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예안이씨 풍은공 종가
초가을, 안동 풍산읍에 소재한 예안이씨 충효당을 찾았다. 이곳은 흔히 풍산 우렁골 또는 우릉골이라고 한다. 종택이 소재한 땅은 下里里 189-1이다. 원래 상리, 하리 할 때의 아랫마을이란 뜻의 하리였는데 전국의 지명을 전산화 하면서 리자를 하나 더 붙여서 하리리가 되었는데, 획일이 빚은 지명의 어색함이다. 한문 표기로는 우동(芋洞)이다. 풀이나 토란이 더부룩하게 우거진 모양을 나타낸다. 아마 예전에 풀이나 토란이 우거졌던 모양이다. 풍산읍에서 보면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상리천이 읍내와 마을의 경계이다. 초입에 경상북도청 북부사무소가 있다.
우릉골은 말로만 들어 온 초행길이다. 사실 우리 집안과 이곳 예안 이씨 집안과는 혼맥이 빈번하게 있었다. 집안에 우릉골, 상리, 풍산 등의 택호를 가진 이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나직한 山 아래 고옥(古屋)이 여러 군데 보인다. 예안 이씨 충효당(忠孝堂)은 그 끝자락에 있다. 보물 553호이다. 집이 보물로 지정받기는 특징이 없으면 어렵다. 곰삭은 주연(柱椽), 고색 빛 고와(古瓦), 고와의 추녀에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누백년 삶의 족적이 풍경과 함께 다가온다. 마을은 하천 안의 들을 끼고 형성 되었다. 충효당 고택은 풍산들을 바라보면서 서향으로 자리 잡았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고택 주인은 이준교(李駿敎)씨다. 젊은 시절 중앙일보 기자를 했고 언론계데 30여년 근무하다 환향했다. “한국의 미” 24권을 편집한 이다. 또 독도박물관 설립 실무책임자였다. 이는 그의 실력과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간단 이력이다. 알프스 3대 북벽도 등정했다고 한다. 차분해 보이는 모습의 반전이다. 일흔이 갓 넘었다는데, 빠른 서리가 백두(白頭)에 소복 내렸다. 손짓은 어둥하고 눈짓은 순진해 보인다. 몸짓의 느림에서 오는 매력이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조근조근한 그의, 이 집에 대한 설명의 시간 안에 반가(班家) 후손의 자긍심이 보인다. 느린 것에는 신중함이 내포되어 있다. 종손 그 느릿한 것이 그렇다. 빠르거나 급했으면 종가를 지켜 내었을까? 호감이 간다. 순진한 눈동자를 지닌 그는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은 이 집의 17대 주손이다. 어눌함은 본래의 그런 것이 아니다. 건강에서 오는 문제였다.
먼저 집의 터부터 이른다. 양택은 배산임수(背山臨水)가 기본이다. 백두대간 문수지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학가산을 낳았다. 학가산은 경북북부 명산으로 풍수상 봉황의 형상이다. 명산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기에 조선조 현인달사들이 학가산을 동경했고, 그 산을 오르며 수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학사 김응조는 학가산과 사천(沙川: 내성천)이 너무 좋아 첫글자를 따 학사(鶴沙)라 자호(自號)했다. 봉황(鳳凰)은 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다. 우리도 예로부터 신성시했던 길조다. 기린·거북·용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한다.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한다. 그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했다.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연(鳳輦), 천자가 도읍한 장안(長安)을 봉성(鳳城)이라 하였으니,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 함은 당연한 칭호다. 봉은 안동 땅을, 황은 예천 땅을 딛고 서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안동 예천에 인물이 많다. 그 산이 남쪽 줄기 하나를 풍산으로 내렸다. 그게 하지산(下枝山)이다. 한줄기가 이 지역에 세 갈래로 내려 왔다. 와우산(臥牛山)과 옥녀봉(玉女峰) 그리고 비아산(飛鵝山)이다. 세 산이 마을을 감싼다. 와우산이 종가의 배산이다. 상리천이 마을 앞에 유장하다. 풍산들을 경유하여 낙동강과 합수한다. 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흐르니 풍수상의 기본 조건은 이렇게 갖추었다.
다음은 이 집의 기단 터이다. 집 터 앞 진입로보다 둔덕지다. 길 아래에서 보면 너무 우렁차게 보일 수 있는 집의 높이다. 그래 이 집 주인은 일단, 이단, 삼단으로 높이를 서서히 죽이며 올라와 주춧돌을 놓았다고 한다. 마당과 섬돌층과 봉당의 삼단 구조이다. 규모가 주는 위압적 자세를 최대한 낮추는 타인에 대한 시각적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종손은 대가(大家)를 지키는 홀어머니를 모시고자 낙향을 하였다. 노모를 업고 먼저 가신 아버지 산소에 수백 번 오른 효자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종손은 평생에 그리운 父情이 한이 되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였기에 어머니에게는 남다른 정을 가졌다. 그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아들은 이제 홀로 조석을 끼리 먹고 산다. 처자식은 서울에 있다. 곧 내려 올 거란다.
