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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남도 천안시와 충청북도 진천시의 만뢰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7년 09월 23일 (토요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흐리고 약간의 바람이 불었으나 여전히 무더웠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3도에서 영상 27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엽돈재(323미터 수준점, 34번 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부소산 1.26 Km와 만뢰산 9.77 Km 및 보탑사 11.22 Km, 서운산 4.8 Km)-만뢰지맥 분기점 이정표(만뢰산 9.96 Km와 보탑사 10.93 Km,
서운산 5.07 Km, 부소산 1 Km, 엽돈재 0.29 Km)-무명안부-355.3봉 이정판-365.6봉-373 무명봉-412.4 삼각점봉-435.3봉-월봉산(411.5봉) 종이코팅이정판-도상 싸리재고개-실질적인 싸리재고개-
392.7봉 이정판-무명안부-싸리재 안부-391 바위 무명봉-423 무명봉-북면산(맷돌봉, 478.6미터)과 작성단맥 분기점(개죽산 갈림삼거리, 479.1미터, 삼각점) 이정표(만뢰산 4.99 Km와 보탑사 5.33 Km,
엽돈재 5.89 Km와 서운산 10.04 Km, 개죽산 3.1 Km)-봉항3리 마을회관 갈림삼거리 이정표(정상 3.2 Km와 돌목이고개 0.6 Km 및 보탑사 4.68 Km, 엽돈재 6.54 Km, 봉항3리 마을회관 1.8 Km)-
무명묘지1기-무명묘지1기-돌목이고개 안부 이정표(정상 2.5 Km와 보탑사 4.02 Km, 삼개도 0.6 Km와 봉항3리 마을회관 2.5 Km 및 엽돈재 7.2 Km,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와 벤취 쉼터3-445.4봉-
급경사 내리막 등로-472.5봉 이정판-만뢰산 갈림삼거리(522미터, 만뢰산 119신고안내 제4지점) 이정표(만뢰산 정상 0.57 Km, 보련마을 2.35 Km와 보탑사 2.02 Km, 엽돈재 9.2 Km)-
만뢰산(611.7미터 정상석, 삼각점, 헬기장, 만뢰산 등산안내도) 이정표(만뢰산 정상 0.04 Km, 하수문 1.86 Km, 보련마을 2.88 Km와 보탑사 2.55 Km)-만뢰산 갈림삼거리 복귀-봉항3리 마을회관
갈림삼거리 이정표(보탑사 2.0 Km, 정상 0.6 Km, 봉항3리 마을회관 2.1 Km)-보련마을 갈림삼거리(만뢰산 119신고안내 제3지점) 이정표(보탑사 1.52 Km, 만뢰산 정상 1.07 Km, 보련마을 1.85 Km)-
보탑사 갈림삼거리 이정표(보탑사 1.02 Km, 보탑사 1.3 Km, 만뢰산 정상 1.57 Km)-489.7봉 이정판-만뢰산 119신고안내 제2지점 이정표(멱수 7.58 Km, 보탑사 0.85 Km, 만뢰산 정상 2.02 Km)-
무명묘지1-보탑사 갈림삼거리 이정표(멱수 7.1 Km, 만뢰산 정상 2.5 Km, 보탑사 0.71 Km)-425.1봉 이정판-무명안부-녹슨 철사줄-이정표(멱수 6.09 Km, 만뢰산 정상 3.5 Km와 보탑사 1.72 Km)-
482.8봉 삼각점-462 길주의 지점-무명안부-길주의 등로-392미터 안부-447 무명봉-500 무명봉-남산봉(504.7미터)과 504.7봉 삼각점 이정표(멱수 3.86 Km, 만뢰산 정상 5.74 Km와 보탑사 3.95 Km)-
185 송전탑-지독한 잡목과 사초나무지대-으름나무 지대-비포장 임도-배성고개(비포장 임도 갈림삼거리)-전주이공묘지-묵묘1-14번 송전탑-몽각단맥 분기점(14번 송전탑)-무명묘지1-322.3봉-
전주최공묘지들-비포장 임도-장고개 이정판(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304 웅덩이 무명봉-장교현(21번 4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큰 고도 차이 없이 고속도로 같은 나즈막한 만뢰지맥 산줄기를 따라 빠르게 진행하여 18:00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만뢰지맥 약 17.70 Km (만뢰지맥 분기점에서 장교현까지)
접속구간 약 00.30 Km (엽돈재-만뢰지맥 분기점까지)
산행트랙 : 20170923 만뢰지맥 제1구간 엽돈재-장교현.gpx
산행시간 : 약간의 바람이 불고 흐린 날씨에 빠르게 진행하여 6시간 02분 (07시 37분에서 13시 40분까지)
교통편 : 갈때 - 애마로 엽돈재 간이 주차장까지 이동
올때 - 옆지지의 도움으로 정교현에서 곧바로 애마 회수 후 청주로 이동
만뢰지맥이란 ???
만뢰지맥은 금북정맥의 서운산에서 남쪽으로 5.1 Km 떨어진 엽돈재(34번국도) 남쪽 200 미터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면서 만뢰산( 612.2 미터, 일부 지도엔 만근산으로 표기), 덕유산(412 미터), 환희산(402.2 미터), 취령산(또는 목령산, 229.1 미터)을 일구고 취령산(목령산)에서 방향을 바꿔 서남진하며 다시 상봉산(196 미터), 국사봉(171 미터)을 일구고 경부고속도로를 건넌후 마지막으로 응봉산(175.4 미터)을 들어 올린후 청주시를 바라보며 미호천에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9.5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를 지나는 산들중 제일 높은 산인 만뢰산의 이름을 따서 만뢰지맥이라고 박성태님이 신 산경표에서 표기하고 있다.
