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 지난 7월 말 개봉한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명량(울돌목)대첩을 그린 영화이다. 개봉 첫날부터 폭발적인 흥행을 이어가더니, 개봉 12일 만에 국내외 영화를 통틀어 최단기간 1천300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낳았다. 정유재란 때 대승한 명량해전(1597.9.16)이 결과라면, 그 해전을 원인인 초창기 김해전투(1592.4.20)에서 송빈 의병장이 왜적침입의 지연작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단숨에 전 국토가 점령됐을 것이다. 그의 전력과 전술에 왜적은 전력이 무능해졌고, 1년 1개월 만에 패전으로 전란은 끝났다. 또 왜적은 5년 5개월 3일 만에 장비를 가다듬어 재침하던 해전이 명랑대첩이었다.
김해도호부는 태종 13년(1413)에 설치됐고, 세조 5년(1459)에 김해진관을 설치했다. 이때 웅천과 완포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 칠원은 군사적으로 김해의 통제를 받게 됐다.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석성으로 문종 원년(1451)에 둘레 4천 418척, 높이 13척으로 기록돼 있다. 왜적이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700여 척의 내침했다. 4월 14일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장군이 전사하고, 다대포전투에서 윤흥신장군이 전사하고, 4월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송상현부사가 전사했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해에서는 대유학자 송빈(宋賓) 의병장이 부산 인근에 있는 김해부 산하의 유생들에게 격문을 보내 급히 김해성으로 집결하도록 독려했다.
이어 왜적은 4월 18일 다대포를 건너 죽도에 진출하고, 익일 19일 새벽부터 김해성 전투가 시작됐다. 김해성에서 이틀간이나 주야로 왜적과 맞대어 싸웠다. 이때 송빈 의병장은 지원병이 올 때까지 전술과 전략으로 왜적과 지연작전을 펴고 있는 데도 경상 우병사 조대곤은 대군을 거느리고도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왜적은 기괴한 왜병복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중으로 던지고, 괴상망측한 복색으로 교란책동을 감행하니, 열세의 병력과 무리한 전투로 극도로 지친 군사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고, 충천하던 사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저하됐다. 이를 본 초계군수 이유검은 전황이 매우 불리함을 느낀 나머지 성을 지키는 수문병을 죽이면서까지 서문을 열고 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사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북문을 열고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도망쳤다. 이을 듣고 경상감사 김수는 초계군수 이유검을 잡아 참수시켰고, 진주로 도망간 서예원을 삭탈관직시켰다.
김해성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이에 송빈 의병장은 성중의 장사들을 다 모아 충의를 떨쳐 맹서하기를 “김해는 적이 오는 길의 요충인데 안록산의 난리에 장순이 수양을 막아낸 것같이 해야 한다.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는 것이니, 마땅히 각자 忠을 다해 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어찌 적에게 항복하겠는가? 살아서 자손에게 부끄러움을 남기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자”하니 모두가 답하기를 “죽고살기를 오직 명령에 따르겠소”라고 했다. 그들은 송빈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주장으로 삼고 성과 함께 죽기로 맹서하며 독전하니, 모두 감격해 성중의 사기가 생사를 초월했다. 이런 와중에 송빈 의병장은 뛰어난 지략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4월 20일에 성이 함락되자 포의의 몸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송빈 의병장이 며칠간이라도 관군의 지원 없이 의병으로 사투를 했기에 왜적의 진로가 차단되고, 또한 지연 전술을 섰기에 의령의 곽재우 의병장에게 만방의 준비태세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선조 33년(1600)에 ‘송빈(宋賓)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한 바 있다. 이에 김해의 송빈 의병장이 전국 최초의 의병장이었음을 재조명하기 위해 학술적인 세미나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