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반지하 원룸 한가운데 있는 매트리스에서 시작하고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매트리스에 남은 핏자국은 고인이 누워 있던 모습 그대로 말라 있었다. 맞은편 화장대에 튄 분비물로 보아 고인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을 것이다. 고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들은 경찰이 대부분 수거해 갔다. 고인의 형상 그대로 굳어버린 핏자국을 바라보던 K는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반쯤 열린 장롱 안에는 품이 넓은 원피스가 몇 벌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서랍에는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와 팬티 따위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곰팡이가 핀 벽과 천장에는 달과 별 모양 야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K는 고인의 나이를 20대로 추측했다. 주름 개선용 화장품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며칠 내내 내린 비 탓인지 창문에는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창틀은 신문지나 두꺼운 솜이불로 막혀 있었는데 아마도 건물 주인이 할 수 있던 최대한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건물 주인은 50대 여자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야간작업을 요구했다. 야간작업은 기본 금액 외에 추가 수당이 붙었다. 선금 오십을 포함한 총 금액 이백삼십을 불렀을 때도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깨끗하게만 치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주인은 직접 대면하자마자 가격을 깎아달라며 잰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다녔다. 작업 시간은 고용주의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지만 가격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나는 단호하게 나머지 백팔십을 요구했다. 주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선금 오십이 든 봉투를 내밀고 작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건물 주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취는 이미 1층까지 스멀거리며 올라온 상태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 낡은 원룸 빌딩 전체가 빠지지 않는 악취로 내부부터 곪았을 것이다. 겨울이라 난방을 틀어 놓았던 게 빠른 부패의 원인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창문 안쪽에는 난방으로 인한 습기가 서려 있었다.
장내에 머물러 있던 박테리아는 죽음과 더불어 전신으로 빠르게 흩어진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단백질과 근육은 물처럼 녹아내린다. 인간의 형상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는 몸에는 구더기가 번식한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벌레들은 단백질과 지방을 파먹으며 성장해 환풍기를 타고 건물 전체로 퍼진다. 매트리스 주변의 핏자국을 따라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본 주인은 다 질린 얼굴을 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장사 다 망하게 생겼네, 미친년이 죽으면 나가서 죽어야지……. 내가 다녀간 뒤 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차피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 머리에서 희미해지다 끝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매트리스를 들어올린 K가 그 뒷면에서 유서로 추정되는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시체에서 나온 분비물로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어 보였지만 일단 유가족에게 전달할 봉투에 담아두었다. 매트리스를 뒤집은 자리에는 분비물을 흡수한 장판이 콘크리트 바닥과 완전 밀착되어 있었다. 장판을 전부 뜯어내야 했다. 매트리스를 트럭에 싣고 온 K가 야밤에 시끄럽게 하지 말아달라는 주민의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이 작업은 사람들이 대부분 출근한 오전이 제일 적당하다. 매트리스가 붙어있던 벽은 새카만 곰팡이가 천장까지 번진 상태였다. 적절한 습기와 난방. 사건 현장은 곰팡이를 비롯해 박테리아와 벌레들이 자라기 알맞은 온실이다.
K가 장판을 뜯어내는 동안 나는 가전제품을 수거했다. 텔레비전은 노트북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작업을 하고서 깨닫게 된 사실 하나는 누구나 죽을 때 텔레비전을 켜놓는다는 것이다. 시체가 발산하는 유기물질들이 가전제품의 열기에 달라붙는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빠르면 이삼일, 늦어도 일주일 안에 결국 가전제품도 시체가 된다. 종종 유가족들이 냉장고나 텔레비전, 컴퓨터 따위의 고가 가전제품을 다시 사용하겠다며 달라고 하지만 회로기판부터 죽어간 무용지물임을 설명하면 포기한다. 하지만 직접 고물상에 내다 팔겠다며 차를 가져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나는 K가 한쪽으로 몰아둔 벌레들을 피하며 작업에 착수했다.
보통 이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세간 정리는 나 같은 성인 남자 한 명으로도 쉽게 진행할 수 있다. 여섯 평짜리 집에 사는 이들이 820리터짜리 최신형 냉장고를 쓰진 않으니까. 트레이에 소형 냉장고를 올려놓고 현관을 나서는데 K가 날 불렀다. 형, 이거 봐요. 장판을 뜯어낸 아래에 수십 장의 아기 사진이 놓여 있었다. K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나는 묵묵히 유가족에게 전달할 봉투에 사진을 갈무리해서 넣었다.
