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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단편소설 페스티벌-정태언의 주머니 속 자작나무.pdf
그날 나는 서울 한 복판 종묘에서 북방을 만났다. 무슨 전시회 같은 곳에서가 아니었다. 전날도 학생들에게 북방을 읊었다. 그곳은 내게도 학생들에게도 아득했다. 그런데 그게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목적지가 없어진 나는 종로3가역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며 지하철 노선도를 보았다. 색색의 선 위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이어지는 수많은 역 이름들. 마땅히 갈만한 데가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 저장된 전화번호를 위에서 아래까지 훑었다. 딱히 전화할 데도 없었다. 어쨌든 지하철역을 떠나서 어디로든 가야했다. 노인들이 북적이는 지하 계단을 올라 서성거렸다. 그렇게 걷다가 우연찮게 들어선 곳이 종묘였다.
몇십 년 전 초등학교 때 소풍을 온 뒤로는 처음이었다. 죽은 왕들의 혼이 머무는 곳. 그러고 보면 학창시절에 소풍을 갔던 곳은 무슨 능(陵)이니 하는 죽은 자를 위한 터가 많았다. 러시아에 있을 때도 모스크바나 쌍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들의 유서 깊은 관광지라 소개받은 수도원에 가보면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왕, 대문호, 예술가들이 그곳을 차지했다. 도스토옙스키, 고골, 체호프, 차이콥스키 같은 인물들과 무슨 특별한 교감이라도 나눌 양이 아니면 별로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그것도 사람이 뜸한 평일 오후쯤에는 더 그랬다. 종묘도 그런 느낌을 주었다. 뭔가 할 일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생각에 마지못해 입장권을 받아들었다.
신로(神路)를 따라 정전으로 다가갔다. 문득 앨범에 흑백으로 남은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소풍 때 정전 돌계단에 앉아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나는 그때 지퍼를 잘못 채워 X자로 벌어진 점퍼를 어쩌지 못한 채 뿌루퉁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사진 속의 한 인물이 불쑥 스쳐갔다. 앞머리를 일자로 싹둑 잘라놓아 우습긴 했지만 체크무늬 양복저고리 앞섶을 단정하게 여미고 내 곁에 점잖게 앉아 있는 아이. 내가 늘 부러워하던 친구였다.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 변두리였는데 근처에 큰 고아원이 두 개나 있었다. 그곳 아이들은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그 중 구세군 고아원 아이들은 대개 외국에서 날아 온 구제품 양복저고리를 입었다. 그게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 시장 리어카 위에 쌓아놓고 파는 싸구려 옷을 걸친 내게 그 친구는 풍요롭다는 영국인지 미국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곧 양부모가 데려갈 것이라는 말도 자주 입에 올렸다. 얼굴도 도시 풍으로 해사해서 우리가 상상하는 고아원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입양 꿈을 꾸는 아이들 사진 중에서 그 친구 얼굴이 금방 눈에 띄었는지도 몰랐다. 가끔씩 외국 우표를 보여주며 양부모가 될 분들이 보내 준 것이라고 자랑을 했다. 하지만 그의 멋진 체크무늬 양복은 소매가 점점 짧아져갔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부모를 기다렸다. 그의 옷은 누더기가 다 되어버렸다. 그에게 밝은 미래가 될 영국이나 미국은 너무 먼 곳이었나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 근처 유리공장에 다닌다고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그 애가 밝은 미래를 보장할 양부모를 기다리듯 나는 러시아를 그려 왔었지만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날만 해도 그랬다. 나는 수도권에 있는 한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폐강 아니래요?” 집을 나서려는 나를 아내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는 신발을 꿰며 애꿎은 핸드폰 폴더만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전화로 확인해 봐요. 헛걸음 말고.” 나는 못들은 척 그 소리를 뒤로했다. 종로3가에서 전철을 갈아타려는데 학과 조교로부터 강의가 폐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기 초인데 아무 연락이 없어 그대로 강의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정말 아내의 말을 따라야 할 때가 다가오나 보았다. 조교는 늦게 연락을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애당초 긴가민가했던 강의였다. 친한 선배가 학과장이라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 강의를 빼고 맡은 터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 선배 사정도 이해가 갔다. 러시아는 늘 그랬다. 어쩌면 강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미리 받긴 했다. 이번에 예비 신입생을 뽑았는데 등록을 앞두고 열댓 명의 학생이 등록을 포기하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요사이 계속 터지는 러시아에서의 사건 때문이었다. 얼마 전 알타이에서 한국학생 하나가 러시아 극우주의자인 스킨헤드한테 맞아 숨졌다. 또 모스크바의 유학생은 중태에 빠졌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흉보였다. 범행 장소가 모스크바 유고자파드나야라면 내가 당한 지역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어두컴컴한 범행 장소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비겁한 루스키 새끼들!” 욕설과 함께 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그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스쳤다.
