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6-06 현충일
대한민국의 현충일, 스웨덴의 National holiday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 백범 김구, [나의 소원]
2008 - “즉각 재협상” 서울 최대인파 15만명 거리행진
대책회의 “대통령발언 또 국민감정 불질러”
미8군부대앞 500여명 “버시바우 사죄하라”
발디딜 틈이 없었다. 서른 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6일 저녁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15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지난달 2일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래 최대 인원이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시청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들은 저녁 8시께 시청 앞 광장은 물론 소공동과 을지로,
광화문 네거리 일대를 가득 메웠다. 거리행진에 나선 시민들이 광장을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날 저녁 부산·대구·광주 등에서도 일제히 촛불집회가 열렸다. 10일로 예정된 ‘100만 촛불 대행진’을 앞두고
연일 최대 규모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이번 주말은 ‘쇠고기 정국’의 최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날 시민들은 저녁 8시30분께부터 세 갈래로 나뉘어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2만여 시민들이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하려다
경찰에 막혀 대치했으며, 나머지 시민들은 서울역과 명동 방향으로 행진했다. 서울역 방향 시위대
1만여명은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 앞으로 행진해 “어청수 경찰청장 구속”을 외쳤다. 행진은 밤 늦게까지 계속됐으며,
청와대 방향으로 가려던 시민들은 안국동 한국일보사 앞과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밧줄로 경찰버스를 끌어내려 시도하는 등
경찰과 맞섰다. 신문로 새문안교회 앞에서도 시민 1천여명이 경찰과 대치해 격렬한 몸싸움을 벌여 일부 시민들이 다쳤다.
하지만 대부분은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72시간 릴레이 시민행동’ 두번째 날을 보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한용진 공동상황실장은 “대통령이 재협상이 없다고 해 국민 감정에 또 불을 질렀다”며
“청와대 비서관들을 교체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전면 재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국민들의
강력한 퇴진 운동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날 서울광장을 차지했던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원들은 이날 저녁 7시께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과 시민들이 몸싸움을 벌여 시민 3명이 다쳤다. 수행자회 회원 10여명도 경찰에 연행됐다.
길윤형 최현준 노현웅 기자 charisma@hani.co.kr /한겨레 2008-06-06, 기사수정 : 2008-06-0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2003.html
2008 - “안중근의사 옥중사용 추정 벼루 일 사찰서 보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옥중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가 발견돼
안 의사와 관련이 깊은 일본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와카야나기초(若柳町)의 사찰 다이린지(大林寺)에 봉납됐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6일 보도했다.
이 신문 미야기판에 따르면 벼루를 발견한 사람은 도쿄에 거주하는 치과의사이자
역사연구가인 히로세 다메히토(廣瀨爲人.71)씨다.
히로세씨는 올들어 이 벼루를 입수, 전문가의 감정 결과 진품인 것으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자 이를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깊은 곳에 기증하기로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그는 안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돼 있을 당시 담당 간수로서 안 의사의 유문(遺文)을 갖고
일본에 돌아왔던 지바 도치시(千葉十七)의 위패가 있는 다이린지에 벼루를 봉납했다.
벼루는 넓이 7.5㎝, 길이 13.3㎝ 크기였다. 벼루 뒷면에는 '경술 3월, 어여순옥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 安重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경술년은 1910년으로 이해 3월 일본에 의해 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 의사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 다이린지 주지는 "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벼루를 한국에 반환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도쿄=연합뉴스) /한겨레 2008-06-0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92036.html
최수향(48·사진)
2008 - 유네스코 정규직 한국인 첫 국장
최수향 박사, 짐바브웨 지역사무소장 승진
유네스코 사무국에 근무하는 한국인 정규직원이 내부승진을 통해 처음으로 고위직에 진출해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유네스코 본부 사무국의 중등·기술·직업교육 과장인 최수향(48·사진) 박사가
7월1일자로 국장급으로 승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 유네스코 지역사무소장으로 임명됐다.
유네스코 사무국에는 현재 6명의 한국인 정규직원이 과장급 이하 직위에 근무하고 있으며 국장급으로
승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 박사는 1997년 유아·가족교육 담당 전문가로 유네스코 사무국에 발을 들여놓은 뒤, 그동안 유아 및 통합교육 과장과
현장지원 및 협력 과장, 중등·기술·직업교육 과장 등을 지냈다.
