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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종교 심리 철학의 반성적 숙고-
친구에게
오늘은 3월XX일,이다. 벌써 3월도 중순을 넘어거고 있다. 그런데 꽃피는 봄 4월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한데 오늘은 바람이 빠르고 눈발이 제법 많이 내려서 모든 공립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리는 매우 미끄러워져 차들이 엉금엉금 기듯이 조심스럽게 운행하고 거리는 매우 한산한 느낌이 었다. 나는 오늘 천조웅이가 온다고 하여 기다리기로 했는데, 날씨가 나빠서 다음 주일로 약속을 미루었다. 물론 장거리 운전을 하는데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의 내리는 싸래기 눈보라를 보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어서 마태의 수난곡과 요한의 수난곡을 계속 듣고 있다가 어제 저녁, 네가 나에게 전화를 하여 “행복”에 대한 문제를 계속 거론 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가 다시 생각이 떠올라서, 밖으로 나가 Starbucks Coffee 집으로 갔다. 내가 항상 즐기는 Americano의 진한 Black Coffee를 마시면서 눈오는 거리를 내다 보면서 다시 행복이란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정말 행복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그래, 수많은 동서양의 성현들과 철학자들이 줄곳 행복을 말해왔다. 어쩜,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는 철학자들, 성현들이 언급했듯이 많은 종교도 궁극적으로 결국 행복을 위한 삶을 위한 도구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현재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종교, 또는 철학자들은 물론, 더구나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 행복이란 것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고 단순 논리로 말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육체와 정신(마음)이 있기에 이것이 실존적인 보통 사람들의 인간들안데 말이다. 물론 인류사에는 특수한 예외의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1차적인 단순한 욕망의 충족을 행복으로 느끼고 그것을 위하여 자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 동물적인 행태를 말 할것이다. 예쁜 여자만 보면 꼴리는 대로 개가되어 상대는 배려함이 없이 그런거 있지 않냐? 표현을 잘못하겠다. 자기 본능의 충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구사하는데 윤리성이 없는 인간 만이 가질 수 있는 양심이 없는 개같은 행동도, 프로이드가 말한바 Id(동물)적인 삶을 말할것이다. 권력을 가지면 남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군림하려는 삶 말이다. 이것은 강육 약식의 삶의 행태다.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 행복이란 말의 개념이 달라 질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교육심리학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성장과정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가치관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동물적 본능적인 삶에서 서로가 돕고 협동하는 이상국가를 희망하는 무수한 행복의 논리가 있지 않느냐? 하여 교육은 욕망의 전이를 가지게 되며 이 범주속에서 행복관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다. 하여 단순한 행복의 원리는 복잡한 언어로 다양하게 말해져 왔지 않느냐? 근대 세게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우리에게 준 Karl Marx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그는 역사가 참된 완성을 향해 진보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보다 높은 이상 세계, 공산주의 유토파를 위한 이상국가를 건설하기위한 세계 평화와 인간의 행복은 투쟁에 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위한 쟁취하는 때가 행복이라고 했다. 나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Karl Marx가 말한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논리에 아주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비전은 계급투쟁과 유물사관 등의 잘못된 역사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념과 제도가 쏘련의 붕괴로 인하여 나에게는 또하나의 유토피아의 꿈, 그것은 미국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의 전파를 통해, 전세계에 영원한 자유와 번영을 실현한다는 또하나의 유토피아의 꿈, 그후 신자유주의에 약간의 희망을 걸기도 했었다. 결국 이 비전도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철학 위에서, Globalize에 의한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정치 경제 철학은 미국 자본주의 Standard가 세계 스탠다드로 돼야 한다는 신제국주의 사회 경제 신자본주의 정치 철학들은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 두가지 유토피아는, 모두 인류사회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정말 오늘의 현실에서 점검해 볼 때 이 상반된 과정은 인류사회의 복지와 행복을 약속 했지만 가혹한 불행만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이런 외적인 만인을 위한다는 철학이 아직 까지도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니냐?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면서 행복론에 고심하고 있는 너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어 너는 늙지를 못하고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것 같구나. 결국 우리는 인간의 궁극목표인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를 선택하여 신뢰하고, 신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 이란 생각이다. 예를 들어 먹기를 좋아하는 미식가도 어떤 좋은 것을 잔뜩 먹고나면, 잠시 만족할뿐이다. 