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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대형교회 주일예배 참관기
1. 동기
몇 년 전 늦가을, 불교색채가 강한 문화계에서 월간지를 발행하는 지인이, 직업상 스님들과 접촉이 잦고 게다가 사찰을 방문할 때면 대웅전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삼배를 하던 그가, 갑자기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의 결단이 갑작스럽기는 해도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수년간이나 함께 취재여행을 다니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간혹 기독교신앙에 관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조금씩 느끼던 참이었으니 사람에게는 갑작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때가 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거주하는 지역의 인근에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교회가 없었던지라 ‘집에서 가까운, 건전한 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다른 지인의 구체적인(?) 조언에 따라 결코 집에서 가깝지 않은 한 대형교회를 선택했다.
세간의 부정적인 시각과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대형교회를 그리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던 차에 그가 대형교회 그것도 초대형교회를 선택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함께 일을 하며 나의 영향을 받던 사람이 신앙생활의 첫발자국을 떼며 선택한 교회가 초대형교회라니… 그러나 대놓고 말릴 수는 없었다. 대신 만날 때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조언하며 교회생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무언가 한계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의 고민에 대하여 좀 더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가 출석하는 교회에 대하여 알아야했다. 해서 최근 몇 달 동안 주일사역이 없이 지내고 있는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하여,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다.
철새 신자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 말고 다른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기회는 거의 없다. 목사들은 더욱 그렇다. 목회를 하는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식적인 목회를 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정해놓고 출석하는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형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해오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해들은 것일 뿐이요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다. 또한 대형교회라고 모두 똑같이 취급할 수도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지 않는가? 단 한 번일지라도 예배에 직접 참여해 본다면 대형교회의 정체를 어느 정도나마 파악해볼 수 있겠다싶었다.
2. 길을 나서다.
지난 성령강림주일 오전 10시 10분에 지인과 만나 그의 승용차에 동승하여 교회로 향했다. 교회 인근에 위치한 아트센터에 주차를 하고 미니셔틀버스로 교회까지 이동해야한다고 했다. 예배 한번 드리기가 이렇게 번거로워서야 원…
아트센터주차장입구에서 잠깐 망설이던 그가 차를 반대방향으로 돌리며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교회 앞의 학교운동장에 주차해도 괜찮겠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미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 아트센터로 차를 돌렸다. 덕분에 10 분가량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아트센터주차장입구, 그가 자동으로 발행되는 티켓을 뽑아들고 주차장 안으로 차를 몰았다. 안내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방향 화살표에는 K 교회 오른쪽방향 화살표에는 W 교회가 표시되어 있었다.
미니버스가 교회까지 순환 운행되고 있었다. 교회 소유로 보이는 차량도 있었고 교인들의 봉사차량도 눈에 띠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열에 합류하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회가 나들이 삼아 걸어도 좋을 만큼 근거리(1.3 ㎞)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을 좀 전에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철역에서는 5 분여 거리가 아닌가. 전철을 이용해도 될 것을… 그러나 지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차에 올랐다.
6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운전자가 스탬프를 뒤로 넘겨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차티켓을 꺼내어 스탬프를 찍었다. 스탬프가 찍힌 티켓을 주차관리소에 내면 나중에 교회에서 주차비를 정산한다고 했다. 친절하기도 해라. 대형교회는 주차비용도 대신 물어준다. 하긴 서울시내의 어느 교회는 불법주차를 하고 주일예배를 드린 교인들이 무더기로 범칙금을 물게 되자 수백만 원의 예산을 들여 몽땅 대납해주었다. 교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를 서비스업소 쯤으로 아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의 교회는 교인들에게 종교적 만족을 제공하는 종교서비스업체로 전락했다.
운전자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차량봉사를 한 듯 익숙하게 차를 몰았고 다른 봉사차량과 마주칠 때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곤 했다. 교회 입구 교차로의 좌회전 차선에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운전자는 과감하게 교통법규를 위반했다.