유네스코에서는 함재봉 전 연세대 교수가 외부 영입 인사로 2003부터 2005년까지 본부 사회과학국장을 지낸 적이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08-06-06
http://www.hani.co.kr/arti/society/internalmove/291904.html
2006 - 극작가 차범석 사망
2005 -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출범식
2005 - 남미 볼리비아의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 전격사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왼쪽)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탄핵철회 등을 요구하고 있는 김혜경 현 민주노동당 대표(오른쪽).
2004 - 민주노동당, 새대표에 김혜경 빈민운동가 선출
민주노동당은 2004년 6월 6일 당 대회를 열어 당대표에 김혜경 부대표를 선출했다.
김 대표는 총 1만6629명이 참여한 당원 투표에서 64.36%의 지지를 얻었다.
김 대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빈민운동을 시작, 천주교 도시빈민회를 만들었고 1·2대 서울시 관악구의원을 지냈다.
김 대표는 “2012년 집권을 위해 수권정당으로서 능력을 키우고, 의원단과 원외 정당을 통합하는 정치를 하겠다”며
“아저씨들의 정당에서 씩씩한 언니들의 정당으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지도부 구성에 따라 민노당을 이끌어왔던 ‘평등과 민주’에 중점을 둔 ‘좌파계열’은 후퇴하고,
‘반미·자주·통일’을 강조해온 이른바 ‘전국연합계열’이 부상하게 됐다. 사무총장에 당선된 김 전 구청장은
1998년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전국연합계열이고,
최고위원 중 김 사무총장과 같은 노선은 김미희·이정미·유선희·최규엽 최고위원 등 5~6명에 이른다.
앞으로 민노당은 좌파 계열이 주축인 의원단과 전국연합 계열의 당 지도부 간에 노선 차이가 불거질 것으로 우려됐다.
2004 - 슈뢰더 독일 총리, 전후 독일 지도자로서 60년 만에 처음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참석
관련 기사
2003 - 일본 자위대 유사법제 통과(2003)
2003년 오늘, 일본이 다른 나라의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자위대의 대응방침 등을 규정한 유사법제
관련 3개 법안이 일본 의회에서 통과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일본 참의원은 이날 본회의에서 유사법제에 대한 표결을 실시해 자민당 등 연립 3여당과 야당인 민주당과
자유당의 압도적 찬성으로 유사법제를 통과시켰다.
이는 헌법에서 무력의 보유와 행사를 포기하고 외국과의 교전을 상정하지 않았던 일본이 전쟁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대비에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과거 전쟁 당시 '국가 총동원령'을 연상케 하는 전쟁준비 법률이라며 반대했다. -YTN
2003 - 일본 자위대 유사(有事)법제 통과
2003년 6월 6일 노무현 대통령 일본 국빈방문 1시간 전 유사(有事)법제가 일본 국회에서 통과됐다.
일본 참의원은 이날 오전 10시쯤 본회의를 개회, 토론과정을 거쳐 자민당 등 연립 3당과 야당까지 가세한 90%
가량의 압도적인 다수로 이를 가결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정부가 참의원에서의 유사법제 통과에 앞서 외교경로를 통해 유사법제 처리를 연기해달라는
우리측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한 것으로 인식,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국내 출동과 작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행정적 지휘·협조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골자로, 일본으로서는 안보상 필요한 국내법 정비에 해당한다.
일본의 경우 헌법에서 무력의 보유·행사를 포기하고 미국에 안보를 일임해 왔기 때문에 ‘법의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다. 유사법제는 ‘공격’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률 자체만으로는 외부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런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사일이라도 쏴서 실질적인 전쟁상태가 되면 ‘초법적’인 명령이 난무할 것이고,
그게 더 위험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전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태세가 정비되지 않았던 일본이 앞으로 최소한의 방어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과 관련해 우려를 표시해 왔다.