그리고 색(色)을 밝히는 오입쟁이도 매일 양귀비같은 미인과 밤 낮으로 그짓을 한다면 행복할 수 있겠느냐다. 언젠가 네친구, 김동선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나는 말이다, 술한잔 기분 좋게 먹고, 기차 소리 내며, 칙칙 퍽퍽, 야! 그거 한 번 신나게 할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쩜 필부(匹夫)나 보통사람들의 솔직한 행복론의 결론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 왔다는 생각이 되기도 한다. 하기야 우리가 잘알고 있는 임어당 같은 지식인(知識人)도 행복이란 것을 어느순간 즉, 때에서 느끼는 환희, 즉 기분좋은 상태, 즐거운 때, 다시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맑은 공기를 들어마시고 현란한 햇볕에서 들여 마시는 상쾌함, 그리고 담배 맛, 그리고 청순한 아름다운 처녀를 바라 보는 순간, 아~아~ 그 여인과 부드러운 살결을 음미하며 절정에 오르는 순간, 그때가 부족함이 없고 욕망의 절정에 머물를 때, 촉각, 미각, 시각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정(情)에서 만족을 느낄 때를 행복한 때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란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가 얼마나 많으냐? 그리고 행복에는 도덕이니 윤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한것 같다. 행복은 욕망 충족 에서만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차적인 순간에서 영원이란 차원의 다른 행복을 말해야 할것 같다. 나는 한때, 지성주의 철학자 버트란드 럿셀에 매료되어 그의 방대한 철학사를 몇번이고 탐독하면서 그의 에세이 형식의 글 중에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책속에서 “행복론”을 읽은 기억이 있는것 같다. 그의 어록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행복의 비결이란 가능한 한 광범위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당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사물이나 인간에 대해 적대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젠 오래 되어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말이다. 라틴어 felicitas, 영어 happiness란 것은 일반적으로 서구 문화에서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善:goodness)으로 이해되어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한자(漢字) 문화권 에서의 복(福: 복복)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에서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우연적이고, 숙명적이며 자연적인 행운으로 파악한 것 같다. 이러한 한자문화권에서는 행복(幸福)이란 단어는 본래 사용된적이 고대에서는 없었으나 20세기를 전후하여, 서구(西歐)와의 접촉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언어로 인간의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활동성에서 획득하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으로 사용된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일반적으로 부(富)나 명예와 권력, 그리고 건강과 장수, 그리고 학문적 탐구등에서 행복이 말해져 왔지만. 철학에서의 행복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행복은 공동체속에서의 삶전체에서 인간 자신의 만족과 연관하여 선(善)하고 옳바른 삶에서 행복을 가질수 있다고 한것 같다. 물론 일반 보통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쾌락이 행복이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라는 저서에서 행복은 시민 사회의 민중들의 3가지 양상으로 구분한 행복에 뉴앙스의 개념을 그의 후계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 보통 대중들은 동물적인 본성에 의한 쾌락적인 삶이 궁극적인 관점이고, 교양있고 행동적인 사람들은 명예를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삶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철학자의 행복은 관조적인 삶이 있는데 그것은 자족적(自足的) 이며 참된 행복이라고 했다. 그것은 예컨데 의학에서는 건강, 건축에서는 집과 교량등, 장사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데 언제나 그차체를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그럼으로 일차적으로 육제적, 감성적인 만족에서가 아니라 사람에게는 이성(理性)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즐거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표를 향하여 최선을 다하고 그 목적을 달성한 성공적인 삶이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마뉴엘 칸트는 이것을 반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칸트는 본래 인간은 본질적으로 분열속이 있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편으로 천사와 같은 존재로, 다른 한편으로는 야수와 같은 존재임으로 우리가 자연적 욕망과 충동의 지배 아래 있을때, 우리는 야수와 다를바가 없고, 우리가 양심의 지배아래 있을 때 우리는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우리 속에 내재하여 있는 이 두가지 본성은 결코 최종적인 화해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우리의 내면이란 영원한 싸움터라고 했다. 여기에 도덕이란 이런 자기 분열로 부터 발생 되는데, 칸트가 말하는 도덕이란 내면의 투쟁속에서 야수적 욕망의 유혹을 뿌리치고 양심의 소리에 따르려는 의무감에 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된 도덕은 인간의지의 근원적 자유의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행복론을 서술하려고 하면 끝이 없을 것같다. 하여 나는 여기에서 철학자들의 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민중들의 언어속에서 어떤 것이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이 행복이란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가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 지를 아랫 글에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하자.
