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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홍선생의 한자로 푸는 세상만사 2009년 야외교육(1)/2009.5.15
경복궁
오늘은 경복궁에서 궁궐공부를 하는 날이다. 아침10시에 경복궁에 집합이다.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 하차하여 경복궁으로 들어가다 보니 불로문이 반가이 맞이 한다. 불로문은 불로장생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마침 10시부터 경복궁 마당에서 수문장교대식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왕궁에는 수문군이라는 군대가 있어서 궁궐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경복궁에서 행해지는 수문장 교대식은 조선시대 수문군이 교대하는 의식을 역사학자의 연구에 따라서 과거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으로,수문장 교대식 은 경복궁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덕수궁의 대한문, 숭례문에서 행해지고 있다.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시에 이루어 진다. 영국의 버킹검궁의 근위병 교대식에 비견되는 행사로 내국인은 물론 외국관광객들도 흥미롭운 구경거리 를 제공한다.
지하철 / 불로문 수문장 교대식
자유롭게 수문장교대식을 구경하고 경복궁 흥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대홍선생님의 경복궁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있었다. 이어 조선조에 시행되었던 기로연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였다. 기로연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고 70세가 되면 입적하여 잔치를 열 어주었다고 한다. 장수한 숙종,영조대왕을 비롯 왕으로서는 몇안되는 행운을 가졌다.
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경성전~강녕전~교태전~아미산~자경전~경회루~ 수정전~향원정~집옥천~건춘궁의 순으로 관람을 하면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광화문 제모습찾기 공사가 한창이다. 조선시대 기로연 /궁중의례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 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3년 12월 4일 개토를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라는 신하가 중국 시집인 「시경」에 나오는 '군자의 만년 빛나는 복을 빈다'는 뜻이 담긴 경복이라는 시구를 따서 지은 것이다. 서울 북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북궐'이라고 도 불리었는데 이때 세워진 여러 궁전에는 근정전, 사정전, 천추전, 만춘전, 강녕전, 교태전이 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크고 작은 궁전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그 주춧돌만 남은 채 폐허가 되었 다가 1868년(고종 5년)에 처음의 규모대로 다시 지어졌다.광화문의 해태조각상과 근정전의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들과 경회루 다리 및 영제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조각물들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조각미술품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의 루원과 향원지의 연못이 원 형태로 남아 있어 조선의 대표적 명원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근정전 남쪽의 모든 궁전들 의 신무문이 있다. 그리고 경복궁 안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옮겨와 있는데 경천사10층석탑(국보86호), 범천사 지광국사 현모탑(국보101호) 등 국보7점, 보물11점도 있다.
조선개국으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짓는데는 당연히 풍수 즉 산(장풍:藏風)과 강 (득수:得水)을 보아야 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주장하였고 정도전은 백악산(현,북악산) 을 주산으로 주장하였다.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경복궁이 세워졌다.
주산이며 진산인 북악산을 뒤쪽 배경으로 경복궁이 남면하여 앉혀있고 서쪽의 인왕산,무악산이 있 으며, 동쪽에 북한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는 안산으로 남산이 보이고 객산이며 불의산인 관악산 이 있는데 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남지라는 연못도 팠다.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 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뜻의 "광피사표 화 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 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해체되어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쪽으로 옮겨지었다가(1927년), 196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현재 '광화문'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올해말 완공예정이다. 경복궁에는 광화문(光化門) 외에 동쪽의 건춘문(建春門)서쪽에 영추문(迎秋門),북쪽에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중 인의예지를 뜻하며 을 나타내며 신(信)을 뜻하는 보신각이 있다.
