한 때도 있었다-김 변호사가 그 때도 지금도 나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당시 조관행 교수님은 이를 상당히 안타까워 하셨다고 한다.
형은 나의 연수원 수료식에 형수님과 함께 와 주었다. 형이 비록 화려한 조명이 있는 강당의 단상은 아니지만 나와 함께 우리반 교수님(박병대 교수님 후임의 최중현 교수님)께서 주시는 수료증을 받았을 때(증제1호, 사진) 나는 형에게 더 자랑스런 동생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다소나마 형에게 기쁨을 주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도 들었다. 김준호 변호사와 강의길 변호사와 나는 역시 고등학교, 대학 및 연수원 동기인 우남준 검사에게 훌륭한 검사가 되어줄 것을 굳게 다짐받으면서 형과 함께 해맑은 표정으로 힘차게 단체 사진을 찍었다(증제2호, 사진).
형은 한화 이글스에서 수년간 코치생활을 한 후에 현재는 청주기계공고 야구부의 감독을 하고 있다. 올해 청주기계공고는 봉황대기 2승과 미추홀기 1승-미추홀기에서는 형의 팀이 그만 갑자기 나온 만루홈런 때문에 형의 모교 고등학교를 콜드게임으로 이기고 말았다고 한다-의 전적이지만 내년에는 더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을 확신한다. 나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형과 동갑이면서 또 다른 나의 형인 조정 변호사와 쌍둥이 아빠이자 최근에 아들 현승이를 낳은(?) 김준호 변호사의 사랑과 관심 속에 지원(支院)근무를 자청하여 가정지원 옆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도 건강하시고 누나는 형의 기대대로 수 년 전 칠곡에 새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그리고 나의 천사처럼 예쁜 딸-대학선배가 내 딸에게 항상 쓰는 표현이다-민성이, 민성이의 동생인 생후 4개월의 승민이-별명이 “정한이 소(小)자”인데 나를 무지 많이 닮았다고 아파트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와 나를 잘 키우고(?) 있는 아내와는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올 추석에 형과 나는 새로이 다짐을 했다, 더 열심히 살자고, 또 더 자주 만나자고. 형이 프로야구팀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램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혀-엉,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