K의 도움으로 반지하 계단과 건물 입구에 세워놓은 트럭까지 왕복하며 물건을 싣고 나머지 잡동사니들을 특수 폐기물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땀과 빗물로 옷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습기를 머금은 옷에 악취가 스며들었다. 이렇게 날이 좋지 않을 때는 옷의 세탁보다 몸에 스며든 악취를 처리하는 게 문제였다. 좋은 비누나 보디샴푸로도 악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온몸의 털을 미는 것이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시간은 새벽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K는 곰팡이가 핀 벽지를 뜯어내기 위해 사다리를 가져왔다. 나는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수대에는 고인의 마지막 식사 흔적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냄비에는 라면 국물이 말라 있었고 수챗구멍에는 불어터진 면발과 벌레 시체가 가득했다. 마스크를 뚫고 올라오는 악취를 참아내며 부엌을 정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는 고인이 게워놓은 토사물로 변기가 막혀 있었다. 세면대와 거울은 알 수 없는 분비물로 더러웠다. K가 벽지를 뜯어내는 소리와 내가 변기의 토사물을 퍼내는 소리가 점점 비어가는 사건 현장을 채워갔다.
건물 주인이 내려왔을 때는 새벽 다섯 시였다. 비가 갠 하늘은 멀리서부터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얀 보름달이 빌딩이 가득한 서쪽 끝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쓰레기들을 트럭에 싣고 있던 K는 유가족에게 전할 봉투를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은 그 자리에서 봉투 입구를 벌려 내용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얼굴을 하고는 K에게 봉투를 떠넘겼다. 버려달라는 것이었다. K는 넌지시 여자와 사진 속 아이들에 대해 물었다. 주인은 가끔 고인의 집에서 목이 터져라 우는 아기들 때문에 신고가 들어오곤 했었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보다 이제 날이 밝았는데 아직도 끝나려면 멀었느냐 성화였다. 작업은 마무리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벽지와 장판을 뜯어낸 자리 위에 세정제를 펴 바르고 고온 스팀 청소기로 닦아냈다. K가 자외선 살균기를 가져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뒤따랐다.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CNN 본사에서는 달(月) 이주 계획 문서 복원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시간마다 속보로 내보냈다. 그 뉴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큰 조지아 아쿠아리움의 마스코트인 흰돌고래의 집단 자살이 달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덧붙였다. 돌고래들은 새벽에 갑자기 수족관 벽에 머리를 찧고 뇌진탕으로 죽었다. 돌고래들은 죽기 전 동쪽에서 서쪽으로 헤엄치길 반복했다. 옥스퍼드 대학 유전학과 교수 올리비아 벤슨은 돌고래들이 죽기 전 보인 이상행동은 달의 움직임을 닮아 있으며 이것은 생물이 달의 영향을 받아 진화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자료 화면으로 달 이주 계획이 담긴 육중한 철제 금고가 나왔다. 쇠사슬로 칭칭 감긴 금고는 몇 개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금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추락시킨 독일 전투기가 싣고 있던 것으로 어디서 발견되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연이어 인류가 처음으로 달 탐사를 위해 쏘아 올린 탐사선 파이어니어가 나왔다. 1958년 8월 15일에 발사된 파이어니어 0호는 달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지구 궤도를 맴돌다가 증발했다.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두 달 뒤에 발사된 1호가 지구로부터 11만 km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먼 거리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달 탐사선 파이어니어 0호는 연속된 달 탐사선의 성공에 빛바래 쉽게 잊혔다. 파이어니어가 뉴스에 나온 건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달 이주 계획 특별방송의 마지막은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으로 끝났다. 채널을 돌리자 CNN 뉴스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해석이 나오고 있었다. 다른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텔레비전 전원을 껐다.
내게는 달 이주보다 몸의 털을 밀어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머리부터 밀었다. 신문지 위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문득 달에서 살게 되면 머리카락을 처리하기 곤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썹을 제외한 온몸의 털을 밀었다. K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며 끝까지 음모를 고수했다. K는 올해 초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와 헤어졌다.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여자가 K의 직업을 문제 삼았다고 생각했다. 청소부. 하물며 사람이 죽은 자리를 치우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하진 않을 것이다.
머리를 밀고 다리에 셰이빙 폼을 바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사장이었다. 사장은 아침에 작업했던 사건의 유가족이 찾아왔다며 유품의 행방을 물었다.
"건물 주인 말로는 연고자가 없어 버려달라고 했는데요."