직진신호를 받고 2 차로를 따라 직진하는 차량을 뒤쫓아 교차로 앞쪽으로 진입하더니 차선을 변경하여 좌회전이 가능한 1 차로의 정지선 10여 미터 전방에 차를 세웠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교차로 한복판에서 좌회전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방향지시등이 깜박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얼굴이 뜨듯해졌다. 운전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운전자의 표정은 오히려 당당해보였고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통봉사자들은 이런 행태를 당연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예배당 건너편 학교건물의 현관입구에서 하차했다. 학교운동장에는 차량들이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로 붐볐다. 본당 앞에는 여러 개의 천막이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무슨 야외행사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일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굳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40여 년 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빌리그레이엄 전도대회’가 연상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 열리는 행사였다. 여기는 주일마다 이렇다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10 시 30 분,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봉사자들이 ‘체육관으로’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아뿔싸! 본당이 벌써 만원인지라 우측에 있는 체육관에서 소위 ‘영상예배’를 드리라는 안내 문구였다. 교회 입구까지 왔다가 다시 아트센터주차장으로 돌아가며 소모한 10여 분이 이렇게 운명을 바꿀 줄이야. 오호, 통재라!
간이철재의자가 열을 맞추어 가득 놓여있는 체육관에 들어서자 헌금함이 눈에 들어왔다. 입장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여 헌금함 주변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준비한 헌금을 하고 안내자들의 손짓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빈자리에 앉았다. 정면의 화면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위치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앞쪽에 서있는 안내자들은 빈자리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좌석을 채웠다. 이내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3. 예배
10시 45 분, 화면에 찬송인도자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반주가 울리며 찬양이 시작되었다.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번갈아 불려졌다. 본당 전면 무대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는 몇몇의 남녀의 모습이 간간히 화면에 비쳐졌다. 체육관의 전면 무대에도 평상복차림의 남녀가 찬양을 인도했다. 육중한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음향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자기의 음성이 자신의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량이었다.
무대 위의 사람들이 표정과 손짓 몸짓을 담아 찬송을 불렀다. 스스로를 분위기메이커로 여기며 애써 감정을 쥐어짜내는 모습이었다. 예배라기보다 종교적 군중집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젊은 시절, 부흥회 찬양을 인도하며 교인들을 흥분시켰던 것이 기억나며 얼굴이 뜨듯해졌다.
예배는 전통적인 순서들을 생략한 채 빠르게 진행되었다. 예배에의 부름, 통성기도, 대표기도, 찬송, 광고, 설교 순으로 행해졌는데 ‘신앙고백’을 하는 순서가 없었다. 정적인 순서들을 과감하게 배제함으로써 기존 예배의 지루함을 없애고 교인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배는 경배이다. 경배에 신앙고백이 없을 수 있는가. 꽉 막힌 보수 꼴통이라 손가락질을 당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다.
일정한 순서에 의해 엄숙하게 진행되는 예배형식이 자칫하면 교인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적이고 능동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교회의 예배는 확실히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ABADE) 혹은 ‘샤하아’(SAHA-A)이다. 전자는 ‘숭배하다’라는 뜻이요 후자는 ‘엎드려 굴복하다’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 ‘라트레이아’(λατρεια),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인데 순서대로 그 뜻을 말하면, ‘엎드려 입맞추다’ ‘(노예가 주인을) 섬기다’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이다.
예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은 앵글로색슨어의 ‘weorthscipe’에서 유래 했는데, ‘worth’(가치)라는 말과 ‘ship’(신분)이라는 뜻을 가진 합성어다.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 라는 뜻이니 고로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중략>
교회의 예배의식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이성적인 행위이며 감성적으로는 두려움과 떨림의 행위이다. 감격과 기쁨은 예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의식을 변질시키고 있다. 예배를 마치 회중을 흥분시키기 위해서 연출하는 쇼처럼 만들어버렸다. 감성을 자극하여 심리적으로 감격과 기쁨을 조작 하는 것이다.』(「예배냐? 쇼냐?」중에서)
분명히 말해서 ‘예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두려움과 떨림과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대단히 정적靜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적인 형식을 제하여버리고 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함으로서 ‘쇼’가 되어버린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다.
성가대 찬양 후에 광고내용이 영상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상광고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한정되었다. 교회학교봉사자를 모집하는 따위의 민감한 광고는 담임목사가 교인들의 심성을 건드려가며 비교적 긴 시간동안 이어갔다.