1.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기도한다.
2.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한 소리 또하고, 또 하는 사람은 불행
한 사람이다.
3.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4. 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하는사람은 불행하다.
5.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6.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불행하다.
7.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
쾌해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8.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9.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
행하다.
10.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평으로 먹는 사람은 불행하다.
11.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13.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14.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
이다.
15.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16. 잘 된 이유를 찾는 사람은 행복하고, 안 될 이유만 찾는 사람은 불행하다.
17.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18.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19.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
20.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21. 목소리가 힘차고 생기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불행하다.
22. 남의 잘못을 잘 용납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23.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24.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다.
25. 죽음은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
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26. 차 탈 수 있는데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걸을 수 있는데 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27.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입이 원하는 음식을 먹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
이다.
28. 좋은 의견이 나오고 해 보자고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보나마나 뻔하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29. 배에 힘을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30. 할 일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시작도 않고 요행을기
다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또 유태인 잠언에 이런 질문이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하면서 사는 동물이다.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사랑하는 눈빛을 가득히 담아서 보내자. 인간으로서 존중을 표하자. 그러면 만남의 축복을 즐기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심리학자, V.E Frankl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구하면 구할수록 채워지지 않는것으로 행복의 파라독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 즉 자기의 꿈을 실현하며, 희망과 소망을 실현하고 목표를 달성해가는 것처럼 생각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하고자하는 것을 실현시켜 가는것 자체는 옳은 일이지만 그러나 “행복해지고 싶다”고하는 인간 욕망은 끝이 없는 것으로 전에 바라런 재물이나 명에를 얻고나면 이번에는 더 높은 지위와 새물질을 바라게 됨으로 이와 같은 욕망의 상승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볼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는 욕망에 쫓기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채술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결핍감은 영원한 불만을 갖게 되므로 이경우에 행복이란,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로 부터 멀어져 떨어져 나간다고 하는 인생의 역설적인 진실인 행복의 패러독스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대로 부터 철학자들은 이 인생의 진실을 말했으며, 이 끝이없는 욕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하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단독자로서 사는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서로돕고, 사는 공동체가 아니면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유할수 없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어제 네 친구 박순이가 전화로, 너의 글을 읽었다고 하면서, 행복은 “마음”에 있는데 뻔한 사실을 왜, 쓸데없이 떠들고 있냐? 는 항의가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그는 마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막연히 어떤 생각을 말하는것 같았다. 마음이란 그가 속한 문화와 context에서 자신의 교육과 성격과 함께 형성된다는 사실을 간과한것 같았다. 어린 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마음, 그리고 교욱을 받은자와 그렇치 못한 사람이 어떤 느낌은 같을수 있겠지만 마음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가 학부 때 심리학 개론만 제대로 파악했었다면, 이런 단순한 항의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것도 동물적인 욕망 충족에서 오는 순간적으로 feeling으로만 이해하는 것같았다. 그런 것을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래서 e-mail로 써서 너에게 반론을 제기하라고 했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지금 뉴욕 뉴져지에서는 가장큰 교회 고명하신 목사님 한분이 제 7계명을 어기고 놀아났다는 비난과 죄의 고백에 대한 용기에 대하여 엇갈린 반응과 함께 떠들석하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이 완전한 선(goodness)를 열망하여 현실의 한계를 뛰어 넘어 피안의 세계로 들어갈때, 그때 정신은 종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고 헀다. 