지나는 산들은 만뢰산(612.2 미터), 덕유산(412 미터), 환희산(402.3 미터), 목령산(혹은 취령산, 229.1 미터), 상봉산(196 미터), 국사봉(171 미터), 응봉산(175.4 미터)들이다.
가족 모임에 가기 전 잠시 시간을 내 새롭게 올랐던 만뢰지맥에서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원래 계획은 오늘 밤에 무박2일 일정으로 산악회를 따라 보현지맥 제5구간인 한티재에서 평팔재까지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한북정맥 상 새롭게 추가된 4개의 지맥중 한 곳을 선정해 무리가 되지 않는 거리를 다녀와야 되는데 오랫만에 가족들과 충북 청주에서 모임이 있기에 모든 계획을 수정하여 평일인 엊그제 보현지맥 산행을 무탈하게 마치고 올라 왔다.
그리고 오늘 충북 청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일찍 내려가 봐야 이슬이와 친구만 할 것 같아 청주의 예약된 펜션에서 가장 가까운 지맥 하나를 확인하다 보니 진천의 만뢰지맥이 보이고 그 만뢰지맥 산행을 위해 새벽같이 일찍 준비하여 집을 나서 본다.
오늘 산행 들머리인 엽돈재는 충남 천안과 충북 진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2010년 여름에 금북정맥 산행을 위해 들렸던 기억이 있기에 오늘 다시 방문을 하게되면 만 7년이 지나 다시 들리게 되는 곳이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고갯마루 정상에 오르면 빛 바랜 기억으로 그 엽돈재를 추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하면서 옆지기와 함께 천천히 올라 본다.
엽돈재에 도착을 하니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 나고 잠시 옛 추억을 생각하며 남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금북정맥을 타고 잠시 오르니 금새 만뢰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 분기점에는 각기 다른 세개의 분기점 이정판이 붙어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고속도로 같은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각 봉우리마다 선답자들이 정확한 이정판들을 설치해 놔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각 봉우리마다 포인트를 지정하며 걸어가니 금새 논산의 바랑산님이 이정판을 달아 놓은 392.7미터 봉우리를 넘어 등로 좌측으로 벌목지대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대문리 마을 뒷편으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만뢰지맥 상 445와 462봉우리가 보이고 그 좌측 끝자락에 이 산줄기의 이름을 낳게 한 만뢰산이 어머니 품같이 넉넉한 모습으로 반겨주고 있다.
생각보다 잘 정비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니 약한 바람이 불어 와 산행하기는 좋은 조건이지만 아직도 무더위가 남아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ㅇ혼 몸을 흥건히 적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뢰산 갈림삼거리 옆에 배낭을 숨겨 놓고 스틱과 카메라 그리고 모바일폰만 들고 등로 좌측의 만뢰산으로 향하니 지금까지 조용하던 등로에 약간의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인사 나누며 오르다 보니 금새 넓은 헬기장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만뢰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오를 때 약간의 안개로 인해 조망은 전혀 기대도 못했는데 고도를 높이니 안개가 사라지며 제한된 거리의 조망과 풍경을 살펴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약간은 막히는 도로를 타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엽돈재에 도착을 하니 약간의 박무가 끼어 있어 아쉽지만 산행하기에는 좋은 조건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 준비를 해 본다.
애마를 옆지기에게 맡기고 산행 준비를 하다 보니 조금씩 7년 전 이곳을 지나칠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데 그날도 홀로 오르며 무척 무더위를 느끼며 힘들게 도로를 건너 올랐다는 기억이다.
엽돈재(323미터, 34번 2차선 포장도로)는 충청북도 진천군의 백곡면 갈월리와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 및 안성시 서운면 도림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현재 34번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안성에 사는 홍계남이 의병 수천 명을 모아 왜군과 접전하여 승전한 곳으로 엽둔재 인근에는 홍계남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남아 있다.
1872년지방지도의 직산편에 진천과 경계부에 청룡산과 함께 엽돈치가 나타나는데 고개가 높고 험해서 옛날에는 도둑이 많았으며 엽전을 가지고 이 고개를 넘는 사람은 모두 도둑에게 털리었으므로 엽돈재라 부르게 되었고 변하여 엽둔재, 율둔티, 엽전티 등으로도 불렀다.
고개 아래 보덕원이라는 원 마을이 있어서 이 고개를 넘는 행인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조선 시대에는 협탄령으로 불렸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협탄소에 있으니 직산현 경계이다 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서쪽 38리에 있으며 대문령에서 뻗어 와서 한 줄기는 길상산이 되고 한 줄기는 보련산이 되었다 라는 기사 내용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지명과 함께 직산계 청룡동 38리라는 주기가 있고 협탄은 이곳에 협탄원이라는 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며 여지도서에 협탄원에 대해 관아의 서쪽 24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라는 기록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차량 통행에 주의하며 주위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산행 들머리로 가니 그 앞에는 수준점이 박혀있고 그 뒷쪽으로 생거진천이라는 커다란 이정석과 이정표 그리고 진천군 백곡면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서 있다.