특히 미·일 협력을 통한 일본 안보가 강화되면 될수록 동맹국과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금지한 평화헌법과의
괴리는 점점 커져 결국 개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도 주변국의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
2001 -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수석 부회장 선임
1999 - 세계 최소 2백56메가D램 개발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 독일 지멘스가 대량생산이 가능한 세계 최소의 256메가D램을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1995년 6월 6일 발표했다. 256메가D램은 삼성전자도 개발에 성공했으나
양산체제용으로 공동개발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사가 개발한 256메가D램의 면적은 2백85.5㎟로 신문 1천 쪽 이상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으며,
미국의 공동전자기기기술위원회(IEDEC)가 1995년 여름 정한 표준규격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D램은 퍼스널컴퓨터나
게임기에 쓰이는 반도체 기억장치로 현재는 4메가비트와 16메가비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번 개발로 2백56메가D램 시대가 열렸다. 조선
1995 - 남아공 흑인노동자 5만명, 노동법개정 요구 시위
1994 - 중국 여객기 추락 160명 사망
1994년 6월 6일 오전 8시12분쯤 승무원 14명과 승객 1백46명이 탑승한 중국 국내선 서북항공 2303편이 이륙 직후
8분 만에 공중폭발해 서안 남쪽의 장안현 농촌지역에 추락,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에는 중국인 150명 외에
미국인 2명, 이탈리아인 6명, 스위스인과 홍콩인이 각각 1명씩 탑승하고 있었다.
사고는 온전한 시체가 60구에 불과할 정도의 대형 참사였다. 추락한 여객기는 러시아제 투폴레프154
서북항공 2303편 항공기로 산서성 서안공항을 이륙, 남부 광동성 광주시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이날 사고는 중국 역대 항공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사고는 연 20% 씩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중국 항공산업에 경종을 울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안전점검과 정기정비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었다. -조선
1993 - 중국 전인대부위원장 전기운, 의회지도자로는 처음 우리나라 방문
인권운동가 출신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 과테말라 대통령.
1993 - 카르피오 과테말라 대통령 취임(1993)
1993년 오늘, 라미로 레온 카르피오'Ramiro de Leon Carpio'가 과테말라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의사당 주변에는 많은 과테말라 국민들이 모여 새 대통령을 환영했다.
그러나 당시 과테말라의 정국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 해 10월 정부군과 좌익반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3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카르피오는 반군과의 평화교섭을 계속 시도하고 빈곤대책, 인권 개선책도 추진했다.
취임 이듬해인 1994년 1월 반군과 평화협상을 재개하고 1995년 3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카르피오는 1996년 1월 총선거를 통해 알바로 아르수'Alvaro Arzu'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새 정권은 1996년 12월 29일 마침내 반군과 영구평화 정착에 합의하고 36년 동안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기나긴 내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킨다. YTN
1993 - 카르피오, 과테말라 의회에서 새 대통령에 선출
1993년 6월 6일 과테말라 의회 특별보궐선거에서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그동안 헌정중단 사태를 겪어온 과테말라는 다시 민주통치로 복귀하게 됐다.
과테말라 의회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대통령에 선출된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 신임 과테말라 대통령은 지난
1985년 과테말라에 민정이 들어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까지 줄곧 인권검사로 활약해 온 인권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다.
32년 간의 군부통치에 종지부를 찍으며 지난 1985년 출범한 제헌의회 의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86년 부통령 후보로 나선 적이 있으며 1988년 당시 비시니오 세레소 대통령에 의해 4년 임기의 대통령 직속
인권검사로 발탁, 연임해왔다. 대통령 측근으로 있으면서도 군부의 잔학 행위 등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카르피오는 전임 호르헤 세라노 대통령의 강력한 비판자였는데 세라노가 1993년 5월 25일 비상통치를 선언하고
자신을 가택연금하자 곧바로 지붕을 통해 탈출, 다음날 세라노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 1990년 국제적으로 말썽이 된 2건의 인권침해사범에 대한 수사를 통해
현직 군대령과 대통령 경호원을 기소하는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
1991 - 소련 KGB, 히틀러 참모 헤스관련 1941년 비밀문서 공개
1989 - 김영삼 민주당 총재, 소련방문중 북한 조평통 위원장 허담과 회담
1987 - 중국과 몽고, 국경협정 체결
1983 - 중국. 제6기 전인대 개막
1982 - 이스라엘, 레바논 전면침공
1982 -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 아라파트 PLO의장 15000 지지자와 함께 망명
1981 - 인도 열차 추락 사고 5천여명 사망
1981 - 인도 동부에서 열차 추락으로 5000여명 사망
1978 - 미국과 파나마, 파나마 운하 통제권 이양에 관한 조약 체결
파나마운하 연혁
1881-00-00 - 프랑스의 레셉스,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설립하고 수평식운하 건설 착수
1889-00-00 - 회사 파산으로 건설공사 중단
1894-00-00 - 신(新)파나마운하회사 설립
1901-00-00 - 미국, 영국으로 부터 운하 건설 운영권을 인정받음 (2차 헤이-폰스포트조약)
1903-01-00 - 미국-콜롬비아,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
1903-07-29 - 미국,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
1903-11-03 - 미국의 도움으로 파나마 독립.
