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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나이 반도의 모세
임 태 수 박사
(호서대명예교수/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1. 마라의 쓴 우물 아윤 무사
우리는 1995년 7월 26일 아침 8시 15분, 시나이산을 목표로 하고 카이로를 출발하였다. 관광버스는 수에즈운하 방향을 향하여 정 동쪽으로 달린다. 우리 일행은 휴게소에서 잠깐 쉰 다음 수에즈운하 터널을 버스를 탄 채 통과하였다.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한 곳인데 우리는 냉방장치가 된 버스에 편히 앉아 5분만에 통과하였다. 터널을 통과한 우리는 수에즈운하를 보기 위하여 잠깐 멈췄다. 마침 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버스 기사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물가로 달려가 물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3300여 년의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과 모세가 건넌 홍해의 물을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버스기사가 말린 이유가 시간 때문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운하 근방에 6일 전쟁 때 매설해 놓은 지뢰가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에즈운하 터널에서 시나이 반도 해안을 따라 동남쪽으로 26Km정도 달려가자 오아시스 아윤 무사(Ayun Musa) 즉 모세의 우물이 나타났다. 안내원은 이 곳이 마라라고 한다. 마라란 쓰다는 뜻이다. 100여 그루의 대추야자 나무가 서 있고 우물도 하나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곳에 도착해서 물을 마셨더니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다(출 15:23). 우물은 지름 2m, 깊이 2m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밑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는데, 물 색깔은 약간 검푸른 썩은 빛이었고 그 위에 먼지마저 덮여 있었다. 이 우물을 본 순간 물이 쓴 이유를 금방 알 것 같았다. 수에즈만이 지척에 있어 물에 소금기가 많을 것이고, 여기에 모래먼지가 덮이고 썩기까지 하면 그 물은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성경시대의 사람들, 베두인
우리는 마라에서 두 시간쯤 달린 후에 왕의 온천장을 향하여 수에즈만 쪽으로 조금 들어갔다. 건사한 호텔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천장을 연상했는데 나타난 것은 컨테이너 모양의 네모난 조그만 나무집 두 개 뿐이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뜨거운 물이 조금씩 솟아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초라한 곳에 왜 왕의 온천장이란 거창한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 실망스러웠다. 마침 베두인 부자가 나무집 옆에 서 있기에 다가 가 보았다. 아버지로 보이는 60-70세 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작은 소라껍질 3개를 손에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소라껍질을 사라는 말인 모양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순박해 보였다. 나는 소라껍질을 사는 대신 함께 사진을 찍고 1$를 드렸다. 나는 이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떠올렸다. 아브라함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또 나는 이스라엘 순례를 모두 마치고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이집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석양에 우물에서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가는 시나이 사막의 여인을 보면서도 그 여인이 마치 이삭의 아내 리브가인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베두인은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그들의 생활습관과 풍습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베두인은 이집트 본토, 시나이 반도, 그리고 이스라엘 등에 살고 있다. 시나이 반도에만도 35,000여 명의 베두인이 살고있다고 한다. 그들은 반유목민으로서 양, 염소, 낙타 등을 기르며 사막 속에서 산다. 보이는 이 모래벌판뿐인 사막에서 베두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으면서 살까 하는 궁금증이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수공예품을 팔기도 하고, 자녀들은 학교도 다니고 해서 직장을 얻어 도회지에서 일도 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시뻘건 사막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텐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척박한 사막에서 멸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비법을 간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세계에 7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시뻘건 사막에서 죽지 않고 살아가는 베두인들이야말로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베두인들은 정직하고 친절하며 공정하다고 한다.
