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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 왕조를 위협하여 한반도를 자국의 식민지로 강점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 혹은 상해 등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끈질긴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눈물겨운 고난과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만주에서 독립군이라 불리우는 무장 단체가 조직되어 맹렬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이 전개되면서 일제(日帝)의 식민통치에 심각한 위협을 끼쳤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외침(外侵)에 저항하는 끈질긴 항쟁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이러한 독립군 지도자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좌진은 1920년대 초반 재만(在滿) 독립군 최고의 정예 부대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펼쳐 홍범도(洪範圖), 지청천(池靑天)과 더불어 항일독립전쟁사(抗日獨立戰爭史) 3대 영웅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맹장(猛將)이며 지장(智將)이었다.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고남면 갈산리에서 김형규(金衡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귀족 가문인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자제(子弟)였던 김좌진은 세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마을 서당을 운영하는 김광호(金光浩)에게 글을 배웠으며,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석범(金錫範)을 만나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01년에는 열두살의 나이로 자신보다 두살 위인 오숙근(吳淑近)과 혼인했으나 형인 김경진(金景鎭)이 병사하는 불행을 겪었다. 열일곱살 때에 자기 집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었으며, 80칸이나 되는 자신의 집을 교육장으로 내어주고 초가집으로 나가 생활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 터는 지금도 홍성 갈산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김좌진은 열여섯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학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2년밖에 군사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김좌진은 서울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애국계몽사상(愛國啓蒙思想)에 고취되어 교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가 사업이라 확신하였다.
1907년에 향리로 돌아온 김좌진은 자신의 가옥을 기반으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교육사업(敎育事業)에 힘썼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의병항쟁(義兵抗爭)이 일어나 수많은 민중이 일제(日帝)의 침략에 항거하다가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김좌진은 1908년에 다시 상경하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 신학문교육운동(新學問敎育運動)을 펼쳤다. 기호흥학회는 1908년 초에 서북학회(西北學會), 관동학회(關東學會), 교남학회(嶠南學會) 등과 더불어 충청도, 평안도, 강원도, 영남 지역 등 지방별로 애국교육운동(愛國敎育運動)을 벌인 단체로서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양성하고 서울에 학생을 유학시키는 등의 사업을 벌였고 월보(月報)를 발행하여 대중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좌진은 1909년에 한성신보(漢城申報) 이사에 임명되었고, 대한협회(大韓協會) 회원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이 되어 활발한 교육사업을 펼쳤다. 서울의 오성학교는 평양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간도 용정의 명동학교(明東學校)와 더불어 이 시기의 뛰어난 사립학교였다. 오성학교는 또 장도빈(張道斌), 황의돈(黃義敦) 같은 국내의 저명한 역사학자가 재직했던 학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으로서는 이 같은 소극적이고 먼 장래를 보고 눈앞의 국난을 외면하는 운동은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사실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지경, 아니 이미 망한 상태인데도 단순한 언론이나 교육 같은 소극적인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믿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4월초에 극비리에 결성되었는데 주동 인물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이름난 실력양성론자였다. 먼 훗날을 내다보자고 주장하는 온건파 독립운동가로 '한국의 간디'였다. 신민회라는 이름도 그가 지었다고 하는데 창건위원 속에는 안창호 이외에도 양기탁(梁起鐸), 전덕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파(抗日鬪爭派) 인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창호가 주도하는 대로 신민회의 성격이 단순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노선에 불만은 표시하는 인사가 늘어나서 신민회에서도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강화되어 갔다.
