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0. 1. 2.~3.(목,금)
- 음력(12. 8.~12. 9.), 일몰 17:27, 일출 07:45
●산행지: 호서정맥 3구간 (음성 금왕읍 무극리 월드사우나-천안 목천읍 응원리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산행코스: 월드사우나-굴암산-내송교차로-쌍봉초교-두리실고개-대야고개-마이산-수레티재-황색골산-거티고개-당목리고개-도솔산-바카프미산-걸미고개-좌벼울고개-바사리열두고개-3정맥분기점-칠장산-칠현산-공림정상-덕성산갈림-무티고개-사장골정상-무이산갈림-만디고개-고라니봉-옥정재-옥정봉-덕주봉(470봉)-장고개-배티고개-서운산-엽돈재-만뢰지맥분기점-부소산-부소문이고개-위례산-우물목고개-사리목고개-성거산-만일고개-영인지맥분기점-걸마고개-유왕골고개-도라지고개-태조산-아홉사리고개-유랑리고개-장고개-불대산-배넘어고개-취암산-경암산-장태산(구성산)-경부고속도로 굴다리(목천 응원리)
●먹거리: 생수1,000cc, 치즈크래커1, 롯샌샌드1, 크림빵4, 쏘시지2, 약밥1, 아몬드자유시간2, 미니자유시간5, 사탕
●준비물: 우모복, 쟈켓, 바람막이조끼, 충전지, 스틱, 헤드랜턴2, 비상용경광점멸등, 손수건, 버프, 비니, 구급약, 수면용안대, 장갑, 귀마개, 휴지, 물티슈, 부직반창고, 우의, 예비 양말, 옷, 팔토시, 핫팩1, 무릎보호대, 방수주머니, 매트
●거리: 약 84Km
●소요시간: 약 30.31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하행고속8,200, 떡볶기3,000, 택시4,260, gs25 3,400, 걸미고개6,000, 옥정재3,000, 상행버스6,900, 뒤풀이14,000
●날씨: -4~6도
●산행경과:
- 08:25 : 금왕 월드사우나, 1,000cc
- 10:17 : 내곡삼거리
- 12:20 : 대야리산
- 12:46 : 마이산 (472m) 1등삼각점
- 13:15 : 화봉육교
- 13:38 : 황색골산(도고리봉)
- 14:03 : 삼박골산 (356m)
- 14:48 : 당목리교차로 (국도)
- 15:09 : 도솔산 비로봉
- 15:30 : 바카프미산 (장수봉)
- 15:50~16:45 : 걸뫼고개 식사, 2,000cc
- 17:09 : 좌벼울고개
- 17:39 : 바사리열두고개
- 17:56 : 3정맥분기점
- 17:58 : 칠장산 (492.4m)
- 18:46 : 칠현산 (516.2m)
- 19:16 : 덕성산 (519m)
- 20:15 : 무티고개
- 20:57 : 무이산 (463m)
- 21:10 : 만디고개
- 21:57~22:20 : 옥정재
- 23:47 : 덕주봉 (철판 헬기장)
- 00:27 : 장고개
- 00:50~01:50 : 노박
- 02:01 : 두멍골 (골프장 부속건물)
- 02:46 : 배티고개 (카페)
- 03:47 : 서운산 (547.4m)
- 05:40 : 엽돈재 (34번 국도)
- 05:55 : 만뢰지맥분기점
- 06:17 : 부소산 (459m)
- 06:44 : 부소문이고개
- 07:53 : 위례산 (523m)
- 08:21 : 우물목고개
- 08:43 : 사리목고개
- 09:53 : 성거산 (573.3m)
- 10:13 : 만일고개, 만일사 1.1km
- 10:32 : 영인지맥분기점
- 10:35 : 갈마고개
- 10:56 : 유왕리고개
- 11:11 : 대머리봉
- 11:46 : 태조산 (421.5m)
- 12:15 : 흑성산갈림길, 아홉사리고개
- 13:02 : 장고개
- 13:44 : 취암산 (319.9m)
- 14:45 : 경부고속도 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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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정맥: 378.2km
* 한남금북정맥: 158km
* 금북정맥: 279km
* 금북기맥: 129km
* 호서기맥: 72km
* 3-1구간 월드사우나-돌고개 84km
- 금왕월드사우나~3정맥분기점 32.8km
- 3정맥분기봉~돌고개 51.2km
-. 3정맥분기봉~경부고속도 굴다리 48.1km
- 금왕월드사우나~수리티고개 20.6km
-. 금왕월드사우나~쌍봉초교 8.3km
-. 쌍봉초교~마이산 9.9km
-. 수리티고개~칠장산 12.34km
- 칠장산~엽돈재 26.6km
- 칠장산~덕성산 4.2km
- 옥정재~배티고개 8.3km
- 칠장산~옥정재 10.7km
- 칠장산~배티고개 19.2km
- 배티고개~엽돈재 7.4km
- 배티고개~우물목고개 14.5km
- 엽돈재~덕고개 35.5km
- 엽돈재~우물목고개 7.1km
- 엽돈재~성거산 9.4km
- 우물목고개~돌고개 17.5km
-. 우물목고개~유왕골고개 5.9km
- 성거산~태조산 5.3km
- 태조산~취암산 5.8km
- 취암산~고려산 8.4km
- 돌고개~덕고개 10.9km
※ 사전정보
- 우등산 금왕읍과 생극면 경계
- 마이산 (=망이산, 경기 안성 일죽면과 충북 음성 삼성면과 도계
- 수레티고개 (안성 일죽면과 음성 삼성면 연결 329번 지방도)
- 당목리고개 (안성시 죽산면과 진천 광혜원면 연결 17번 국도)
- 바카프미산 400m
- 3정맥분기점~칠장산 300m
- 덕성산 30m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과 충북 진천 광혜원면 도계)
- 무이산 150m (경기 안성 금광면과 충북 진천 광혜원면 도계)
- 옥정재 비닐하우스
- 404봉 삼면봉(진천군 이월면, 광혜원면, 안성시 금광면)
- 배티고개, 배티성지 (카페)
- 서운산 = 청룡산
- 엽돈재 (경기, 충북, 충남) 34번 국도
※ 식수조달 가능지역 :
- 내곡삼거리 GS25시
- 망이산성남문터 좌측 약수터
- 수레티고개 일죽방향 200m 식당
- 걸미고개 식당 (안성골프장)
- 두멍골 (골프장 부속시설)
- 서운산 정상 막걸리
- 우물목고개
- 유왕골고개 약수터 160m
-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응원리(원골마을) 식당, 굴다리 건너 들머리 동원시스템즈 수도, 자판기
- 전의산수련원 수위실앞 수도
※ 서울에서 금왕 월드사우나 가는길
* 서울 남부-무극 06:30, 1.30h, 8,200
* 동서울-무극 06:20, 1.40h, 8,200
무극터미널 건물을 서울사람이 경매로 낙찰받아 주상복합으로 건축허가를 냈으나 불허하는 과정에서 터미널갈등이 생겨났답니다. 금왕읍에서 소방서옆에 임시정류소를 만들었고, 저 다리를 건너 100m 직진하면 무극정류장이 있습니다.