1903-11-06 - 미국, 파나마 독립 승인
1903-11-18 - 미국-파나마, 파니마운하 조약(헤이-뷔노 바리야 조약) 체결
1904-05-04 - 미국, 프랑스로부터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 소유권을 인수
1906-00-00 - 파나마 운하 최종설계도 채택
1914-08-15 - 파나마 운하 완공
1977-09-07 - 신 파나마 운하조약 체결(워싱턴)
1978-06-06 - 파나마 운하 통제권 이양에 관한 조약 체결(파나마시티)
1979-10-01 - Return of Canal Zone to Panama, Oct.1, 1979
1999-12-31 - 파나마 운하 통제권 파나마정부에 완전 이양
1976 - 카터 미국 대통령 후보. 주한미군 철수계획 발표
1972 - 김대중 의원, 3단계 통일방안 제창
남북 평화공존-남북 교류 확대-정치적 통일
1967 - 이집트, 수에즈 운하 봉쇄
1967 - 통일아랍, 수에즈 운하 봉쇄
1966 - 미국 우주비행사. 2시간 5분동안 우주유영 /조선 -
1966 - 무인우주선 서베이어 1호가 달에 착륙 /동아사이언스 -
1965 <7년만의 외출> 뉴욕에서 개봉됨
지하철 통풍구에서 바람이 급격히 회오리쳐 일어나면서
마릴린 몬로의 흰 원피스 자락이 들추어져 날리는
영화 <7년만의 외출>의 유명한 장면은
뉴욕 렉싱톤 번화가 52번지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1965. 6. 6.에 뉴욕에서 개봉된 이 영화의 감독 빌리 와일러는
몬로의 매력을 '육체의 충격'으로 표현했다.
1962 - 요르단 아랍권 5개국 아랍 경제통합협정 조인
1962 - 단색화의 작가로 불리는 이브 클라인(1928-1962) 출생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브 클라인
1961 -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 사망
1961 -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공포
1961 - 북한방문중인 코시킨 소련 제1부수상, 남북연방제 지지 성명
1956 - 제1회 현충일 추도식
1956 - 제1회 현충일
1956 - 제1회 현충기념일(1956)
1956년 오늘!
서울 동작동에 있는 당시 '국군묘지'에서 처음으로 '현충기념일' 행사가 엄수됐다.
유가족 천2백여 명을 포함해 추모객 2만여 명이 참석해 6.25전쟁 등으로 희생된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국군 창설후 이때까지 국군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은 8만8천 위였다.
현충기념일은 두 달 전인 같은 해 4월 19일 대통령령으로 제정됐다.
이전까지는 국방부 주관 하에 3군 전몰장병 추모식과 무명용사 추도식 등이 열렸었다.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는 1965년 3월 관계법령 정립에 따라 이름이 '국립묘지'로 바뀌었다.
'현충기념일'은 1975년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이름이 '현충일'로 고쳐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 - 스웨뎅의 테니스 선수 보리 출생
1956 - 미국의 고고학자, 정치가 빙엄(Bingham III, Hiram, 1875~1956) 사망
1911년 인간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페루 안데스 지역에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의 위치를 알아냈다.
소년시절 태평양지역의 유명한 선교사인 아버지에게 등산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기술은 그의 잉카 연구를 위한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06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시몬 볼리바르가 1819년 여행한 안데스
길을 따라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까지 여행했다. 1908년에는 옛 스페인의 교역로를 따라
안데스를 관통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페루의 리마까지 갔다.
1909~24년 예일대학교 역사학교수를 지내면서 1911년 마추픽추 발견을 주목적으로 한 예일고고학 조사단을 지휘했다. ...