담임목사의 외모에서는 결코 위엄을 찾을 수 없었다. 비교적 작은 체구에 평범한 얼굴이었고 중후한 목소리도 달변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경너머로 보이는 눈매에는 매서움이 엿보였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대중적 호감을 사고 이면적으로는 추종자들을 조직화하여 단단히 거머쥐는, 대중심리에 능통한, 대중운동가의 역량을 지닌 무서운 능력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설교
평가가 너무 지나치다고 지탄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평한다면,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자가, 영악하게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며, 대중을 휘어잡는 치밀함’을 느끼게 하는 설교라고 하겠다. 이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대중적 인기를 지닌 목회자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저들은 ‘구속의 은혜와 중생 그리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하여 전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지키고 추구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주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해라 등의 율법적인 요구를 하지만,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며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주신 두 번째 메시지를 외면하는 것이요 그 이유는 인기를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목회자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는, 대중적 친근감을 연출해 내며 대중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설교의 기교에서 비롯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계명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다.』(마태19:16-26)
이날의 본문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였다. 성령강림주일에 자주 사용하는 본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도전적으로 마음을 찌르는 가르침인지 모른다. 그저 맹목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인줄로 알고 있거나, 치열하게 갈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설교는, 성령 충만하지 않은 신자는 화약 없는 폭탄과 같다는 비유적 예화로 시작되었다. 방탕이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술 마시고 재물을 탕진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을 탕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가 주식투자로 재물을 서너 배 늘렸을지라도 역시 탕자라고 했다. 목사가 목회를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탕자라고 했다. 아울러 오늘날의 교회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말인즉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식투자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투자방법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니 예를 잘못 들었다. 타인의 손해에 대한 반사이익을 노리는 ‘증권투기’를 정당화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현실교회에 대한 비판도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 자신과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슬쩍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싶었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비판을 하게 되면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의 치밀한 말장난으로 들렸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즉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대립에 의해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갈 5:16,17)에 대하여는, 그 과정의 중요성과 치열함을 간과하고 결과만을 전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가 충만해진다는 외침이 공허하게 들렸다.
음주흡연에 대한 예를 들었는데 이는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의 필연성과 치열함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음주흡연 때문에 갈등하며 이를 감추기 위해 양치질을 하고 은단을 먹는 사람이, 어쩌면 이들을 정죄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하여 ‘그렇다고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적 싸움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30 대, 40 대, 50 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난다.’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민감한 대목에서 변죽만 울리며 인기에 연연하는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아닌가! 신자가 매일 순간순간마다 치러야하는 영적인 전투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듣는 교인들의 입장에서야 ‘음주흡연을 비롯한 각종 습관적인 죄 대한 부담’을, 목사가 인심 좋게 덜어주니 좋기는 하겠다.
그의 설교는 교인들의 관심사를 잘도 건드렸다. 그러나 한결같이 변죽만 울리며 죄에 대한 지극히 수동적 태도를 용인해주었다. 예수가 부자청년에게 던진 두 번째 메시지를 갈등도 없이 제거해버린 것이다. 성령 충만은 중생과 다르다. 중생은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것이요 성령 충만은 자기를 버리고 요단강으로 걸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족속을 몰아내는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19 세기 초에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찰스피니는 ‘결코 죄인을 위로하지 말며 회개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를 용인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날도 아니고 성령강림주일에 그것도 에베소서 2장 18절 말씀을 적당히 뭉뚱그려서 변죽만 울리며 죄인들을 위로했다. 이런 식의 설교로는 ‘인격과 삶의 거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수백만의 기독교인을 자랑하고 엄청난 규모의 교회가 속속 생겨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설교는 35 분간 행해졌는데 꽤 길게 느껴졌다. 아마도 영상광고 이외에 그가 직접 행한 보충광고와 설교가 연속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설교 마지막에 ‘짓밟힌 장미꽃처럼 나를 위해 죽으셨네.’라는 지극히 감각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마지막 분위기를 띄웠다. 대중들 중에는 분위기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에 클로즈업됨으로써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성경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장미’라는 단어가 없다. 공동번역의 외경에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의 고난을 ‘짓밟힌 장미꽃’에 비유하는 가사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목사는 왜 하필 이것을 주일예배의 마지막 찬양으로 선택했을까?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쾌하고 거북했다. 장미는 그 꽃말이 사랑, 애정이다.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하긴 신앙과 관계없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그만한 것도 없으리라.