갑작스러운 등뒤에서의 린치. 나를 향해 퍼붓는 주먹질. 엎어져 머리를 감싼 두 손과 어깨를 찍던 구둣발. 머리, 몸뚱이 할 것 없이 불꽃이 튀었다. 마침내 나는 계단에서 구른 뒤 울퉁불퉁한 얼음 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그 때 도로 맞은 편에 아득히 지하철 역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으로 만든 알파벳 ‘M’자가 ‘음’하고 시치미를 떼며 어둠 속에서 허연 눈만 씀벅였다. 그 옆의 키오스크에 써 붙인 키릴 문자들이 발길질 속에서 제멋대로 배열된 채 가물댔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무작정 그리로 뛰어야 했다. 벌떡 일어서 차도로 내려섰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쪽 다리가 그냥 무너져내렸다. 차들이 질주하는 8차선의 도로. 절뚝이다가 결국 반포복으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어붙은 도로에서도 기가 막히게 차를 모는 러시아인들의 운전 솜씨 덕분인지 나는 길을 가로질러 무사히 인도로 기어올랐다. 나는 얼이 빠져 지하철역 옆으로 길게 퍼진 자작나무 숲으로 뛰어 들었다. 패거리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그 뉴스가 끝나고 나는 혀끝으로 앞니를 문질렀다. 모스크바에서 얻은 의치였다. 인터넷에는 계속 들려오는 범행 소식에 격분한 네티즌들이 수많은 댓글을 달아놓았다. 그런 러시아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그런 후진국에 비싼 돈 들여 뭘 배우러 가나, 심지어는 우리나라에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갚아주자는 날이 선 글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하면 우리와 그 무지몽매한 러시아 스킨헤드와 다를 게 뭐 있냐는 글도 보였다. 거기에 지하철 폭탄 테러까지, 말 그대로 악재였다. 국내 매스컴을 타고 흘러드는 러시아 소식은 대개 그들이 한 겨울에 걸치고 다니는 길고 검은 가죽외투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나도 몇 년간 그 칙칙하고 무거운 외투를 입었다. 아득한 옛일이었다. 그것을 벗어버린 지가 십 년을 넘어섰다. 보이지 않는 그 외투는 다른 모습으로 내 양어깨를 짓눌렀다. 초등학교 때 그 친구가 걸쳤던 양복의 소매처럼 내 꿈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폐강이니 하는 말도 그런 사실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참에 강의를 아예 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내 눈치를 살피던 아내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이제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통장과 가계부를 꺼내놓던 게 삼사일 전이었다. 막막해졌다. 목적지를 향해 걷는 도중 큰물을 만났는데, 배도 없고 더구나 헤엄도 못 치는 그런 상황, 길을 잘못 들었다고 알아채 봐야 너무 먼 길을 와서 돌아갈 수도 없을 때의 허탈감. 그런 마음이 스쳤다. 그렇게 머뭇머뭇 종묘에 들어섰다가 북방을 만난 것이다.
안내판을 보며 서 있는데, 먼저 입장한 무리가 나이 지긋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종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 알고 호기심에 슬그머니 그 곁으로 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게 산사나무라는 건데, 여러분이 드시는 산사춘이라는 술에 들어가는 게 바로 이 나무의 열매입니다. 오월이면 꽃을 핍니다. 서양에서는 메이플라워라고 하지요. 이게 벼락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신통력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올 때 벼락을 맞아 많이 죽었답니다. 그래서 이 나무 기둥을 배에 세우고 건넜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메이플라워호라고 불렀지요.”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청교도 혁명이니 메이플라워호니 세계사 시간에 사뭇 외우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활자 속의 내용이었다. 가이드는 이런 안내를 자주 하는지 익살스럽게 나무에 얽힌 사연을 풀어냈다. 뒤를 쫓으며 이야기를 듣다 알게 된 사실은 가이드가 전직 국어교사였다는 거였다. 그는 간간이 교사 시절의 경험담을 섞어가며 나무에 대한 설명을 했다.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나무 몇 그루를 거치는 동안, 그가 정년퇴임을 했고, 자식들은 전부 출가시켜 이제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자유로운 생활. 그런 말을 듣자 한숨 속에서 내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이제 어쩌면 나도 ‘자유로운’ 생활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다만 무엇으로부터 자유인지 자꾸 생각이 흐려졌다. 앞으로 무얼할까 헤아려보아도 캄캄했다. 그 봄날 내게 주어진 자유는 겨우내 걸쳤던 무거운 외투를 훌훌 벗어 던지며 느끼는 가벼움, 홀가분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이드는 소로를 따라 심어진 나무 앞에서 가다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뒤에 처져 걸을 때였다. 귀가 번쩍 뜨였다.