1911년 6월 24일 미국의 고고학자인 히람 빙엄(Bingham, Hiram, 1875∼1956) 이 인간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페루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찾아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은 13㎢이고 신전 하나, 3,000개가 넘는 계단, 테라스식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빙엄은 1906년부터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교 역사학 교수를 지내면서 잉카에 대한
옛 기록을 단서로 마추픽추를 찾아나섰다. 1911년 6월 24일 그는 요새화한 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해 잘 보존된
석조물의 유해를 발견했다. 이어 8월에는 또 다른 중요한 잉카 유적 비트코스도 발견했다.
빙엄은 안데스 문명에 관한 <잉카의 땅>·<마추픽추>·<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말년에는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와이 출생.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사(史)를 공부하였다. 예일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였고,
1908년 칠레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석한 후 페루에 들러 잉카제국의 유적을 답사하였다.
1911년 쿠스코 북쪽의 탐험에서 마추픽추유적을 발견, 1912년에 발굴하였다.
1924년 코네티컷주 부지사, 상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이 있다. naver
1948년 9월 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일제 때
중추원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들이 반민특위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1949 -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
1949 - 서울시경, 반민특위 포위하여 무기 압수하고 특경대 해산
1946 - 졸업가 제정 /tgedu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1946 -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 독일의 극작가 하우프만 사망
1944 - 155,000 명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전쟁 역사상
최대의 상륙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다.
1944 -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
1944년 오늘!
2차 세계대전 사상 최대의 연합군 상륙작전이 감행된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은 새벽에 미국 아이젠하워 장군의 총지휘 아래 미군, 영국군, 캐나다군을 주축으로 독일군 점령지인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으로 침투한다.
연합군은 이날 공수부대 병력 3개 사단을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거점을 확보하고 함정 수천 척의 호위 아래
수송선으로 보병과 기갑부대 7개 사단을 5개 지점에 상륙시켰다.
이후 7월 2일까지 연합군 병력 100만여 명, 군수물자 57만여 톤, 각종 차량 17만 량이 상륙했다.
상륙 초기 3주 동안 연합군측은 전사 8천9백여 명, 부상 5만천7백여 명의 인명피해를 봤고 독일군 4만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패해 유럽대륙에서 퇴각한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44 -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
수십만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한다. 상륙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상륙 저지 역할을 맡은 롬멜은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월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년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6월 6일, 마침내 ‘D-데이’가 결정됐다. 작전명 ‘오벌 로드 작전’.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몽고메리가
상륙을 지휘했다. 상륙지점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6월 5일 늦은 밤, 40개 사단의 연합군 16만명과 2000척의
함정이 영국을 출발했다. 상륙용 주정(舟艇)도 4000척이나 됐고, 전투기 만도 1만1000대나 돼 7초 간격으로 이륙했다.
6월 6일 새벽 0시15분, 낙하산 부대가 해안 뒤편에 떨어진 데 이어 새벽부터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상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히틀러는 이때까지도 진짜 공격이 따로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보강을 주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피아간의 피해가 너무 컸다.
1944 -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1944년 6월 6일 군함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 4,1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백 대의 수륙양용전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 6,000명의 연합군 병력과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프랑스 북부해안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사상최대의
진격함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영국의 프랑스 북부 공격은 처음에 정한 5월이 아닌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의 'D-데이'
6월 6일에 시작되었다. 연합군 공격부대가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라고 암호명을 붙인 노르망디 해안의 5곳에 상륙했다.
캉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던 영국군은 독일 기갑사단의 저항에 맞부딪히기도 했다.
결국 1개월 이상의 격전을 벌인 뒤에 영국군은 7월 9일 캉을 점령했고, 미국군은 6월 26일 중요한 항구인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다. 상륙이 시작된 뒤부터 히틀러는 장군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해 독일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일부 지역에 묶여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937 -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
1937 - 수양동우회사건 발생
1937년 6월 6일 일본경찰이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이광수가 조직한 흥사단 국내조직인 수양동맹회가 그 모체이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에서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조만식 주도의 물산장려운동 관련자들이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다.