※ 서울 오는길
- 엽돈재~진천터미널 택시 20,000
- 엽돈재~입장택시 12,000
- 목천읍 응원리~천안시외터미널 (부영아파트앞 버스 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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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한남금북정맥에서 호서정맥 3구간으로 바꿔 뜁니다. 원 산경표로 말하면 한남금북정맥을 3구간으로 마치고 금북정맥 1구간에 들지만 신 산경표로 말하면 호서정맥 3구간이 됩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를 재해석한 박성태선생의 신 산경표를 서로 비교분석하고 이해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호서정맥을 먼저 마치고 금북기맥과 한남정맥순으로 이어갈까 합니다.
충북을 서북진하던 한남금북정맥이 음성 금왕읍 대야리 망이산에서 경기 안성 일죽에 닿고 서쪽으로 틀어 칠장산에 닿습니다.
칠장산 3정맥분기점에서 두 줄기로 나뉘어져 한남정맥은 강화 문수산으로, 금북정맥은 태안반도 안흥진으로 항합니다.
오늘 다녀온 금북정맥은 경기도와 충북 도계를 따라 서남진, 경기도 안성 서운면, 충북 진천 백곡면, 충남 천안 입장면이 접하는 엽돈재까지 진행하여 이후 천안의 서북구와 동남구를 나누고 성거산 지나 걸뫼고개에서 목천으로 하향하며 비룡산에서 세종시 전의면과 만납니다.
이후 천안과 공주 경계를 타고 아산 봉수산까지 올랐다가 예산과의 경계를 타고 내려가 청양으로 움직이는군요.
정맥은 우리나라 10대 강을 나누고 모든 정맥은 수계를 나누는 강어귀에서 끝맺는다는 원칙에 따라 산경표의 태안반도 안흥진이 신산경표에서는 금강 하구언인 장항 용당나루로 향합니다.
날씨가 좋다길래 당겨 출발했건만 많이 내린 눈은 아닌데 예정에 없던 눈으로 등산화가 젖고, 야간에도 꾸준히 -3도를 유지하여 멈추면 신발이 얼고, 졸립고~ ㅋ
바람없는 둔덕에서 잠시 노박을 취하고, 자는둥 마는둥 일나자마자 옷입은 채로 스틱만 잡아들고 열이 오를 때까지 뛰다시피합니다. 몸에 열이 오르면 겉옷을 하나씩 벗어 배낭에 챙기며 땀이 나지않도록 온도를 조절했습니다. 다음 구간을 고려한다면 탄약창으로 정맥이 끊겨진 세종특별시 전의면 덕고개(돚고개)까지 가야했으나 신발은 젖고, 밧데리는 간당간당,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졸려서 하품나고, 뒤풀이 시간을 고려하여~ 아흐흐ㄱ~~ 눈물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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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북서쪽 끝에 있는 군으로 진천은 충청북도 중부에 위치한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는 농공병진이 함께하는 내륙도시로 반경 40km 내에 청주, 음성, 괴산, 안성, 천안등이 위치해 있다. '생거진천'이라는 유래에 따라 차령산맥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러 산악이 많고 동북부는 금강상류인 미호천이 광혜원면과 백곡면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광활한 평야가 흐르고 있어 비옥한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진천군은 고구려(高句麗)시대에 금물노군(今勿奴郡) 일명 만노군(萬弩郡) 혹(或) 이르기를 수지(首知) 신지(新知)라 하였으며 신라(新羅)때에는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치고 그 후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초에 이르러 강주(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고 성종(成宗)때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에 이르러 이를 파(罷)하였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와서 창의현(彰義縣)이라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가 원종(元宗) 때에 의령(義寧)이라 하고 군사(軍事)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때 와서 상산(常山)이라 고치고 그 후 진천 감무(監務)로 바꾸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 계사년(癸巳年)에 진천으로 개명, 현감을 두었다가 그 후 연산군(燕山君) 11년(1505) 을축년(乙丑年)에 일시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中宗) 초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 고종(高宗) 32년(1895) 5월 26일 칙령 98호로 현감을 두었던 것을 군수를 두게하였다.
광혜원면은 충청북도에 윗자락으로 경기도와 접경을 이루는 면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변방으로 화랑과 관련된 유적과 지명이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조선 성종(1469~1494) 때부터 충청도 지방과 수도 한양을 통하는 요충지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고 충청도 신·구관찰사 관인인수인계 장소로 광혜원을 설치한 이후 우리고장의 이름으로 불리어왔다.