사장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가족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며 사무실로 나와 줄 것을 요구했다. 간혹 값비싼 유품을 멋대로 처리하지 않았냐며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원칙을 내세워 유품의 행방을 물었다. 그 원칙대로라면 내 쪽에서 유품에 함부로 손댈 수 없다. K가 궁금해하던 고인의 마지막 물건, 아기 사진이 떠올랐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사장은 두 시까지 나와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K에게 전화해 유품 봉투를 버렸냐고 물었다. K는 자다 깬 목소리로 왠지 껄쩍지근해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달 이주 계획 특별방송을 봤냐고 했다.
"지금이 세기말도 아니고. 21세기잖아. 전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내 대답에 K는 질문 하나를 했다.
"형. 그럼 돌고래 시체는 누가 치웠을까요?"
사무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만삭의 여자 한 명뿐이었다. 여자는 사장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허리를 받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근 업무용 컴퓨터 모니터에서 달 이주 특집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틀어놓고 간 모양이었다. 흑백 자료 화면의 파이어니어가 나타났다. 아나운서는 파이어니어의 실패에 대해 공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설명했다. 여자의 긴 생머리 위로 모니터의 빛이 달무리처럼 반사되었다. 여자는 자신을 고인의 언니라고 소개했다. 나는 K에게 받아온 유품 봉투를 건넸다. 여자는 유서로 추정했던 편지봉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편지봉투에서는 수표 네 장이 나왔다. 사백만 원이었다. 수표를 핸드백에 넣은 여자는 봉투를 털어 아기 사진들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씩 확인한 뒤에 사진을 봉투에 담아 다시 내게 건넸다.
"주인아줌마는 청소 비용과 벽지, 장판 도배 비용까지 요구하더군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 10년 만에 온 소식이 이런 거였다면."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은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사장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뿐인 사무실의 창문으로 정오의 태양이 길게 발을 들이고 있었다. 부유하는 먼지들이 네모난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나는 여자가 말하는 소식이 동생의 죽음인지, 건물 주인의 요구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아기들이 동생과 전혀 연관 없는 생판 남이라며 전부 버려달라고 했다.
"사진을 보셨으면 잘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서로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동생과도 절대 닮을 수 없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크기로 비유한다면 빛 속을 부유하는 먼지 같을 것이다.
"동생은 임신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물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들의 부산물뿐이었다. 여자에게 그것들을 설명할 수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동생은 조용한 걸 참지 못했어요. 동생 방에서는 항상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았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틀어댔어요. 그건 감상이라기보다 시위 같았어요. 유일하게 조용해질 때는 카세트테이프를 뒷면으로 돌릴 때, 그때 잠시뿐이었어요. 제가 생일 선물로 사준 카세트플레이어는 중고 장터에서 샀던 거라 오래되었고 뒷면으로 자동 재생되지 않아 직접 뒤집어 넣어야 했거든요."
여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유가족 중에는 내 앞에서 고인을 생각하다 눈물을 쏟아내는 부류가 있다. 대부분 고인을 혼자 내버려뒀다는 미안함으로 비롯된 눈물이라 나는 여자가 울기라도 하면 휴지를 건넬 생각으로 테이블에 놓인 크리넥스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목소리만 줄였을 뿐,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동생은 카세트플레이어만 남겨두고 사라졌어요. 편지 한 통 없이. 난 그 애의 유별난 행동을 전혀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 애의 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 소리들은 온 가족을 괴롭게 했어요. 그래서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갑자기 찾아온 그 적막이 감사했어요. 그런데 동생의 흔적은 모두 버렸는데 카세트플레이어는 버리질 못하겠더군요. 그게 벌써 10년이나 됐네요. 오래됐어요."
나는 고인의 방 풍경을 떠올렸다. 별과 달 모양 야광 스티커가 붙어 있던 벽지와 천장, 그리고 고인이 마지막까지 켜 놓았을 텔레비전과 노트북을. 그리고 뒷면으로 돌려놓지 못한 카세트테이프를.