1926년 1월 8일 수양동맹회가 동우구락부를 흡수하는 형태로 통합이 이루어져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수양동우회에서는 김윤경·이윤재·주요한·박현환 등이 기관지 <동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7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하자 일본경찰은 수양동우회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수양동우회에 대한 일본경찰의 탄압 결과 모두 18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이광수가 징역 5년을 선고받는 등 재판에 회부된 42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934 -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Albert II) 출생
알베르 2세 [Albert II, 1934.6.6~]
1933 - 최초의 드라이브인 영화 미국 뉴저지 윌슨가에서 상영
1928 - 중국 국민혁명군(북벌군), 북경 입성 시작(19일 완료)
1926 - 6.10만세운동 계획 탄로(천도교인사 다수 체포)
1925 - 월터 크라이슬러가 크라이슬러를 설립하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이었던 원세개(위안스카이).
1916 -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원세개(1859-1916) 사망
1916 - 청나라 원세개(위안스카이) 사망
“손문의 입, 황흥의 두다리도 원세개(위안스카이)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
” (20세기 초 중국 민간에 유행한 노래가사). 이렇듯 거대한 땅 중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그가 1916년 6월 6일, 제제(帝制)의 부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중국 허난 성 샹청[項城] 지방의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기는 했으나 젊었을 때는 학문보다
운동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쾌락을 탐닉했다. 이런 그가 이홍장이 지휘하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8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고 이에 군사ㆍ
경제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1885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됐다. 청일전쟁의 패배후
새로운 군대의 육성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고 이 일이 원세개에게 맡겨지자 그의 정치적 위치가 크게 높아졌다.
1901년 직례성 총독에 임명, 후에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중국 근대화와 국방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신해혁명의 물결이 만주족을 위협하자 청조는 원세개를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 결국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뒤 원세개는 중국 내의 모든 세력을 단결시키고 중앙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제제(帝制)를 부활시켜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런 그의 야욕에 반대파는 물론이고 지지세력인 보수파 관료와
군부 내에서까지도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총통직에서조차 물러나야했다. -조선
1903 - 소련의 작곡가 하차투리안 출생
1901 -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1901~1970) 출생
1891 - 캐나다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사망
1884 - 기독교청년회(YMCA) 창설
1884 - 영국 런던서 기독교청년회 'YMCA' 창설
1884 - 안남,`후에`조약으로 프랑스 보호령
1882 - 한국-영국 수호통상조약 조인
1882 - 인도 봄베이. 태풍과 해일 10만여명 사망
1882 - 인도 봄베이 지방에 태풍 강타 10만여명 사망
1880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즈그레이브 출생
1875 -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출생 - 1929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1875 - 독일의 소설가, 평론가 만 출생
만은 192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소설가·평론가이다. 초기에는 형 하인리히 만과 달리 국수주의적 성향을 취했으나
서서히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로 전환되어갔다. 이런 변화는 장편소설 <마의 산 Der Zauberberg>(1924)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세기말의 문화적 위기상황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진보와 보수, 동양과 서양,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 등 인간의 본질적이고 전형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만은 망명길에 올라 미국에 정착했고, 전후 미국 사회에서
독일 문화와 독일인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부덴브로크가(家) Die Buddenbrooks>·<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und seine Brüder>·<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
<파우스투스 박사 Doktor Faustus>·<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Bekenntnisse des Hochataplers Felix Krull> 등이 있다.
"문학은 죽음이다.
어떻게 그것을 증오하지 않고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토마스 만
1872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출생
1868 - 영국의 해군장교, 탐험가 스코트 출생
"여기 있는 이 각서와 우리의 시체가 이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뒤에 남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기 바란다."
- 스코트의 유서에서
1866 - 조선-영국 수호통상조약 조인
1850 - 무선통신 개발로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 출생
1850 - 브라운관을 발명한 물리학자 카롤 브라운 탄생 /동아사이언스
1850 - 독일의 물리학자 브라운(Braun, Karl Ferdinand) 출생
브라운 [Braun, Karl Ferdinand, 1850.6.6~1918.4.20]
1844 - 기독교 청년회(YMCA)가 런던에서 설립되다.
1844 - 영국 런던서 기독교청년회 'YMCA' 창설 -
1836 - 다산 정약용(1762-1836) 사망
1832 -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 사망
1799 - 러시아 시인 푸쉬킨 출생
1799 -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 출생
1756 - 미국의 화가, 건축가, 작가 트럼벌 출생
1723 - 일본 에도시대의 문인화가 이케노 다이가 출생
1606 -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코르네유 출생
1599 - 에스파냐의 화가 벨라스케즈 출생
벨라스케스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1599.6.6~1660.8.6]
1592 - 이순신, 이억기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26척 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