약간의 이슬이 풀섶에 내려 앉아 있는 잡풀을 헤치며 산행 들머리로 들어가니 등로는 생각보다 잘 정리되어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잠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수로 같은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을 통해 조금 더 오르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오늘 아침에 올라 온 34번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도로를 따라 천안시 입장면 마을이 박무속에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입장면 마을 뒷쪽으로는 성환이 살짝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평택의 마을이라 생각되는 마을들도 보이지만 거리가 멀고 박무가 끼어 있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입장면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 속하는 법정면으로서 1872년 제작된 안성군 고지도와 일제가 만든 조선 지지 자료에는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으로 표시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안성군의 일부 지역이 천안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직산현 삼동면과 이동면 지역의 삼곡리, 오목동, 모곶리, 신전리를 제외한 지역을 합하여 명칭을 새롭게 바꿔서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으로 하였다.
조선 시대에 직산현 이동면과 삼동면 지역으로 이동면 사장동, 기로촌, 상장리, 하장리, 홍천동, 동계리, 효아촌, 구덕리, 신대리, 양대리, 복덕리의 15개 리와 삼동면 하리, 연봉리, 우지곡리, 산정리, 차중리, 흑암리, 차상리, 토산리, 가좌동, 용두리, 강당리, 적정리, 신두리, 독정리, 발림리, 도랑리, 가련리의 17개 리를 관할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안성군 입장면 신흥리 일부와 간곡면 구정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안성군 입장면의 지명을 한자만 새로 바꿔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으로 하였고 도하리, 연곡리, 산정리, 흑암리, 가산리, 용정리, 신두리, 독정리, 도림리, 유리, 기로리, 상장리, 홍천리, 하장리, 효계리, 신덕리, 양대리, 시장리, 호당리 등 1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63년에는 천안읍이 환성면과 함께 천안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이 천원군이 될 때 천원군 입장면이 되었고 1989년 1월 1일 천안군 조례1084호에 의해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시켜 1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천원군이 천안군으로 명칭을 변경함에 따라 천안군 입장면이 되었고 1995년 5월 10일 천안시와 천안군의 통합에 의하여 천안시 입장면이 되었으며 2008년 6월 23일 행정구 설치에 따라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이 되었다.
부소산과 위례산을 중심으로 성산성과 거산성이 좌우로 우뚝 솟아 양대리, 호당리의 위례산성, 한림봉의 서북 지맥이 안성천의 상류 입장천, 청룡천과 만나는 곳에 입장면이 자리하며 완만한 구릉과 평야 지대이다.
양대리 국사봉 아래에 일제 강점기 때 중앙 광산이 있었으며 많은 양의 사금과 석금이 채취되었다.
넓고 비옥한 토지는 일제의 곡물 수탈로 이어져 입장면을 관통하는 천안과 안성을 연결하는 안성선 철도가 1919년 착공하여 1925년 준공되었으나 안성선은 1989년 철거되어 폐선되었다.
예전 직산현 이동장이 섰던 날은 매 4일과 9일이면 지금도 장이 열리고 1993년 시작된 입장 거봉 포도 축제가 매년 9월 20일 전후에 열린다.
포도의 여왕 거봉 포도라는 주제로 입장 초등학교 일원에서 행사가 진행되며 인기 연예인과 유명 가수, 천안시립 예술단과 풍물단의 공연, 거봉 포도 가요제 등이 열려 지역 주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울린다.
포도주, 포도 식초, 연미주, 표고버섯, 선인장 등 농특산물이 전시 판매되고 입장의 거봉 포도는 전국 최고의 당도와 맛을 자랑하며 전국 최대의 생산지인 입장면 일대 거봉 포도 마을은 천안 12경으로 선정되었다.
늘 지나다니기만 했던 입장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료를 찾아 공부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등로 우측으로 입장과 성환읍 그리고 평택쪽 조망을 살펴보고 오르니 금새 만뢰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 분기점에는 각기 다른 이정판 3개가 걸려 있어 조금은 어수선해 보인다.
우측으로 가면 금북정맥의 부소산과 성거산으로 가는 방향이고 오늘 이산객이 걸어야 할 만뢰지맥 마루금은 좌측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 중요한 갈림삼거리 지점이다.
그 분기점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보니 방금 전 산행을 시작한 엽돈재까지는 290미터이고 진행 방향으로 만뢰산까지는 약 9.96 Km로서 약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추측이다.
잠ㅎ시 주위를 둘러보며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곧바로 만뢰지맥 분기점을 출발해 또 새로운 산줄기 탐사에 나서는 순간이다.
분기점에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에는 벌써 낙엽이 떨어져 쌓이기 시작하고 푸르던 잎사귀들은 약간 생기를 잃고 누렇게 변해가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큰 바위들도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니 낙엽이 깔린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른다.
생각보다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첫번째 봉우리인 355.3봉에 도착을 하는데 맨발님이 이정판을 설치해 정확한 위치 파악에 상당한 도움을 받는다.
첫번째 봉우리인 355.3봉을 지나 평이하게 이어지는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이미 중천으로 떠 오른 햇살이 안개를 뚫고 활엽수 사이로 들어오며 아름다운 빛내림을 선사하고 있다.
그 황홀한 빛내림을 즐기며 진행하니 나즈막한 봉우리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지도산 365.6봉인데 이 봉우리에는 아무 표식도 없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계속 이어지는 큰 높낮이가 없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373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이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여 이어지고 있다.
커다란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는 373 무명봉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무명 안부를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연결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룩스 맵을 잘못 이해를 해 배낭을 풀섶에 숨기고 잠시 365.6봉 방향으로 되돌아 갔다가 올라오는 황당한 일이 벌어져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어 간다.
다시 배낭 찾아 둘러메고 오르니 412.4미터라는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는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추억 하나 더 만들어 본다.