“이게 자작나무입니다.”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서울에 자작나무라니. 그것도 시내 한복판인 종묘에. 납득이 안 갔다. 내 고정관념에 따르면 자작나무는 이북이나 만주, 러시아 같은 추운 지역에서만 자랐다. 나중에야 우리나라에도 조경을 위해 자작나무가 꽤 심어진 것을 알았다. 한 대기업이 대량 재배를 한다는 것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안 사실이었다. 그만큼 자작나무를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자작나무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봄을 상징하는 동시에 젊은 여인을 상징한다는 러시아의 자작나무. 대도시인 모스크바에도 자작나무 숲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쉽게 만났다. 시장에서도 자작나무 가지를 묶어 팔았다. 목욕탕에서 혈액 순환을 위해 그 가지로 벌거벗은 몸 여기저기를 치는 모습은 영화를 통해 흔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의 셋집 주인 노파는 자작나무가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창밖에 보이는 자작나무 숲이 아파트 단지를 보호해 준다는 믿음은 철석같았다. 늘 개똥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그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자작나무에 대한 노인네의 이상한 믿음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가이드의 자작나무라는 말이 수상쩍기만 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아도 자작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수피를 뽐내며 늘씬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자작나무. 도통 그런 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쳐들고 이리저리 둘러들 보지만 어느 게 자작나무인지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가이드는 금줄을 넘어 정원 가운데 있는 나무를 짚었다. “이게 자작나무입니다. 여러 분 자일리톨 껌있죠? 그걸 여기서 추출합니다. 저게 군락을 이루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늘씬하고 하얀 여인을 연상시키지요. 백화라고도 하는데 추운 지방에 삽니다. 여러분, 시인 백석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데 그의 시 가운데도 「백화」라는 게 있고, 다른 시에도 자작나무가 많이 나옵니다. 그 만큼 추운 지방을 대표하는 나무예요.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껍질을 벗겨 밖으로 나왔다. 그 나무를 보고 백석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스웠다. 더욱이 하얀 피부에 늘씬하게 쭉 뻗은 여인을 상상하라니. 그건 무리였다. 그게 자작나무라면 몰골이 너무 처참했다. 멀리서 보면 그 곁의 참나무와 그게 그거였다. 저 하늘로부터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빛을 머금은 눈부신 백색나무. 그게 내가 아는 자작나무였다. 북방의 나무. 그건 모스크바에서 서울까지 내 길의 이정표처럼 북방의 곳곳을 지키고 있을 나무였다. 나는 그 대륙을 따라 집으로 걸어오는 날을 가끔씩 그렸다. 모스크바의 술자리에서 한두 번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냈더니 대륙기질이라 그렇다고들 했다.
대륙기질. 그 말은 참으로 웅장하고 멋졌다. 그 대륙기질은 옆 사람들에게 말 위에 올라 초원과 숲을 거침없이 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하나 보았다. “그렇게 말 타고 신나게 달려보지, 왜 걸어간대?” 그건 아니었다. 실은 대륙기질이라는 말은 내가 ‘맥주병’임을 뜻했다. 말이니 대륙이니 하는 말에 짓눌려 나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걸어서 집에 온다는 말 덕분에 대륙기질이란 별명을 얻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근교의 호수로 서너 차례 야유회를 나갔다. 일행은 첨벙첨벙 물로 뛰어들었지만 나는 숯불에 얹힌 돼지고기 꼬치를 뒤집으며 멀거니 그들을 바라만 보았다. 물에 대한 공포. 물가에 갈 때마다 무서움이 나를 덮쳐 오곤 했다. 어렸을 때 멱을 감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자주 본 탓일지도 몰랐다. 동네 앞 샛강은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매해 여름 그것은 타지에서 수영하러 온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런 날이면 수면을 훑고 있는 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내 코끝을 더욱 비릿하게 자극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여름이면 보통 서너 구의 퉁퉁 불은 시체가 거적때기에 덮여 강변에 놓였다. 