주요역사인물로는 김유신(金庾信) [595~673] 충청북도 진천 출신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무신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진천읍 상계리에 있으며, 태령산에 장군의 태를 안치한 태실이 있다. 진천 김유신장군 탄생지와 태실이 1999년 6월 11일 국가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김유신장군은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진천군 길상사와 경주시 서악서원 등에 배향됨.
경기도 최남단에 있는 시로 동쪽은 이천시와 충청북도 음성군, 서쪽은 평택시, 남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충청북도 진천군,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1998년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시의 동부에 비봉산, 마이산, 덕성산, 칠현산 등의 줄기가 뻗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정미천과 산맥의 북부 산록지대를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이 도중에 한천을 합치고, 다시 황구지천, 청룡천 등과 합류해서 하천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인 기름진 안성평야를 형성, 농경문화가 발달해 왔고 삼남지방을 잇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이며,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였던 만큼 상권이 발달했다. 시청 소재지는 안성시 봉산동이다.
'안성맞춤'이라는 명사를 탄생시킨 안성유기와 쌀, 포도, 인삼, 배, 한우고기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그 밖에도 다양한 문화유적과 연중 문화예술행사가 열리는 예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그 뒤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로 불렸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16) 백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23) 안성현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9) 수주(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하였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하였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 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12)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1366년(공민왕15) 마전, 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조선시대 안성시는 고려 현종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하였는데 1399년(정종 1) 안성군 양양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陽智縣)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竹州)는 이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陰平)·연창(延昌)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洪彦秀, 일명 洪自修)와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 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때 축성한 서운산성(瑞雲山城)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남정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攻守進退)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福島正則]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覆蓋戰車隊)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邊以中)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895년 공주부 안성군, 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안성군, 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으로 하였으며, 1931년 읍내면을 안성면으로 개칭하고, 1937년 7월 1일 안성면이 안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용인군 고삼면이 편입되었고, 1983년 원곡면. 공도읍 일부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 되었으며, 1987년 보개면 양복리 일부가 금광면으로, 삼죽면 남풍리, 동평리, 가현리가 보개면으로 편입되었다.
대한민국 충청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천안시는 동쪽은 진천군과 청주시, 서쪽은 아산시, 남쪽은 세종특별자치시와 공주시, 북쪽은 경기도 안성시와 평택시에 접하고 있다. 1995년 천안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예로부터 서울과 전라도·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시청소재지는 서북구 불당동 번영로이다. 금북산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동부에는 덕유산(德裕山, 412m)·위례산(慰禮山, 524m)·국사봉(國師峰, 360m) 등이 솟아 있다. 서부에는 성거산(聖居山, 579m)·흑성산(黑城山, 519m), 남부에는 광덕산(廣德山, 699m)·망경산(望京山, 600m)·국사봉(國士峰, 403m)·쌍령산(雙嶺山, 415m) 등 험준한 산이 솟아 있고, 공주·논산으로 통하는 관문인 차령(車嶺)이 있다.
원삼국시대 천안지역은 해상교통로의 거점이었던 아산만과 수로를 통해 중부 내륙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통해 바닷길로의 접근이 쉽고,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육로상 길목이라는 유리한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상당한 위세를 가진 세력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이 지역에는 목지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백제가 주도권을 잡기까지 마한연맹체의 중심국가였으며 삼국시에는 백제의 주요 지방세력이었다. 천안지역에는 당시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청당동에 출토된 말모양 띠고리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원삼국시대 청당동유적은 금박유리구슬, 청동곡봉형대구 등 중국(군현)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출토유물을 통해 이러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후 백제에 편입된 천안지역의 위상은 화성리, 용원리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성리.용원리유적에서는 청자반구호, 흑유계수호 등의 중국제 자기류와 은상감.용봉문 환두대도, 관모장식,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백제 중앙이 지방 세력가에게 하사한 위세품으로 천안지역이 백제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천안지역은 마한의 중요국에서 백제의 중요지역으로 여전히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는 삼국시대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기로 대체로 1~3세기를 말한다. 이 무렵 낙랑과의 접촉을 통해 철기생산이 본격화됨에 따라 철제 무기류나 농공구류 등의 사용이 확대된다. 이에 다수의 세력집단이 출현하였고, 중부 이남에서는 삼한이라 일컬어졌던 소국들이 자리하였다. 천안지역에는 마한 소국의 맹주국인 목지국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고, 또 그에 상당하는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천안지역은 백제가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마한지역을 병합해 가는 과정에서 백제의 세력권내에 편입되었다. 