특별하게 높은 산도 없고 특이한 볼거리도 없는 만뢰지맥 산줄기이기에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만뢰산을 오르는 산님들이 많은지 등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삼각점봉을 지나면서도 등로는 여전히 고속도로 수준에 큰 고도 차이도 없으니 발걸음만 덩달아 빨라지고 있다.
아마도 산행 후 청주로 이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마음도 그렇게 빠쁘게 작용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정도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나즈막한 봉우리가 올려다 보이는데 등로는 우측 사면 등로로 나 있는 곳에 도착을 해 잠시 좌측 봉우리로 오르니 이곳 정상이 바로 435.3미터 봉으로서 많은 산님들이 우측 우회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였는지 잡목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사진 한장 남기기도 어려운 정상부가 되어 있다.
그래도 그 435.3봉 정상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 잡목 등로를 헤치고 잠시 내려오니 커다란 활엽수에 이곳을 월봉산이라 적은 종이코팅지가 걸려있는데 살펴보니 어느 산악회에서 걸어 놓은 것으로 독립운동 기념산길 50 Km 코스에 포함된 정상처럼 보이는데 월봉산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천안시에도 월봉산이 있기는 한데 이곳이 아닌 성환쪽 월봉산을 가리키는 산으로 이곳 월봉산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해 더욱 궁금하기만 한데 이곳은 산이 달을 닮아 월봉산인지 아니면 달이 또는 산이라 월봉이 되었는지도 궁금하기만 한 시간이다.
월봉산이라 종이코팅지를 지나 잡목을 헤치고 잠시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고속도로 같은 등로를 만나 편안하게 진행이 된다.
거대한 활엽수들이 등로 옆에 자라고 있는 멋진 마루금을 따르니 등로 좌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박무속에 높아 보이는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직까지는 정확히 어떤 산줄기인지 분간이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좌측 조망을 살펴보며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지도 상 싸리재고개인데 지형상으로는 전혀 고갯마루처럼 보이지 않는 능선상의 지점으로 그곳에는 커다란 활엽수들이 일렬로 줄지어 늘어 서 있어 멋진 등로를 만들고 있다.
지도 상 싸리재고개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위에는 다시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쌓이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다시 무명 안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이곳 또한 안부같지 않은 안부에 등로 좌우측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 하나 없는 실질적인 싸리재ㅔ고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 싸리재고개는 충청남도 천안시 남동구 북면 대평리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산이 높고 깊어서 싸리가 고복같이 즐비하게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그리 높지도 않고 아무리 살펴봐도 싸리는 없어 고갯마루 이름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도 가져 보는 시간이다.
평이한 능선으로 보이는 싸리제고개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이제 등로에는 소나무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만하게 오르니 정상에 웅덩이가 보이는 392.7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추억을 남긴 후 주위를 살펴보니 이곳도 역시 6.25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였는지 가끔 이런 커다란 웅덩이들이 보이고 있다.
이제 활엽수가 자라고 있는 곳에는 제법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쌓이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시키고 있다.
웅덩이가 있는 392.7봉을 넘어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된 장소가 나타나는데 눈 앞으로는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싸리재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야 할 개죽산 갈림삼거리인 478.6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고 그 좌측 저 멀리에는 만뢰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산줄기도 한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아직도 약간의 박무가 남아 있어 조망이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새벽에 만났던 짙은 안개에 비하면 큰 아쉬움은 날려주는 풍경이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지대가 드넓게 드러나고 그 아래 대문리에 인삼밭이라 생각되는 푸른 지붕이 내려다 보이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 인삼밭이라 생각되는 곳 넘어 위로는 만뢰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어 한동안 그 풍경을 가슴속에 남기며 걸어 내려가니 무명 안부를 지나 곧바로 좌우측으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싸리재 안부에 도착을 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새텟말마을과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대평리 대산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싸리재는 싸리고개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널리 쓰이는 지명으로 싸리와 재로 나뉜다.
싸리는 몇 가지로 달리 풀이되는데 첫째로 싸리나무로 보는 견해로서 그렇다면 싸리재는 싸리나무가 많은 고개로 풀이된다.
둘째로 사리의 된소리 어형으로 보는 견해로서 여기서 사리는 먼저 수리와 관련되며 수리는 봉우리를 뜻하는 말로 백제어 술과 수리 및 수니로 소급되며 중세 국어에서는 수늙(령)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술은 후부 요소 뿐만 아니라 전부 요소로도 사용되고 술 외에도 수레, 수리, 수, 사리 등으로 나타나 봉우리나 높다로 해석된다.
따라서 싸리재나 사리재는 높은 고개로 풀이될 수 있으며 다른 면에서 사리는 살과 관련될 수도 있는데 살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싸리재나 사리재는 화살처럼 가늘고 긴 고개로 풀이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싸리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싸리나무가 많은 고개 또는 사리재의 변화형으로 보아 높은 고개나 화살처럼 가늘고 긴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싸리 고개로 나오고 축현이라는 한자 지명이 대응되어 있다.
싸리재는 산이 높고 깊어서 비탈이 매우 심한 고개로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40여년 전까지도 충청남도 천안시의 입장장을 보러 다닐 때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이다.
이제는 입장장을 보러 싸리재를 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만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대평리에 처가를 둔 사람이나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들이 버스 시간이 맞지 않을 때 가끔씩 이용할 뿐이다.
예날 이곳으로 드나들었던 민초들을 생각하며 다시 싸리재를 통과한 후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싸리재를 지나 잠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바위지대를 지나는데 커다란 참나무 한그루가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391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 참나무를 보는 순간 인생의 고달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그래도 그 척박한 환경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고 이토록 거대하게 자라고 있는 활엽수 한그루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앞으로도 더욱 위풍당당하게 자라고 있기를 빌어주며 출발해 본다.
