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아들의 채마 밭 / 김류수
살아오면서 아쉬운 것들이 많지만
지하 전세방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조각보만한 햇살이라도 잠시 방을 거쳐 가는 것을 보면
그날은 재수 좋은날이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주변의 날씨는 화창한 날이 드물거니와
앞뒤로 건물이 빼곡히 들어차
햇살이 건물 사이로 간신히 찾아드는 형편이다.
그런 형편이니 봄이 와도
땅 한 평 일굴 공간에 대한 욕심은 언감생심이 아닌가.
물론 주변의 주말 농장을 임대해서
아쉬움을 해결하는 방도가 없지 않지만
그냥 마음 뿐 이어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논밭을 놀이터와 학교 삼아 살던
그 마음의 갈증을 해결 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고향 청산을 생각할수록 내가 선택해서 사는 삶 일지라도
숨통이 칵 막히는 느낌을 받기는 다반사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 년 말 결혼 한지 십칠 년 만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사게 되었다.
세 아이를 방 하나에 가두어(?)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이 편했겠는가.
20여년을 돈하고는 거리가 먼 일만 해 오다 보니
집을 갖는 것은 내게 요원한 꿈이어서
아예 생각 자체를 접고 살았었기에
어떻게 지하 탈출 방도나 있으면
내게는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였다.
그런데 전세 기간 만료가 가까이 오자
집을 구하러 여기저기를 다니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전세금에 천 만 원만 보태면 집을 살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산의 변두리지만 2,500여 가구의 제법 큰 아파트 단지에
꽤나 알아주는 시공사가 지은 아파트였는데
모기지론 융자를 하면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매월 이자가 문제였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한 나머지 큰 맘 먹고 욕심을 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 주택이나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는데도
나는 집이 없다는 사실에 둔감한 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주변에 낮은 곳을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의 이들을 대하며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니
그들의 삶의 방식에 가까이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별로 불편함도 느끼질 못했다.
작년 11월 말에 이사를 했다.
우선 딸들이 그렇게 좋아 할 수 가 없었다.
바라보는 내 맘엔 만감이 교차하였다.
내 집이 생기자 여기저기 공간에 채워놓을 것들에 마음이 먼저 갔다.
봄이 되자 나는 먼저 아파트 베란다를 화분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꽃을 직접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농장에 가서 직접 사오면
보통 시중에서 사는 값의 삼분의 일 정도 하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주로 이용했다.
3월 중순경이 되어 고기를 파는 곳에 가서
스티로폼 박스를 대 여섯 개 얻어왔다.
베란다 가득 스티로폼 박스를 늘어놓고
아파트 주변 야산에 가서 파온 흙을 채워 놓고
어떤 농사를 지어 볼까 고민을 했다.
거기다 심으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을 흘려듣고
고추와 상추 방울토마토 오이 등을 욕심껏 심고
사온 퇴비와 비료까지 주었다.
올여름에는 내가 직접 기른 채소를 먹게 해 줄 테니
기대 하라고 애들에겐 제법 큰소리까지 쳤다.
이래봬도 아빠가 농사를 직접지어 본 농군의 아들 아니냐.
이 말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잘 키우고 나면 나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물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엔 주변의 밭이나 경비실 아저씨들이 심어 놓은 것과
별 차이 없이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심어놓은 채소는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사이
농부 아들 타이틀에 시비를 거는 것이 확연했다.
그나마 상추는 잘 자라 주었지만 교회 옆의 밭에는
고추가 수 십 개 씩 달려 쑥쑥 커 가는데도
베란다의 스티로폼 내 밭 10여 구루의 고추에는
달랑 고추 하나를 매달고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두 개, 오이는 2센티 정도 자라다가 말았다.
오이는 내 키보다 더 높게 줄을 타고 잘도 올라갔고
고추와 토마토도 허리춤께 까지 제법 자랐는데도 그 모양 이었다.
진딧물까지 일일이 손으로 잡아주며 정성을 들여 키웠더니 겨우.......
딸들아 이것 크는 것 좀 봐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하며
큰소리 친 것이 나날이 무색해져 갔다.
처음에는 아침 눈을 뜨면 베란다에 얼른 나가서
얼마나 컷나 재면서 흥분을 하곤 했다.
한 달이 지나면서
녀석들은 베란다에 한줌 흙으로 농부 흉내를 내는 내게
안티를 걸고 나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햇살이 잠깐 스쳐지나가는
2층의 한 구루 심을 공간에
두 세 구루 욕심을 부려 심어 놓은 탓도 있었다.
채소도 물만 먹고 클 수는 없나보다. 햇살 뿐 만 아니라
비바람 곤충 해충까지도 채소가 자라는데
역할을 하는 것이려니 생각하니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농부의 아들이라고 해도
부모님이 시키는 일만 죽어라고 했을 뿐인데
농사를 안다고 자만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농사라는 것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땅 심을 기르고,
땅에 맞는 작물을 고르고,
계절에 맞게 심고,
밑거름도 주고,
햇살과 비바람이 함께 지은 농사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매도 안 맺는데 대가 쉬어지기 전에 뽑아다 버리라고 성화다.
그러나 베란다의 채소는 봄에서부터 이른 여름까지
내게 짧은 기간 이지만 희망의 단초였고
단 몇 개의 열매를 주었을 뿐이지만
우리 집 베란다에서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며
더없이 좋은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로 했다.
직접 기른 채소를 원하던 내 채마밭은 잎만 무성하다.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방울토마토 익은 것을 두개 따서
몆개를 입에 쏙 넣고는 미련을 접었다.
나는 수 십 년을 농부 아들의 타이틀로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농부 아들이지
농부는 아닌 것이 판명이 난 셈이다.
그래도 나는 나이 들어 고향에 가면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땅과
청산 앞 바다에서
먹거리를 손수 키우고 건져 먹으며
살 생각을 할 때가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