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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제1문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몸과 영혼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내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해 합력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 내게 영생을 보증해 주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제부터 진심으로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나를 준비시키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제2문
문: 이 위로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다가 죽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합니까?
답: 다음 세 가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어떻게 내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는지 알아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내가 그러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유사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 1문은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두 첫 번째 질문은 주어와 목적어의 차이일 뿐이지 사실 결국은 똑같은 질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은 제 1문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인간이 해야만 하는 일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은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먼저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내용을 한 단어로 핵심 요약하면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 1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내용이 주제이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1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와 핵심 주제는 바로 은혜와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이나 모두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들로 더불어 그 첫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왜냐면 “유일한”이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당신을 위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그 위로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참 여러 가지 양태에서 쉼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라고 질문하고 있습니까?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장 중요한 위로, 진정한 위로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단어가 독일어에 “트로스트”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요. 독일어 트로스트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신뢰”라는 뜻과 “확신” 그리고 “보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 삶 속에서 당신에게 가장 진정한 신뢰를 가져다 주는가?” 또는 “당신을 진정으로 보호해 주는 유일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에 진정한 위로, 진정한 보호, 유일한 신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나 자랑거리나 혹은 권력이나 지위 등에 근거해서 위로를 얻으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교리문답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이 말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뜸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내가 나의 소유가 아니면 누구의 소유란 말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쇼? 내 인생이 오로지 나만의 것입니까?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단순히 자신의 것으로만 여겼을 때 인간은 한없이 잔인해집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이러한 자아의식을 만들어지게 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쓴 시 중에 “인빅터스”라는 시가 있는데요. 이 뜻이 “굴하지 않는,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요. 이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는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인간 승리자입니다. 12살에 폐결핵에 걸려서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습니다. 20대 중반에는 오른쪽 다리가 감염돼 의사들이 살려면 절단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3년간의 끈질긴 치료로 절단하지 않고 병을 이겨냈던 정말 인간 승리자입니다.
그가 이러한 상상 못할 고통 속에서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중얼거렸던 말들을 병을 이겨낸 후에 언어로 옮겨 만든 시가 바로 “인빅터스, 굴하지 않는,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원래도 유명했지만 더 유명해 진 것이 여러분 잘 아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노벨 평화상)가 정치범으로 감옥에 27년 6개월을 갇혀 있었는데, 그가 그 감옥생활을 버티게 해 주었던 시가 바로 이 시라고 말해서 더욱 유명해졌던 시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사람들에게 대단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시인 것 같지만, 반면에 우리 기독교에는 엄청난 해악을 미쳤던 시입니다.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바로 이 시로 인하여 20세기에 인본주의의 영향이 엄청나게 커졌다고 말합니다. 이 시의 내용을 다 말씀드릴 순 없고, 그 마지막 부분이 이런 내용입니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기에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선장이랍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 인생은 나의 노력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죠, 그러나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이 노력한 것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시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견고히 해내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이 시가 오히려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고, 내가 내 영혼의 선장이니까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라는 의미의 시인 것 같지만, 반면에 오히려 어려움과 역경 속에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자살을 했고, 지금도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언장에 이 글을 써넣고 자살을 합니다. (살인자들... 테러리스트)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인생이 네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제 1문에 이것을 확증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만 우리의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 신자의 삶은 그 인생과 삶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개혁파 신학을 형성한 신학자 존 칼빈, 요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위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뜻을 좇아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마귀의 권세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기에,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사실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존재가 아니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만일 죽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존재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이며, 후에 참 생명을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위로요, 진정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살다가 장차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 구체적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두 번째 질문이고, 이 질문 앞에 교리문답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가 뭡니까?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뭡니까? 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가 뭡니까? 어떻게 내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는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뭘 알아야 한다는 겁니까? 은혜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세 번째 어떻게 내가 그러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뭘 알아야 한다는 겁니까? 감사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죄, 은혜, 감사를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환경이 사람을 좌우한다고 말하면서 환경만 잘 만들어주면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뭐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잘 받으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면, 제대로 환경적 지원을 해주면 인간이 잘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독자 치유 프로그램의 시작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나는 마약 중독자입니다”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인간, 내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비로소 죄를 해결하는데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양심도 없고, 얼마나 자기 이기주의에 빠진 존재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가 드러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광야잖아요. 어렵고 힘들면 인간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내면들이 다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만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만나가 뭔지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게 없다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주신 음식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음식을 주시자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음식을 만나라고 지칭을 합니다. 그런데 만나라는 뜻이 뭡니까?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이게 뭐냐?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게 왠 떡이냐? 이겁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기적과 같이 먹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이게 왠 떡이냐”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이게 뭐냐” 하면서 놀랬던 반응이 민수기 11장에 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민수가 11장 5~6절(213p)입니다. 같이 보실까요?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겨우 이것밖에 없다는 뉘앙스 잖아요. 그런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민수기 21장에 가서는 이렇게 더 한 표현을 씁니다. 민수기 21장 5절(231p)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처음에는 놀라서 이게 뭐냐 외쳤던 사람들이, 후에는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죄의 성향을 깊이 깨닫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요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를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 뭐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까? 당연히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감사의 연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와 비신자의 가장 큰 삶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감사를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입니다. 삶에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은 감사가 없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TV에서 무슨 토크쇼 같은 것을 보시면, 이 사람이 크리스천인가? 난크리스천인가를 단번에 알아보는 방법이 그 사람이 말할 때 “감사”라는 표현을 많이 쓰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기독교 용어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길 합니다. 북한에 도우려고 가서 열흘을 머물렀는데, 단 한 번도 북한 사람들의 입술에서 “감사”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성경에 감사가 없이 원망과 불평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아까 보셨던 민수기 11장(213p) 보실까요? 4절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이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먹을 게 없다고 말하면서 5절에 우리가 애굽에서는 값없이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을 먹었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여러분! 언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이런 음식 먹었습니까? 죽도록 일만하고 피죽도 못 먹었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늘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뭐라고 말하자면 4절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을 어떤 성경에서는 잡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은 섞여 사는 인종들이 어디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를 누리며 살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요.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나 큰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었는지 아는 것이요. 그 은혜를 아는 자는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사는 자들임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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