바위지대를 지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무명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올라 본다.
그렇게 잠시 걸어 오르니 선답자의 띠지 한장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423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제 개죽산 갈림삼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에 평이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해 본다.
조금은 빠르게 걸어 오르니 금새 개죽산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어느 산악회에서 478.6미터의 북면산 맷돌봉이란 종이코팅지를 붙여 놔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이곳 정상은 또한 개죽산 갈림삼거리로서 우측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르면 3.1 Km 거리에 개죽산이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삼각점도 보이는데 삼각점은 낡아 글씨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북면산의 높이는 478.6미터와는 달리 준.희님 이정판에는 479.1미터로 표기가 되어 있어 조금은 헷깔리기도 하다.
또한 개죽산 방향으로는 작성단맥이라는 이정판도 보이는데 아마도 길이가 30 Km 미만의 짧은 산줄기가 이곳에서 분기되어 개죽산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찾아보니 금북정맥에서 분기하는 만뢰지맥1구간 돌목이고개 위에서 분기하는 작성단맥은 천안을 병풍처럼 휘감고있는 산줄기로 개죽산, 봉암산, 작성산, 은석산, 상봉산으로 연결되는 약 10 여 Km 길이의 산줄기이다.
이 작성단맥을 찾는 사람은 산줄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찾지 않기에 인적이 드물고 고즈넉한 산줄기 이지만 최근에는 천안 인근의 산꾼들이 가끔 오르는 산줄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또한 맥 잇기 열풍이 불면서 조금씩 더 알려지고 있는 산줄기 중의 하나이다.
아직 마답지로 남아 있는 개죽산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여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작성단맥이란 이름으로 한번쯤 거ㅏㄹ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리와 봉항리의 경계에 있는 개죽산은 해발고도가 452.6미터로 천안 시가지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위례산(523미터), 성거산(573미터), 태조산(252미터), 흑성산(504미터)가 있고 북쪽으로는 서운산(538미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은석산(457미터)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만뢰산(612미터)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서운산과 만뢰산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충청북도 진천군의 경계를 구성하는 연속적인 산지로서 개죽산은 이들 산지에서 남서 방향으로 분기하는 산지에 위치한다.
개죽산의 명칭에 대한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개죽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데 개죽나무는 가죽나무의 충청남도 방언으로 새순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개죽산 일대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서산층군 경기 변성암 복합체에 해당하는 호상 흑운모 편마암과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 매입암류 화강암에 해당 하는 복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개죽산이 위치한 지역은 호상 흑운모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개죽산이 아주 오래된 암석으로 구성된 산지임을 알려준다.
개죽산의 동쪽과 서쪽에는 넓은 곡저가 발달하여 있으며 이는 제4기 충적층에 해당한다.
동쪽의 곡저에는 안산(395미터)의 남서측 산비탈에서 병천천이 발원하여 남서 방향으로 흐르고 서쪽의 곡저에서는 만뢰산의 서측 산비탈에서 광기천이 발원하여 마찬가지로 남서 방향으로 흘러 탑원리 일대에서 병천천 본류에 유입된다.
개죽산의 토양 특성은 인셉티솔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산기슭에 국지적으로 알피솔과 엔티솔이 분포하고 있다.
개죽산에는 역사적인 유적 및 유물이 전해오지 않는다.
산의 북측 산기슭에는 에스원 천안 연수원이 위치하고 남동측 산기슭에는 풍산공원묘원이 위치하는데 이는 개죽산이 천안 도심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지가 및 교통의 접근성 측면에서 위락 시설이 입지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또한 서쪽 곡저에 해당하는 지역의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와 전곡리에는 냉동 창고, 자원 재활용 관련 시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역시 도심과의 지리적 고립, 지가 및 교통의 접근성 측면에서 이점이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개죽산의 동쪽과 서쪽 곡저에는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동쪽)와 오곡리(서쪽)가 입지하고 있으며 농업용수의 공급을 위해 동측 산기슭에 삼성 소류지가 조성되어 있다. 개죽산의 서쪽 곡저에는 국도 5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이렇게 만뢰지맥 산행을 하면서 다시 작성단맥이라는 산줄기 하나를 더 알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맥 잇기 산행에 올인하다 보니 자꾸만 이런 산줄기만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 개죽산 갈림삼거리이자 작성단맥 분기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출발하니 약간의 잡목들이 등로에 보이지만 크게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다.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금새 등로 우측으로 봉항3리 마을회관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만나 잠시 봉항리를 생각해 본다.
봉항리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있는 리로서 만뢰산과 개죽산 사이의 좁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인데 작은 두 하천이 흐른다.
소근리, 삼성리, 석항리와 봉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과 석항의 이름을 따서 봉항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돌모리, 삼성, 서근바미마을 등이 있는데 돌모기마을은 봉항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기라 하였고 삼성마을은 돌모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효자가 있어 부모 산소에 매일 세 번씩 성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근바미마을은 삼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밤이 잘 되는데 예전에 밤 한 개가 매우 커 세 근이 나갔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앞으로도 몇번인가 더 만나야 할 봉항리 갈림삼거리 이정표이기에 이렇게 봉황리 마을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본다.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고 있다.