3. 정착을 거부하는 베두인들
수에즈 터널에서 165Km 지점에 있는 아부 루데이스(Abu Rudays)를 지나 얼마쯤 달리니 왼쪽에 베두인 마을들이 자주 보인다. 천막이 아니고 시멘트 벽돌로 지은 집들이다. 이집트 정부가 베두인 정착정책을 강행하고 있단다. 그러나 베두인들은 이러한 정착정책을 달가와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베두인들은 정부가 지어준 집안에 천막을 치고 살기도 한단다. 베두인 핏속에 흐르고 있는 수천 년 동안 흘러 내려온 조상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러한 베두인 정착촌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브엘세바 근방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집트에서보다도 더 대대적으로 정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착촌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도둑으로부터 지켜야 할 재산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이웃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정착촌 이외의 베두인 천막에는 울타리도 없고 문도 없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10여Km 떨어져 있는 믹마스 근방에서 한 베두인 천막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남녀거처를 구분하는 천으로 된 칸막이가 천막 중간에 하나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천막 구석에 곡식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루들이 몇 개 놓여 있을 뿐 서발 장대 거칠 것이 없었다.
베두인 자녀들이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뒤로 하고 도시에 나가 취직하여 돈을 벌고, 정부의 계획대로 정착정책이 추진된다면 성경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베두인의 고유한 모습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생겼다. 우리를 이스라엘 국경도시 라파에서부터 카이로까지 안내한 갈릿이라는 이집트 청년은 그의 할아버지가 베두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베두인은 자의반 타의반 전통적인 베두인 생활을 떠나고 있다. 베두인 본인들을 위해서는 어느 편이 더 유익할지 모르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베두인의 현재 생활형태가 그대로 유지됐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4. 법궤를 만든 나무 싯팀
시나이 반도는 우리가 여행하는 기간인 7월이 건기였기 때문에 오아시스에 있는 야자나무 몇 그루 외에는 푸른 나무나 풀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유일하게 사막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높이 10여m 쯤 되어 보이는 나무를 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가까이 가보니 잎은 바늘 같은 가시 모양이고, 몸통 크기는 지름이 20-30Cm쯤 되어 보였다. 이 나무가 싯팀(shitim) 나무다.
개역에서는 ‘조각목’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영어성경을 따라서 아카시아 나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싯팀나무는 아카시아와는 판이하게 다른 나무였다. 하여튼 이스라엘 사람들은 싯팀나무로 광야에서 제단과 법궤를 만들었다(출 25:10; 27:1). 광야에서 궤를 짤 수 있는 유일한 나무다. 풀도 자라지 못하는 광야에 무슨 나무가 있어서 제단과 법궤를 만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5. 시나이의 진주, 페이란 오아시스(르비딤)
아부 루데이스에서 25Km 정도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해안선 길을 버리고 시나이산 쪽으로 약 50여Km 들어가는 길에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오아시스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4Km정도 이어졌다. 페이란(Feiran) 오아시스다. 아랍 사람들이 시나이의 진주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아말렉 사람들과 싸워 이긴 르비딤으로 추정한다(출 17:1, 8). 도로 왼쪽에는 모세가 손을 들고 승리를 기원했다는 가파른 작은 산이 있었다. 그 승전장소를 기념하는 작은 수도원 유적이 남아 있다는 데 시간관계상 가 보지는 못하였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산 앞에서 감신의 방석종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6. 모세의 산, 게벨 무사(시나이산)
우리는 7월 26일 오후 7시 조금 못돼서 시나이산밑에 있는 모르겐 란트(Morgen Land)라는 독일식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산장에 도착하였다. 카이로를 떠난 지 대략 10시간 반 만이었다. 산장에는 이미 한국 순례객들이 많이 와 있었다. 오늘 온 팀만도 우리를 포함해서 다섯 팀이란다.
