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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도를(鵲島) 속칭「까치섬」이라 부른다.
「까치섬」은 음성읍 평곡리에 있고 원남면 하로리, 음성읍 신천리, 삼개리 경계지점이기도하다. 음성천(陰城川)을
따라 음성읍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평지에 대형공(大型공) 하나를 놓은 것같은 둥그런 까치섬을 볼수가
있다. 십여년생의 소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사계절 어는때나 오작(烏鵲 : 까마귀와 까치)이
모여듦은 물론이고 때따라 철새(철새)도 곧잘 날아온다. 여름철에 백로나 황새 등이 날아들면 까치섬의
풍경 또한 돋보이지만 이 때에 이곳조곳에서 들려오는 농부들의 콧노래가 더 구성지다. 이 까치섬은
옛날 귀양살이 오는 곳으로 또는 「굴비진상(진상)」을 했다해서 그에 대해 일러 내려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많다. 옛날 음성현에서 진공물(진공물)로는 황기, 백출, 백급, 차유이인, 백청, 연교,
연료 등 약재들이다. 어느해 음성고을 현리가 진공물을 챙겨가지고 지정된 창고로 가지고 갔다. 고사(고사)
앞에 나아가서 "음성현 진공품을 가지고 왔습니다."하고 절을 했더니 고사가 음성현의 장기(장기)를
살펴보다가 하는 말이 "오 참 잘 왔네"하면서 "너이 고을에 바다뫼(海山 : 현 석인리와 평곡리
경계지점의 소지명 '바다뫼들'을 말함)과 작도(작도)가 있구나" "네 있습니다." "너의 고을은
해변가에 있구나" "아니올시다 바닷가가 아니올시다." "그러면 바다 해자(해자)와 섬도자(島字)가
웬말이냐" "아니올시다 토지가 바다와 같이 넓다해서 작도(작島)라 했을 뿐이옵니다." "아니다 필시
너의 고을에 바다가 있는데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 "너의 고을은 내년부터 진공물목(진공물목)에
'굴비'를 첨가할 터이니 실행하도록 해라" "……." 현리는 고사(고사)의 말은 우수게 말로 알고서
돌아왔다. 이듬해 현리는 전과 같이 진공물을 챙겨가지고 창고로 갔다. 창고에 이르러 고사(고사)에게
진공물을 바치니 고사가 하나하나 점고(점고)하다가 현리를 보고 큰소리로 "음성현 진공물목에 있는
「굴비」가 없으니 웬일이냐" "네 저의 고을엔 바다가 없어 「굴비」는 못가지고 왔습니다." "관문서(관문서)인
진공물목에 굴비가 엄연히 있는데 무슨 소리냐, 빨리가서 가지고 오너라" 이 말을 듣고 현리는 난처하여졌다.
고사의 얼굴을 살피면서 선처해줄 것을 사정하였다. 그러나 고사는 노기띤 어조로 힐책하기만 한다.
사태가 이쯤되자 현리는 하는 수 없이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 가서 굴비를 사다가 진공물을 완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음성 고을에서 굴비진상을 했다. 이 억지 굴비진상 이야기는 원근(원근)고을까지
전파되고 말았다. 그 뒤 음고성을 굴비진상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이말이 중앙관서까지 알려져서
음성현 진공물목에서 굴비는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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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음성 향교에서는 낮과 밤도 없이 글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서 잔 심부름하던 한 소년이 있었는데 하루는 글소리를 들으며 생각 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까막눈으로 그냥 보낼 수야 없지 않으가? 비록 가산이 빈궁하여 조상으로부터
남들처럼 물려받은 유산은 없을 망정 다같은 사람일진대 남도다하는 공부를 나라고 못할건가? 밤과 낮으로
편안히 공부하는 저 학동이나 선비님들은 부모님들의 격려와 물려받은 가산으로 사람구실을 다하며 살지만
내비록 가진 것은 없으되 그들보다 두배, 세배 노력만 한다면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으리라,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도 하면 출세는 못할망정 사람구실이야 하겠지?"하고 글배울 것을 결심하였다.
본래 부지런하고 끈기있는 노력가인 그는 낮에는 부지런히 향교일을 맡아일하고 저녁이되면 학동들의 책을
빌려다가 등불을 밝혀서 밤새는줄도 모르며 글을 읽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표'를 해두었다가 선비나
학동들에게 물어서 깨닫고 배워서 익히는 중에도 성품이 착하고 어질며 사랑받는 처지인지라 선비나 학동들은
기꺼이 다투다시피 가르쳐주고 공부 잘 하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이와같이 열심히 공부한 끝에 초시에
응시하여 급제가 되닌 음성 향교에서는 선비하나가 탄생했다고 야단이 났다. 이 소년은 2년후에 문과에
응시하여 또 무난이 급제하였다. 옛날에 문과에 급제하면 곧 직함이 주어지고 벼슬길이 열리는 법인데
이 청년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못 하였다. 그래도 아무불평없이 농사일을 하면서 지낸는데 하루는 거창한
행열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리비켜, 저리비켜라, 사또님의 행차시다"하는 소리로 보아 서울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신임고관의 행차인 듯하였다. 위세와 권세가 당당한 행열에 위압된 순바가하고 나약한
백성들이 길을 지나다가 길 양쪽에 즐비하니 업드려 부복해있는 사이로 위엄있는 사또의 가마가 지나가다
잠시 쉬는데 그때가 마침 점심때라 집으로 돌아오던 이 청년이 소를 몰고 사또 행차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사또가 바라보니 기골이 늠늠하고 선비같은 점이 엿보였다. 그래서 만나보기로 하였다. 만나보고 서로
인사를 하는데 문과 과거동방(동방 : 현동기생)이었다. 서로 반가워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자기는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늙은 어머니와 농사일로 소일한다고 대답했다. 잠시 그 신임 사또가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더니 같이 주안을 난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지 얼마 후에 서울에서 전갈이
왔는데 급히 상경하라는 내용이였다. 불야불야 준비를 갖추고 서울에 가니 나라에서 음성현감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말인즉 이분이 저 유명한 옹몽진 현감이라는 뒷날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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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읍 남천동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신천리 냇말로 가는 고개를
흔행이 고개라고 부른다. 이 고개는 "흉행이(흉행)고개"가 변하여 현재 흔행이 고개로 된것이다.
흉행이 고개는 문자 그대로 흉한 행동을 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이조 헌종때 음성현감이 죄수를 잡아다가
"망난이(형을 집행하는 형리의 벌칭)"로 하여금 사형을 집행한 곳이다. 또한 흔행이 고개는 예날
악성질환(악성질환 : 천연두, 장질부사, 홍역 등)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더금뫼(일조의 ???)하여
두는 곳이었다. "더금뫼"는 이씨 왕조말까지 우리나라 도처에 있던 한 풍습이다. 즉 가장법(가장법)의
하낟이다. 이곳에는 지금부터 50여년 전에 성황당이 있었고 큰 나무가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