등로는 여전히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특이할 만한 내용이 없으니 발걸음만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니 잔디가 죽어 분봉이 붉게 드러나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는데 오늘도 역시 장묘 문화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일 부모님 산소에 들려 벌초를 할 계획이지만 산속 깊이 부모님을 모셨다가 찾지도 않아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산소들을 만나면 그렇게 조성되는 묘지와 산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 자신은 간단한 수목장이나 잔디장으로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묘지를 만나 안타까운 마음을 남기고 걸어 내려가니 이장된 듯한 묘지 한기를 더 만나고 잠시 후 등로 좌측의 벌목된 곳으로 나즈막하게 펼쳐진 산줄기와 그 아래로 보이는 들판들도 살펴보며 내려가니 금새 이정표와 벤취 쉼터 3개 그리고 돌목이고개라는 이정판이 붙어 있는 돌목이고개 안부에 도착을 한다.
돌목이고개(성황당)라는 이름도 특이해 찾아보니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칡목마을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돌목이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돌목이고개는 돌목이와 고개로 나뉜다.
돌목이는 돌목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고 돌목은 돌과 목으로 나눌 수 있으며 여기서 돌은 여러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로 돌(석)로 풀이할 수 있는데 돌은 지명의 전부 요소로 빈번히 사용되어 전국적으로 돌고개, 돌다리, 돌담, 돌들 등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석성2리의 돌꼬지도 이에 해당하며 마을 동쪽 뒷산이 까막개울까지 길게 뻗어 곶을 이루며 이 곶에 가마바위를 비롯한 큰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꼬지 또는 돌패기(돌박이)가 되었다.
둘째로 들(야)로 풀이할 수 있는데 들이 변하여 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달곶과 달구지가 그것으로 이 달은 때로 돌로 바뀌어 돌곶과 돌고지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로 돌다(회)의 어간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돌모랭이와 돌목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돌다의 뜻으로 사용되나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대문리의 돌목이고개가 석항치와 대응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돌은 첫째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목은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된 항, 색에 소급되는데 원래 목은 머리와 몸통을 잇는 잘록한 부분(경부)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나 지명에 전용되면 통로의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이나 좁다란 산협이나 물속을 가로 지르는 길목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돌목이고개는 돌이 많은 좁은 길목으로 되어 있는 고개로 해석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과 현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등로 좌우측을 살펴보니 아직도 가끔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지 희미한 등로가 남아 있다.
돌목이고개에서 추억 몇장 남기고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된 방향으로 약간의 조망이 터지기 시작하여 잠시 발걸음 멈추고 조망을 즐겨본다.
바로 아래 대문리 마을 지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즈막한 산군들이 보이는데 모두가 이름없는 산들이다.
대문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에 있는 리로서 구릉지가 발달하였고 평지가 적으며 대삼리와 수문리의 이름을 합한데서 대문리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중수문, 갈항, 대삼골, 사곡, 쇄댕이, 수문골, 신대, 하수문이 있는데 관청재는 하수문에서 진동골 위 800미터에 있는 골짜기로 김유신 장군의 부친이 도읍으로 정했었다 고 한다.
대문리 분청사기 요지 제1호는 대문리 하수문과 중수문 마을 중간쯤의 도로에서 왼쪽으로 30미터 떨어진 산사면에 있으며 제2호는 중수문 마을 제1호 요지에서 1.2 Km 떨어진 대삼교 남서쪽 약 100미터 지점의 돌출된 사면에 있는데 특산물로는 담배가 있다.
짧은 시간 등로 좌측의 백곡면쪽 풍경을 살펴보고 다시 오르니 등로는 활엽수 등로가 뚜렷하게 나 있어 진행에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생각보다 활엽수가 잘 자라고 있어 여름 산행지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꾸준하게 오르니 낙엽진 등로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잠시 무심으로 오르니 참나무 한그루가 잘려진 정상에 오르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445.4미터 봉인데 정상에는 아무 표식도 없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생각보다 무더워 많은 땀을 흘리며 진행을 하지만 가끔 불어주는 산들바람에 땀을 식히고 나니 조금은 진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강렬한 햇살이 나지 않은 흐린 날씨이다 보니 진행에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 표식도 없는 445.4봉을 내려가니 커다란 참나무들이 보이고 잠시 후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동안 다리에 힘을 주고 내려가니 다시 등로는 평이한 낙엽 등로로 변하고 안부를 지나 그림같은 활엽수 등로를 걸어 간다.
한동안 그렇게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걸어가니 또 한번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조심해 내려가니 드디어 길지 않은 급경사 내리막 등로가 끝이나며 일반 평이한 등로가 열린다.
활엽수 낙엽이 등로에 쌓여가는 산줄기를 걸어가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며 좋은 시간이다.
아직 마르지 않아 바삭거리는 소리는 없지만 오랫만에 새롭게 쌓이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시간은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기에 더욱 산행에 빠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즈막한 무명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커다란 활엽수에 맨발님이 472.5미터 봉이라는 이정판을 달아 놔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이제 참나무 등로 아래 자라고 있는 잡풀들이 보이는 마루금을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는 좌측 능선이 아닌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후 다시 정상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만뢰산 119신고안내 제4지점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 봉항3리 마을회관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벤취 쉼터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이곳이 좌측으로 만뢰산 가는 갈림삼거리로서 해발고도는 522미터이다.
사진 몇장 남기고 곧바로 정상 만뢰지맥 마루금을 벗어나 좌측의 만뢰산 정상부로 향해 걸어가다 배낭을 풀섶에 숨기고 정상을 향해 빠르게 걸어 올라 본다.
그렇게 한동안 빠른 걸음으로 만뢰산 정상으로 향하니 아주머니 몇분이 함께 오르고 잠시 후 만뢰산 정상부에서 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정상에서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만뢰산(만근산)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시대에 지명을 본떠서 그대로 붙인 이름으로 추측되며 해발고도는 611미터이다.
