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실을 찾기 위하여 종교를 믿고, 과학을 연구하고, 학문에 정진한다.
이러한 노력들 가운데서 무엇이 진실을 말해주는가?
과연 진리란 또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력사를 보면서 우리가 익힌 낱말의 풀이로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그 낱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우리는 "아리랑"을 노래하면서 "아리아리"라고 하면,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마음이 "아리는" 느낌에서 감정을 추스런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보면서 울먹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같은 소리로서 일본말이라고 하면 "아리아리"는 "아리아리또"와 같은 말이며, 그것은 "똑똑히""뚜렷이"라는 뜻의 말이다.
한국사람과 일본사람과의 사이에 같은 소리가 저녀 다른 뜻으로 인식하며 대화한다.
그러다면 같은 한국인이면서 "천지(天只)"는 어떻게 무슨 뜻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가장 쉬운 접근으로써 <고사성어사전>(학원사, 1977)에 보면, "부모(父母)를 이름"이라고 하면서 그 례를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를 들고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 찾아보았다. 륙당 최남선의 여러 내용을 들먹인 역주자 박성봉씨와 고경식씨의 번역문을 보았다.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며 몹시도 슬퍼하다가, 25년 후인 헌제 립안 4년 기묘(199)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158살이었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가시던 때보다 더했다."
[元君乃每歌鰥枕悲嘆良多隔二五歲以獻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阻落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若亡天只悲慟甚於后崩之日]
여기서 임금이 죽은 것이 허왕후가 죽은 것보다 더 슬픔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유가 "부모를 잃은 듯"이라고 번역된 것이 바로 "天只"이다.
번역된 말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왕후보다 더 슬픔을 나타낸 대상은 바로 "왕"이나, "천자/황제"여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천자"가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번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번역되어 있으면, 그렇게 해석해놓고나면, 그 뒤부터는 너나할 것없이 그렇게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례는 <시경(詩經)>용풍의 큰배[柏舟]에 나온다. 거기엔 "母也天只 不諒人只"가 있는데, "어머니여! 하늘이여! 어찌 나의 마음을 몰라주시나요."이다.
여기서 "天"은 "하늘"이요, "아버지"라고 한다. "只"는 댓구로서 뜻이 없는 조사다.
여기서 "하늘"의 뜻으로 보면, 다들 "어머니"로 해서가기보다는, 역시 "천자"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또 다른 뜻으로는 볼 수 없을까?
"天只"는 "天威咫尺"의 줄임말로 보자. 그것이 "天咫"이든, "天只"이든 말이다. 이것은 천자의 위엄이 가까이 있는 곳, 즉 "서울"이요, "경사(京師)"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요, "황도(皇都)"이다.
우리의 력사 속에서 "天只"는 얼마나 있을까?
<난중일기>에 수없이 나온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