이 무렵 화성리, 용원리유적 등의 분묘유적은 이러한 한성 백제와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성리유적에서는 위세품적 성격의 은상감 환두대도, 중국제 자기류 등은 백제 중앙의 하사품으로 중요지역 세력가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용원리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백제내에서 천안의 위치를 짐작케한다. 천안지역은 백제가 마한지역을 병합하는데 있어서 마한의 중심국으로써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한강유역이나 금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이후에도 중요한 방어상의 요지로 삼국시대 천안이 갖는 중요성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천안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관방유적(국경지역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관방유적은 대부분 산성유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천안지역에는 20여개소에 이르는 산성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위례산성, 사산성, 백석동 토성 등 많은 예가 있다. 대부분의 토성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천안지역이 한강이남 지역과 남부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관방이 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천안지역 산성분포도. 삼국시대 천안지역은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여러곳에 산성들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때까지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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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정맥 3구간 월드사우나-돌고개 80.64km
- 월드사우나-수리티고개 18.5km
- 수리티고개-칠장산 12.34km
- 칠장사-배티고개 19.2km
- 배티고개-우물목고개 14.1km
- 우물목고개-돌고개 16.5km
82번국도(월드사우나/146m) → (2.8km) → 583국도(주유소) → (1.0km) → 군부대철망 → (2.7km) → 쌍봉마을이정석 → (1.6km) → 사창고개(515번국도) → (0.9km) → 기술공제원 → (1.4km) → 형제고개(515번국도) → (1.8km) → 두리실고개 → (1.6km) → 덕호로차도 → (3.2km) → 마이산(馬耳山/471.9m)) → (1.5km) → 수리티고개(중부고속도로/182m) → (0.84km) → 황색골산(삼각점/352m) → (1.4km) → 삼박골산(356m) → (2.0km) → 당목리고개(176m) → (1.5km) → 도솔산(삼각점/280m) → (2.5km) → 걸미고개(180m)
걸미고개(180m)→(1.6km)→좌벼울고개(258m)→(2.5km)→칠장산(七長山/한남,금북정맥종주/492.4m)→(2.4㎞)→칠현산(七賢山/516m)→(1.8km)→덕성산(德城山/519m)→(1.7㎞)→454.6봉
454.6봉 → (2.3㎞) → 무이산(無夷山/463m) → (2.2㎞) → 옥정현(玉井峴/387번지방도/320m) → (3.5㎞) → 470.8봉(헬기장) → (2.8㎞) → 장고개(성대리/場고개/410m)
장고개(성대리/場고개/410m) → (1.3km) → 배티고개(梨峙/313지방도로/370m) → (2.3㎞) → 서운산(瑞雲山/548m) → (3.0㎞) → 395.4봉 → (1.7㎞)→ 엽돈재(34번국도)
엽돈재(34번국도)→(1.3㎞)→부소산(扶蘇山/459.1m)→(1.4㎞)→부수문이고개(57번 국도/275m)→(2.4㎞)→위례산(慰禮山/523m)→(2.2㎞)→우물목고개(320m)→(2.2㎞)→성거산(聖居山/579m)
성거산(聖居山/579m) → (1.7㎞) → 갈마고개(367m) → (2.0㎞) → 359.6봉 → (1.5㎞) → 태조봉(太祖峰/太祖山/422m) → (2.5㎞) → 유량리고개(275m) → (3.0㎞) → 취암산(鷲巖山/경암산/320m)
유량리고개(275m) → (3.0㎞) → 취암산(鷲巖山/경암산/320m) → (1.6㎞) → 응원리(應院里/21번국도/160m) → (0.5㎞) → 216.1봉 → (1.5㎞) → 돌고개(石峴/12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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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정맥 줄기가 월드온천수사우나 건물 뒤쪽의 산으로 내려오는 모양인데....
♤ 무극리(無極里)
본래 충주군 금목면(金目面)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반의리(班衣里)와 금곡리(金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무극리라 하여 금왕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가운데로 무극천이 흐르며 읍사무소 소재지로 금왕읍의 중심 역할을 한다.
1973년 7월 1일 금왕면이 금왕읍으로 승격되었다. 냇가 또는 벌판이 되므로 무기 또는 무극이 되었다. 일설에는 무극 지역이 금이 많이 매장되어서 나침판의 자침이 극(남극과 북극)을 나타내지 못하므로 극(極)이 없다는 의미로 무극이 되었다고도 한다. 문화 유적으로는 탑골에 석조약사불의상과 석조약사불좌상, 명승지로는 용담이 있다. 자연 마을로는 다리건너삼거리, 새말, 신농촌, 약방말, 바리미, 양달말, 숫돌고개 등이 있다. 주요 도로로는 국도 21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며, 읍사무소 앞에서 음성읍으로 연결된 국도 37호선이 있다. 이외에도 무극교를 지나 서쪽의 삼성면으로 연결된 도로와 대소면으로 지나는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금왕농공단지를 지나고, 쌍봉리를 지나 내곡삼거리 gs편의점에 들러 김밥에 우유 한잔 하고, 쌍봉초교로 가지않고 직진하여 높은산 언덕으로 오릅니다. 조금 더 가면 우등산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 또하나의 편의점이 보이더군요. 마이산에 닿기까지 반바지님이 설치한 표찰을 몇 개를 보았지만 글씨가 지워져 두리실고개, 대야리고개, 대야리산... 마음속으로 짐작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 마이산남문터 좌측 약수터
약수터를 들러 목을 축이고 계단을 따라 마이산으로 올라가도 됩니다. 마이산 정상석은 세개나 만들어 두었네요.
마이산을 등산하는 등산객을 두분이나 만나 인사를 건넸습니다. 엄청난 수확이네요.^^
♤ 마이산(馬耳山/471.9m)/ 삼면봉
마이산(馬耳山/472m)은 망이산(望夷山)으로도 불린다. 음성군 삼성면, 안성시 일죽면, 이천시 율면 경계에 있다. 1980년도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망이산성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터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 유물이 출토되었고 고구려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의 위급한 일을 전달하는 통신수단이던 봉수대 기록도 있다. 망이산성 봉수대는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합쳐지는 중요한 봉수대였다고 한다. 마이산은 진천 청주 연기를 지나 금강으로 가는 미호천의 발원지라고 알려졌다.
♤ 망이산성(望夷山城) 또는 마이산성(馬耳山城/471.9m)
경기 안성시 일죽면 금산리, 이천군 율면 산양리에 소재한 산성은 1993년 6월 3일 경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망이산성(望夷山城) 또는 마이산성(馬耳山城)이라고도 한다. 한남금북정맥의 한 줄기인 망이산(望夷山:472m, 마이산이라고도 함)에 축조된 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망이성 봉수가 기록되어 있다. 1977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처음 조사하였고, 2003년 4월 11일에는 충청북도가 망이산성 중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와 대사리 일대에 위치한 부분을 따로 분리하여 충북기념물 제128호로 지정하였다. 산성은 토축식(土築式)인 내성(內城)과 석축식(石築式)인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지는데, 봉수대가 있는 내성을 주성(主城)으로 본다. 산성 꼭대기에서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와 멀리는 진천군 일대의 평원이 내려다보이며 남쪽의 산세는 절벽으로 험준하고 북쪽은 낮은 평원이 전개되는 것을 보아, 남쪽의 적군을 대비하여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화봉육교로 내려서기 전....
