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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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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 6월 3일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현 추사고택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무수히 많으나 추사를 비롯하여 완당(阮堂), 예당(禮堂),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유명하다. 추사는 병조판서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노영 앞으로 입양되었다. 추사는 어린 시절을 서울 통의동에 있는 월성위궁에서 보낸다. 그러다가 1800년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산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렸다. 그렇지만 그 전후 무렵, 추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꼬리를 물고 어어졌다,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이미 죽은 데다가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죽고 다시 1805년에는 부인 한산 이씨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추사는 1808년 스물셋의 나이로 예안 이씨와 재혼했다. 다행히 둘 사이는 금슬이 무척 좋아 나중에 추사가 귀양갔을 때에도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추사의 생부 노경이 호조 참판을 지내던 중 1809년 중국 북경에 보내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선임되자 추사는 외교관의 아우나 자식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이 일은 추사에게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추사는 북경에 두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당대 제 일급에 속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무수히 만났다. 특히 당대 제일의 금석학자로 널리 알려진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일러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찬탄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한 사람의 대학자인 완원은 완당이라는 호까지 지어주며 애정을 보였다. 두 사람은 추사에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무수한 금석문 자료들을 기꺼이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추사가 학문적 호기심을 보이는 모든 분야에서도 많은 자료를 구해주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이외에도 많은 학자, 예술가들이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레 가득히 선물을 싣고 돌아온 추사는 이제 어제의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었다. 그는 선물로 받아온 학술자료며 예술품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고증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816년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새로 발견한 것이 그 첫 업적이었다. 아울러 탁본을 연구하여 황초령 순수비도 고증했다. 그런 연구 결과를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집대성하였다. 그는 금석문뿐만 아니라 천문, 경전 등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논저를 상대적으로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북경학계와의 교류는 북경에서 돌아온 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어 추사는 중국에서 보내주는 금석문의 글씨체를 연구하여 마침내 저 유명한 추사체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1819년 추사는 서른 넷의 나이로 과거 시험 대과에 합격하여 출세길로 접어든다. 그는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정5품), 예조 참의(정3품) 등을 거쳐 시강원 보덕에 이른다. 한편, 그의 부친 김노경은 북경에서 귀국한 후 20년 동안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평안감사에 이르기까지 요직 중에 요직만을 두루 거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이제 추사 가문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1830년 부사과(副司果) 김우명이 비인현감 때 추사에게 파직당한 기억을 잊지 못해 비열한 탄핵을 시작했다. 당시 왕이던 순조는 추사 가문을 적극 비호했지만, 반대파의 공격으로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1년 동안 귀양살이를 가게 된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노경은 1838년에 세상을 뜨고, 추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들이 다시금 탄핵을 개시했다. 순조는 이번에도 추사를 옹호했지만, 당시 안동 김씨의 세력은 왕의 권위까지 넘볼 정도였다. 추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죽음 일보직전에서야 풀려나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간다.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뜨게 해주었으니, 그의 글씨는 이제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유배 시절에 남긴 세한도(歲寒圖:국보 제 180호)는 그의 예술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추사체도 역시 제주 유배생활을 통해 완성하였다. 그는 쉬지 않고 노력하는 예술가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칠십 평생에 벼루를 열 개씩이나 밑창을 바닥내고 붓을 천 자루나 망가뜨렸다고 하니, 그의 노력의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848년 제주 유배생활 9년만에 풀려난 추사의 시련은 끝나지 않고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함관령을 넘어 북청으로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다행히 그때의 유배는 일년간이었지만, 유배에서 풀려 나오는 그는 이미 세상에 미련도 없었다. 그는 말년에 경기도 과천에서 주로 기거하다가 일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추사의 예술적, 학문적 경지를 보여주는 듯 추사의 생가 또한 전통적인 조선조 양반 가옥의 깊은 품위를 복원, 보존하여 유지되고 있다. 이 가옥을 두고 예산 주민들은 추사고택이라 부르며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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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형성배경과 경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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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배경(창안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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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증조부 김한진(金漢盡: 1720-1758)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신암면 고택일대를 사전(賜田)으로 하사 받아 지은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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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전개 또는 발전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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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가문은 원래 서산군 대교리에서 속칭 '한다리 가문'으로 불렸던 명문가인데, 추사의 고조부 흥경(興慶: 1677-1750)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더욱 번성했다. 그의 아들 한진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慰)에 봉해졌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너무나도 아꼈기 때문에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던 자리에 월성위궁과 현재의 신암면 고택일대를 사전으로 하사하였다. 신암면 사전에 집을 지을 때는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각 고을마다 한 칸씩 분담하게 됐다는 말이 있고, 서울에서 경공장(京工匠; 한양에서 나라 건축을 전담하는 목수)을 불러다가 지었을 정도로 영조가 화순옹주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의 추사 고택은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상류계층 건물로 후손이 오랫동안 거처해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되었는데, 이를 1976년 충청남도에서 다시 매수하였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유적지 정화사업을 벌였다. 그렇지만 형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던 곳도 있어서 완벽하게 복원공사를 하지 못했다. 현재의 추사고택 규모는 반으로 줄여서 복원된 것이다. 