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어, 조봉암 사형 사실을 보도관제한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민주국가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언론탄압이고 국민 기만행위지요.」
「그건 당연한 원칙론이구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잖아요. 유족의 행위억제를 포함해서, 그게 조선총독부령을 끌어다가 적용한 것 아니에요?」
「그건 독재정권의 극치에 달한 만행이고 웃지못할 희극이죠. 다시 말하면 그 짓을 해서 이 정권은 주권국가를 스스로 부정하고 포기했으며, 법치국가의 위신을 스스로 훼손하고 말살한 겁니다. 소도 웃을 짓을 한 거죠.」
정부가 끌어다댄 총독부령의 유족 행위억제는, 사형자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 대중을 상대로 공공연히 부고를 낼 수 없다, 집단이 모여 장례식을 할 수 없다는 세 가지였다. 그건 총독부가 독립투사들을 사형시키고 나서 민심의 자극과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대비책이었다.
「조봉암이 사형당한 건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뭐랄까……. 앞으로 사회적 영향 같은 건 어떻게 될까요?」
「그건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한 것을 빼고 현시점에서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건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 평화통일론의 말살입니다. 둘째, 진보세력의 파탄이고, 셋째, 반공주의와 북진통일론의 강화입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큰 문제는 민심의 동요일 겁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민심의 동요는 조봉암의 옹호가 아니라 이 정권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승만은 정적 하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대신 새로운 민심의 불신을 사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이익이고 손해인지는 더 두고 볼 일입니다.」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은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존재를 떠올랐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자유당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을 발표하고 2월 25일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하였습니다. 이 사건인즉, 진보당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였고 북한 간첩과 접선하였으며 공산당과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음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재판 결과 대부분 조작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법원에서 대부분의 진보당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의 관심이 조봉암에게 내린 사형 언도와 경향신문의 폐간 조처에 쏠려 있듯이 유일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건 별개의 사건 같으면서도 한 꼬챙이에 꿰이는 정치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통성은 한마디로 정적 제거였는데, 진보당 간첩사건은 조봉암을, 경향신문 폐간은 장면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건은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그 사건들의 무리한 조작으로 오히려 이승만 정권이 위기에 처할 거라고 점치고 있었다.
「계속 경향신문 사건 보도야. 한심하게 미군정법령 88호를 가지고 끝도 없이 왈가왈부니 원.」
「그건 이미 결판났잖아요. 전 대법원장 김병로 씨와 정구영 변협회장이 위헌이라고 공식입장을 밝혔는데요.」
「그 입장표명 가지고 돼? 칼자루 쥔 놈들이 잔소리를 닥쳐라 하며 맘대로 멋대로 몰아가니까 문제지.」
「아닙니다. 이건 대처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면서 미군정법령 88호를 끌어다가 적용시킨 것에 대해 위헌이라고 한 것부터가 발상이 잘못됐고, 방향이 어긋났다 그겁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미군정은 종식됐고, 따라서 군정법도 완전히 폐기처분됐습니다. 그런데 엄연히 독립국가고 법치국가에서 집권자의 편익을 위해 미군정법을 끌어다 적용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정통성을 전면 부인하는 반역행위이고, 법치국가의 존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반란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미군정법을 끌어다 대는 건 일제 총독부의 법을 끌어다 대는 것과 뭐가 다르냐 그겁니다. 이 점을 부각시켜 정부를 비판하고 공격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위헌이다 뭐다 하고 있으니 일이 해결될 게 뭡니까.」
1959년 이승만이 다시 대선에 출마할 뜻을 비치자 경향신문은 몇 차례 이승만 정권을 공격하다가 결국 폐간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적용된 것이 군정법령 제88호입니다. 소설을 통해 조정래님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미군정 시절의 법령을 적용한 것을 꼬집어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군정법령은 1961년이 되어서야 외국정기간행물 수입배포에 관한 법률로 대체되었습니다. 당시 적용된 군정법령의 위헌 여부를 따지기 위해 헌법위원회에 제청되었는데, 판결이 나기 전 4·19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 이후 4월 27일 경향신문은 복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