수레티고개입니다.
마이산 서쪽 황색골산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 수레티 고개(182m/차현고개/車峴) /중부고속도로
경기 안성시 일죽면 화봉리와 충북 음성군 삼성면의 경계로 583번 도로가 지나는 다리로 중부고속도로를 넘는다. '수레티고개'라고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보리고개라고 부른다. 일명 車峴으로 불린다. 지방도 583번 도로가 중부고속도로를 뛰어 넘어 가로지르는 육교가 화봉육교이다. 車峴은 수레 車와 재 峴, 즉 수레가 넘나드는 재란 뜻이고 수레티는 순수한 우리말로 수레가 넘는 고개란 뜻이다.
고문서/기록들을 보면 車峴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정주시, 평양시 순안구역, 황해도 은율군, 漢城府 車峴大路, 충북 음성군, 충남 연기군, 경남 산청군이고 車嶺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초산군, 충남 천안군, 강원도 정선군이다. 그중 충북 음성군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고도 하며 한자로 표기하면 車峴고개)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지금도 차현고개 표식이 남아있으며 차현고개 주변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산성, 사찰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때부터 10여세까지 보냈다. 그런 연유로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고향으로서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왕건일파에게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기고 통합되어버린 궁예의 추종세력들은 크나큰 분노와 반감을 가졌고 궁예의 정치적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중심으로 임춘길, 이흔암, 선장형제 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왕건이 그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하였고 일부 세력은 후백제에 투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청주 위쪽 차현고개 아래의 진천은 고구려/백제 멸망에 앞장선 김유신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조금 더 오르면 죽림산 갈림길이 나오고.....
♤ 죽림산(351.7m) 갈림길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과 일죽면 용설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용설리는 용암과 설동의 이름을 따서 붙였고, 설동의 지형이 용의 혀처럼 생겼기 때문에 용설리(龍舌里)라 칭하였으나 1985년 완공된 용설저수지로 인해 수몰지역으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할것이다. 용설저수지를 중심으로 죽림산, 황색골산, 바카프미산, 남산이 반원형을 그리고 있다. 안성은 '맞춤유기'로도 유명하지만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에서 보듯 산이 깊고 대나무(竹)로도 유명하니 호랑이도 많았을 것이고 죽림산으로 어울린다.
♤ 황색골산(352.9m)
마이산 서쪽 음성군 삼성면과 안성시 이죽면 경계이며 도고리봉이라고도 한다. 이산 아래 '황세 골'이란 골짜기가 있어 황색골산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에는 삼성면 주변에 연탄처, 대조곡처, 상맥곡처, 하맥곡처 등의 처라는 천민부락이 설치된 소외지역이었다.
고개마다 돌탑을 쌓아놓은 사람의 사연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 저티고개(돌탑/243m)
음성군 삼성면 대사리 범말과 안성시 일죽면 용설리를 잇는 고개인데 성황당의 흔적인 듯한 돌탑이 있으며 '겨티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용설리의 설동은 느티나무(桂樹)가 많아 계터, 혹은 겨티라고 하며, 범말은 마을앞에 벌판이 있어 벌말이라 부른다고 한다.
장뇌삼재배지역이라는 경고문과 함께 가는 철선으로 울타리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 삼박골산(356m)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56m이다.
차랑이와 산박골에서는 호랑이를 실제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호랑이 눈빛이 얼마나 광채가 나는지 마치 보름달빛 같았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지나면 음성을 지나 썬밸리 골프장을 감싸고 있는 능선으로 완전하게 안성땅에 접어들게 된다.
♤ 당목리고개(176m)
좌측 음성군 당목리와 우측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龍舌里)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로 9번 지방도로이다. 당목리는 난리를 피하기 위해 더없이 좋은 피난고지(처)라 할 만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 많은 곳이다.
♤ 백운산(白雲山, 345.5m)과 주거리마을
칠장사 동쪽에서 경기도 안성 죽산면 당목리와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의 도계를 이루고 있는 백운산(白雲山)에는 서운산에서 그 이름이 바뀐 유래와 함께 '유월샘' 전설이 전한다. 심한 가뭄이 들어 먹을 물조차 없어 사람들이 우물가에서 유월 한 달 동안이라도 물이 나오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물이 솟아올라 해갈이 되었다. 그런데 칠월 초하루가 되니 우물물이 말라버렸다. 그 뒤로 매년 유월 초하루면 샘이 솟았다가 유월 말이 되면 물이 말라버려서 '유월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주거리마을은 새색시가 가마타고 시집오다 죽음을 당해서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주거리고개에서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당목 교차로, 산을 깍아내고 죽산면 두교리와 충북 진천을 연결하는 17번 국도가 뚫려 왼쪽편으로 내려가 터널을 통해 돌아가야 한다.
누가 왜 도솔산이라 했는지, 비로봉과 보현봉이라 했는지 연유를 알 수 없다는....
♤ 도솔산(삼각점/280m) 비로봉 & 보현봉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인 도솔천(兜率天)에 빗대어 산 이름을 명명한 것 같으나 뚜렷한 유래가 없어 추측할 따름이다. 육욕천의 넷째 하늘
비로자나란 '무한한 빛을 발하여 어둠을 좇는다'는 뜻으로 대광명의 화엄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보현보살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보살로 일체제불의 이법(理法), 실천을 대표하고 모든 불국토(佛國土)에 나타나 교화(敎化)를 맡는다고 한다.
♤ 바카프미산 (장수봉)
바카프미는 우리나라 산이름 족보에는 없는 이름이다. 어느 분 산행기에 바카스 좀 달라는 뜻으로 "바카스미"라고 한게 바카프미로 잘못 읽혔을 수도 있고... ㅋ 지금은 장수봉으로 불른단다.