여기에 참된 종교든, 사이비 종교든, 모든 종교는 어떤 초월적 대상 또는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이 끝나는 곳에서 종교가 시작되는 이유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우리가 현실의 한계를 뛰어 넘어 피안의 세계로 초월하게 되는 것은 완전한 선을 실현하려는 우리의 도덕적 열망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현실을 떠나 피안의 세계로 초월하는 까닭은 이기적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곧 알수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계내에서는 모두 충족되지 않는 개인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피안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보존이라는 본능적 욕구를 절대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을 바라고, 이땅에서 겪은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하늘나라의 행복을 바란다고 하겠다. 그리고 한걸음 더나가 땅위에 자신들의 적들에 대한 우리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천당 밑에 지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종유의 신앙에 있어서 신이란 우리의 모든 이기적 욕망의 최종적 지향점인것이다. 우리가 숭배하는 신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숭배할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숭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이기심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무리 순수하고 거룩한 외관을 띠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미신일뿐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의 행태는 현실을 신성하게 만들 수 없다. 이런 종교는 현실의 욕망을 피안의 세계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여 모든 성스러운 것을 현실의 논리속에서 더럽혀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참된 종교는 우리가 욕망의 다리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한 열망에 이끌려 현실을 초월할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어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이루어 질수 없는 선 때문에 현실에 절망할 때 욕망이 충족된 피안이 아니라, 보편적 선이 실현된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숭배하는 신은 우리의 욕망의 총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善)한 의지며 완전한 선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에 대한 열망에 이끌려 신을 갈망하게 되며, 우리가 신을 숭배하는 것은 선을 숭배하는 것이다. 칸트적 입장에서 이것만이 참다운 종교가 된다고 하겠다. 결국 선(善)에 대한 열망이 우리를 현실에 절망하게 할때,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Lord)이야 말로 참된 의미의 절대자라고 할수 있겠다. 이때 우리는 자기에 대한 관심, 즉 자기의 이기적 애착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참다운 긍지(矜持:Superbia: dignity)를 가져야 하는데 이때 긍지란 나의 정신의 크기와 숭고에 대하여 만족감이며, 이상을 뛰어 넘어 상승하려는 열망을 말하는 것 이다. 하여 칸트는 일찍이 그의 어록에서 “내가 그것을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생각하면 할수록, 내마음을 그만큼 더 새롭고 더 증대되는 결단과 외경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내머리 위의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마음속의 도덕법”,-이라고 한 그를 이해 할수가 있다. 그러나 긍지만 가지고 우리는 선해질 수 없으며, 또하나의 다른 관심은 타인에 대한 고통의 관심 이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긍지는 공허한 자부심에 불과하며, 우리의 모든 열정 또한 한낱 정신의 허영에 불과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 역시 선(善)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한 마지막 관심은 모든 나와 모든 너에 대한 관심, 즉 우리 모두의 관심인데, 칸트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것은 보편에 대한 관심,, 보편적 법칙에 대한 관심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너에 대한 관심 없이 나 자신에 대한 관심만 갖고 산다면, 그때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 인간이 되므로 우리가 보편에 대한 고려 없이 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면, 이때 우리의 의지는 편협해 지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예수님도 어떤자가 그에게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분이외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 하시었음을 볼때, 예수님 조차도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한, 온전한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말이다. 고등학때, 궤테의 “젊음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그의 소설을 보면서, 사랑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후 “파우스트”를 읽으면서도, 신약 성서의 예수라는 인간 예수의 선한 인간의 유혹과 고통을 다시 음미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고 인내하는 신앙의 훈련없이 행복이란 것을 도달수 없는 것이며, 또 이것을 여러가지로 말할수 있겠지만 그것은 모두가 비극이 었으며 불행이었다는 사실이다. 행복은 행복 자체로서 우리의 최상의 목표며, 달성해야 할 과제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에의 산상수훈과, 루가 복음의 평지수훈의 예수라는 사나이의 “행복론”에서 행복(happiness)이란 의미를 궁극적으로 다시 찿아야 할것이라 믿어진다. 이 철학적인인 행복의 논의속에 네가 해답을 갖고자하는 숙제가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바램이 내게 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생활속에서 떠돌아 다디는 행복의 언어(言語)에서 보편적으로 느끼는 담론(談論)들을 다시 음미해보자.
►사람은 미덕을 많이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단 허영심에 사로잡히는 날이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만다. 그것은 허영과 진실은 결코 함께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쾌락은 육체의 어떤 한 점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행복, 유일한 행복, 온전한 행복은 마음 전체의 영혼 가운데 존재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그저 행복할 뿐, 행복할 특별한 이유를 갖지 아니한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까 망설이지 말아라! 진리의 빛이 그대를 인도하고 있다. 사람은 습관을 존중할 것이다. 그렇다고 습관에 구속되지는 말아야한다. 가끔 습관은 진리를 짓밟곤 한다. 습관보다는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의무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의무를 벗어난 생활 속에는 참된 즐거움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는 비결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노력 그 자체에서 쾌락을 발견하는데 있다.