경찰차와 앰뷸런스의 소리가 요란하게 동네를 뒤흔들었다. 거적 주위로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차며 몰려들었다. “너, 저기 들어가면 저렇게 된다. 절대 들어가면 안 돼.” 그 틈에 섞인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쥐고 다짐을 주었다. 어머니는 늘 물에 가면 물귀신이 끌어당긴다며 아예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어느 여름 헤엄 잘 치던 동네 형이 빠져 죽었다. 어머니 말에 믿음이 갔다. 그 뒤로는 어쩌다 물에 가도 발만 담근 채 들어가지 못했다. 큰 강이나 바다를 보면 가슴이 쥐어 눌리듯 답답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말한 물귀신은 비릿하게 스쳐갔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발걸음을 돌릴 때 내 힘으로는 저 건너로 갈 수가 없다는 절망감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세계 곳곳을 누비는 사람이 되라며 당신의 답답한 처지를 내게 강조하곤 했다. 그러면서 세계지도를 안방에 붙여놓고 각국의 이름과 수도를 외우게 했다. 세계지도는 어린 시절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틈이 나면 지도를 짚으며 내게 세계 일주를 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세계 곳곳에서 여러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상한 발음의 국가명과 수도를 연결시켰다. 미국-워싱턴디시. 영국-런던. 프랑스-파리, 일본-도쿄, 소련-모스크바..... 처음에는 모든 나라가 평등했다. 면적이 크든 작든 모든 나라들은 국가와 수도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의미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구세군 고아원의 그 친구를 만났을 때 ‘미국-워싱턴디시’ ‘영국-런던’은 찬란한 빛을 내며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곳은 대양이 가로막았다. 지도에 파랗게 칠해진 대양을 건넌다는 것은 무서웠다. 샛강의 물비린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아주 비릿한 냄새가 지도 속 파란 대양에서 풍겨오는 듯 했다. 아버지의 강행군은 계속되었다. 나는 서울을 거쳐 걸어서 갈 나라들을 어림잡아 보았다. 그렇게 따라가 보면 유라시아 대륙 북쪽을 다 차지한 게 소련이었다. 그 끝쯤에 모스크바가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북한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호시탐탐 우리를 엿보는 섬뜩한 나라였다. 방향을 틀어 반도의 끝을 향해 남쪽으로 가야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뱅글뱅글 도는 수밖에. 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양을 건너야 했다. 신혼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조차 나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로든 조금만 나서면 가만 안 둔다고 넘실대며 으름장을 놓는 파도. 얼른 육지로 갔으면 했다. 거대한 대륙과 이어진 한반도가 내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령, 전쟁이 난다던가, 지구 축이 똑바로 선다는 순간에 닥쳐올 재앙을 상상하며, 나는 모스크바에서 집까지 걸어 갈 각오를 이따금 다졌다. 아마 그때는 비행기도 배도 기차도 탈 수 없을 거였다. 지도는 그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지구라는 조그만 별에 그때 이데올로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언젠가 방학이 되어 서울에 갔을 때 안방 한쪽 벽면에도 세계전도를 붙여놓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큰 녀석이 학습지하는 데서 받은 거였다. 큰 녀석은 제 아비가 있는 모스크바가 얼마나 먼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섯 살 먹은 작은 녀석은 그게 아니었다. 제 깜냥 손바닥을 펴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를 쟀다. “아빠 있는 곳이 여기야? 와, 무지 가깝네!” 글쎄 만 킬로미터라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어림잡지 못했지만 못 걸어갈 까닭도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스크바 내 방 한 쪽 벽에 붙은 커다란 세계지도. 그것은 극장같이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화재에 대비해 출구를 알려주는 비상등과도 같았다. 지도 위에 초록색으로 칠해진 유라시아 대륙. 그 초록빛 속에서 자작나무가 띠를 이루며 한반도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 것이었다.
