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파 송기수(宋麒壽.1507∼1581)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태수(台叟), 호는 추파(楸坡). 순년(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원헌납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군수 세충(世忠)이다. 어머니는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열중하면서 선생이나 연장자와 교유하는 것을 즐겨 하였으며 諸子百家에 정통하였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1534년(중종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선생이나 연장자와 교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이며 간신인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모함에 걸려 물러나 있다가, 김안로 일당이 물러난 뒤 등용되었다.
1538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부임하고, 이어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승진했으며,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강원도어사로 나가 공채(公債)를 적발하여 조정에 간하기도 하였다.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1544년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다.
인종 때 우승지를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명종이 나이가 어려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도승지로서 이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사림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그에게 말하면서 “규암(圭庵 : 종형 麟壽의 호)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결국 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으로 지목받았다.
1546년(명종 1)에 호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이어서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550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형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잠시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였다. 1555년 이조참판으로 등용되고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했는데, 형조참판으로서 성절사 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동지중추부사(知同知中樞府事)·예조참판을 지내고, 1559년 명종의 특명으로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곧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 명종은 성년이 되면서 윤원형의 전횡을 싫어하여 사림의 인물을 뽑아 대간에 배치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사를 바로 하고,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 동안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윤원형이 제거되자 을사사화 이후에 죄를 입은 당대의 명사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어 좌참찬을 거쳐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67년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덕흥군(德興君)의 제3자인 하성군(河城君)으로 대통을 잇게 했는데, 이 일로 여러 대신들 사이에서 입승(入承 : 방계로 임금의 대를 잇는 것) 의절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 때 그가 경전에 의거하여 사군(嗣君)은 마땅히 오모백포(烏帽白袍)를 입고 소여(小輿)를 타고서 광화문 서협(西夾)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의절이 정해졌다.
이황(李滉)과 친숙했으며, 선조 초에는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문 구실도 많이 하였다. 1570년(선조 3) 이조판서를 다시 역임,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73년 좌참찬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4조(朝)를 섬기면서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했다고 하여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楸坡集≫이 있다.
참고문헌『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추파집(楸坡集)』
『상촌고(象村稿)』
『대동기문(大東奇聞)』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각종 석물 등 원형이 잘 보존된 묘역은 당시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묘제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특히 문인은 대전에서 확인된 것 중 최대 규모로 예술성 또한 뛰어나며, 상촌 신흠이 짖고 근곡 이관정이 쓴 神道碑와 묘표, 장명등 등 다른 석물들도 16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들로 조선시대 석조 예술품의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