5. 성찬식
성찬식이 이어졌다. 평소에 대형교회의 성찬식이 궁금했었다. 그 많은 교인들에게 어떻게 일일이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지 의문을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한 성찬기가 앞줄부터 전달되어 왔다. 내용물은 성당에서 사용하는 성체와 비슷하게 생긴 동전크기의 동글납작한 뻥튀기과자였는데 성체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포도주 역시 같은 방법으로 나뉘어졌는데 잔을 든 채 기다리고 있다가 통성기도를 한 후에 다 같이 동시에 마셨다. 수천의 사람들을 상대로 행하는 성찬식이니 회중이 공동체의식을 가지도록 하기위해서는 ‘통성기도’라는 방법이 유일하리라. 성찬식의 압권(?)은 봉사자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뒤쪽에서부터 빈 잔을 수거해가는 것이었다.
성찬식에서야말로 대형교회가 지닌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집례자와 근거리에 마주앉아서 엄숙 경건하게 떡을 받고 잔을 받는 경험을 해본 신자들이라면 분명하게 느꼈으리라. 그것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숨 막히는 긴장 속에 행해졌진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차라리 대형교회는 성찬식 대신에 빈들에서 행해진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념하는 편이 낳지 않겠나싶었다. 그러려면 떡을 얼마나 많이 준비해야할까…
6. 퇴장
12 시 20 분이 다 되어서야 모든 순서가 끝났다. 사람들은 천천히 퇴장했다. 앞줄에 앉아있던 우리는 거의 마지막으로 걸어 나오면서 예배 후의 광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예배가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지는 않았지만 무언가에 취한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런 모습이, 여느 종교적 군중집회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군중집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종의 대중최면상태가 지속되는 것으로 보였다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 것인가…
바깥으로 나오는데 출입구에 늘어선 안내자들이 인사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례적인 목례를 할 뿐이고 1 년 이상 이 교회를 출석한 지인도 아는 사람이 없는지 말없이 걸어 나왔다. 어쩌면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겠지만 작은 교회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들은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예배를 마친 대규모의 군중들은 운동장을 가득 메우며 서서히 큰길을 향해 걸어 나갔고 행동이 빠른 사람들은 주차했던 벌써 승용차를 몰고 도로로 몰려나왔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유명대형교회에 속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일부는 대규모집단이 발생시키는 ‘대중大衆 에너지’를 느끼며 조금은 흥분한 듯 보였다. 이는 분명히 대형교회가 지닌 힘이다. 이는 초대형교회를 이루는 원동력이며 교인들은 이를 위로와 활력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이 맛에 대형교회를 찾는다. 며칠 후 이 점에 대하여 대형교회에 출석한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확인했더니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영적 에너지나 신앙 에너지가 아니다.
7. 맺는 말
나는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교인들을 더 많이 만난다. 그것도 교회와 상관없이 사업관계로 만난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반하여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인을 만나기 매우 어렵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신앙적인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업종을 선택하고 추진하는 방법에 있어서 비기독교인과 다를 바가 없고 불법이나 편법을 거리낌이 저지른다. 주일날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만 교인행세를 할뿐 자기의 일상에서는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교인일 뿐이지 신자가 아니다. 이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빠르게 그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원인은 교회가 기독교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과거에 난립했던 이단교회들은 거의 노골적으로 본질에서 벗어난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지탄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들은 매우 교묘하게 본질을 도외시하며 교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종교성, 이기심, 편리성, 개인주의, 명예욕, 권력욕 등을 지능적으로 자극하며 거대집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교회가 이를 좇으며 부흥 아닌 부흥을 꿈꾼다. 이는 본질과 정반대의 것들이지만 영적인 분별력이 없이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다. 초대형교회는 이 같은 방법을 가장 잘 이용한 목사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회는 극도로 이기적인 종교집단이 되어버렸다.