- 일러스트=이진아
"동생은 항상 미혼모 시설에서 일하고 싶어 했어요. 이 아기들은 그 시설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동생은 봉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치장하고 외로움을 달랬던 것뿐이에요. 아기가 있는 집은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으니까요."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푼 배를 쓰다듬는 여자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피해주었다. 여자가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카세트테이프가 맴돌았다. 왠지 여자는 한평생 카세트테이프를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동생의 생전 모습이 희미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힐 즈음, 그때쯤 돼서야 카세트테이프를 뒷면으로 돌려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기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사진의 뒷면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근 날짜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기들의 생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진을 봉투에 넣었다. 여자는 버려달라고 했지만 왠지 버릴 수 없었다. 여자가 카세트테이프를 뒷면으로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
다음 날 사장은 나와 K를 경기도 안산의 공단지역으로 보냈다. 의뢰인이 설명해준 원룸텔 주소와 내비게이터의 주소가 일치하지 않아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오전 열한 시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좁은 골목에 트럭을 주차할 수 없어 K가 지하철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는 사이 의뢰인을 만났다. 번잡한 안산역 근처를 지나 훨씬 뒤쪽에 있는 원룸텔 주인인 의뢰인은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였다. 빨간색 점퍼에 흰 모자를 쓴 남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남자는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몇 년 전 불법으로 개조한 옥탑방에서 젊은 여자가 목을 매고 죽은 이후로 옥탑방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건물 한 층을 올려버린 것이다. 그때 고시원이었던 건물을 원룸텔로 바꾸었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새로 지은 5층 구석방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가격을 조금만 깎아줄 수 없냐고 물어왔다. 뒤늦게 올라온 K는 왜 다들 하나같이 돈을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고인은 원룸텔에서 가장 좋은 방에서 살고 있던 50대 남자로 생전에 덩치가 큰 사람이라고 했다. 주인의 설명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욕조에는 고인의 지방층이 두꺼운 층을 이루며 둥둥 떠 있었다. 욕조에서 사망한 시체는 K에게 처음이었다. 욕조를 보던 K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을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K의 목소리가 닫히는 문 사이로 멀어져갔다.
일반적인 시체는 먼저 도착한 경찰이 치우지만 욕조에서 발견된 시체의 경우는 다르다. 경찰이 가져가는 것은 뼈와, 거기에 붙어 흐물거리는 살점뿐이다. 나머지는 직접 퍼내야 한다. 마개를 여는 순간 경찰이 건져내지 못한 단백질 덩어리와, 물 위에 떠 있던 지방, 한때 인체의 일부를 구성했던 물질들이 하수구를 막기 때문이다.
나는 가방에서 고무장갑을 꺼내고 K에게 전화해 차에서 뜰채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K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K는 아침으로 먹었던 순대국밥을 모두 게워냈다고 했다. K가 뜰채를 가져오는 사이 욕조 안으로 손을 넣어 큰 덩어리들을 건져냈다. 화장실 문을 연 K는 내가 막 건져낸 손톱을 보자마자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는데 K는 이런 결정적인 부분에서 초짜 티를 냈다. 나는 K에게 방 안을 정리해달라고 말했다. 화장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더 이상 손으로 건져낼 것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뜰채로 욕조를 휘저었다. K가 방을 치우기 시작했는지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뜰채로 건져낸 것들은 구불거리는 털 뭉치와 노랗게 변색된 무좀에 걸린 엄지발톱 하나와 딱히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작고 물컹거리는 덩어리들이었다. 화장실에서 사람이 죽은 경우 일은 조금 힘들어진다. 타일 사이사이에 낀 흔적들을 지워야 했고 여차하면 배수관까지 전부 소독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곰팡이가 핀 타일과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지저분한 변기를 전부 닦아냈다.
바닥에는 몇 군데에 동그라미가 쳐진 구인광고 잡지가 물에 젖어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고급 보디클렌저와 입욕제가 있었는데 뒷면의 사용설명서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 뒤쪽에서 작은 철제 상자를 찾아냈다. 참기 힘들 정도의 냄새라든가, 사람의 형상이었던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치우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 될 때다. 상자 안에는 남성용 자위기구가 들어 있었다. 항상 이런 것들은 무언가의 뒤쪽에서 발견된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나는 그것들을 전부 폐기물 봉투에 담았다. 유가족에게 이런 걸 전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화장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왔을 때 K는 냉장고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들추고 있었다. 달력은 깨알같이 자잘한 글씨로 가득했다. 매달 21일에 '송금'이라 적힌 부분에서 K는 고인을 기러기 가족이라 추측했다. 부엌은 사용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냉장고에는 소주병과 편의점 도시락 한 개, 그리고 치킨이 그대로 포장된 채 놓여있었다. 냉장고의 전원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K가 수거한 물건들 중 유가족에게 전달할 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었다. 21일에 주기적으로 송금한 내역이 찍힌 통장 하나와 카드명세서는 냉장고 바닥에 숨겨져 있었다. 의뢰인의 설명으로 떠올릴 수 있던 고인의 생전 모습과 정반대로 간소하고 가벼운 마지막이었다.
