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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수요 야간도보는 오후 7시부터 광화문 한글가온길을 중심으로 경희궁 숲길을 거쳐 세종문화회관을 한바퀴 도는 코스로 진행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한글가온길과 함께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지역을 거닐은 셈인데 사연도 많고 설명도 길어져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9시 30분 세종문화회관에서 마쳤습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정동 덕수궁-친일 음악인 홍난파 가옥-권율 도원수 집-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걸어보고자 합니다.
한글이야기, 위대한 한글가온길
한글가온길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한 경복궁에서 주시경 선생 옛집, 구세군회관 옆 한글학회에 이르는 길입니다. 한민족의 위대한 창조물이자 유산인 한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연구 보급한 분들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죠. 한글가온길의 가온은 ‘중심’이라는 순우리말입니다.
한글가온길은 원래 경복궁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동선이 너무 길어서 경복궁역부터 시작합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지금은 용비어천가 오피스텔로 바뀐 주시경 선생 옛집입니다. 주시경 선생은 망국의 지식인으로 나라의 힘을 키울려면 민력(民力)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자를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글 연구와 보급에 매진하다 38살 젊은 나이로 급서합니다. 그분의 동료와 제자들이 힘을 합쳐 조선어학회를 만들고 한글 보급에 신명을 바쳐 오늘날 한국이 문화강국이 된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 망국의 곤궁한 지식인으로 커다란 책보따리를 들고 동분서주 한글보급에 앞장서 별명이 ‘주보따리’였습니다.
광화문 구세군회관 옆 한글가온길 알림판
주시경옛집을 지나면 바로 도렴녹지공원이 있고 그곳에 주시경 호머 헐버트 기념 조형물이 있습니다. 헐버트 선생은 미국선교사로 이땅에 와서 한글에 매료, 한국인보다 더 한국과 한글을 사랑, 1949년 죽어서도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힐 정도로 이 땅과 한글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민족에게 한글은 공기와 물같은 존재이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죠. 그렇지만 글은 그 민족의 혼입니다. 글을 빼앗기면 혼을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류라고 말할정도로 풍성한 문화생활, IT강국인 것도 다 한글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에 대해서는 세종대왕 관련, 신화적인 설명이 많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그대신에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한글을 왜 만들었을까요?
보통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가엾게) 여겨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대부분 반대하는데 강행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감동적이죠. 그런데 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면 진실은 다르게 나옵니다.
조선 세종대는 고려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왕조 성립 후 상당시간 흘러 안정적이고 태평성대, 생산력도 높아지고 인구가 급증한 시대입니다. 백성들이 많아지고 요즘같은 집단지성이 아니더라도 정보교환도 많아집니다. 이른바 백성들이 고본고분해지지 않은 시대이죠.
머리가 부쩍 커진 백성들을 교화하고 왕조의 충실한 백성들로 거듭나게 하려는 목적이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아닐까요? 훈민정음 만들자마자 충효사상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삼강행실도를 제일 먼저 만든것도 훈민정음 만든 배경을 짐작케 합니다. 어린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는 이해가 가죠. 지금이나 옛날이나 정보가 힘이자 권력입니다. 평생 유교만 붙들고 문자타령만 하는 사람들이 미천한 백성들이 글자를 읽고 쓰고 하면 그들의 힘의 원천이 무너지기 때문이죠.(TV 드라마 김영한 극본의 ‘뿌리깊은나무’는 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칩니다) 왕과 신하의 대립은 또다른 권력대결이죠. 왕은 백성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릴려 하고 신하들은 백성들의 문자습득을 방해하는 것, 조선왕조는 그렇게 600년을 보냅니다. 그래도 왕조가 오래 간 것은 문화의 힘, 백성들까지 문화권에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다시 주시경 선생입니다. 주시경 선생의 위대한 점은 바로 꺼져가는 한글의 힘을 다시 살린 점에 있습니다. 왕조보다 더 무서운 이민족 일본의 지배, 조금 더 길었다면 한글이 이렇게 복원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점에서 주시경 선생의 역할은 나라를 되찾는 가장 큰 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생각합니다)
경희궁 이야기, 영원한 미완의 궁전
가온길을 나와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올라갑니다. 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는데 위치가 어정쩡합니다. 바로 복원된 경희궁 위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죠. 아니 경희궁 복원이 잘못된 것은 나라가 망해 경희궁이 일제 총독부에 팔리면서 조각조각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경희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이후 광해군 때 건립이 시작됩니다. 괭해군은 후궁의 몸에서 난 대군이라 신분상 콤플렉스가 많았고, 당시 기득권의 아성이던 법궁이던 창덕궁을 싫어해서 경복궁 서쪽, 서대문 안(이른바 새문안)에 경희궁을 짓습니다. 짓기 전 풍수지리를 점치더니 이곳이 왕기가 서려 궁궐로 적합한 곳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은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이자 후에 인조의 아버지가 되는 정원군의 개인집을 빼앗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정원군이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아무래도 광해군 때 나온 얘기가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 쿠데타를 합법화 하기 위해 나온 소리 같습니다.