걸미고개로 내려서기 전에 말소된 자동차를 고물로 찌그러트리는 마지막 단계 폐차장이 있다.
겨울이라 여기까지 오며 물은 600cc정도 소비했습니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르고 마이산 약수 한 모금 해서 그런지.... 골프장 정문 안쪽으로 보이는 정면의 산, 조금 걸어올라가 주차장에서 그 왼쪽으로 들머리가 있습니다.
♤ 걸미고개(안성컨츄리크럽입구/180m)
경기도 안성과 충청북도 진천이 갈라지는 도경계에 있으며, 안성컨트리클럽 진입로와 17번 도로가 만나는 곳이다. 안성컨트리클럽 주차장까지 오른쪽 위로 정맥 길이 동행한다. “걸미고개”는 장을 보러갈 때 짐을 걸머지고 다녔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농사가 잘 안되는 척박한 땅이라 주민들이 거지가 되다시피 했고 곡식조차 맛이 없어 “걸미”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긴 고개’ 혹은 ‘진 고개’라고도 했고, 채표노름을 많이 했던 곳이라서 ‘채팻골’, 비석이 있던 자리라고 해서 빗돌골, 4월 초팔일 날 음성에서 칠장사로 가는 사람들로 붐벼 큰 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 걸미고개 식당 (경미골 한식뷔페)
선배들의 산행기에 나오는 음식점 선녀와나무꾼은 없어졌습니다. 건너편에 '동해생선구이'집이 보이는데 걸신들린 고개이니 당근 뷔페로~^^ 생각보다 많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국시 한그륵, 음식 한접시에 추가로 치킨 두조각, 바나나 한조각... 대신 밧데리 충전하고 물도 보충하고 주인도 친절하게 연신 많이 드시라고 하고...
우측은 계속 골프장입니다.
♤ 좌벼울고개(258m)
죽산면 장계리와 칠장리를 잇는 고개이다. 남쪽능선에 있는 제비월산(칠장사)으로 이어진 고개이름이 이상하게 變音이 되어 좌벼울이라 불려진다고 한단다. 서너 그루의 소나무가 서있는 고개에 소나무 서낭이 있었고, 천계에는 내목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의 느티나무에서 주민들이 정월과 팔월 보름에 고사를 지냈고, 초당마을에서는 산제사를 지냈는데 일제시대를 지나며 없어졌다 한다. 지금은 우측에 안성 컨트리 골프장이 생겨서 넘을 수 없는 고개가 되었다.
여기까지도 우측에 골프장이 내려다 보입니다.
♤ 바사리 열두고개(320m)
칠장리에서 넘어오는 고개가 북전고개와 바사리고개인데 북전고개를 12고개 혹은 삐뚤이 고개라고 불렀다. 그만큼 구불구불했던 길인데 그래도 마차가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재공 등 많은 궁중 사람들과 선비들이 칠장사를 찾아 오가며, 넘나들었다는 바사리 열두 고개, 칠장사로 들어가는 제일 큰 고개로 고갯길이 갈“지(之)”자 형태로 열두 번 꾸부려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사리고개는 바(밧줄)을 사린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이다. 죽산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이 고개도 이제는 골프장에 가로막혀 더이상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까지 완전히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구릉지를 지나오며 얼굴에 자꾸 뭐가 묻는다 했더니 높은산에는 제법 싸래기눈이 흩날린 모양입니다.
♤ 칠장산 3정맥분기점(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금북정맥 분기점/452m)
♤ 금북정맥
산경표 분류로 칠현산 3정맥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천안 예산을 거쳐 서산을 들어가 태안반도 안흥에 가서 끝나는 정맥을 말한다.
헬기장에 있는 칠장산 정상석입니다. 정상 삼각점은 한남정맥길로 조금 더 가야 나온다네요.
♤ 칠장산(七長山/492.4m)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금광면·삼죽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기슭에 있는 칠장사와 칠장사 주변의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덕성산(519m)·칠현산(516.2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칠현산의 일부였으나 조선 후기에 세도가의 사유지가 되면서 독립된 산이 되었다.
♤ 칠장사 대웅전(七長寺 大雄殿)
칠장사는 칠현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고려 현종 5년(1014)에 혜소국사가 다시 지었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절이 불에 타 숙종 30년에 석규대사가 대웅전을 옮겼다. 영조 12년(1736)에 설영대사가 고쳤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으로 각 칸마다 2개의 공포를 설치했다.
칠장사는 유난히 도둑과 인연이 깊다. 임꺽정이 나라를 훔치는 데 실패한 도적이었다면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궁예는 나라의 절반은 훔친 도적쯤 되겠다. 궁예는 열살 때까지 여기서 활을 배웠다.
경부선이 들어앉은 20세기부터 역사의 외곽으로 밀렸지만 죽산은 장호원 음성 문경새재 문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가려면 여기를 통해야 했다.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고을은 번성했고 빈부의 양극화도 활발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한 건 한 뒤 한달음으로 달리면 반나절 만에 닿을 법한 거리에 칠장사가 있다. 잠깐 숨을 은신처로는 제격인 셈이다. 나한전에 봉안된 7인의 아라한 역시 본래 산적이었다. 사찰을 중수한 혜소(慧炤) 국사의 교화로 도를 깨쳤다. 스님은 고려 제9대 임금 덕종의 왕사(王師)였다. 어느 날 이들의 산채 인근인 칠장사에 스님이 부임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한 도둑들은 스님의 동정을 살필 요량으로 한 사람씩 뽑아 칠장사로 올려 보냈다. 절에 당도한 첩자들에게 염탐은 뒷전이었다. 약수터에 놓인 금바가지에 혹해 물을 마시는 척하고는 바가지를 훔쳐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빼돌린 바가지를 아지트에 갖다놓기만 하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도둑 중 한 사람이 이 일을 고백하니 나머지 여섯도 괴이한 현상에 관해 실토했다. 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패거리는 그 날로 머리를 깎고 국사의 제자가 됐다. 스님이 입적하자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한 7개의 돌만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후문이다. 칠장사(七長寺)와 칠현산(七賢山)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 칠장사 철당간
우리나라에 세개가 있는 철당간 지주로 사찰에서 부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각색 깃발을 게양하던 곳으로 대개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공주 갑사에 있는 것과 청주의 도청 용두사지에 있다. 칠장사 철당간 지주는 제조연대가 확실치 않아 유형 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산에서 칠현산으로 가는 도중에.... 칠장사로 내려가는 길도 두어 곳? 보이고....