나는 두 개의 용기에 나눠 담은 욕조의 내용물을 들고 트럭까지 왕복했다. 원룸텔 주민들은 이 소동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끔 단잠을 방해받았다는 표정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인은 말끔하게 정리된 사건 현장을 보고도 맘에 들지 않는다며 가격을 깎아달라고 했다. 벽지와 바닥재, 배수관 소독까지 마친 사건 현장은 무균실이나 마찬가지다. 고인의 흔적은커녕 누군가 살았던 기억마저 모두 지워낸 현장을 보고도 이렇게 나오는 의뢰인을 만날 때마다 K는 혀를 내둘렀다. 잔금을 모두 받아내고 원룸텔 건물을 나왔을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 낮달이 뜨고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고인의 통장을 담은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아든 주인은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며 혀를 찼다.
"그 인간이 얼마나 짠돌이였는지 상상도 못 할 거유. 병원 다녀오는 것도 아쉬워서 썩은 이를 직접 뽑아낼 정도로 독한 인간이었는데 그렇게 죽을 거 알았으면 진작 병원에 다녀왔을걸."
고인의 사망 원인은 고혈압이었다. 주인은 시체를 보고 며칠 밥도 먹질 못했으며 경찰의 질문에 시달리느라 일주일 내내 피가 바짝바짝 말라갔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전에 죽었던 여자보다 더 끔찍했다고 했다. 왜 그런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주인의 머릿속에서 잊힌 여자의 죽음을 다시 상기시킨다는 건 그 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시체들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가능한 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전 모습이 어떠하든 중력 때문에 항문으로 대장이 쏠려 나오거나 단백질과 지방이 분리되어 곤죽처럼 욕조 안에 둥둥 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이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K는 내비게이션에 사무실을 입력했다. 차는 안산역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사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차 안은 나와 K의 몸이 발산하는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안산 시청 앞 전광판에 대기 중 일산화탄소가 작년보다 줄고 있다는 내용이 지나갔다. K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애틀랜타 CNN 본사에서 달 이주 문서를 발표하겠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수인산업도로는 차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위로 전광판은 여전히 번쩍거리며 일산화 농도를 체크했다.
나와 K를 태운 차가 전광판 아래로 지나갈 때 일산화탄소 농도가 0.7PPM에서 0.6PPM으로 줄어들었다. 문득 지금 어딘가에서 0.1 분량의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 입욕제로 몸을 데우고 자위기구로 위로할 수밖에 없던 고인이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고인의 행복했던 시간들. 달력에 깨알같이 적혀있던 송금 내용이라든가 금액은 고인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었을까.
K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이제 속은 좀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K는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쩔 수 없다며 분식집에서 간단히 해결하자고 했다. K는 스마트폰으로 달 이주 내용과 관련된 채널을 찾아가며 말했다.
"형, 순대는 빼고요."
사무실에 들러 오전에 수거한 폐기물을 처리하는 동안 사장은 예약 명단을 작성했다. 회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지가 좋아졌다. 나와 K가 직원의 전부였던 시절은 벌써 까마득한 예전 일이 되었다. 사장은 내년쯤에 경기도 지역에 체인점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한 건 더 있다. 이 일은 수요와 공급이 맞질 않는다. 인구는 계속 늘어나니까. 하루에 세 번 정도 예약이 잡히면 K는 앓는 소리를 냈다. 다른 직원 두 명은 15평 빌라에서 죽은 독거 노인의 마무리를 하고 막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악취가 풍기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주소지를 받아 나왔다. K는 차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찾아보고 있었다. 우리는 성적비관으로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여고생의 잔해를 치우기 위해 일산으로 향했다. 거치대에 올려둔 스마트폰에서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을 때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