만노산 또는 이흘산이라고도 불리는 만뢰산의 주능선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가르는 경계선이며 정상에는 화가 최양호가 제작한 장승이 세워져 있고 이 장승은 한자 뫼 산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진천에서 가장 높은 산을 상징한다.
인근에 진천읍 연곡리 보련 마을이 있어 보련산이라고도 하는데 정상부에 만뢰산성이 있으며 조선 시대는 이흘산성으로 불렸다.
만뢰산은 진천군의 주봉으로 백곡면 대문리와 진천읍 연곡리를 경계로 하여 진천군 내 하천 분포의 일대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신라시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만노군의 태수로서 북쪽으로는 고구려군과 또 서쪽으로는 백제군과 선전 분투하면서 군민에게 선정을 베풀었기에 평화롭게 살았다고 하여 만뢰산이라 불린다는 전설도 있다.
만뢰산은 김유신 장군 이후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물리친 유창국과 휘하 의병들의 활동이 지금도 눈에 밝힐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내용의 한시이다.
만뢰산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회상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장과 그 휘하 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24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사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산 정상에 있는 만노산성에서 유창국이 조감과 함께 적과 맞서 수천 명의 피란민을 구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태령산 관련 기사에서 만노군태수라는 내용이 있어 이 지명은 당시 이곳에 있었던 만노군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련산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라는 기사가 있다.
여지도서에는 협탄령에서 뻗어 나와 떨어진 줄기가 성산이 된다 라는 내용이 있고 대부분의 옛 지도에서도 만노산이 기재되어 있으며 보련산은 따로 나타나지 않으나 해동지도에서는 만노산과 보련산이 다른 위치에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이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진천은 김유신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김유신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많은 고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 만뢰산 정상에는 또한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백제군을 방어했다고 전해져 더욱 둘러보게 만드는 산성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만뢰산성(만노산성, 이흘산성)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만뢰산 정상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만뢰산은 진천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신라 서북쪽 국경지대에 위치한 산성 요새였다.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백제군을 방어했다고 하며 김유신 장군도 만뢰산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고 전하며 산성지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산성의 형태는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이며 계곡의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성되었고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조감과 유창국이 7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청군에게 항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한다.
잠시 그 옛날 국경으로서 이곳 만뢰산을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만 내려 놓는다.
그렇게 만뢰산 정상에서 그 옛날 삼국시대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뒤돌아 내려오기 전 잠시 동쪽을 살펴보니 저 멀리 박무속에 연곡리의 연곡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연곡지 뒷쪽 좌측으로는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는 태령산과 그 뒤로 희미한 문안산이 보인다.
그 연곡지 앞으로는 생거진천 화랑촌이 있지만 박무속에 보이지 않고 또한 연곡지 뒷쪽으로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가 있는 연곡계곡이 있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진천에 들려 여유롭게 김유신 관련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만뢰산을 출발한다.
배낭을 숨기고 빈손으로 올랐다 다시 만뢰산 갈림삼거리로 내려가지만 온도가 오르면서 많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뢰산 갈림 삼거리로 내려 와 숨겨 놨던 배낭을 찾아 벤취 쉼터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신 후 김유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는 길상사를 생각해 본다.
길상사는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김유신(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원래 길상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를 지내오다가 1399년(태종 8)부터 관행제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철종 2)에 정재경과 박명순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 아래 서발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하였으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1926년에 후손인 김만희의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인 벽암리 도당산성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으나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른다.
김유신은 만노군(현 충북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79세로 별세한 신라의 명장으로 후일 삼국통일을 이룩한 공으로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고 경주의 서악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묘(사적 21)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을 비롯한 관리사, 내삼문, 협문 2동 등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흥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장우성이 그린 가로 98cm, 세로 187cm의 영정이 있는데 1976년 11월 5일에 봉안된 것이며 그 밖에 뒤뜰에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다.
진천군에는 길상사 이외에도 장군의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의 김유신태실 및 돌담(충북기념물 108), 탄생지인 상계리의 김유신장군유허지(충북기념물 79) 등이 있으며 특히 탄생지와 태실을 포함한 상계리 일대의 129필지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아직 들려보지 못한 길상사이지만 조만간 시간이 되면 태령산으로 한바퀴 돌고 내려오는 것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렇게 만뢰산을 다녀 온 후 다시 갈림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넓은 수레길 같은 등로를 타고 가파르게 내려가니 이곳도 역시 등로 옆으로는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다시 봉항3리 마을회관으로 하산 할 수 있는 갈림삼거리에 나무 벤취 하나가 설치된 쉼터를 지난다.
다시 가파르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낙엽진 등로가 온순해지고 가끔 만뢰산 산행을 위해 오르는 가족 단위의 등산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진행을 한다.
잠시 후 커다란 참나무를 베어 낸 나무 등걸을 만나 통과하고 계속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만뢰산 119신고안내 제3지점 안내판과 이정표 그리고 나무벤취 쉼터와 구급함이 설치되어 있는 보련마을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잠시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보련마을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자연마을이자 산촌 체험 마을로서 지명유래는 보련마을이 있는 연곡리는 신라시대에 절을 세우고 그곳에서 연화세계를 꿈꾸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보련은 연화대와 관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보련마을은 1900년경 금광이 있어 한때 번창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새마을운동을 하던 시기까지는 숯을 굽는 오지 마을이었다가 1981년 연곡저수지를 만들면서 농지가 수몰되어 마을 주민들이 점차 줄고 고령화되면서 마을 고유의 모습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자 이를 보존하고자 문화 역사 마을로 지정하여 문화유산들을 복원하고 여러 사람에게 마을을 알리기 위하여 산촌 체험 마을을 조성하였다.