자작나무라는 말에 대단한 것을 본 듯 가슴이 뛰었다. 선뜻 자작나무라고 수긍하기 힘든 종묘의 그 나무. 가이드에게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색을 못했다. 종묘에 심어진 수많은 수목들 가운데 자작나무가 있다는 게 무슨 이야깃거리일까. 어쨌든 내게 자작나무는 북방의 나무였다. 저 시베리아, 만주를 따라 한반도로 계속 내려오다 종묘에 머문 자작나무. 그건 분명 이상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내 몰골을 하고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인데도 겉껍질, 속껍질 할 것 없이 들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후드득 떨어져 내릴 듯 했다.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람들이 얼른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가이드는 굽은 언덕길을 오르며 창경궁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간혹 곁을 지나치는 관람객들 어느 누구도 그 나무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제 자작나무는 내 차지였다. 하늘 높이 솟은 그 나무 꼭대기를 올려 보았다. 정말 자작나무일까, 의심이 들었다. 나는 들어가지 말라는 줄을 슬쩍 넘어 나무 앞에 섰다. 껍질은 아래에서 위까지 온통 들고일어난 채였다. 손바닥을 슬쩍 대자마자 희끄므레한 껍질이 허물을 벗듯 땅으로 떨어졌다. 속에 감춰져 있던 옅은 살구색 속살도 부풀어올라 있었다. 미심쩍어 다시 자세히 살폈다. 자작나무의 자태가 희미하게나마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지?’ 나는 조심스레 먼지에 덮인 나무껍질과 누렇게 말라붙은 잎사귀를 주워들었다. 자작나무였다. 역시 문제는 색이었다. 나는 껍질을 조심스레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흰빛이 되살아나는 착각이 일었다. 서울 도심 속에서 공해에 찌들어 색이 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종묘 정원 안쪽 저만치 병들어도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할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껍질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득 그게 너무 먼 길을 온 것같이 느껴졌다. 저 북방의 대륙을 거쳐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서는 어쩌지 못하고 생을 감내하고 있는 자작나무. 시베리아, 만주, 흥안령, 아무르, 숭가리는 가지 못하고 이승의 삶은 끝날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그런 지명들이 자작나무 위로 흩어졌다. 모스크바의 내 방 한쪽을 채운 세계지도를 보며 간혹 그 지명들을 읊조렸다. 지도 옆에는 확대해서 붙여놓은 시 한편이 있었다. 그 안에 열거된 지명들은 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부쩍 가깝게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시인 백석이 「북방에서」뒤로하고 떠나왔던 곳들이었다.
전날도 한 대학의 ‘시베리아’ 강의 시간에 강의계획서와 함께 「북방에서」를 함께 나누어주었다. 나는 퍽 엄숙한 어조로 읽어나갔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領)을 음산(陰山)을 아무으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나는 그때/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던 말도 잊지 않았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던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라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았다/ <......>” 백 명 가량 되는 학생들에게 그 북방은 재미 없나보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옆 학생들과 잡담을 하는 광경이 몇 번인가 시의 행을 끊어 놓았다. 백석 시집은 모스크바에 가기로 결정이 나고 송별식 비스름한 술자리를 가진 날 대학동기가 챙겨준 거였다.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그 시집을 짐 속에 쑤셔 넣었다가 나중에 우연찮게 꺼내들고 슬렁슬렁 읽어나갔다. 그때 나를 붙잡았던 것이 그 시였다.
나는 자못 비장하게 모스크바로 갔다. 글쎄 비장하다는 게 어떤 것일까. 우선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야했다. 앞날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 더 보태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 북쪽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만난 ‘북방’이라는 말에도 장대함과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지도에서 그 지명이 어디쯤 위치하는가 짚어 보았다. ‘흥안령’은 대흥안령산맥, ‘아무으르’는 아무르 지방과 하바롭스크를 휘어 도는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흑룡강으로 부르는 일대를 말했다. ‘숭가리’는 한반도에 바싹 붙은 송화강이었다. 그러자 내게 ‘흥안령’이니 ‘아무으르’니 ‘숭가리’니 하는 지명들은 고향으로 가는 이정표로 다가왔다. 먼 길을 돌아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 왔으나”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었다. 견뎌내야 한다는 마음도 풀이 꺾여 갔다. 다른 일을 찾지 못하면 정말 ‘자유로운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시베리아’ 강의 첫 시간에 내가 그 시를 읽어주면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 대학의 교양 강좌로 러시아에서 돌아와 맡은 첫 강의였다. 그게 십 년 째였다. 시베리아는 내 전공과 동떨어진 것으로 늘 내 지도 속에만 자리했다. 그렇다고 그 기회를 사양할 수도 없었다. 시베리아에 대해 내세울 게 있다면 딱 한 번 바이칼을 갔다 온 것뿐이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동방학부에서 민속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너무 좋은 기회라며 가자고 부추겼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경비라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또 러시아 친구들 틈에 묻어가는 여행이라 신변에 대한 걱정도 떨칠 수 있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보며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 답사여행에서 인상에 남은 것은 연어 일종인 오물을 훈제하는 연기. 