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호호트는 벌써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낮에는 햇볕이 따가운 전형적인 가을 날씨입니다. 이 날씨가 몇 주 후면 계절풍의 영향으로 한국으로 가겠지요. 이런 가을을 우리는 천고마비(天高馬肥)라 하여 풍성한 결실의 계절로 감상적으로 여기지만 그 유래를 보면 참으로 절실함이 묻어있는 말입니다. 그 옛날 중국 한(漢)왕조의 어느 관리가 가을만되면 주기적으로 쳐들어온 북방유목민을 두고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 돌아 왔으니 북방 흉노족이 또 쳐들어 오겠구나’하는 통탄의 심정으로 그의 시에서 쓴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자고로 인간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죠. 묘하게도 중국의 상징이라는 만리장성은 강수량 15인치 정도의 선상에 쌓여 있습니다. 그 이남에서는 자연조건에서 농사가 가능하지만 장성 북쪽의 내몽골에서는 강수량이 1년에 3, 400mm, 외몽골에서는 2, 300mm밖에 되지 않아 자연 조건에서는 농사짓는 일이 불가능하죠. 그러니 자연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스텝 초원에서 5축이라는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키우며 이동하며 살아갔습니다. 가축과 함께 살다보니 짓고 해체하기 편리한 이동식 집 겔을 짓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축의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먹고 겨울에는 우리네 김장하듯이 큰 가축 1, 2마리,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 여러 마리를 도축하여 부위별로 저장했다가 그 고기로 겨울을 났습니다. 옷도 가축의 모피를 입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유목문명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근 농경 정착민족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쌀과 밀과 같은 농작물과 비단이나 면포 같은 옷감의 유용함을 알게 되고, 그 맛을 본 유목민들에게 이러한 물건들은 애타게 갖고 싶은 물건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왕조들은 유목민과의 접경지역에 교역 시장을 개설하여 적당히 교역을 통해 이들을 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종 수해나 가뭄으로 인해 흉작이 들면 농산품 가격이 폭등하고 목민들의 교역품인 가축과 모피류의 가격을 후려치게 되기도 합니다. 가격 불일치로 인한 교역 불균형은 언제나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 집니다. 여름 내내 말을 방목하며 말을 살찌운 목민들은 가을이 되면 부족장의 지도로 목민전사 1인당 말 3, 4마리를 이끌고 전투식량인 ‘버르츠’라는 육포를 소 오줌보에 넣어 말에 싣고 장성 이남으로 약탈 원정을 떠납니다. 이러한 약탈을 통해서라도 유지할 수 밖에 없던 유목경제는 진(秦)왕조 이전부터 명(明)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들을 막기 위해 진의 시황제는 기존의 성들을 보수, 개축하여 장성을 축조했고, 명왕조 또한 2백 여 년에 걸쳐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장성을 축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시황 때의 장성은 지금 우리가 보는 명대 장성보다는 위도상 약간 위쪽에 판축공법으로 흙을 다져 축조했다고 합니다. 그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감숙성 쪽에 가면 아직 흙으로 쌓은 장성이 남아 있죠. 그만큼 강수량이 적으니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거용관 위쪽의 팔달령 장성은 15, 6세기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벽돌을 찍어 불에 구워 만든 연와벽돌로 만든 것입니다.
결국 장성은 기마유목 군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13세기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계를 제패한 것은 이러한 기마전술의 우수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마전술도 16세기 총포가 나오면서 전술의 변화로 인해 그 위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쏟아 만든 장성 또한 그 효용성은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장성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막대한 외화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잘지내고 계신지요. 북여동 을 통해 인근지역을 다녀보니 말씀 처럼 거의가 팔달령 부근 이더군요.산수가 좋은이 먹을거리많았겠지요.잊고 살았던 중국 역사를 깨우쳐 주시는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몸조심 하십시요.살롬~~
<천고마비>의 어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 가을걷이로 인한 넉넉한 마음에서 만들어진 고사가 아니고 생사가 걸린 절박하고 애절한 내용이 담긴 슬픈 유래의 고사였군요...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