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후텁지근한 날씨였지만 길을 떠나기에는 적당했다
청량리 시장에 들러 스님께 드릴 과일과 일행과 함께 먹을 과일을 챙겨 역에 도착하니 10 여분 이른 시간이었다
한가로운 바람과 노닥거리는 시간이 여유롭다. 아니, 시간이 여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랜만의 여행으로 설레는 내 마음이 여유로웠음일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설렘이다.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면 외로움이겠지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잠시의 외출 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여유로움이다
가끔 깊은 갈등과 상념으로 입을 닫고 가슴이 닫혔을 때 몸과 마음은 피 접한 꼴로 엉망이었지만 불투명한 것들에게서 벗어났을 때 진정 마음의 평화를 느꼈듯이 내 마음이, 내 육신이 온전히 내게로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은 마음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서울을 벗어나자 막혔던 길이 뚫려 경춘가도를 막무가내로 달렸다
워낙 길치라 길 안내가 버거웠는데 마침 일행이 길을 잘 알고 있어 다행이다.
북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이리저리 휘돌아 들어선 길, 작은 둔덕은 푸름이 한껏 짙어 눈과 마음이 시원했다
스님이 전화로 안내한 '흙내음'이란 음식점은 작고 아담했다.
깨진 항아리로 지붕을 덮고 넓게 창을 낸 실내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마루의 식탁들이 나란히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있었다.
마루 위 앉은뱅이 식탁 위에 '새콤달콤 맛깔스런 올갱이 무침과 정찬이 차려지고 담백한 반찬과 시원한 총각김치가 입맛을 도와 맛있는 점심을 끝냈다.
부른 배를 껴안고 떠나기가 거북해 잠시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주위 여건이 산책할 만한 코스가 없음이 아쉬웠다
10 여분쯤 길을 달렸을까?. 스님께서 키 작은 코스모스처럼 길가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오랜만에 뵙는 스님은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소년의 모습이었고 지난겨울에 뵈었을 때 입을 벌려 크게 웃으면 검은 동굴처럼 공허롭던 앞니 빠진 자리엔 금니가 반짝거렸다
길이 험하니 차를 타고 올라가자는 스님의 말씀에 일행 중 환자인 한 분만 차를 타고 가시라 하고 두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막무가내로 붙들었다
"이 곳은 차 타고 올라가면 재미없어요
암자로 올라가는 길은 헐떡거리며 올라가야 제격이란 말이에요
올라가는 길이 조금 힘들어서 그렇지 얼마나 멋있는 줄 아세요?"
온갖 말로 꼬드겨 결국 물이 철철 넘치는 계곡을 건너 산길로 오르기로 했다
개울을 건너기 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디다!"
개울 옆 가지 넓은 뽕나무에는 보라색으로 익은 오디가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 발길을 유혹했다
두 어른 남자는 소년이 되어 가지를 잡고 매달리고 키 작은 여자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면서도 열심히 손과 입을 놀렸다
손가락이 보라색으로 물들을 때까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후식은 이 정도에서 그칩시다. 잘못하면 설사합니다"
길눈이 어두워 앞장서 산길을 들어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하더라?
다행히 옆으로 빠지자 길이 나타났고 두 남자는 가벼운 몸으로, 하이힐을 신은 여자는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바위길을 올라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지만 숲길로 들어서자 그늘진 오솔길로 푸른 바람이 등을 훑고 지나가니 등골이 서늘하다
좋다.
정말 좋다.
이곳에서 이대로 망부석이 되어도 좋으리.
힘들게 암자에 올라서자 먼저 도착한 스님께서 바가지 가득 물을 담아주는데 벌컥벌컥, 목을 넘기는 시원한 샘물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지붕 낮은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일 배하며 가족과 이웃을 안녕을 빌고 잠시 산사를 둘러보았다.
두 칸짜리 오두막 요사채 마루 밑에는 며칠 전 데려왔다는 생후 2개월을 겨우 지난 강아지가 재롱을 부리며 제 놈을 예뻐하는 줄 어찌 알고 발가락을 핥고 깨물고 늘어진다.
품에 안고 싶었지만 흙에서 뒹굴던 놈들이라 차마 안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주니 좋아라 달라 붙는 것이 영락없는 하룻강아지였다
한 남자는 마루에서 바람을 껴안고 잠이 들었고 한 남자와 잣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섰다
젖은 숲은 묘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했다
마치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 향처럼 깊은 곳에 감추어 놓은 감성을 건드리듯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강하게 마음을 낚아채며 유혹했다
잘못 마음을 삐끗하면 그냥 그대로 그 숲에 주저앉을 만큼 숲은 유혹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왜? 갑자기 숲 속의 귀족이라는 자작나무와 '자작나무 숲으로'라는 시가 생각났을까?