초대형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다. 『매주 한 번씩 기독교를 표방한 대규모의 종교집회를 주관하는 조직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교회를 표방함으로써 유대감을 조성하고 결속력을 갖게 된 초대형집단』이라고 하면 어떨까싶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저들에게 돌멩이로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렇다.
‘대중大衆 에너지’는 집단이 발생시키는 에너지이다. 이는 느낌의 차이가 있을 뿐, 관중들의 열기로 가득 찬 운동장이나 대규모 종교행사장 혹은 시위현장 등에서 동일하게 감지된다. 그것은 대규모 집단과의 연대감에서 비롯된 자신감과 흥분감이다. 종교집단에서는 이것이 구원에 대한 맹목적 기대감 자신감과 연결된다.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집단적 에너지를 방출했던 이스라엘백성들도 그랬으리라.
대형교회에서 교인들이 느끼는 집단적 에너지는 신앙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것을 신앙적 에너지라고 한다면 예수는 대규모 군중이 자신을 따를 때 큰일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는 대중을 불러 모으던 아름다운 교훈과 기사奇事를 뒤로하고, 오히려 고난과 죽음을 강조함으로써 거의 모든 자들이 자신을 떠났을 때, 고독한 가운데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며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 신앙적 에너지는 군중 속이 아니라 홀로 하나님과 대면할 때 오히려 넘쳐나는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니 믿는 자의 수가 삼천 명 혹은 오천 명이나 더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초대형교회를 부흥의 결과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절하게 이용된다. 그러나 당시의 예루살렘교회가 이들을 전부 한 곳에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나,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관리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교인들은 앞서 전제한 종교성, 이기심, 편리성, 개인주의, 명예욕, 권력욕, 이익추구 등과 관련된 심리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대형교회를 찾는다. 다음의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① 대중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출석에 대한 부담이 작다.
② 헌금에 대한 부담이 작다.
③ 죄인을 위로하는 교묘한 설교가 심리적 위안과 만족감을 준다.
④ ‘대중大衆 에너지’을 느끼며 구원에 대한 맹목적 기대감과 자신감에 취할 수 있다.
⑤ 유명대형교회에 소속됨으로써 신분상승의 기분을 느낀다.
⑥ 사업에 도움이 된다. - 혹자는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보다 유명대형교회 주보의 광고란에 실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⑦ 충성심과 헌금으로 직분을 얻어 교회의 상위조직에 들어갈 수가 있다.
대형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일반적으로 이런 교인들은 열심이 부족한 교인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대형교회는 이런 교인들에게 결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매우 적절하게 이용할 뿐이다. 대형교회를 유지하고 몸집을 키워나가는데 있어서는 대규모의 군중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규모집단을 이끌어갈 리더가 필요할 뿐이다.
대중은 대중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훈련된 소수에 의해서 움직인다. 대형교회는 집단 속에서 리더의 재목을 가려낸다. 그 기준은 종교적 열심과 아울러 자기를 드러내고자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다. 자기의 명함에 출석교회와 직분을 새겨 넣기 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차피 대형교회 교인들의 출석 동기가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만큼 이 같은 기준이면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신앙적인 면은 부담스럽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이런 사람들을 부추겨서 리더를 만들고 조직화하여 집단을 움직인다.
신분증을 목에 건 봉사자들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지만 그 이면에는 대단한 우월감이 감추어져 있다. 이는 상부조직으로부터 하부조직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정도차이가 있을 뿐 동일하다. 또한 이들은 타 교회에 대한 우월감을 지니고 있는데 작은 교회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대규모 집단을 유지 운용하기 어려우리라.
대형교회가 수많은 교인들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내세우는 것이 ‘소규모 모임의 활성화’이다. 이는 구역, 다락방, 순, 셀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집단 속의 패거리모임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지닌 문제이기도 하다.