흥례문(興禮門)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 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흥례문
영제교(永齊橋)와 천록(天鹿) 흥례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금천(禁川)과 영제교가 있다. 금천의 상징적 의미는 대궐에 들어오는 신하들은 백성을 위해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들어와야 하며 왕 또한 이 다리를 건너 궁 밖으로 나갈 때는 백성을 어여삐 여겨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洗心)한다는 깊은 뜻이 있다. 금천의 물은 열상진원으로부터 흘러들어와 향원정을 거쳐 금천에 이르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
영제교 위에는 바깥의 삿된 기운을 막기 위해 용의 모습을 그린 이무기의 석상을 세워 두고 있다. 이무기 만으로 나쁜 기운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영제교 옆 동서에 네마리의 천록(天鹿)을 두고 있다. 천록은 기린(騏麟:하나의 뿔을 가진 용의 머리에 사 자의 갈기, 수사슴의 몸통, 황소의 꼬리를 달고 있다고 하며. 그 내뿜는 숨은 생명을 되 살리며 기린이 달리는 발아래의 생명체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상상의 서수(瑞獸:상스 런 동물)의 다른 이름이다. 털이 있는 해태나 사자모양의 산례와는 다르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이며 이덕무의 후배학자인 유득공이 나흘간 한양을 돌아보고 쓴 춘성유기(春城遊記)에 천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복궁 남문안을 들어갔다. 남문(광화문)안쪽에 다리가 있는데 다리 동쪽에 천록 두마리가 있고 서쪽에 한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남별궁 뒤뜰에 등에 구멍이 난 천록이 있는데 모습이 꼭 닮았다.--->
여기서 말하는 남별궁은 지금의 조선호텔 부근에 있던 별궁으로 당시에는 칙사를 대접 하던 장소였다. 유득공이 본 서수는 세마리였으나 지금은 네마리로 70년대에 한마리를 더 만들었다고 한다.
천록 경복궁 안에서 단체사진 찍는장소로 알려진 곳에서- 뒤로 근정전과 인왕산 북악산이 보인다. 근정전 영제교에서/뒤 건물은 근정문이다. 근정문(勤政門)과 근정전(勤政殿)/국보 제223호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 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 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근정이란 인(仁)한 신하를 찾고 등용시켜 간하는 말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라 정의를 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 물에 비해 많이 변형되었다.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 고 있다.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대 하단에는 경복궁 근정전앞 월대 난간 기둥과 계단 그리고 기둥석에도 갖가지 동 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를 법수라고 하는데, 쥐, 소, 호랑이 등의 각 띠를 상징하는 12지신상이 조각돼 있다. 상단 네모서리에는 동쪽엔 좌청룡(靑龍)을 서쪽엔 우백호(白虎)를 그리고 남쪽에는 주 작(朱雀:봉황모습))을 북쪽엔 현무(玄武:거북과 뱀의 합) 배치하여 근정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월대 남쪽 아래위 모서리의 돌출된 멍엣돌 네 곳에는 또 다른 한 쌍의 짐승이 아주 재미 있게 조각되어 있다. 암수 한 쌍이 분명한데 몸은 밀착해 있으면서 딴청을 부리듯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어미에게 바짝 매달려 있는 새끼까지 표현되어 있어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石犬)이라고 하며 전해지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 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 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득공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화를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이 석견의 죄란 말이냐며,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 모름지기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석견에 주목하는 것은 근정전이라는 엄숙한 공간에 이처럼 해학적인 조각상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경복궁 건축의 디테일은 치밀하고 여유 롭다는 점 때문이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 천정에 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두마리의 황룡이 거울을 갖고 있는데, 이건 왕의 정통성을 상징 하는 것이라고 한다. 황룡의 비늘은 81개인데 9의 양수와 용의 가지수인 9를 승한 숫자 이다. 그리고 이 황룡은 발톱이 일곱개인 칠조룡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비가 오거나 햇빛을 가릴 때 천막을 묶는데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 다.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 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근정전 지붕에는 어처구니 7마리가 있다. 제후국에 해당하는 7을 상징한다. 근정전 앞뒤 마당에 깔린 돌은 화감암으로 강화와 황해도에서 가져온 박석(얇은돌)으로 2만장이나 된다고 한다.
가운데길은 어로 노선생님의 설명에 경청하고 있다. 월대
두마리의 석견과 새끼 어처구니 옥좌
(상)백호/현무 (하)청룡/주작
천정의 황룡 두마리
사정문과 사정전(思政殿) 사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편전(便殿)건물 중의 하나로 초기에는 보평청(報平廳) 이라 하다가 곧 사정전으로 바꾸었다. 사정전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4년(1867년)에 중건하였다. 편전은 임금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으로 경복궁 편전의 영역은 사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사정전 안은 가운데 용상이 있고 뒤에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그 위로 발톱이 넷달린 두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그림을 수묵채색기법으로 그려 놓아놓았다.
