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추천작 2학년 3반 담임 진웅용.hwp
<운문>
역경
이소정
-만남, 그리고 구원-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돌아갈 수 있는 장소도
나를 반겨줄 누군가들도
모두 사라졌다.
배신이라는 이름의 악마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점점 검게 지워져가는 나
지옥의 끝에서 보면 빛하나
흐려지는 눈에 비친 빛하나
나를 향한 그 가냘픈 손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여린 팔들
사라져가는 이성 속에
무심코 뻗어 잡은 그 손들은
따뜻했다
단지 그것뿐
너무나도 따뜻한 그 여린 팔들은
나의 식은 몸을 녹였다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짓는 그 사람들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너희들
이미 매말랐던 눈물이 흐른다
참고 있던 모든 것이 흘러넘친다
나를 향한 그 미소는
그것은 ‘따스함’
그것은 ‘사랑’
그것은 ‘희망’
그것은 단 하나의 ‘구원’이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던 나에게 손을 향하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나에게 눈을 맞춘다
나에게 그 따스함을
나에게 그 상냥함을
그렇게
그렇게
한치의 더러움 없는 눈들로
너희는 나를 바라보았고
너희는 나에게 미소지었다
-이별, 그리고 만남-
너희의 그 따스한 미소에
나는 울며 너희들에게 안겼지.
친구라는 존재
나에겐 하나뿐인 존재
더럽혀진 나에겐 과분하고 순수한 빛들
그 영원한 빛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믿었다
그렇게
그렇게 믿어왔다
모든 것을 잃었을 적처럼
너희는 나를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고
너희는 나를 다시 차가운 세상에 남게하진 않는다고
너희만은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지만 세상을 달랐다
단지 이건 나의 이기심
너희를 향한 나의 이기심
하지만 너희는 그런 나를 더욱 따스히 안아주었고
그렇게 맑게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그게 마지막
그때의 포근했던 따스했던 시간은
이제 너희가 없는 이 세상에 남아
바람에 흩어져가
시간을 따라 서로 다른 길로
그래
더 이상 사슬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너희가 바란 이래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존재
새로운 만남과 이별
하지만 이 모든 게 지금의
나의 존재에 대한 이유
서로 길은 달라도
살아가는 방법은 다라도
이 마음만은 변치 않아
어둠에도 빛을 잃지 않을 이 마음은
그리고 이제 당당히
바라볼거야
- 너희가 있을 저 밤하늘을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위해
<심사평>
만남과 이별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감수성 높은 언어로 잘 표현해 냈다. 같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우 깊이 공감할 수 있게 솔직하고 탁월한 감각으로 썼다.
기다리는 동안
이소영
친구를 만나기로 한 공원 입구에 나는 서 있어요
아직 친구는 오지 않았나 보아요.
얘는 원래 이렇죠.
워낙 블링블링한 아이라 저의 이해가 필요해요
친구를 기다린 지 30분이 지났어요.
멋좀 내보겠다고 레이스 달린 민소매 티셔츠를 입었지만
겨드랑이 밑이 온통 젖어서 몹시 민망해 죽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저를 쳐다봐요.
이젠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기다림이 1시간째 지속되고 있어요.
겨드랑이부터 허리까지 고드름모양으로 촉촉이 젖은 민소매를 입고 있어요.
화장은 이미 땀으로 씻어졌네요.
이런 삐리리야, 삐-이 너는 오기만 하면 삐리리리하게 때려주겠어.
눈을 떠보니 사방이 깜깜해요.
잠시 정자에 앉아서 쉰다는 게 자빠져 자버렸나보아요.
거울을 보니 아주 가관이에요.
저의 친구 블링블링걸에게서 문자가 오진 않았을까 핸드폰을 여는 순간
위이잉- 분노게이지 상승
40%, 85%, ····· 100%
목표지점, 블링걸의 집.
준비, 출동!!!!
‘얘, 나 다리털 밀다 피나쪄. 핫팬츠 입으려다 이게 웬 봉변이니? 호호··· 미안염 ㅃ2 - 블링블링’
<심사평>
젊은 세대의 표현이 잘 드러났고, 현실감과 개연성이 짙어서 동세대가 공감하기 좋으며, 결말의 반전이 재미를 더한다.
<산문>
7월28일(역경)
이민지
7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내 기억엔 무척이나 이른 아침이었던 것으로 남아있다.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일찍이 울리는 벨소리에 놀라 빨리 눈을 떴지만 이미 끊겨버린 핸드폰을 게슴츠레 바라보곤 시야를 옮겨 얼마 전에 내 돈으로 구입해 손목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G-rego 시계를 한번 보았다. 뿌듯한 마음과 함께 몰려 온 불쾌감 ‘대체 이른 아침에 누구지?’라는 생각도 잠시, 똑같은 번호로 인해 핸드폰이 다시 칭얼댄다.
‘네’라는 짧은 대답만으로 이루어진 통화가 끝난 뒤 쿵쿵거리는 불안함에 그대로 주저 앉았던 기억이 난다. 생각과는 다르게 눈물도 서글픔도 나오지 않았고 탄식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아이의 이름 석자만이 두 눈 속에 젖어 들었다.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눈 깜빡할 새에 한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의 부모,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이 생생한 죽음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뒤로 그 아이에게 정이 너무 많이 가 있었던 탓인지 마음 속에서 학생이라는 자의식이 잠겨 많은 슬픔 속에 방황하던 도중 수개월이 지나 그 아이의 생일이 다가왔고 만반의 준비를 하여 친구들과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몇 개월 동안 달라진 우리와는 달리 개구지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미안함과 함께 조심스레 손짓하자 소리없이 식어간 모습이 떠올라 무참히 짓밟힌 느낌이었다.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살았을까. 내 삶의 부분이었던 아이와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오로지 남들보다 더 특별히 정분을 나눈 아이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해 허우적대기만 했다는 생각도 겹쳐져 마치 그때의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때 늦은 사춘기, 아니 오춘기 쯤이나 될까? 그 때문에 허비했던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때가 짧으면 짧다고 길며 길다고도 할 수 있는 내 16년 인생의 역경이었던 것 같다.
<심사평>
시간의 역전적 구성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잘 사용했고, ‘전화가 칭얼댄다’ 등에서 표현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첫댓글 우리반 학생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재능들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추천작을 고르기도 참 힘들었고요. 어렵게 세 작품을 추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