풍산에는 전의이씨와 예안이씨 두 파가 있다. 원래 전의가 본류다. 본류에서 내려오다 10대 때 예안파가 형성되었다. 풍산의 전의 이씨는 낙남(落南) 500여 년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무렵 상서이부판사 이사례(李思禮)가 그들 일파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아들 이웅(李雄)이 숙부 송월당 이사경(李思敬)을 따라 안동 소산리로 은신하였다. 이웅은 아들 일곱을 두었다. 그 중 둘째가 양정공(襄靖公) 이화(李樺 1421~1489)이다. 판사공 이사례의 손자인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의 참모가 되어 병조의 수장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소산리에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당호를 야소헌(埜巢軒: 양정공의 호)이라하고 인근의 젊은이를 모아 제자들을 길렀다. 양정공(襄靖公)에서 7대를 내려오면 이산두(李山斗 1680~1772)라는 분이 있다. 영조에게 어필영정(御筆影幀)을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 불천위로 모신다. 상리 중간의 작은 골짜기에 전의이씨 양정공의 후손들이 산다고 한다.
우렁골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분파되었다. 시조 이도(李棹)의 10대손 이익(李翊)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으로 예안군(禮安君)에 봉해 지면서 관향을 예안으로 쓰게 되었다. 중종 때 기묘사화를 만나 이영(李英)이 동생 이전(筌)과 이훈(薰)을 데리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영의 맏아들이 숙인이다. 그는 진사시에 입격하고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숙인의 아들은 율원공인데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이분들 3형제가 우릉골로 입향하였다. 둘째 전(筌)의 아들이 홍인(洪仁(1528∼1594 호 豊隱)이다. 임란의병장으로 충신의장(忠臣義長)이다. 이 집 충효당은 풍은공(豊隱公)이 1551년 분가 하면서 지었다. 충과 효가 이 집안의 전훈(傳訓)이다.
주인은 나직히 말한다. 안동 하회마을 서애선생의 고택 당호가 충효당이고, 또 영덕 인량리 갈암 이현일의 집 당호가 그러하다. 충과 효의 모범을 보인데서 유래된 집안의 당호이다. 풍은공은 1811년(순조11)에 충신으로 정려되었고, 그의 8세손 용눌재 이한오(李漢伍 1719~1793)는 효자다. 아버지 병에 잉어와 꿩으로 이치탕(鯉雉蕩)을 공궤하여 쾌유하였다. 순조 때 정려가 내렸다. 그래 이 집안에 한 분은 충으로, 한 분은 효로 정려 되었으니, 이를 기려 쌍수당(雙修堂)이라 명명했다. 충과 효를 닦는다는 뜻이다. 家傳忠孝 世守仁敬이다. 세종이 이 집안 이정간(李貞幹)에게 내린 휘호다. 충효와 인의가 가문의 골육(骨肉)임을 알겠다. 17대를 이어오면서 두 번의 양자가 있었을 뿐이다. 흔하지 않은 계통이다. 8대 주손에서 무과 한 장, 9대 손에서 문과 한 장이 나왔다.
충효당과 쌍수당 그리고 문간채 등 건물이 □자 배치다. 집의 몸체는 홑처마의 납도리집이다. 길에서 약간 둔덕에 지었다. 가까이는 상리천이, 멀리는 풍산 넓은 들이 조망된다. 기둥과 서까래의 木色은 짙은 황갈색이다. 맑은 가을 하늘에 뚜렷하다. 북편 건물에 雙修堂이, 서편에 百源堂이다. 쌍수당은 일자형으로 중층 팔작지붕이다. 자연석 봉당과 자연석 축대가 바르게 놓여 있는 모양이 근래에 보수한 흔적으로 깨끗한 인상이다. 안채는 2층의 토대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쌍수당보다 춤이 낮다.
종손의 설명은 마당 안으로 이어져 들어간다. 일행의 몸도 나직한 소리를 따라 안채로 갔다. 안채 앞면은 3개의 두리기둥이 버티고 있다. 당시 군신의 위계질서로 보아 두리기둥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왕실과 어떤 허용되는 관계나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 주인은 추측한다. 부억은 팔각기둥이다. 전면 두리기둥 3개와 팔각기둥 8, 이는 3-8의 숫자이다. 仁을 표현하였다. 안방 문간채는 쌍문이다. 복판에 세로 문설주가 있다. 다른 고옥에서 보지 못한 특이한 구조다. 마루의 북쪽 문 2개의 사각 문틀이 사괘받침이고 중보는 팔괘받침이다. □자의 오른쪽 연결은 한 단계 높은 다락이다. 이곳에서 제수를 차린다. 요즘으로 치면 다용도실 공간이다. 쌍수당은 마루부분의 두리기둥이 9개이고, 방부분의 사각기둥이 4개이다. 숫자로 보면 4-9이다. 이는 義를 표현하였다. 집의 구조가 仁義와 忠孝사상에서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쌍수당 현판은 또 우 又자 두개의 받침이다. 충과 효, 두 가지를 닦으라는 의미란다. 백원당(百源堂)은 효는 백행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정충각과 정효각은 안교리에 있다.
안동에서 오면 풍산읍 초입 왼편에 체화정이 있다. 전의 이씨 집안의 선대 이민경, 이민적이 부모를 모시고 형제의 우애를 다졌다는 정자이다. 이한오도 이곳에서 노모를 모시기도 했다한다. 체화정 내현판 담락재는 단원 김홍도가 썼다.
전의(全義) 이씨 시조는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이도(李棹)이다. 전의현(全義縣)은 충남 연기군에 있다. 그의 이름은 치(齒)였는데,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위해 금강에 이르렀을 때 강물이 불어나 도강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치가 사병을 동원하여 강을 건너게 도왔다. 왕건이 이름을 하사했다. 노를 저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고 배를 젓는 노의 뜻을 지닌 도(棹)자로 작명해 준 것 것이다. 후에 벼슬이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렀다.
2015년 초추(初秋)에, 충효겸전의 풍산의 예안이씨 풍은 종택을 둘러 보는 의로운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