아름다운 얼굴, 고운 옷이 사람을 끄는 힘 보다는 웃는 얼굴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크다. 웃는 얼굴은 남에게 유쾌한 기분을 줄 뿐 아니라 자신도 그것으로 해서 유쾌한 기분을 얻는다. 다소 기분 나쁜 일도 웃음으로 넘겨버리면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이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적어도 행복한 조건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질투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고, 남의 소유물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즉 남의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탐내지 않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더 애를 쓰는데 문제가 있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스스로 만족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행복하게 보이고자 하는 허영심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진짜 행복을 놓치는 수가 많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남의 장점을 존중하고, 남의 기쁨을 자기의 것인듯이 기뻐하는 자다. 남의 불행 위에 자기의 행복을 만들지 말아라! 나에게나 남에게나 따스한 온기가 통하는 것이 진실이다. 행복은 진실하기를 요구하며, 진실 그 자체는 행복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데 있다.
행복은 활동에 있다. 이것이 자연의 구조이다. 행복은 흐르는 개울이지, 고여 있는 웅덩이가 아니다.
인류 최대의 불행은 농사가 잘 안되었거나 화재를 만났다거나 또는 또는 나쁜 사람으로부터 받은 타격에서 온다기 보다는 우리 개인 개개인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웃과 전 인류를 적대시하면서 그 누가 행복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주위 사람,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형제와 친적과 그리고 친구와 이웃과 화목한 것이야말로 행복의 출발점이다.. 행복이란? 타인을 행혹하게 하여 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다.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보다는 머리속에서 생각하고 있을 때가 더 행복한 것이 보통이다.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뛰어다닐 마음이 없어 나태해져 버린다. 재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사람을 나태하게 하는 재물은 권태가 온다.
인간은 활동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쌓아놓고 소비만 할 수 있는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알야야 한다. 사람을 게으르게 하는 행목은 이미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권태일 뿐이다. 재물을 생산하지 않고 재물을 소비할 권리가 없듯이, 행목을 생산하지 않고 행복을 소멸할 권리는 없다.
사람들은 보물을 찾아 헤메고 있다. 어디가면 노다지가 있을까하고 두루 살피고 있다.
그러나 보물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이 시간이 더 없이 값진 보물이다.
무엇이든 풍족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더 바랄 것이 없이 풍족하다고 해서 그 만큼 기쁨이 큰 것은 아니다. 모자라는 듯한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 된다.
기성복 보다는 맞춘 양복이 몸에 잘 맞는다. 사람들은 대개 기성복과 같은 행복을 머리에 그리고 있다. 자기 몸에 맞도록 만들지 않고 이미 되어 있는 행복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무엇이고 자기 마음대로라면 오히려 일생의 재미를 모르고 말 것이다.
먹고 입는 일에 걱정이 없는 임금님은 먹고 입는 행복을 모르고 있다. 다소 살기가 어렵고,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잘 안되는 것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적당하다. 모든 것이 손 닿는데 있다면 손쉽게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이 다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행복을 잃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 다음에 온다.
손쉽게 얻을 수 있다면 누가 올림픽의 영광을 원할 것이가,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란 늘 우리가 건너편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걱정과 노력과 고통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대는 무엇을 자랑하고자 하는가? 좋은 집을 가졌다고 자랑할 것인가?
어떤 명성이 있다고 자랑할 것인가? 혹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랑할 것이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아직 당신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정 당신의 소유물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것만이 인생의 본질적인 재산이다.