경희궁은 창덕궁 창경궁 등 동궐에 비해 작고 아담한 규모로 서궐로 불렸습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불렸지만 이제는 그 지위를 제례 공간 종묘에 넘겨준 비운의 궁궐입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을려 한 것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목적, 그러나 임란 이후라 국력이 안좋아 대규모로 하긴 힘들겠죠. 그런데 순조 시절 한번 불타서 다시 재건에 들어갑니다. 참 기구한 궁궐입니다. 그러다 망국 이후 일제에 의해 유린됩니다.
경희궁 금천교. 복원이 어정쩡하게 이뤄져 서울역사박물관 앞 다리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경희궁을 조각조각 내서 내다 팝니다. 경희궁 터는 총독부 자제들을 위한 학교로 만들고 정문인 흥화문은 안중근 의사에게 죽임을 당한 이등박문(이또 히로부미)를 위한 남산 에 지은 박문사라는 사당 정문으로 쓰입니다. 정말 기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다 이 문이 해방 후에는 사라지더니 어느날 신라호텔 영빈관 대문으로 쓰였더군요.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 정각원으로 이름과 위치가 바뀐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일제 패망 후에 일어납니다. 관리가 부실했고 그후 이곳을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고 규모는 상당히 줄어들게 됩니다. 진짜 더 큰 문제는 서울고등학교를 이전하고 경희궁을 복원한다면서 궁궐터에 서울역사박문관,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 등 뜬금없는 건물이 들어서면서 경희궁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있는 것이죠. 서두에 금천교 위치가 뜬금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죠. 박물관 미술관 등 공익적 건물이니 괜찮다 할 분도 많지만 옛 경희궁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도 도심 한복판에 경희궁이 있고 뒤로 숲길이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종문화관 이야기, 문화없는 문화의 거리
경희궁을 한바퀴 돌고 성곡미술관을 거쳐 내자 내수동을 지나 세종로로 나옵니다. 세종로에 오면 웅장한 건물이 나옵니다. 1972년 서울 시민회관이 불타 없어진뒤 74년에 시작, 78년 준공 개관한 세종문화회관입니다. 생긴 것 만큼 권위적, 유신말기부터 전두환 정권 등 역대 정권 정부행사, 외국 유명 단체들의 공연장 역할을 한 세종문화회관입니다.
광화문에서 시청앞 까지 차없는 문화의 거리 만들자고 한지가 20여 년이 흘렀다. 생긴 것은 세종대왕 동상 뿐.
문턱이 높은 세종문화회관, 국내 공연단체들에겐 고자세, 외국 공연팀에겐 저자세, 문화창달의 현장 아닌 전시공간이던 이곳도 김대중 정부 이후 변화, 99년 재단 설립 이후 문턱이 낮아진 곳이죠.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 광화문부터 시청, 남대문에 이르는 길은 김대중 정부 이후 문화의 거리, 조선왕조 600년 재현의 거리로 무수히 많은 제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명쾌하게 정리된 것은 없는 미완의 거리입니다. 사실 광화문에서 시청, 남대문에 이르는 길을 멋지게 꾸민다면 워싱톤광장이나 천안문광장,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못지않을 것인데 전체적인 그림은 못그리고 항상 부분적으로 채워 나가는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깝네요. 그래도 많은 부분이 바뀌고 문화로 채워지긴 했지만 100년을 내다보는 청사진이 없는 것이 아쉬운 거리입니다.
수요일 야간걷기는 세종문화회관에 마쳤습니다.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짧은 거리를 2시간 30분에 걸쳐 걸은 셈입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다음 좋은 길에서 뵙겠습니다.
낙화는 유수처럼
* 아래 사진들은 2014년 7월 6일 찍은 사진들입니다.
한글가온길 알림판
한글가온길 곳곳에 한글조형물들이 많습니다. 그것 찾는 재미도 쏠쏠.
용비어천가 주상복합건물 입구에 있는 이영송 작가의 '사랑'이라는 작품. 용비어천가 자리는 주시경 선생이 살던 곳. 선생의 살림살이는 항상 곤궁해 그의 조그만 집은 5남매와 책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도렴녹지공원. 이곳에 조그마한 규모로 주시경 헐버트 기념 조형물 설치. 사진 왼쪽 가로등을 잘 보세요.
한글 자모 모음판
주시경 선생 조형물.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한글 조형물. 주형호의 '소통'이라는 작품입니다.
'죽보기'는 '발자취' '연혁'의 뜻을 가진 말이니 한글을 배우는 곳, 즉 조선어강습원(한굴배곧)의 연혁을 정리한 책의 겉장입니다. 오른쪽은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발자취를 쓴 겉장으로 국어연구학회는 오늘날의 한글학회로 이어졌죠. 가운데의 '익힘주글'는 '한글을 익힌 사람에게 주는 글'이니까 조선어강습원의 졸업장을 의미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선생 활동 내용. 헐버트 선생은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Korean alphabet scarcely has its equal in the world for simplicity and phonetic power)며 한글의 우수성을 서양에 널리 알렸죠. 헐버트 선생은 이같은 공로로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모셔졌습니다.