달 이주 문서는 검열을 받은 듯 몇 구절을 제외하고 전부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그나마 복원된 내용은 달 뒷면에 관한 것이었다. 한평생 태양의 빛을 받지 못한 달의 뒷면에는 대량의 물이 보존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달이 자전만 하게 된다면 얼음이 녹아 생명이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사의 수석연구원인 에릭 로즈킨트는 총 아홉 장의 문서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달의 뒷면에 세울 수 있는 전파수송장치의 설계도라고 말했다. CNN 본사 앞에서 모인 달 이주 반대 시위단체는 맥 빠진 얼굴로 해산했다. 며칠 뒤 영국의 신흥종교 집단은 인간이 죽으면 일종의 전파가 되어 달로 이주할 수 있다는 교리 내용을 바탕으로 스톤헨지에서 집단 자살을 했다. 그들은 스톤헨지의 커다란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그중에는 뉴스에 나왔던 올리비아 벤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가장 격렬하게 머리를 찧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단체 명의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는데 거기에는 '달로 간다'라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올리비아 벤슨은 마지막 일기에 열 살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왔으며 나중에는 그것이 화간으로 이어졌다는 내용을 적었다. 일기의 마지막은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K는 인터넷으로 스톤헨지의 돌에 찍힌 사람들의 핏자국이나 시체 사진을 검색했다. 간혹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사진을 발견하면 프린트해 사무실 벽 한쪽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종종 벽을 지날 때마다 프린트된 올리비아 벤슨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K는 다른 직원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K는 우주비행사가 꿈이었다. 내게도 질문했는데 대강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지금 하는 일이 평생 직업이 되어버린 이후 다른 꿈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K가 붙여놓은 올리비아 벤슨의 흑백사진은 나사에서 개발 중인 전파수송장치의 도면과 달 표면에 착륙시킨 장치의 조감도 아래로 사라졌다. K는 지금까지 달 탐사를 위해 쏘아 올린 우주선을 전부 프린트해서 일렬로 붙여놓았다. 1990년대 이후의 달 탐사선을 붙여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자 파이어니어를 떼어낸 뒤 사진을 재배열했다. 직원들은 출퇴근 때마다 벽 앞에 멈추어 그것들을 바라보곤 했다. 사진들 앞에서 가장 오래 멈추어 있던 것은 K였다. 아홉 번의 작업을 하는 동안 K는 끊임없이 달 이주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돌고래들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야?"
폐차장 한가운데 놓인 2006년형 도요타 코롤라는 외관상 아주 멀쩡해 보여 마치 잘못 도착한 우편물처럼 보였다. 조수석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아 경찰이 미리 뜯어놓은 운전석부터 작업해야 했다. 유가족에게서 수입 세단을 거저 얻은 폐차장 주인은 견적을 부르자 흔쾌히 작업을 의뢰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차의 외관이나 내부에 손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어차피 전부 폐기처분해야 될 거라는 말에도 뜯어보면 뭔가 하나쯤은 쓸 수 있는 게 이 바닥이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형은 종교 있어요?"
K가 차 앞유리에 붙어있는 천주교 마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룸미러에는 묵주가 걸려 있었다. 차주는 죽기 전까지 차의 안위를 걱정이라도 했는지 좌석마다 비닐을 깔아두었다. 부패하는 시체의 열기 때문에 비닐은 의미가 없다. 일가족 네 명의 생전 모습으로 열화한 비닐은 시트와 밀착되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연관된 현장을 치울 때는 감정적이 될 때가 많다.
"한때는."
운전석의 비닐을 걷어낸 뒤 몸을 뻗어 조수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차 안처럼 공간이 협소한 경우는 마스크를 자주 갈아줘야 했다. 내 마스크는 벌써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노랗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그럼 아직도 신이 있다고 믿어요?"
나는 마스크를 교체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딘가 의지할 구석이 필요해 눈에 밟히는 교회를 찾아다니긴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교리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K는 룸미러에 걸린 묵주와 조수석에 놓여 있던 성서를 챙겼다.
"올리비아 벤슨은 생물이 달의 영향을 받아 진화했다고 말했어요."
스톤헨지에서 집단자살 사건이 있었던 뒤로 올리비아 벤슨은 단숨에 유명세를 탔다. 그녀가 남긴 책들은 방송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케이블 방송에서는 미스터리 사건으로 그녀의 죽음과 달 이주를 연관 지어 보도했다. K가 인용한 그녀의 말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진, 다시 말해서 이제는 식상해진 말이었다. K는 마스크를 교체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마스크는 빨리 변색된다. 나는 뒷좌석을 열고 비닐을 걷어냈다. 비닐에 남은 네다섯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 명은 내비게이션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자세로 죽었다. 두 아이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가 숨을 거둔 듯 움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닥 깔개를 치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형은 인류의 진화를 믿어요?"
나는 대답 대신 K에게 의자 아래에서 찾아낸 인형을 내밀었다.
"죽은 돌고래들이 여기까지 헤엄쳐 왔나보다."
하얀 돌고래 인형은 주둥이 부분에 신발 자국이 남은 것만 제외하면 깨끗한 편이었다. K는 장갑을 벗고 인형을 받았다.