현재는 예산군 공공시설 관리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추사고택 내 관리사무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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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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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원소재의 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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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분포 또는 생산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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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내용적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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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5천년 동안 이름을 떨친 이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추사 김정희만큼 뭇사람의 입에 두루 오르내린 이가 얼마나 될까. 이른바 추사체로 일컫는 해동제일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 그리고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그는 시서화에 당대 제일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추사는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의 수준 또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추사 김정희 선생은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고택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추사고택이라 명칭한다. 현재의 고택은 1976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복원공사 되었다. 절반 정도는 훼손정도가 심해서 끝내 복원하지 못했다. 추사고택은 총 80평으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안채와 엄격히 구별되어 있는데,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주인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배려한 것이다. 현재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고 각자가 된 돌기둥이 있다. 천문학에도 관심이 깊었던 추사가 만든 해시계이다. 그리고 기둥마다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을 붙여 두었다. 주련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복원공사를 할 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랑채 안에는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복사본이 걸려있다. 진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세한도는 1884년 제주도 유배시절에 남긴 그의 예술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수제자 이상적(1803-1865)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 가 뒤늦게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을 발문에 적었다. 사랑채는 입구에서 보면 '?'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6간 대청과 안방 건너방이 있는 '?'형 집이다. 안방, 건너방에는 각기 툇마루가 붙어 있다.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의 대갓집에 흔하다. 안채에도 기둥마다 주련을 붙여 놓았다. 안채 뒤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다. 1976년에 복원공사를 할 때 만든 것이다. 이 곳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영전이 모셔져 있다. 추사고택 왼쪽 옆에는 추사묘가 있다. 추사묘는 과천에 안장되어 있던 것을 1937년 선조들이 묻혀 있는 이곳에 이장하였다. 추사고택에서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순옹주와 증조부 김한신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이 묘 옆에는 홍문이 있는데, 추사의 증조부는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 그 부인인 화순옹주가 재가를 하지 않자 영조가 화순옹주의 정절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하사한 것이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홍문에서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기슭에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 10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이 서 있다. 이것은 추사가 동지부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가져온 소나무로 원래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제일 큰 가지는 고사하고 말았다. 보통 소나무가 이엽송인 것과 비교하면 백송이 얼마나 특이한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식하면 대부분 죽어 버린다고 한다. 중국 원산으로 껍질이 밋밋하고 큰비늘처럼 벗겨져 회백색을 띠게 되기 때문에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 불린다. 수령은 200내지 300년이며 높이는 10미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에 4그루, 고양에 한 그루, 보은에 한 그루 등 모두 8그루가 있다고 한다. 추사고택 근처 나지막한 구릉 오석산(烏石山)에는 화암사(華巖寺)가 있다. 이 절은 백제때 창건되었지만 현재의 건물은 추사의 증조부가 재건하고 그후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화엄사는 추사 가문의 집안 절이었기도 한 셈이다. 추사는 여덟살 때 서울 월성위궁으로 올라갈 때 까지 자주 그 절에 올라가서 놀았다. 추사는 또한 스스로 오산노초(烏山老樵)라는 호를 쓰고 서재를 오산독서루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다 그가 어린 시절에 오산, 즉 오석산을 오르내리며 놀았던 추억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그는 오석산의 남쪽 암벽에 '소봉래(小逢萊)'라고 새기기도 했으니, 그만큼 추사는 자신이 뛰어놀던 곳을 작은 금강산처럼 사랑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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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행위자 및 전래자에게 주는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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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지역주민들에게 주는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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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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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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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용기/재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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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비및 장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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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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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보존 및 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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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 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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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청에서 예산경찰서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공주산업대학교가 있다. 산업대 앞에 버스 정류소가 있다. 추사고택 버스 노선을 찾아보려면 신례원 방향의 노선 시간표에서 찾아야 한다. 신암면은 신례원을 거쳐서 지나가기 때문이다. 신암·조림 방면의 차를 타면 추사고택에 들어간다. 차는 그리 많지 않아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추사고택을 지나간다. 버스가 출발하면 예산시내를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0분이다. 10분 후면 예산종합터미널이 보일 것이다. 터미널을 지나가다 보면 도로 옆으로는 풍요롭고 잘 정돈된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조금을 더 가면 발연리 육교가 보인다. 