정도전은 사정(思政)이란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게 되는 것인즉 만인을 다스리는 임금이 나태하고 생각이 부족하면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 하게되고 만사가 번잡스럽게 되나니 마땅히 세밀히 살피고 깊이 생각하며 다스려야 성 인이 되고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경연과 정사가 주기능인 편전에 걸 맞는 이름이다.
편전영역은 사정전을 중심으로 사정전,만춘전,천추전이 있으며, 주변으로는 행각이 둘러 싸고 있다. 만춘전은 편전의 일부로 서편전에 해당하며 1865년(고종2년)에 중건되었다. 만춘전과 천추전은 온돌이 설치되어 겨울에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사정전 편전인 사정전 내부/용상,병풍,용의 그림 천추전 강녕전(康寧殿) 강녕전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정전 바로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있다. 향오문(嚮 五門)을 통해 강녕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이 곳 영역은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인 연생전(延生殿)과 연길당이 동쪽에 있고 경성전(慶成殿)과 응지당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녕전은 왕의 침소이지만 대신들과 만나 일상업무도 보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강녕전은 태조4녕(1395년) 경복궁 창건과 더불어 지어졌으며 강녕전(康寧殿)이란 이름 은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지었다. 강녕의 뜻은〈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의 오복(五福) 중 세번째인 강녕(康寧)을 당호(堂號)로 삼았다. 오복은(五福)은 수(壽), 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의 다섯가지의 복을 말한다.
강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방치되어 오다가 고종2년(1985년)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강녕전을 비롯 건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헐려 옮겨졌다. 현재의 강녕전은 1995년 12월에 다시 재건된 것이다.
강녕전의 외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梁閣)지붕으로 되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왕과 왕비가 머무는 침소로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은 강녕전에 딸린 소침전(小寢殿)이다. 일반가옥에 비 교하면 사랑채에 해당한다. 임금은 혼자 책을 읽거나 새로운 일을 구상할 때 넓고 큰 강 녕전 대신 조촐한 연생전,경성전을 활용했다. 이 곳에서 중전도 만나고 신하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침전이라고 해서 그냥 사생활 공간만이 아니라 공적 기능도 있었 던 셈이다. 흔히 봄여름에는 연생전을 가을겨울에는 경성전을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생전과 경성전의 이름도 역시 정도전이 지었다. 일제시대에 모두 헐렸다가 1995년10 월 새롭게 복원되었다.
강녕전에서 향오문 강녕전 경성전 연생전 강녕전 지붕에는 에는 용머리가 없다 용머리
침실 내부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세종22년에 새워진 것으로 추정되 며 왕비의 침전으로 궐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원리에서 연유된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까지도 음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름을 지었으니 왕과 왕비가 만나 잘 교통하여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뜻을 중전의 침소에 담고자 한 것이다. 교태전 지붕에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은 경복궁의 남쪽정문 광화문과 북쪽 신문문과의 딱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그래 서 중전이라고도 한다. 중전의 뒤쪽은 후궁이 동쪽은 동궁이 서쪽에는 서궁이 위치한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옮겨 다 쌓은 계단식 화원이다.중국에서 제일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 이라 했단다. 다양한 화초를 심고 교태전에서 나오는 연기를 땅밑으로 연기길을 내어 빠져 나가도록 만든 굴뚝이 너무나 아름답다. 6각의 면에 십장생과 박쥐 봉황 매화 국 화 등 조화롭게 배치해 만들었다. .
교태전 주변에는 많은 각,당,헌이 있다. 교태전 동쪽에 자리한 원길헌(元吉軒)과 서쪽 의 합홍각(合弘閣)은 상궁과 나인이 거처하며 중전의 시중을 들던 곳이다. 내숭당,보선당,승순당,체인당 등은 궁녀들이 거쳐하는 숙소이다.
흠경각(欽敬閣)과 함원전(含元殿) 경복궁 강령전에서 경회루 누각쪽으로 연결된 건물들이다. 농본사회를 운영하는 왕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가 되는 건물들이다. 농업위주의 전통사 회에서 시간과 천체의 운행에 맞추어 정치를 하기 위해 천체기구들을 왕실 가까이에 두고 있다. 세종은 옥류기륭,앙부이구 등의 시계와 간의를 만들어 흠경각에 설치하였다. 이와 달리 함원전은 불교행사가 자주 열렸던 곳으로 기록되어 이채롭다.