나를 압도하는 바이칼의 거대한 물, 그리고 굿판이었다. 내 앞을 막아서는 바이칼은 호수가 아닌 바다였다. 우리는 샤먼의 성지라 부르는 바이칼 속의 알혼섬까지 갔었다. 불과 이십 분가량 배를 타는 거리인데도 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는 답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얼른 행사가 끝나고 다시 뭍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자니 조바심이 났다. 다만 모스크바보다는 훨씬 더 한국에 가까워졌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날 ‘타일라간’이라는 제천행사를 보는 게 일행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다. 제천행사는 우리 굿판이었다. 친구 말로는 소련 시절 샤먼들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해 사라졌던 행사라고 했다. 알혼섬에 있는 샤먼들은 부리야트 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것이었다. 굿이 시작되기 전에 샤먼들은 자작나무를 굿판 앞에 정성스레 세웠다. 샤먼의 부름에 응답한 신이 강림하는 우주수(宇宙樹)였다. 일행은 녹음을 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나는 멀리 떨어져 물끄러미 굿판을 지켜보았다. 그리로 정말 신이 내려오는지 샤먼들은 응답을 받아 예의 우리가 본 굿에서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공수를 주었다. 그날 제일 큰 무당이 주는 공수를 받으려는 사람은 ‘눈 째진’ 몽골계의 부리야트 사람들 말고도 얼굴이 하얀 러시아인들이 꽤 되었다. 그들은 두 손을 합장하고 꿇어앉아 자작나무를 타고 내려 온 신의 말을 들었다. 굿판 앞에 세워진 꽤 굵은 자작나무. 민속학을 전공하는 그 친구는 시베리아 무속에서 샤먼이 내림굿을 할 때 거치는 통과의례 중 하나가 자작나무를 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하얗게 벼린 작두날 위에 서야 하는 우리네 무당의 그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실제로 그날 한 샤먼이 자작나무를 탔다. 시베리아 샤먼은 나무를 통해 신의 뜻을 전달받는다고 했다. 그 친구가 덧붙인 말은 신라 금관의 뼈대가 자작나무, 즉 우주수를 상징한며 이는 시베리아와 우리를 연결지을 수 있는 단서라고 했다. 우리 무당들이 굿을 할 때 흰 한지를 오려 상에 세우는 지화도 자작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북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수니 자작나무니 하는 이야기를 나는 강의 시간에 채 하지 못했다. 다만 시베리아는 자원의 보고이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에게 시베리아는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 그 기미도 보이지 않는 한반도 종단열차와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이어졌을 때의 엄청난 기대효과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시베리아 풍경이 빠질 수 없었다. 그걸 담은 DVD를 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 한 방송국에서 특집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바이칼에서 내가 굿을 보았던 곳도 소개되어 있었다. 굿을 보면서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스킨헤드에게 린치를 당할 때 어떤 신이 강림해서 나를 지켜 주었는지. 그 후 자작나무는 풍경을 넘어 모스크바 셋집 노파의 말처럼 내게는 종교 같은 의미로 다가들었다.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자작나무 숲.
나는 그때 자작나무 숲에서 딴 세상을 보았다. 북극의 저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로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눈밭, 또 그렇게 하얀빛으로 나를 감싸며 끝없이 저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자작나무들. 욱신거리는 통증도 잊은 채 그걸 보며 넋이 나갔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빙 둘러 싼 채 높은 데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러시아 경찰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지도 몰랐다. 경찰들이 내 양팔을 부축해 숲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하숙집 노파의 말이 떠올랐다. 새삼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날 저승사자는 한국과는 대륙 반대편에 있는 모스크바에 왔다가 그만 낯설어 길을 잃었든지, 아니면 차들이 질주하는 사지로 죽자 살자 덤벼드는 내가 기가 막혔던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자작나무가 보호해주어서인지 그냥 가버렸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올 때 과일을 사러 시장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괜스레 들떠 있었다. 오전에 한국의 아내와 통화를 끝내고 별일 없다는 말에 마음을 놓은 탓일까. 큰놈이 학교에서 상장을 받았다는 말에 더욱 그랬다. 지하철역 옆에는 시장이 붙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오가곤 했다. 경찰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는 곳이었다. 그들은 가끔 돈을 뜯으려 하지만 여권과 비자만 있으면 꿀릴 게 없었다. 그날따라 경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장도 한산했다. 이미 어둠이 내린 지 오래였다. 다니는 사람들도 뜨문뜨문했다. 나는 집을 향해 얼음이 덮인 길 위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건물 층계참에 한 무리의 젊은 패들이 보였다. 뛸 수도 없었다. 인적도 없는 거리에서 뛰어봤자 그들의 눈에 더 뜨이리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젊은 패거리는 웃고 떠들며 러시아산 병맥주를 마셔대고 있었다. 내가 그들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지 슈다”라는 돼먹지 않은 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이리 오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몇 발짝 가지 못했다. “개새끼, 꺼져버려!” 욕설과 함께 등 뒤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곧바로 “꺼져버려”는 “죽여버려”에 파묻혔다.