뜬금없이 닥터 지바고가 달빛을 길동무 삼아 혁명군을 등졌던 그곳과 지바고와 라라가 마지막 며칠을 지냈던 바리키노 설원의 등줄기 하얀 자작나무가 떠올랐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지. 한여름 잣나무 숲에서 설원 속의 자작나무를 생각하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대로 숲 속에 머무르며 그들처럼 사랑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하필이면 설원속의 자작나무였을까?
바람 잔잔한 잣나무 골목 사이로
아장아장 걸어오던 사랑이여
머물고 싶었던 시간 바람에 흘려 보내고
바람과 향기의 애무에 취했던 그 찬란한 여름날에
이미 그곳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구나.
마음에 바람꽃 불어 가슴 스산한 날에는
그곳에 두고 온 너의 향기를 찾아 잣나무 숲으로 가리라.
차마 내려놓지 못한 마음,
가지에 걸어 놓은 그 마음소리 담으려 나는 잣나무 숲으로 가야겠네.
나는 자작나무가 아닌 잣나무 숲길을 노래했다.
오랫동안 기억될 그곳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멈춘 시간과 공간 안에 사람과 바람이 함께 갇혔다
하얗게 드러낸 어깨 위로 바람의 손길이 닿자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짙은 페로몬 향에 유혹당한 내 마음이 비틀거렸다.
엉덩이뼈에서 시작된 강한 전류가 척추를 지나 정수리를 향해 빠르게 올라가고 활활 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아찔했다. 그냥 그대로 바람에 안기고 싶었다. 그냥 그대로 뜨거운 키스로 마음과 몸을 녹이고 싶었다.
아!
아득함이여.
깊은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숲을 빠져나와 갈 길을 서둘렀다.
아무리 급한 발길이라지만 역시 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사양하고 거친 산길을 뚜덕거리며 내려왔다
요사채를 짓기 위해 잣나무를 베어낸 비탈은 붉은 허리를 드러내었고 베어진 잣나무는 길을 가로질러 누워 바람을 희롱하고 있다.
일행의 손과 어깨를 빌려 겨우 둔덕을 내려올 수 있었다
도로와 산을 경계로 흐르는 개울에는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었는지 깊이가 꽤 깊어 보였다
개울을 가로질러 황순원님의 소나기를 연상케 하는 큼직한 돌다리가 놓여있었지만 위험하다고 말리는 일행을 뿌리치고 굳이 개울물을 건너겠다고 고집했다
가운데로 들어갈수록 물이 종아리를 넘어 무릎까지 차올랐다
잘못 걸음 하면 원하지 않는 목욕을 해야 할 판국이다. 잠시 난감했지만 되돌아가기는 싫었다.
비틀비틀, 조심조심 걷는 발바닥 사이로 모래가 끼어들었고 종아리를 슬쩍 건드리며 지나가는 물결이 기분 좋았다
뒤돌아보니 슬쩍 비켜 앉은 암자는 뒷꼭지 조 차 보이지 않았고 잣나무 숲이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이 끝났다
넉넉한 하루였음을 만족스러워 하며 잠시 들떠있던 마음을 다독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포만했던 가슴에서 "으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쑥대밭인 집안. 마음을 버리고 퍼뜩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첫댓글 좋으셨겠네요. 매일 반복되는 생활로 몸과 마음이 찌들릴때면 순수한 자연과 함게하는것보다 더 이상 좋은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부럽네요^^*
시골살때 학교 끝나고 오는길에 친구들하고 남의뽕밭에 들어가 손과 입이 까맣게 되도록 따먹다가 주인이 소리치면 놀래서 가방도 제대로 못챙기고 도망가던 시절..같이 놀던 친구들도 가끔 그시절을 그리워하겠지 ..... 보고싶은 죽마고우들... 오디얘기에 잠시 추억에 젖어 봅니다.
회색빛 도회지를 벗어나 산 골짜기 내음이 얼마나 신선 했을까요^^ 아름 다운 글에 푹 빠져 봅니다^^*~~
와... 멋진 글입니다. 사진과 곁들였다면 한폭의 그림이었을......
ㅎㅎㅎ쑥대밭인 집안. 마음을 버리고 퍼뜩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ㅎㅎㅎ
아... 이런 보석 같은 글을 볼 수 있다니 행복하군요. 그 숲에서 페로몬향에 한 껏 유혹된 님을 따라가도 좋았겠고, 또 암자에 남아 그대로 바람을 안고 잠들었어도 좋았을 듯
행복한 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