우리는 다음날 새벽 2시 20분에 일어나 카타린 수도원 밑에까지 자동차를 타고 5분쯤 간 다음 내려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올라가자 한국말로 낙타, 낙타 하는 말이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베두인들이 낙타 옆에 앉아서 낙타를 타고 올라가라고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다. 한국 순례객들이 하도 많이 오기 때문에 아예 한국말로 낙타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새벽 3시경이기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전등 가져오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연세대학교 교목이신 윤병상 목사님의 뒤를 바짝 따라 올라갔다. 남의 불에 게 잡는 격이었다. 우리가 올라가고 있는 이 길은 이집트 정부가 닦은 등산로란다. 처음에는 별로 가파르지 않더니 점차 가파라지기 시작했다. 오르기가 힘들었다. 정상 직전에는 아주 급경사여서 숨이 목에까지 헉헉 차올랐다. 노약자들은 올라오기 힘들 것 같았다.
온통 사방이 깜깜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었다. 환한 대낮에 한번 올라와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찌는 더위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새벽에 오를 것이다. 이따금씩 숨을 돌리기 위하여 쉬면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더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공장도 없고 해서 공기가 맑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곳에 천문대를 세워 별들을 관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올라가면서 가족, 친척, 교회, 연구소, 학교, 학회들, 그리고 국가와 민족통일, 세계평화,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시나이산에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인지 특별한 의미가 느껴졌다.
정상을 바로 앞두고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길가에 앉아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는지 알고 싶어서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 이집트의 콥트교인, 그리고 덴마크, 프랑스, 이란 등에서 온 사람들이란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새벽 5시 25분이었다. 출발에서부터 약 세시간 쯤 걸린 셈이다. 윤병상 목사님이 만보기로 재어본 결과 출발에서부터 정상까지 10,277보라고 알려준다. 정상에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올라와 해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략 200여 명쯤 되어 보였다. 그 중에는 부모와 함께 온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추워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상에는 작은 기념교회가 하나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두어 개 있었다. 음료수 등 요깃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성스러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나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모세의 시나이산 이야기가 적힌 출애굽기 19장 이하를 읽으며 명상했다.
시나이 반도에 사는 베두인과 아랍 사람들은 이 산을 수천 년 전부터 게벨 무사(Gebel Musa) 즉 모세의 산이라고 불러 왔다. 이 전통을 기독교가 받아들여 출애굽기의 시나이산과 일치시킨 것은 비잔틴 시대 이후부터이다. 높이는 2258m이다. 꽤 높은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이 시나이 반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아니다. 이 보다 400여 미터 더 높은 2637m의 성 카타리나(Kathrinah) 산이 시나이산 남쪽에 우뚝 솟아 있다.
태양이 떠오르고 날이 밝자 여기저기에서 찬송소리가 들려 왔다. 정상에서 큰 소리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교인들이었다. 한국교인들의 열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우리도 산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한 다음 곧바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뭔가 아쉬움이 남아 그대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조용히 모세를 느끼고 명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거룩한 장소에서 최소한 한번쯤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다는 절박한 욕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나는 일행을 앞서 내려가도록 놔두고 혼자 정상에서 잠시 명상한 다음, 몇 걸음 더 내려와 반듯한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계에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였다. 좀 더 산 정상에서 조용하게 모세와 그의 한 일들을 명상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나이산을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와는 다른 길로 내려왔다. 오를 때의 길보다 훨씬 더 가파랐다. 올라갈 때는 어두워서 볼 수 없었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시나이산의 모습이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장관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산이었지만, 붉은 빛을 띈 시나이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시나이산의 이러한 장관은 화산 용암이 분출해서 그대로 식어버린 결과라고 한다. 이런 곳은 세계에서 몇 곳 안 된다고 한다.