자작나무 숲에서 나왔을 때 입가가 욱신거려 말조차 하기 힘든 내게 러시아 경찰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날 거기서 뭘 했냐는 둥 여권을 보여 달라는 둥 실없는 그들의 소리는 허벅지에서 발꿈치까지 보랏빛으로 내려앉은 피멍 위로 헛헛하게 스며들었다. 셋집 노파가 부른 구급차는 다음 날 아침에야 도착했다. 병원에서도 기가 막혔다. “뼈는 멀쩡하군요. 정상입니다. 괜찮아요.” 엑스레이 필름을 보며 무뚝뚝하게 던지는 의사의 말에 부아가 났다. 멀쩡하다니. 걸을 수가 없어 앰뷸런스에 실려 겨우 왔는데. “어쨌든 제대로 설 수가 없어요.” “글쎄 뼈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우리 병원에서는 더 해 드릴 게 없습니다. 다음 환자!” “인대에 이상이 있나본데 깁스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글쎄 이 병원은 뼈만 봅니다. 인대는 다루지 않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며 깁스도 해주지 않고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상이란 말이 그럴 때도 쓰이는지 잘 몰랐다. 넓적다리에서 발뒤꿈치까지 피멍이 들고 얼굴은 다 깨진 채였다. 뭔가 치료를 기대했다. 하다못해 파스나 머큐로크롬이라도 발라 주리라 여겼지만 아무런 치료도 없었다. “정 그렇다면 다른 병원으로 가보쇼.” 의사는 같지도 않다는 눈길로 나를 훑어내렸다. 나는 더 대거리를 못하고 벽을 붙잡은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회칠을 한 진찰실 벽은 누렇게 들 떠 붕괴된 소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병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 번 얼어붙은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친 한국 학생 하나는 병원에서 깁스를 했다. 그는 치료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나중에 찾아가 조그만 성의를 표시하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물론 소아과와 내과가 연이어 붙어있는 우리 병원과 견주어, 아이들의 경우 집으로 왕진까지 와주는 러시아의 의료제도에 탄복하기도 했다. 시립병원을 숫자로 제 1 병원, 2병원 하는 식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게 걸린 숫자는 영 좋지 못했다. 그 숫자는 주인집 노파가 부른 구급차가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그만 손에 안 좋은 패를 쥐고 말았다. 다시 병원을 알아보았다. 깁스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후배를 불러 학교에서 지정한 의원에 두어 번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다가 힘에 부쳐 그만두었다. 다시금 살아있다는 느낌이 영 낯설었다. 세모로 날을 세운 부러진 앞니와 퍼런 멍으로 채색된 채 퉁퉁 부은 눈두덩에 파묻힌 일자의 실눈. 나는 한참이나 그 얼굴을 보아야 했다. 눈은 정말 ‘째진 눈’이 되었다.
“당신 째진 눈이야!”
무슨 소린가 했다. 모스크바의 시장에서였다. 과일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불쑥 내 앞으로 한 중년여자가 끼어들었다. 내 차례라고 하자 그녀는 얼굴을 씰룩이며 그렇게 툴툴거리며 맨 끝으로 갔다. 러시아인들이 동양인을 낮춰 부를 때 ‘눈 째진’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250년 가깝게 몽골의 지배를 받은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째진 눈’의 동양인은 그들의 거부 대상이기도 했고, 또 무의식 속에 깔린 두려움을 그런 표현으로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눈은 말달리던 유목민의 째진 눈을 닮아 있던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당했던 것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서양식으로 눈 성형을 해도 그들에게 우리의 눈매는 매한가지였나 보았다.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면 아주 가끔이긴 해도 ‘째진 눈’이라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 박히곤 했다.
정말 ‘째진’ 눈이 되어 나는 한참이나 거동을 제대로 못했다. 지도 속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끝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작 흉한 꼴을 당하고 나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쌓이자 그 거리는 다다를 수 없는 거리로 까마득했다. 대륙기질은 다른 사람의 것인 모양이었다. 막상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어려운 처지를 실감하자 숨이 턱에 차올랐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벽에 한글로 활자화된 흥안령, 아무르, 숭가리 같은 지명들은 아스라하게 멀어져갔다. 자주 여권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다. 모스크바에서 여권을 분실하고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는 광경이 펼쳐졌다. 꿈에서 깨고 나면 대사관과 그곳 경찰에 신고해서 절차를 밟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꿈에서는 정말 가슴을 졸였다. 경찰 제복이 멀리서 어른대면 얼른 꽁무니를 숨기고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한 채 러시아에서 떠돌이가 되는 꿈.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거주등록을 못한 비자를 가지고 어떻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까 시름에 빠져 가슴만 쓸어내리는 꿈. 이런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내용의 꿈들이 자주 찾아왔다. 컴컴한 지하도 같은 곳에서 스킨헤드한테 걸려 도망치지 못하고 쩔쩔매는 꿈은 단골 메뉴였다.