"벤슨은 달의 기원을 종교에 비유했어요. 그러니까 종교가 이 지구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인간들은 어딘가에 소원을 빌어야 했고 그게 달이라는 거죠."
K는 작업복 상의를 벗어 바닥에 깐 다음 그 위에 인형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잠시 돌고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절단기를 가져왔다. 좌석을 분리해야 했다. 하지만 견고하게 만들어진 탓에 쉽지 않았다. 차를 만든 사람은 이런 이유로 차가 조각조각 분리될 줄 알았을까.
"그러니까 벤슨의 말을 종합하면 고대 인간들은 달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인데, 형은 이해해요?"
K는 손을 쉬지 않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올리비아 벤슨의 이론에 따르면 인류가 숭배했던 가장 기초적인 종교 단위는 자연이었고 특히 태양은 왕이나 신관의 권능이나 힘을 의미했기 때문에 달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태양이 지고 난 뒤에 뜨는 달의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올리비아 벤슨은 지구가 40억 년의 산고 끝에 낳은 아기를 달이라고 말했다. 달의 탄생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어떤 전문가는 달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관측 실수였으며 따라서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올리비아 벤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달이란 지구에 올려놓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소원들을 담아주기 위해 탄생한 위대한 별이었으며 그것을 아는 자에게만 달의 뒷면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그러면 스톤헨지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모두 달로 간 거야?"
마스크를 네 번째 교체한 K는 봉투에 묵주와 성서를 넣고 돌고래인형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불룩해진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옥이라는 불확실한 공간보다 달 뒷면이 더 현실적이니까요. 우리가 치웠던 사람들도 전부 달로 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 반대쪽에 있는 미국에서 죽은 돌고래도 여기까지 헤엄쳐왔는데.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죠."
나는 절단기를 내려놓았다. 의자를 분리하는 건 무리였다. 어차피 전부 조각조각 나누어 필요한 부품만 건져내야 한다면 이 이상 작업을 진행하는 건 의미가 없다. 칼로 시트를 찢어내기로 했다. K는 반대편 좌석의 문을 열고 시트를 찢기 시작했다. K는 시트에 남은 아이들 모양대로 칼을 움직였다. 마구잡이로 찢고 있던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시트의 잔해들을 폐기물 봉투에 넣을 때도 K는 차곡차곡 잘 접어 버렸다.
"형. 나 결혼하기로 했어요."
K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K의 시선은 내가 치웠던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표정을 닮아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은 LED 텔레비전 부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라고 했다. K가 결혼 얘기를 꺼내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고 했다. 매번 직업 때문에 퇴짜 맞았던 K의 맞선을 기억해내고 여자가 그렇게 가볍게 승낙했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달 이주 계획이니, 죽은 사람들이 전부 달로 갔을 거라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던 목소리보다 더 작고 조용해서 어쩐지 이쪽이 더 허황된, 현실감 없는 이야기 같았다. K와 함께 일한 지 얼마나 됐는지 머리를 굴렸다. 며칠 뒤에 찾아올 새해까지 더한다면 이 년이다. 오래 버텼다. 머릿속에 목을 매달고 죽은 사람의 잔해를 처음 보고 구역질을 하던 K가 떠올랐다. K는 아주 오랫동안 울었고 나는 그만두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해주었던 것 같다.
"축하한다."