양의문
교태전 교태전
궁녀들의 방 원길헌 합홍각 아미산 굴뚝 아미산 설명문 함원전 아미산 경회루(慶會樓)/국보224호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에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 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 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 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 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경회루 경회루에서 측면 인왕산이 보인다.
수정전(修政殿) 높고 넓적한 윌대를 차리고 그 위에 세운 이 전각은 본래 세종대왕때의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주야로 글을 읽던 도서실이었다. 집현전이 폐지되고 임진왜란에 불 탄 것을 고종 4년 (1867)에 재건하면서 수정전이라 불렀다. 사용되었다. 수정전은 지금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 200칸 가까운 행각들이 있었고 이웃하여 대전장방, 내반원, 수라간, 정원, 빈청, 선전관직방, 검서청, 옥당, 약방, 의관방, 내각 등의 전각들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1910년 이후 일인들이 헐어 버렸다.
풍기대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속도를 재는 기구로 경복궁 풍기대는 창경궁 풍기대와 함께 조선시대 바람을 측정했다는 실증적 자료로서 기상관측의 선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풍기대
자경전(慈慶殿)/보물809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고 청연루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돼 있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십장생굴뚝이(보물 510호)이 남아 있다. 자경(慈慶)이란 건물이름 또한 자친(慈親) 즉 어마니나 할머니 등 왕실릐 웃어른이 되 는 분의 경사와 무병자수 등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자경전 아름다운 꽃무늬 담장 십장생굴뚝
향원정(香遠亭) 향원지는 내전 뒤편에 있는 후원으로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물 위의 비치는 향원정의 그림자는 환상적이다. 이 향원지는 장엄한 경회루와 달리 대체로 아늑하고 아담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향원지도 연못 한 가운데 네모의 섬을 두었다. 그리고 그 섬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향원정이라고 지었다.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 는 뜻이다. 정자는 둥근 섬 한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낮게 세운 다음 2층의 누각으로 꾸민 것이다. 1층에는 평범한 난간의 툇마루를 두었고 2층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각 칸마다 예쁜 나무 창살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을 올린 다음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 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 장식을 하였다.
매년 새해를 맞아 달력을 받으면 제일 첫장에 눈덮인 향원정이 곧잘 등장한다. 한국 고궁정원의 백미인 경복궁 향원정은 맑은 연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한폭의 그 림을 보는듯 하다. 여기저기 연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비오는 날의 풍경은 더욱 아름 답다.
향원정 취향교(醉香橋)
열상진원 경복궁 내 향원지 북쪽 함화당 후원에 위치한 샘물이다.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복궁 창건(1395년) 때부터 샘솟고 있다는 샘으로 샘솟은 물이 연못에 파문을 일으킬까봐 한바퀴 돌아 조용히 연못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이 말고 차서 음료 로 이용하였다. 샘에서 솟은 물이 내려와서 한바퀴 돌아 두번 두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 지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는 향원지에 비친 나무나 정자의 그림자가 이 물의 흐름으 로 인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와 또한 물고기들이 차가운 물에 의해 놀라지 않도 록 하려는 배려라고 전한다.
열상진원
집옥재(集玉齋)일원 1876녕 경복궁에 큰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협길당 등을 1891년 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사신의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이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 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팔우정/집옥재/협길당 집옥재 집옥재와 팔우정
건청궁 건청궁은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난 고종10년(187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쉬기 위해 지어졌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있으며 앞에 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집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長安堂)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킨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현안들을 처리 해야 했다.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 2층 벽돌건물로 개조되었다. 건청궁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점화되어 당시로선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건청궁은 고종과 비 명성왕후가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은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에서 자신 들의 세력이 약해지자 일본은 불량배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건청궁의 동쪽에 있는 녹산으로 가지고 가서 태워버렸다. 왕비가 시해된 곳은 그녀가 머물던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였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었고 2006년에 와서 다시 옛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건청궁 곤녕합 명성왕후가 시해된 옥호루 장안당 휴식 마무리 정리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 여기서 이날 돌아보면서 설명된 궁궐과 역사적 배경을 순서대로 복습하면서 야외수업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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