당초에 신민회가 조직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1907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그 맥을 잇기 위해 겉으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다시 조직되었으나 이미 일제에 은밀히 매수된 단체였다. 그래서 신민회가 진정한 의미의 대한자강회 후신(後身)으로 결성된 비밀단체였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라는 이름에서 자강(自强)이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교육을 진작하고 식산(殖産)을 흥업(興業)하여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국민들의 자주 정신을 길러야 하며 밖으로부터는 문명과 학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민회 안에서는 나라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시국에 있어서 더 이상 교육이나 산업만 가지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군사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인사가 많이 나타났다. 7인 창건위원 가운데 이동휘, 유동열 같은 사람은 특히 무장투쟁파(武裝鬪爭派)에 속했다. 젊은 김좌진 또한 정통 무장투쟁파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강(自强)의 다른 한 가지 뜻은 군사적 자강이었다. 김좌진도 자강의 뜻에 대해 군사적인 자강 없이 진정한 자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즉 그 나라가 무강(武强)해야 스스로 강하다 할 수 있지 문약(文弱)하고서야 강한 나라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5백년 동안 문약에 빠져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국운이 기울어졌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두 번 다시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라도 군사력을 길러야 한다. 독립군을 길러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요원을 길러야 한다. 군사 요원을 기르기 위해서는 압록강이나 두만강 건너의 간도 땅에 독립운동 군사기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도회의(靑島會議)를 통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뒤에 신민회보다 더욱 강력한 독립운동 단체가 출범하였으니, 바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었다.
1910년 경술병합(庚戌倂合)에서부터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있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사상 유례가 없는 무단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일체의 결사단체, 집회, 언론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강압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마치 창살 없는 감옥처럼 만드는 일종의 계엄령 치하의 공포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비밀결사운동을 벌였으며, 국외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군자금을 거두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김좌진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족질인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갔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3년에 형을 마치고 풀려난 그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 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채기중(蔡基中)이 이끄는 광복단(光復團)과 박상진(朴尙鎭)이 인솔하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된 단체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입하였다. 대한광복단은 만주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무력(武力)으로 일제(日帝)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적 아래 악질적 친일 부호를 처단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8년 이종국(李鍾國)이 배신하여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단의 주요 인물 37명이 체포되는 타격을 입었다.
대한광복단이 와해되자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김교헌(金敎獻), 이범윤(李範允),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翊), 이상룡(李相龍), 안정근(安定根) 등과 더불어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은 동양평화의 정신에 있었는데 이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무오독립선언서에 보이는 것이다. 한국 독립정신의 핵심은 최익현(崔益鉉)이 말한 삼화정신(三和精神)과 안중근(安重根)이 제창한 동양삼국평화(東洋三國平和)의 정신이었는데 무오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슬프다. 일본의 무설(武褻)이여!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라는 구절은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이나 서울에서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보다 앞서서 발표된 독립선언문으로 매우 중요한 선언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 글 내용이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일제의 침략세력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는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털끝 만한 권리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고 우리 강토의 한치 땅도 이민족이 점령할 수 없으며 한 사람의 한국인도 이민족의 간섭을 받을 의무가 없다. 우리 국토는 완전한 한국인의 한국 땅이다. 궐기하라, 독립군아.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하라! 한번 죽음은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니 남의 노예가 되어 짐승 같은 일생을 누가 바라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가 다 부활하는 것이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독립선언문에는 독립전쟁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간도의 독립군 정신을 가장 잘 들어낸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1919년에 백포(白圃) 서일(徐一)이 이끄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입한 김좌진은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중광단(重光團) 조직이 군정부(軍政府)로 개편되자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의 책무를 맡았다. 12월에 군정부의 명칭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바뀌자 김좌진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고, 부사령관에 김성(金星),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참모부장에 나중소(羅仲昭), 총사령관 부관에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이 각각 임명되었다. 김좌진은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의 밀림 지대에 8동의 병영을 건축하여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北路軍政署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오상세(吳祥世), 박영희(朴寧熙), 최해(崔海), 영국인 마츠 커델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이 통솔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의용군이 통합된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격멸하는 대승을 거두자,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간도의 독립운동 진영을 완전히 박멸하겠다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조작하여 일본군의 간도 지역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무려 2만 5천여명의 전투병력을 동원하여 북간도 일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독립군 전부대를 한꺼번에 섬멸한다는 작전 계획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독립군은 북로군정서를 포함해 병력이 2천여명뿐이었고, 그나마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독립군 장병들은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정신력이 매우 강했다. 당시 조선 독립군의 주력부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였다.