그대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것들은 모두 그대의 보물이다. 결국 인생의 본질은 무엇을 이해한 것만이 나의 소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적은 모두가 순간 순간의 행복된 씨앗을 주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행복을 요구하고 있다. 부족한 데서 차차 완전한 것에 가까이 간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한걸음에 먼 곳의 별을 따려고 한다. 모두들 제 발밑에 흩어진 아름답고 향기로운 많은 꽃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가난과 사랑과 전쟁을 알기까지에는 인생의 충분한 맛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여기서 다시 심리학자 Frankl의 입장에서 다시 고찰하면서 이행복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인터넷의 발전으로 소비 사회가 정보화를 매개삼아 욕망을 자유롭게 창출하는 시대에서 적정 필요성을 넘어선 “욕망”의 무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자극받아 팽창되는 와중에서 채움의 충족과 동시에 다음에 뒤딸아 오는 또다른 욕망의 끊임없는 결핍감으로 영원한 불만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플랭클은 인생철학을 180도 전환 할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시말해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최상의 삶이라고 하는 인생관에서 “내가 해야할 것,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사명을 실현시키는 것으로의 파라다임 전환을 그는 말하고 있다. 과거 지금 까지의 심리학에서는 대부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까? 어떤 희망과 소망을 실현시킬것인가? 하는 질문은 더욱 욕망의 심연을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하여 프랭클 심리학은 이점을 중시하며, 동시에 이런식의 문제 접근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의 시각이라고 할 수있다. 요컨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설혹 어렵고 힘들더라도 문제가 일어 나게된 데에는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으로 정신적 성숙과 영성성장의 기회이자 시련의 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의미를 찾기 위한 대안으로 창조가치, 체험가치, 태도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창조가치(Creative Value)는 무엇을 하는 일을 통해서 실현되는 가치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나치 수용소에서 속옷속에 숨겨온 “의사에 의한 정신의 치유”란 원고를 빼앗겼을때도 이대로 죽을수 없다는 다짐과 자기가꼭 완성해야 할일이 있다는 각오는 쓰레기 통의 종이 쪽지를 모아 속기의 기호로 원고를 복원 시켰다는 사실은 감동을 주는 창조가치의 실현인 것이다. 다음은 경험가치(Expreriential Value)로 무엇인가를 체험함으로써 얻는 가치로 예술의 체험,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실현되는 가치를 말한다. 진,선,미의의 체험에서 그의미를 내면화 시킴으로 체험되는 Humanistic Pychology 창시자 에브라함 메슬로의 절정 체험(Peak Experience)이라고 할수 있겠다. 예를 들면 불행한 장애자나 소외된자를 돕는 자원봉사 활동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태도가치(Attitude Value)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 즉 바꿀수 없는 숙명에 직면했을 때, 이에대처 하는 태도다. 바꿀수 없는 운명이란 불치의 병, 각종 장애와 같은 비극적 상황이나 어떤 성격, 미모, 어떤 직업, 어떤 가정에서 태어난 과거, 결혼이 그사람의 바꿀수 없는 운명을 가져 자기가 짊머지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플랭클은 사람에게는 이 태도가치가 있기 때문에,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수난의 의미(Suffering meanning)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인간이나 의미는 반드시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사람 누구나 인생살이에 있어서실현 시켜야 할 의미는 반드시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으로 찾아 노력할 때 행복을 성취하는 성공적인 삶을 같게 된다고 하겠다. 정리가 안된 여러가지 생각들을 쓰다보니 글이 너무길어져 이만 줄여야 할것 같다. 기원전 중국의 老子라는 현인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고 일찍이 말헀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어떤 의미를 주고 이름을 붙히면 그것은 이미 행복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후 약 500년 이후에 예수라는 사나이는 이 행복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다시 새롭게 말씀하셨다. 그후 2000년동안 오늘날까지 역사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이문제에 대하여 말해 왔지만 어떤 개념 규정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니냐? 하여 네가 원하면 산상수훈과, 평지수운에서 언급한 이 행복의 문제를 다시 너에게 보내 줄수있다. 몇년전에 이에대한 나의 글을 보낸 기억이 있는 데 말이다. 긴 한밤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글은 눈이 많이 내리는 날(16)에 쓰다가 사순절 묵상을 4월 8일 까지를 끝내야 하는 의무감 때문에 오늘에야 최종적으로 늦게 너에게 해답을하게 되었다. 이해하라.나는 지금 많은 피곤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너의 행복론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는 교과서식의 글을 전체가 아닌 부분을 써서 보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만일 이견(異見)이 있으면 반론을 즉시 제기하라.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생각을 동시에 기다리겠다. 쓰다보니 횡설수설 두서 없이 글이 길어졌다. 이해를 바란다. 그리고 동시에 용서를 바란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나의 친구들,그리고 교회 공동체 형제 자매 모두들의 안위를 빌면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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