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루왕조
(1) 삼국사기는 기루왕조 서문에 다루왕이 재위 50년 만에 돌아가셔서 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백제왕기에는 그런 말이 없다.
(2) 백제본기에는 기루왕 31년조(겨울에 물이 얼지 않았다)가 있으나 백제왕기에는 없다.
(3) 기루왕 49년(AD125년, 지마이사금 14년)조는 자치통감에도 이에 해당하는 기록이 나오는 유명한 기사로, 고구려 태조왕 69년조의 요서 마한 출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요서에서 마한과 고구려가 협력하며 후한과 전쟁하자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 뿐만 아니라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백제의 의사를 확인한 말갈은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다(賊聞而退).
결국 당시 한반도 북부의 군사력을 고구려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이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는 낙랑이 아니라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와 신라본기가 모두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 셈이다.
*자치통감: 孝安皇帝 建光 元年 十二月,高句驪王宮率 馬韓ㆍ濊貊 數千騎 圍玄菟,夫餘王 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 與州郡並力討破之. 是歲 宮死 子遂成立.
그런데 그 중요한 기루왕 49년조의 표현방식이 다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루왕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여 글로서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박창화의 백제왕기*
기루왕 四十九年 乙丑, 七月 <靺鞨>襲<新羅>大嶺柵 過泥河, <新羅>請救 王遣五將軍 救之 (말갈이 신라의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자,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여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백제의 관심사항은 말갈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지 말갈이 구체적으로 신라의 어디를 공격하였는가가 아니다. 따라서 백제사에 <靺鞨>襲<新羅>大嶺柵 過泥河는 나올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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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개루왕조
백제본기 개루왕조에 대해서는 하나가 다르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이 38년(AD165년)조에 실린 신라 아찬 길선이 한성백제로 망명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일부 판본은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되어 있다.
二十八은 三十八의 오각인데 실수로 三자가 二자기 되었다는 것은 다음처럼 알 수 있다.
가.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2년(AD165년) 10월조에 이에 해당하는 전후맥락이 상세히 나오는데 이것이 (AD165년)에 해당한다.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2년 (AD165년)
十二年 冬十月 阿湌吉宣謀叛 發覺懼誅 亡入百濟 王移書求之 百濟不許 王怒出師伐之 百濟嬰城守不出 我軍粮盡 乃歸
12년(165년) 겨울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백제로 달아났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쳤다. 백제는 성 안에서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아, 우리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 돌아왔다.
나. 백제본기는 그해 1월에 일식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개루왕 38년에 일식이 있었다.
그런데 박창화의 백제왕기 개루왕조는 일식기록은 적지 않았고 연도만 28년이 아니라 38년으로 정확히 적었다.
38년으로 맞게 적은 그의 판단근거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