칠장산에서 칠현산까지 약 2.4km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 칠현산(七賢山/516m)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죽산면에 있는 산으로, 높이 516m로, 산기슭에 칠장사가 있다. 고려 때 혜소국사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치게 했다 하여 칠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금광면과 죽산면에 걸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칠현산은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죽산군읍지』에는 "아미산(峨嵋山)은 남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칠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하여 칠현산의 다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칠현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혜소국사가 신라 때 창건된 칠장사라는 사찰에서 수도를 하던 중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도를 깨우치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기슭에는 칠장사(七長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칠장사의 현판 · 당간에는 '칠현산'이라는 산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葬龍仁)
옛날에 충북 진천에 살던 처녀가 경기도 용인으로 시집을 갔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다시 진천으로 돌아와 살다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고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장성한 용인의 아들이 자기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하고 진천의 아들도 자기가 모셔야 된다고 하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용인의 아들이 원님께 소장을 제출했다. 원님은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원님의 손자가 "할아버지, 무슨 고민 있으세요, 진지도 못 드시고." "네가 알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말씀해 보세요." 용인 아들, 진천 아들 이야기를 들은 손자가 "할아버지,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진천 아들이 모시고, 돌아가시면 용인 아들이 (제사를) 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님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래서 어머니 생전에는 진천 아들이 모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용인에 묘를 만들고 용인 아들이 잘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다. '살아서는 진천에 거하고, 사후에는 용인에 거한다'는 말이다.
바닥에 쌓인 눈이 신발에 척척 감겨옵니다.
가랑잎에 쌓여있는 눈을 계속 건드리고 가니 등산화에 달라붙네요.
음성군에서 세워둔 이정표를 바닥에 엎어버리고 진천군에서 아주 고급지고 야무지게 다시 만들어 세웠습니다. ㅋㅋㅋ
한밤중에 선 정상이지만 주변이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랄까~
지도를 보니 아랫동네 지명에 복지관 등이 보이니 군부대가 아닐까 짐작되고....
♤ 덕성산(德城山/521.8m) / 도계 삼면봉/
경기도 안성시의 동남쪽 칠현산 아래 위치한 산이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과 죽산면,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걸쳐 있다. 요순산(堯舜山)·무위산(無爲山)·무수산(無愁山)·국사봉(國寺峰) 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진천군 북서부의 서운산(瑞雲山:547m)·무제봉(武帝峰:574m)·옥녀봉(玉女峰:457m)·백석봉(白石峰:468m)·장군산(將軍山:436m)·만뢰산(萬賴山: 612m)과 함께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연봉을 이루고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속리산 천왕봉(天王峰:1,058m)에서 충청북도 북부 내륙을 동서로 가르며 안성 칠장산(七長山:492m)에 와서 멈춘다. 이 산은 북동쪽 칠현산(七賢山:516m), 칠장산보다 약간 높지만 능선이 서남으로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생대 말의 습곡산맥으로 화강 편마암이 깔린 구릉산지이다. 세 산의 종주는 9시간 가까이 걸린다.
덕성산 남쪽 계곡에 구암리(鳩岩里) 무술리[無愁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은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郞徒)들과 무예 등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연마하던 터이다.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兵武館) 마을이 있다. 또 산기슭 화랑벌의 화랑도 수련관 자리가 궁전터라 전해오고 있다.
진천의 옛이름은 상산(常山)인데 상산팔경의 3경인 금계완사(錦溪浣紗)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바뀔 때마다 신·구관이 인수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긴 곳으로 지금의 칠장천 일대라고 한다. 당시 과거 보러 가거나 안성장을 가려면 이 산의 무티고개라는 옥정리고개[玉井峴]나 사기막고개를 이용했다. 굴참나무·산벚나무·소나무 울창한 정상 부근에는 조릿대가 무성하다.
이 산에서 시작된 구암천이 남으로 흘러 미호천(美湖川)에 합류하고 17번국도가 진천읍으로 달리며 중부고속도로는 음성IC에서 5분 거리이다. 문화재로는 광혜원면 실원리 덕성산 동쪽 기슭에 조선 선조의 부마 홍우경(1590∼1625), 정인옹주의 묘소(충북기념물 78)가 있다.
좌측 저멀리 조명이 환한 동네가 진천군 광혜원면입니다. 우측 안성시 금광면은 상대적으로 불빛이 띄엄띄엄 시골스럽습니다. 덕성산에서 무이산까지는 약 4.6km로 1시간40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 무이산(無夷山/462.3m)
충청북도 진천군의 북부에 있는 산이다. 진천군과 안성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산 아래에 무술(또는 무수) 마을이 있다. 이 지명과 관련되는 내용이 수록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요순산'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 요순치(堯舜峙)가 기재된 위치로 추정하여 볼 때, 사료에 기재된 심곡산(深谷山)이 지금의 무이산일 가능성이 높다. 심곡산에 대한 기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북쪽으로 죽산(竹山)의 주걸령(周傑嶺)을 거쳐 구불구불 뻗어 와서 대문령(大門嶺)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서 백곡면 유곡점(楡谷店)에서 죽산현을 연결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고개의 동쪽에 무이산으로 추정되는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무이산은 오랑캐가 없는 섬, 혹은 속세의 번민을 잊는다고 하여 '무수산(無愁山)'이라 하였고, 산속에 있으면 중국의 요순시절 같이 편하다고 하여 '요순산(堯舜山)'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하기도 한다. 국어학계에서는 '무수산'이나 '무위산'은 '무술산'에서 변한 것으로 본다.