1920년 10월 왕청현 십리평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되었으니 조속히 현지를 떠나라는 중국군의 통보를 받고 180여대의 수레에 군수물자를 실어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로 장로(長路)의 행군을 시작하였다. 김좌진(金佐鎭)은 부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제1제대는 자신이 인솔하고 제2제대는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도록 했다. 북로군정서는 백운평(白雲坪) 계곡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기다렸다가 10월 21일 오전 8시에 야마다[山田] 기병연대가 진입하자 일제사격을 개시하여 일본군 2백여명을 쓰러뜨렸다. 같은 시각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완루구(完樓溝)에서 교전하여 일본군 4백여명을 전사하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백운평의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한 김좌진의 부대는 64Km를 강행군하여 천수평(泉水坪)에서 시마다[島田] 중대 120명을 전멸시키고 어랑촌(漁郞村) 874호 고지를 선점하였다. 10월 22일에 일본군 동지대(東支隊)가 고지를 포위하고 돌격전(突擊戰)을 시작하자 독립군도 기관총(機關銃)과 자동소총(自動小銃)으로 응사(應射)하여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전투는 아침 9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적군에 비해 병력도 부족하고 체력도 떨어진 채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 김좌진의 부대가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하는 동안, 홍범도의 부대가 가세하여 지원사격을 하면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일본군은 1천 6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독립군은 이어 10월 23일에는 마록구(馬鹿溝)와 맹개골, 쉬구 등에서 교전하였고, 24일에는 천보산(天寶山), 25일에는 고동하(古洞河) 등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며 26일에는 고스란히 전투력을 유지한 채 백두산 북쪽의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개되어 독립군 장병 2천여명이 일본군 2만여명의 포위 공격을 물리친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은 외세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항쟁 의지를 보여준 위대한 승전(勝戰)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잔악하고 오만한 자존심을 더럽힌 쾌거였다.
일본군이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데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한국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하자 독립군 수뇌부는 근거지를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각 독립군 부대 지휘관들이 중국과 소련의 국경 지역인 밀산(密山)에서 회동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 레닌이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정치선전을 믿고 1921년 정월 소련과 만주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그러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으며 상황이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 아래 대한독립군단의 시베리아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시베리아에 들어선 대한독립군단은 먼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여단을 이만(이르크츠크)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개교하였다. 이 때 러시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져 전국이 백계(白系; 왕당파)와 적계(赤系; 공산당)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적계 진영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 독립군을 자기편에 끌어들여서 백계와 싸우는데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독립군 측에서도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으나 워낙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소련 공산당이 주는 군사적 지원을 선 듯 받아들였다. 당시 한국 독립군을 도우려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양측이 군사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으로 인하여 대한독립군단은 적계 러시아군으로부터 푸짐한 군사원조를 받게 되었다.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의 군사장비를 지원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1921년 6월 2일 돌연 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유는 한국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독립군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인데, 갑자기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니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이렇게 부당한 요구에 대해 독립군은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겹겹이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 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독립군과 소련 정부(치타 정권)간의 협상은 26일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결렬되어 소련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1921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소련군은 미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패는 뻔한 일이었다. 이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72명,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국경을 넘어 소련을 탈출하였다. 다행히 이 나머지 인원 가운데 김좌진(金佐鎭)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으로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할 수 있다. 포로 97명 가운데에는 지청천(池靑天)이 들어 있었고 홍범도는 소련군으로 넘어가 공산당이 되고 말았다. 지청천은 뒤에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석방되었으나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홍범도(洪範圖)는 한 때 우대를 받았으나 말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극장 기도로 전락하여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은 한국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다시 간도 땅을 밟은 김좌진은 옛 우리 선조들이 건국했던 발해(渤海)의 중심지인 영고탑(寧古塔)에서 신민부(新民府)를 구성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교장을 지냈으며,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주석으로서 교포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소속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의 나이 41세, 아직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을 많이 남겨두고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은 전례 없이 성대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재만(在滿) 교포들의 슬픔은 두 말할 것도 없었고 중국인들까지 '고려인들의 제왕이 죽었다.'면서 애도하였다. 1962년 한국 정부는 김좌진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