발연리 육교를 지나서 5분여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두 길 모두 가다보면 추사고택 가는 길로 왼쪽길은 신례원 우회도로이다. 버스는 신례원을 경유하기 때문에 오른쪽 길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중앙병원이 있고, 조금을 더 가면 비닐하우스가 많이 보인다. 이 비닐하우스들은 쪽파를 재배하는 곳인데, 전국에서 알아주는 창소리쪽파의 재배단지이다. 재배환경이 이곳과 맞아 쪽파농업이 발전하여 겨울에는 서울 가락동 시장에 출하되는 쪽파 물량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창소리를 지나 신례원리에 도착하면 4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신례원역으로 길이고, 직진하면 온양·천안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은 추사고택으로 향하는 길이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5분을 가면 사거리가 또 나온다.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한참을 가면 정면에 높은 언덕이 보인다. 언덕 끝에 올라오면 왼쪽에 신암농협이 있다. 계속 직진하여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고택주유소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더 가면 작은 언덕 아래에 솔밭과 어우러진 정갈하고 우아하며 규모가 제법 큰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이곳이 바로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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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홍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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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
예산군청홈페이지내 소개 |
라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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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단 |
팜플렛 |
중앙 TV |
KBS, MBC, SBS |
지역신문 |
무한신문, 대전일보 외 다수 |
지역 TV |
예산유선방송 |
전국신문 |
한국일보, 중앙일보 외 다수 |
잡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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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의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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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농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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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개인/주식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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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단체/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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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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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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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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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지적재산의 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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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의 특성 및 주요방문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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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3국에 이름을 떨친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이다. 서예에 취미나 특기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추사와 추사체를 사랑한다. 그래서 추사고택에는 서예인들이 자주 찾아와 추사가 유년기와 노년기에 살았던 추사고택에서 추사의 정취를 느끼고 간다고 한다. 잘 꾸며진 풍치지구와 교육적인 목적에서 학교의 소풍장소로 많은 학생들과 단체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가족들과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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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평균 방문객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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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약 6만 7천여명이 추사고택을 찾아온다. 하루에 약 180여명이 찾아오는 셈이다. 봄, 가을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여름, 겨울에는 덜 찾아온다고 한다. 이유는 봄, 가을에는 야유회와 소풍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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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입장비용, 이용가능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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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은 입장료가 매우 싸다. 군청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이윤을 목적에 두지 않았다. 대인 300원, 청소년·군인 150원, 어린이 100원이다. 단체 할인은 30인 이상이어야 한다. 대인 200원, 청소년·군인 100원, 어린이 100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관람시간은 하절기에는 09:00∼18:00(3∼10월), 동절기에는 09:00∼17:00(11∼2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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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된 운영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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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추사고택 내에서 개최하는 프로그램은 없다. 하지만 예산문화원에서 개최하는 추사 추모 전국 서예 백일장이 추사가 타계한 10월 10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 개최한다. 추사가 돌아가신 10월 10일은 음력인데 음력으로 행사를 개최하면 11월달이 된다. 그러면 날씨가 추워서 붓글씨를 어려움이 많아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어서 행사를 개최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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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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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은 예산군청 홈페이지에 관광명소로 소개되어 있다. 추사고택 내에는 추사고택을 알릴 수 있는 작은 팜플렛이 비치되어 있고 단체관람을 할 때는 직원들이 관람객들에게 돌아다니면서 구두로 설명해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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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및 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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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은 예산군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추사고택 1년 예산을 예산군청에서 지급하고 있다. 추사고택 관람료는 예산군 금고로 들어간다. 예산은 직원들의 임금과 문화재보수등으로 쓰여지고 있다. 추사고택 관리사무실이 관리하는 추사고택의 총 부지는 123,615㎡로 상당히 넓고 연중무휴로 개장하기 때문에 현재 4명의 직원이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군청에서 관리사무실 직원이나 공익근무 요원을 배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자료출처 충청남도- |
첫댓글 이런 건 우리도 배워야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