옥정재는 나오지 않고 터널로 드나드는 차량소음이 꽤나 시끄럽습니다.
고개에는 어김없이 누군가 이 곳을 지나던 수많은 옛 사람의 사연을 담아 돌을 쌓아 올렸습니다.
♤ 만디고개(평택 - 음성간 고속국도/424m)
경기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죽현리를 잇는 고개로 평택 - 제천간 40번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고라니봉에서 이제 내려서기만 하면 옥정재입니다.
마지막 급경사 절개지를 내려서면 임도로 떨어집니다. 지명대로라면 샘물이라도 있을법 한데....
아무도 없는 고개에 이동형 카페와 비닐하우스 그 뒤로 팬션건물이 올려다보입니다.
관리가 되지 않아 바람이 슝슝 드나드는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냉장고에 캔맥을 하나 따서 마시니 몸이 와들와들 떨리네요. 빨리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콜라 하나를 챙기고 3,000원을 탁자에 올려둡니다.
♤ 옥정현(玉井峴/387지방도로/320m) / 옥정고개
충청북도 진천군의 이월면 신계리와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387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옥정현은 안성시의 마을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 '근무치(小武峙)'로 나온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이곳에 '요순치(堯舜峙)'로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요순산(堯舜山)'은 인근 무이산의 이칭이다.
옥정재에서 1시간30분 왔습니다. 철판으로 조성된 헬기장입니다. 진행은 헬기장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우틀하여 떨어집니다.
배티고개 카페에 가면 깨끗한 화장실이라도 있지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졸려 장고개 지나 바람 반대쪽으로 둔덕에 매트를 깔고 몸을 기대 노박을 취합니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윗도리를 다 껴입고 아랫도리는 바지위에 방수주머니를 뒤집어 씁니다. 가까이에서 짐승의 숨소리도 들리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런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다만 낮은 온도가 걱정입니다. 숙면을 취하는게 아니다보니 피로가 풀린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 장고개(성대리/410m)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를 연결하는 고개인 장고개[場고개]는 장(場)과 고개로 나뉜다. 장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장고개는 ‘정기적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풀이된다. 장고개는 개미둑재로도 불리는데, 산이 높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뒤에 오는 사람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미둑재는 갬덕지고개로도 불린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장고개는 백곡면 성대리 두멍골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진 다락골 골짜기에 위치한다. 다락골은 본래 달골에서 변화된 어형으로 ‘높은 골짜기’를 뜻한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장고개도 비교적 높은 곳에 있었으나 과거 안성을 오갈 때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가 폐쇄되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고갯마루에는 장군이 죽어서 묻혔다는 전설이 전하는 서낭당도 있었다. 두멍골마을은 모니마을 북쪽에 있던 마을로 몇 가구가 살았는데 두멍컨트리클럽의 부지로 흡수되면서 폐동되었다.
알람소리에 잠이 깨자마자 스틱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몸에 열이 날때까지 뛰어야 합니다.
무박산행은 체력이 중요합니다.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얼어죽는 것이요, 속도가 나지 않으면 그만큼 지체되는 것입니다.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서니 잘 관리된 납골묘가 대여섯기 보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니 골프장 관리시설인지 똥개는 요란스레 짖어대고, 어디 물먹을 곳이라고 있을까 살펴보다가 그냥 떠납니다. 여기가 두멍골이라는군요.
골프장 입구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와도 되고 산길로 계속 이어가도 배티고기에 닿습니다. 한바퀴 휘~ 둘러보고 들머리를 찾아 가던 길을 갑니다. 들머리는 날머리와 마주보고 있고, 포장도로로 나왔다면 우측 금광면쪽으로 약간 이동해야 합니다.
♤ 배티고개(梨峙/313번 지방도/370m) / 대문령 / 에머슨CC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배티마을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상촌마을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현재 325번 지방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명은 대문령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택리지』에서 진천의 위치를 대문령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관아 서쪽 30리에 있으며, 심곡산에서 뻗어 나와 협탄령(脇呑嶺)으로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인근에 '백학령(白鶴岺)'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경기 안성계 월하동 30리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배티고개는 조선시대 반역의 뜻을 품은 신천영(申天永)의 무리와 북병사를 지낸 이순곤(李順坤)의 의병이 싸운 고개인데, 신천영이 패하자 그 고개를 ‘패한 고개’라 하여 패티[敗티]라 하였고, 음이 변하여 배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은 믿을 수 없고,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으로 여겨진다. 배티의 ‘배’를 이(梨)의 뜻으로 보고 한자화한 지명이 이티[梨티]이다. 전국적으로 배티 또는 배티가 전부 요소로 쓰인 지명이 더러 발견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배고개·뱃재와 함께 쓰인다. 따라서 배티나 배티고개는 ‘배나무가 있는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배티마을에 있는 배티고개도 마을 어귀에 돌배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배티나 이티에서 ‘티’는 고개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티 대신 재나 고개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고, 그에 따라 티의 뜻이 불분명해지자 유의어 고개를 중복하여 배티고개로 부른 것이다.
배티나 배티고개는 그 뜻은 같지만, 현재 배티는 마을 이름으로, 배티고개는 고개 이름으로 나누어 사용되고 있다.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있는 배티마을은 원래 아랫말·중간말·꼭대기말로 이루어졌으나 현재 중간말은 없어졌다. 배티마을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이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양백리 삼박골, 용덕리 용진골·정삼이골, 백곡면 명암리 발래기·명심이, 백곡면 사송리 지구머리, 이월면 신계리 새울, 진천읍 지암리 지장골, 문백면 구곡리 굴티 등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지금은 성역화하여 순례지가 되었다.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