한글가온길 안내판
이야기를 잇는 한글가온길이라면서.... 스토리텔링... 프로젝트.. 도대체 누가 이런 문구를 생각하는지... 미쳐~
한글학회 입구의 한힌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학회는 1976년 준공된 아담한 건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조그만 건물신세를 면치 못해 안타깝네요.
100년 넘은 새문안교회. 7월까지 예배드리고 새건물을 짓는다고 하네요. 강북에 새문안 종교교회, 영락교회, 동대문교회(철거) 몇 안남았죠.
새문안교회와 금호아트홀 부근의 우리나라 최초 극장인 원각사가 있던 곳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표지판에 가려진 구세군회관 자리가 경희궁 정문 흥화문 정문자리입니다.
경희궁 정문 흥화문. 원래 위치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서울고등학교가 78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정주영의 현대그룹이 인수했는데 경희궁 복원으로 현대사옥은 계동 휘문고 자리로 옮겼죠.
궁궐 모습
경희궁 뒤 숲길입니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명품 숲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뒤에서 바라본 경희궁. 복원이 1/10도 안되었습니다.
성곡미술관 입구
쌍용그룹 창업자 성곡 김성곤. 성곡미술관은 김성곤 개인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임.
야외조각전시장.
서울지방경찰청. 70년대 뉴내자호텔이 있던 자리. 이 호텔에서 박정희의 여인들을 차에 태우고 궁정동 안가로 갔던 곳.
내자동 내수동은 경복궁 등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 납품하던 곳. 그래서 이름도 내자 내수이고 지금도 내자동 내수동으로 남았습니다.
감리교 대표교회. 배재학당의 산실입니다.
이 교회도 100년이 지나 신축한 건물입니다.
종교교회 뜻을 풀이한 명판입니다.
외교부 청사 앞 세종로소공원입니다.
한성전보총국, 요즘말로 하면 전화전신국이죠.
세종로공원에는 한글을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모든 글자 11,172자를 적은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죠.
세종문화회관 후원(예전 분수대광장)에 있는 김영식의 <서울의 미소> 작품. 하하하호호호 웃는 모습, 서울시민이 미래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글가온길 이야기 도보여행은 여기서 마칩니다.
* 단체 개인사진입니다.
함께 걸으신 분들
주시경 선생 동상과 함께한 토깽이님
민채님이 소개해서 새로오신 두분 회원님. 민채님 매우맑음님 행복바이러스님
찾아가는길님 에비앙님 토깽이님 씨밀레님
매우맑음님 민채님 행복바이러스님
경희궁 앞에서...
에비앙님이 찍어주신 한컷. 깃발 사진이 없다고 하셔서...
어둠에 잠겨가는 경희궁
에비앙님과 민채님 등이 준비한 과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다들 만족하셨나요~~ 감사합니다. 2주후 남산한옥마을-버티고개에서 뵙겠습니다.
첫댓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다녀오셨네요..
빠름 후기에 놀라고
짧은 걸음 속에 많은 이야기 담아주심에 또 놀랍니다.
즐거운 밤마실
살며시 구경 잘하고 갑니다~~^^
[시원한 바람]이 전하여준 밤의 매력속에
여유롭고 편안하게 도심의 길을 따라 문화와 역사의 길을 걸으며
함께 정겹게 나눈 대화들의 추억과 가족같은 분위기 행복했습니다.
한글가온길.우리말로 중심 이라는뜻도.어제 처음알았고 .한글보급에 앞장서 주신 주시경 선셍님의 별몀이 주보따리 인겄도..외국인 선교사 헐버트님이 한글 띠어쓰기에..애쓰신것도 새삼 많은분들께 고마운 날이었습니다~야간의 경희궁 숲길 정말 아름다웠습니다..낙화유수님~많은 것을 보고 느낀 유익한 밤이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새삼 우리말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말을지키신
주시경 선생님의 고초를 알게된 시간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난번 안산길도보후 다음길 기다린다고 해놓은 말이 실언이 됐습니다!!!
7시이후에 시간이 났습니다
아쉬움으로 님들 도보을 그려보며 마음달랬지요~
에비앙님 도 보고싶고 님들 보고싶기도하고 저녁되보의 참좋아하는프란이 어제 불참한 쓰라림이 큼니다~
낙화유수님 수고하셨습니다
어제의 행복을 오늘 사진으로 다시 확인 했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좋은 코스 선택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한 한글입니다.
감사한 서울입니다.
감사한 낙화님입니다.
경희궁 비밀의정원~ 친구들이랑 꼭 가볼랍니다. 넘좋았어요~^^
참으로 해박하십니다..국문학쪽이나 역사학쪽으로~
훌륭하신 글덕분에 역사공부 열심하고 나갈께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