나는 맞았지만 입을 꼭 다물었다. 외국 학생들은 의료보험료를 따로 냈기에 치료를 받으려면 학교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알려야했다. 그밖에는 도와 준 후배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사건이 어떻게 귀에 들어갔는지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러시아 경찰과 매한가지였다. 결국 어두운 밤에 나다니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북극 겨울은 오후 세시쯤이면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한다. 하나마나한 소리였다. 한국에 나와서도 그 일을 가슴에 묻었다. 러시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가뜩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러시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소련과 같은 나라로 알았다. 거기에 붙는 수식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가 겪은 일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만일 이번 일을 당한 한국유학생들에게 했듯이 흉기를 들고 나를 찔렀다면, 그들이 자작나무 숲에서 정신을 잃은 나를 따라왔다면......
죽여버리라는 고함이 귓가에 살아났다. “우비-이!” 다시 진저리가 났다. 꼭 누군가 지켜준 것만 같았다. 그 일이 있고 자작나무를 보면 서낭당 같은 곳을 지나치며 잠깐 엄숙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왠지 든든한 것이었다. 산사나무가 대서양을 무사히 건너 청교도들을 신대륙에 내려놓은 것처럼 자작나무는 먼 러시아에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나도 미신처럼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을 사서 걸어 놓았다. 관광객이 몰리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그들을 상대로 파는 기념품 중에는 자작나무 위에 인두로 그린 풍경화가 많았다. 한국에 나올 때면 그걸 사 가지고 와 선물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대륙 기질을 발휘하지 않고도 흥안령, 아무르, 숭가리를 무사히 지나쳐 서울 종묘에서 자작나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누더기가 된 껍질을 걸치고 있는 자작나무. 십 년 경력의 대학 시간강사. 이제 중년도 한참 지났다고 알리는 주름진 내 까칠한 얼굴 위에 허옇게 붙어 있는 살갗.
모스크바에 있을 때였다. 지도교수가 논문을 몇 달 연기하자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진짜 가장이란 역할을 해야만 할 때였다. 집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했다. 나는 빈속에 보드카를 마시고 잔뜩 취했다. 한참을 걸었다. 겁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밤. 그날은 스킨헤드도 경찰도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다만 절망만이 두려울 따름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에 힘을 주며 모스크바 셋집으로 지척지척 돌아왔다. 아파트 단지 주변의 자작나무 숲은 허리까지 빠질 정도의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가슴이 저미도록 막막한 북극의 푸른 밤하늘. 하얗게 시리도록 빛나는 자작나무. 아주 푹신한 솜 더미에 누운 듯한 착각. 등이 다 젖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눈가로 흘러내렸다. 눈 시린 자작나무 너머로 밤하늘이 나를 향해 나지막이 내려왔다. 순간 뭔가 뻥 뚫린 느낌이었다. 그랬다. 북방도 대륙도 나를 감싸 안은 하늘 아래 자그마할 따름이었다. 서울 집이 부쩍 가깝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육신만큼의 흔적이 눈 속 깊이 찍혀 있었다. 방에서 창을 내다보면 그 자국은 몇 달 동안 그렇게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녹았을 때 내가 누웠던 자리 밑으로 겨우내 파묻혀 있던 개똥이며 오물들이 나뒹굴었다. 자작나무들은 지상의 일은 모른다는 듯 잎을 틔우며 하늘을 향해 점점 더 올라갔다. 지금도 가끔씩 그 밤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아내에게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눕고 싶다고 말한다. 스킨헤드에 당하고 나서 논문이 통과되자마자 줄행랑 놓듯 떠나온 뒤로 한동안 그곳 이야기라면 진저리를 치던 나였다. 그렇게 싫다더니 웬일이냐며 아내는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햇살에 째진 눈이 되어 자작나무를 다시 올려 보았다. 그것은 그냥 종묘에 심어진 나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가이드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쳐갔을 그런 나무. 볼품없는 몰골이지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조심스레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왠지 모르게 이번 학기에는 모스크바의, 바이칼의, 흥안령의, 아무르의, 숭가리의 자작나무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누구의 나무도 아니었다. 문득 자작나무가 종묘에 깃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 곳을 거슬러 내게 날아온 나무. 나는 주머니 속 자작나무 껍질을 만지작거리며 한 걸음 대륙을 향해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