시나이산은 흙이라고는 볼 수 없는, 온통 바위만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산이다. 오랜 세월에 눈과 비, 바람과 햇볕에 의하여 갖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떤 것은 일부러 조각해 놓은 추상화 조각작품과도 같았다. 아름다우면서도 품위와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국 외에 유럽과 아시아 일부를 본데 불과하지만 이런 산은 처음 보았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주기 위한 산으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산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참 내려오다 20-30여m나 되어 보임직한 큰 나무 한 그루와 너댓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모세의 물(Moses water)을 만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여기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거기에서부터 가파른 길을 한 참 내려오니 카타리나 수도원이 협곡 사이로 내려다 보였다. 협곡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수도원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7. 떨기나무 자리에 세워진 성 카타린 수도원
이 수도원이 성 카타린(St. Catherin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10-11세기경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 수도원의 기원은 주후 330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지시로, 모세가 본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는 자리에 작은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 주후 530년 유스틴(Justinian) 황제의 지시로 좀 더 큰 바실리카 교회가 지어졌다. 그 이후 이 수도원은 한번도 파괴되지 않은 채 1400여 년 이상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수도원에는 오래된 성경사본과 귀중한 기독교 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19세기 중엽에 그 유명한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 발견되었다. 문서들 외에도 귀중한 성화들이 오랜 세월동안 파괴되지 않은 채 잘 보관되어 있다. 이 수도원 경내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떨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높이는 약 3m 정도 되고 수세가 왕성해 보였다. 마치 우리 나라 야산에 있는 산딸기나무와 비슷해 보였다. 수도원 안에는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를 만났다는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펌프로 퍼 올려진 시원한 물이 더위에 목말라하는 방문객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고 있었다.
8. 위대한 모세, 위대한 믿음!
나는 이집트에서부터 시나이 반도의 사막을 지나오면서, 그리고 시나이산에 오르면서 모세란 인물에 대하여 많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스팔트길을 냉방차로 달리면서 가져온 생수를 수시로 마시면서도 뜨거운 더위에 견디기 어려웠는데, 길도 없고 물도 없는 사막을, 게다가 어린 아이와 노인들까지 동반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 사막을 건넜을 모세를 생각하니 그 노고가 보통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하고 불평불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달래기까지 해야만 했던 모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나안을 향한 행군을 강행했던 모세는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던가?!
모세는 가만히 왕궁에 앉아 있기만 했어도 평생동안 부귀영화는 확실히 보장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보장된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한 것이다. 불확실한 정도가 아니고 생명까지도 내걸어야 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집트의 문화유적들을 보면서 나는 이집트 문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호화스러웠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파라오의 권세와 부귀영화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이 거대한 세력에 맨 손으로 맞섰던 것이다. 나는 피라밋과 이집트 박물관을 보면서 이러한 거대한 세력에 단신으로 맞선 모세의 용기와 담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마음속으로 내 생애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그 담대함의 근원은 다른 것이 아닌 히브리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야훼에 대한 믿음이었음이 분명하다. 믿음이 아니고서야 눈앞에 있는 공룡과도 같은 이집트 세력에 어찌 감히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나는 몇 번이나 아 위대한 모세의 믿음이여! 하고 찬탄하며 외쳤다. 파라오의 부귀와 권세는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반면에 모세가 바라고 믿은 것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찬란하게 펼쳐져 있는 파라오의 권세와 영화는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영원무궁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이 미래의 약속을 손에 잡은 듯이 믿고 좇아간 모세의 믿음은 진정 위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모세의 판단은 옳았다. 성경이, 그리고 세계사가 이를 인정하고 있다. 지금 파라오는 어디 있으며, 그의 찬란한 문화는 어디 있는가? 파라오와 그의 문화는 다만 죽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그 이후 역사적 실재가 되어 오늘까지도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세계의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 모세의 믿음의 결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가 모세의 유산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세의 목소리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날마다 하늘을 찌르는 음성으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 그가 이집트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행동하고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은 온 인류가 나아가는 길에 등불이 되고 있다.
모세의 믿음과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존재하며, 유대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한 사람 모세의 믿음의 결단이 이와 같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눈앞의 명예, 부귀, 권세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사회와 민족과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믿음의 행군을 계속할 오늘의 모세가 이 시대에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음을 시나이산 정상에서 나는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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