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과정> 용연초등학교는 1962년 3월 4일 용잠초등학교 용연 분교로 개교했다. 2개 반으로 구성되었다. 1반은 남학생으로 용연5일장 건너편에 있었던 용연동 농협비료창고에서, 2반은 여학생으로 용연5일장 남쪽 건물에서 수업했다. 1회 졸업생들의 1반 담임은 용연동 출신인 김소일 선생으로 임시직이었다. 2반 담임은 박옥경 선생으로 정식으로 발령받은 선생이었다. 2학년 때는 용연5일장에서 동북쪽으로 옮겨 수업을 했다. 이때 1반 담임은 김정원이었고, 2반 담임은 1학년 때와 같이 김옥경이었다. 1회 졸업생들이 3학년 때 황성동 황암마을로 옮겨 왔다. 2회 졸업생들은 황암문화관에서 수업했다. 학교 부지는 원래 모두 논이었다. 육성회장은 1회 졸업생들이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당시 용연술도가 사장이었던 이대유 씨였다. 육성회장은 경제적 지원과 조회 때 훈시를 했다. 1반 급장은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용연동 출신인 김정구 씨가 맡았다. 3학년 때는 역시 용연동 출신인 이상호 씨가 급장과 아동장을 겸하여 맡았다. 급장은 리더쉽이 있고, 성적이 우수하고, 착하다고 인정되는 학생을 담임이 임명하였다. 교장은 1학년 때는 교장직이 없었다. 2학년 때 교장은 김정원 선생, 3학년 때는 이재만 선생이었다. 학교 초기에는 바케스와 천으로 돌을 날라 운동장을 메웠다, 또 용잠초등학교에서 어른 한 아름쯤 되는 플러더너스을 끌고 와 정문 안에 심었다. 또 학교 정문부터 서쪽 방향으로 측백나무를 심어 3학년 1반 학번을 부여하여 학생들이 본인들의 나무를 각각 관리했다. 당시 61번까지 있었다. 1회 졸업생들이 5학년 때 축구부와 씨름부가 창설되어 오영숙 선생이 맡았다. 5학년 때 울산중학교에서 당시 용연초등학교 5학년들(1회 졸업)로 구성된 축구부와 용잠초등학교 6학년들(24회 졸업)이 축구 경기를 벌였다. 결과는 용연초등학교 5학년들이 자책골로 0 : 1로 패했다. 그래서 축구부는 곧 해체되고 배구부가 창설되어 축구부와 마찬가지로 오영숙 선생이 맡았다. 6학년 때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열렸던 제4회 경상남도 도민체전에 출전했다. 용연초등학교는 결승전에서 경상남도 밀양시의 밀성초등학교와 경기를 벌려 우승했다. 도민체전에서 우승하여 전국 체전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으나 재정이 열악하여 결국 도민체전에서 준우승한 밀성초등학교가 출전하여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다. 배구 선수는 이상용(용연동), 이상호(용연동), 김춘일(용연동), 김사원(용연동), 김성준(성암동), 이정우(황성동 황암), 최해수(황성동 천곡)였다. 소풍은 주로 성암동에 있는 개운포성지, 성외의 노른방끝, 봉대산에 갔는데, 신선산과 오비공장도 견학한 적도 있었다. 수학 여행은 6학년 때 한 번 1박 2일로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 등을 답사했다. 이때 48명이 참가했다. 1969년에 용연동사무소 강당에서 메아리 야간 중학교를 개설했다. 이때 용연동 남화동, 황성동 황암마을의 여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극소수의 남학생들도 입학을 했지만 창피하다는 이유로 졸업한 학생은 없었다. 영어와 한자 교사가 별도로 있었다. 이 학교 1기 졸업생들은 삼성전관에 모두 취업하였다. 신작로는 1회 졸업생들이 6학년 때 개설되어 용연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길이 생겼다. 용연5일장은 3일과 8일에 열렸다. 이곳에서 한약재, 고무신, 장작, 솔가시, 닭 등을 팔았다. 주로 오대마을에서는 장작, 목도마을에서는 복어, 멸치 등 바닷고기, 처용마을에서는 채소, 용연에서는 고래고기를 팔았다. 이 용연5일장은 새각단 철거 직전에 폐지되었다.
첫댓글 그런일이 있었는가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