함께 동행 했던 지인은 소모임에 몇 번 참석하다가 일찌감치 포기했다.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애써 친밀감과 유대감을 조성하는 분위기였지만 내용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함께 읽은 성경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제 자랑이나 푸념 따위를 늘어놓거나 타인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영적인 갈망이 담긴 ‘자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류에 의해 주도되는 소모임에는 비주류가 느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의 모임을 통해 소속감과 신분상승의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은 자기들의 패거리모임에다가 ‘성공적인 소규모 모임에 대한 외국의 사례’를 가져다가 겉만 치장하여 홍보용으로 이용할 뿐이다. 그래도 이는 리더들에게 우월감을 주고, 경쟁심을 유발하고, 일부 교인들의 결속을 이끌어내는데 유용하긴 하겠다. 그러나 중소형교회들이 이를 모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를 모방하며 양적팽창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 자신이 먼저 ‘시류를 잘 읽는 대중운동가’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대중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그들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욕구에 따라 맞춤형설교를 하고, 소수의 리더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조직을 장악해야 한다.
초대형교회에 대한 사회적 지탄을 피하며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호화스런 대형예배당을 짓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갈파하고 예배당 건축을 과감하게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예도 있다. 이 경우, 전용예배당이 없다는 이유로 새벽기도회를 이따금 이벤트처럼 거행하기도 하여 특별한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이것도 일종의 마케팅전략이다.
초대형교회가 사회적으로 인기를 얻고 수명을 늘리려면 사회사업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옳다.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양적팽창을 위한 마케팅의 일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것은 정치가나 기업도 한다. 초대형교회가 행하는 사회사업이 순수해 보이지만은 않는 것이 왜일까? 그것은 초대형교회가 본질적으로 성경적인 교회와 거리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초대형교회 목회자는 목회자가 아니라 뛰어난 사회운동전략가요 전술가이다. 대중적 인기를 얻어 대중을 규합하고 움직이는데 있어서 매우 뛰어난 사람이다. 이는 아무나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모방하는 것은 자기에게 맞지도 않는 남의 옷을 입으려는 것과 같다.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초대형교회는 본질상 교회가 아니니 모방한들 무엇 하랴.
중소형 교회가 초대형교회를 모방해야 헛일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 또 하나의 이유는 ‘대중 에너지’의 문제이다. 이 에너지가 없는 중소형교회가 대형교회를 모방해봐야 헛수고라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 자기 교인들의 마음만 더욱 흔들어 놓을 뿐이다. 진정한 부흥은, 교회가 대중적 집단에너지가 아닌 신앙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규모와 상관이 없다.
초대형교회의 교인들은 유명 목사를 추종하며 거대조직에 속하여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인격과 삶에는 변화가 없다. 속은 그대로이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옷을 입었을 뿐이다. 변화와 성장이 없는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유명 대형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생각난다.
신자들을 위험지역에 단기선교를 보내는 이벤트성 행사를 하다가 국익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도 국민에게 사죄하기는커녕 희생자를 순교자로 미화시키며 자랑스러워하는 어느 교회가 있다. 그는 그 교회의 중추적인 교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의 교회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대단한 우월감을 드러낸다. 고학력의 사회지도층인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초대형교회를 이루는 비결은 교인들의 심리를 파악하여 그에 적절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기독교를 종교적 액세서리 정도로 여긴다. 액세서리는 자기만족과 자기과시를 위한 것이다. 이는 없으면 허전하고 과하면 부담스럽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크기 모양 색상도 가지가지이다. 목사는 교인들의 성향이나 요구를 재빨리 간파하여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유무형의 종교적 액세서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초대형교회를 만드는 최대 관건이다.
진정한 목회란, 신자들의 인격과 삶이 예수를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돌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도록 섬기는 것이다. 교인들을 자기의 추종자로 만들어 거대집단을 조직하는 것은 목회가 아니다.
하나님꺼서 목사를 세우신 까닭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려하심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는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몸의 지체 즉 교회를 이루는 신자들을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여 장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1-14)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건강하고 장성한 교회공동체가,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신 목적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아무리 기독교를 표방하고 교회를 표방할지라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거대한 사회적 집단일 뿐이다. 이에 속한 사람들은 종교적 자기만족과 종교적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교회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일반적인 윤리기준을 뛰어넘어 종교적으로 정당화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을 받는 근본적이 이유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중소형교회의 존립과 부흥에 대한 해답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 양적팽창의 꿈을 접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심판을 받고 광야에 시체로 남았다. 어쩌면 마지막 날에 구원 받는 사람의 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소수일지도 모른다.(히 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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