나는 주인을 불러 확인받는 것으로 작업을 끝냈다. 주인은 내부를 대충 확인하고 현금봉투를 내밀었다. 유가족에게 전달할 물건은 고인의 집으로 보내기로 되어 있다. 폐차장을 떠나는 나와 K의 뒤로 주인이 중장비를 가져와 차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
K가 회사를 그만둔 뒤로 나는 잠시 사무만 보았다. 폐차장에서 수거한 유품들을 택배 상자에 포장해 고인의 집주소를 썼다. 대치동 타워팰리스. 택배를 보내기 위해 외투를 입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 사무실을 나가려다 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달 이주 자료들 앞에서 멈췄다. K가 퇴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붙여놓은 자료는 올리비아 벤슨의 마지막 저서 '달로 간 파이어니어'였다. 이 책은 그녀의 전공과 상관없는 내용인 데다가 그녀가 믿었던 종교의 색채가 짙어 쉽게 번역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전파수송장치를 달 뒷면에 세우기 위한 실험이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의 사막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뉴스 캡처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나는 K가 했던 것처럼 종이를 하나씩 들춰가며 내용을 읽어보았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가장 맨 아래쪽에 붙여져 있는 올리비아 벤슨과 파이어니어 0호까지 보았을 때 시간은 삼십 분이나 흐른 뒤였다. 우체국은 십 분 거리에 있다. 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우체국에는 나처럼 택배를 보내기 위한 사람들로 번잡했다. 대기번호는 10번이었다. 번호가 줄어들길 기다리며 주소지를 쓴 택배용지를 붙였다. 직원은 상자를 받아 전자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의 무게는 400그램이었다. 컴퓨터에 주소지를 입력하던 직원은 볼펜을 들고 택배용지 아래쪽의 빈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안에 든 게 뭔가요? 400그램의 숫자를 보는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직원은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질문을 바꾸었다. 깨지지 않는 물건인가요? 나는 다음에 다시 보내겠다며 상자를 가지고 우체국을 나왔다. 신문지나 솜으로 상자 안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짧은 겨울 해가 골목 끝 너머로 천천히 지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거리는 새해를 알리는 플래카드와 사람들이 가득한 식당으로 꽉 찬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곤 컵라면밖에 없었다. 내가 기웃거리는 식당마다 연인 혹은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삼각김밥 두 개를 샀다.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려다 맞은편 고시원 건물을 보고 잠시 자리에서 멈췄다. 고시원 4층 창문방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불투명 유리창에 어른거렸다. 천장이 낮고 방문이 작아 작업하기 굉장히 어려운 방이었다. K는 책상을 빼내다 문고리를 부쉈고 나는 옆방에 사는 남자에게 멱살을 잡혔었다. 오래된 일이다. 사무실 문을 여는데 사장에게 문자가 왔다. 1월에 채용 면접을 보기 위해 누군가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에 체인점을 낼 테니 내가 팀장으로 가 달라는 부탁이 연이어 도착했다.
나는 프린트가 붙여진 벽 앞에 섰다. 전파수송장치와 달 이주 문서, 스톤헨지와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 아폴로 11호,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달 탐사선의 조감도 따위를 하나하나 들춰가며 올리비아 벤슨과 파이어니어 0호를 찾아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녀와 파이어니어 0호를 문서 가장 앞쪽에 붙여놓았다.
<끝>
[당선소감] "수채화처럼 눈에 선한 세월에 안부를 전한다"
- 이세은
가장 먼저 지난 세월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여기까지 잘 왔구나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방 청소를 내버려둔 딸이 밤새 발이 시릴까 책상 아래 수건을 깔아준 엄마. 서늘한 집안 온도에 조카가 감기에 걸릴까 전기스토브를 안겨준 이모와 이모부. 커피포트가 끓기 시작하면 내 몫의 머그컵까지 꺼내는 동생. 그리고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아버지. 그리고 이맘때쯤 언제나 응원해준 이쥬, 아닝, 백영, 무자, 마라. 그리고 HH. 희열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동국대학교 사람들. 핑거발레 멤버들에게는 언제나 고맙다. 미숙 언니, 진솔 언니, 지현이. 낡은 컴퓨터에 옹기종기 모여 소설을 프린트하던 나날들이 물먹은 수채화처럼 눈앞에 아주 곱게, 선하다. 가장 먼저 축하하러 달려와 준 원주와 단비. 그리고 연락해준 많은 후배님들. 소설을 알려주었던 수업들과 소설을 쓰게 해주신 교수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한다.
▲1987년 경기도 안산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국어국문 석사 수료
[심사평] 절박한 삶의 리얼리티, 치밀한 묘사로 그려내
예심을 거쳐 올라온 10편의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우리는 '달로 간 파이어니어', '회수자', '행운아', '성 마트료시카'에 주목했다. '행운아'와 '성 마트료시카'는 나름의 독특하고 일관된 분위기와 안정된 이야기 전개가 눈길을 끌었다. '회수자'는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현대적인 삶의 한 단면을 참신한 발상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세 작품 모두 문제의식의 제기를 통한 극적 긴장감을 살리는 데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 소설가 최수철(오른쪽),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달로 간 파이어니어'는 무엇보다도 치밀한 묘사를 통한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였다. 여기에 인물들의 내밀한 욕망과 심리적 위기가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현대인들이 겪는 절박한 삶의 리얼리티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오래 방치된 시체들을 처리한다는, 어찌 보면 신년 벽두에 읽기에 그리 적절치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초월을 상징하는 '달'의 이미지와 모티브가 소설의 저변을 관류하고 있다는 것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