마을 뒤에 진천군에서 가장 높은 만뢰산(611.7미터)이 솟아 있고 산 정상에서는 서해 바다를 볼 수 있으며 산 정상에 있는 만노산성은 병자호란 때 유창국과 조감이 의병을 모아 청군에게 항전하여 승리를 거둔 곳이라고 전한다.
보련계곡을 따라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여름철에 반딧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환경을 자랑한다.
개인적으로 진천에는 아무 연고가 없어 들리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는데 이번에 만뢰지맥 산행을 하면서 진천에 대해 살펴보니 생각보다 매력적인 지역임을 알게되어 앞으로도 자주 들릴 수 있는 고장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보련마을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넓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등로에 자라고 있던 커다란 참나무를 베어낸 나무 등걸을 지나 무명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나무 벤취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보탑사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며 쉬어 간다.
충청북도 진천군 보련산(만뢰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1996년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스님인 지광, 묘순, 능현스님이 창건하였는데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 영산전, 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목탑의 높이는 42.71미터로 상륜부(9.99미터)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무려 52.7미터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고 강원도산 소나무를 자재로 하여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지어졌다 한다.
1층은 대웅전(199 m2), 2층은 법보전(166 m2), 3층은 미륵전(136 m2)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웅전에는 사방불(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법보전에는 윤장대(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두고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고 한글법화경을 총 9톤의 돌판에 새겨 놓았다.
미륵전에는 화려한 금동 보개 아래에 미륵삼존불을 모셨고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보탑사에는 그밖에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해 만든 영산전, 와불 열반적정상을 모신 적조전과 법종각, 법고전, 불유각, 삼소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도 있다.
저료를 찾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사찰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새로 불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찰이었다.
보탑사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이정판이 설치되어 있는 489.7미터 봉을 지나고 다시 낙엽진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그렇게 약간의 잡풀들이 자라고 있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만뢰산 119신고안내 제2지점 안내판과 바위들 그리고 보탑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보는데 진행 방향으로 멱수라는 이름이 보여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멱수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자연부락의 하나로서 지량 북쪽에 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계양리와 하목리, 상목리, 내산리를 병합하면서 상목과 계양의 이름을 따서 상계리라 했으며 자연마을로는 지량이(계랑리), 남산골, 멱수, 산거리, 상목, 쇠건너, 아래산거리, 연평, 위산거리 등이 있다.
지량이(계량리)는 계자가 구개음화 현상으로 지 자로 발음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이곳은 삼국시대에 김서현 장군이 만노태수로 부임했을 때 살았던 곳이며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멱수는 신라시대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미역을 빨면 그 물이 마을까지 흘러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편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 형국이라 하여 멱수라 한다고도 한다.
진천의 작은 마을까지 김유신과 그 부친인 김서현 장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진천군에서 자랑을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다.
멱수 마을에 대한 자료를 읽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시간이기에 이제는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진행을 해 본다.
낙엽이 깊게 깔린 사면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잡풀들이 자라고 있는 무명묘지를 지나 안부로 내려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이한 낙엽 등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다시 보탑사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와 벤취 쉼터를 만나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을 해 본다.
그 보탑사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진행을 하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등로가 좁아지면서 잡목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진행에는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기에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커다란 소나무 한쪽에 425.1미터 봉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어 살펴보니 바랑산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사진 한장 남기며 기억해 보니 충청권의 맥 산행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바랑산님이기에 스치는 인연이라도 바랑산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지만 언제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바랑산님의 산패가 걸려있는 425.1봉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도 역시 멧돼지들이 많은지 식흔들이 널려있어 주의를 하며 진행을 한다.
낙엽 깔린 오르막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평이한 활엽수 등로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사줄이 함께 따라오고 있어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는 약초재배지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약초재배지 보다는 축사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곳이다.
이제 한동안 그 철사줄을 타고 진행을 하니 등로에는 점점 더 우거진 잡목들이 나타나 진행에 방해를 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도 간간히 보이는 소나무와 활엽수를 친구삼아 걸어가니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이제 만뢰산 정상에서 3.51 Km 진해해 왔다는 거리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멱수가는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니 금새 또 다른 이정판이 붙어 있는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준.희님이 482.8미터 봉이란 산패를 걸어 놨다.
사진 몇장 남기고 그늘 공터에 자리 잡고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삼각점 앞 산패가 걸려있는 곳으로 가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더 남기고 출발한다.
삼각점이 있는 482.8봉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갔다 오르니 474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약간의 조은 공터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 봐도 잡목으로 가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다시 출발한다.
잠시 더 진행하니 진행 방향으로 약간의 조망이 터지고 살펴보니 이제부터 통과해야 할 송전탑이 바로 앞에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다시 잣나무 군락지를 짧게 지나니 잡목이 우거진 등로와 만나지만 누군가 잘 정리를 해 놔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제부터는 그 넓은 수레길 같은 등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한다.
천안과 아산 태극종주라는 띠지들이 보이는데 아마도 장거리 종주 산행을 주로하는 산악회에서 얼마전 이곳을 종주한 듯한 표지기들이다.
등로 좌우측으로는 여전히 잡목의 저항이 심해 보이는데 미리 다녀간 산악회의 수고스러움에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낙엽 깔린 무명 안부를 지나 등로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가는 길주의 지점에 도착을 한다.
이곳 역시 장거리 종주를 즐기는 산악회와 사람들의 띠지가 붙어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직진의 등로가 워낙 잘 나 있어 우측의 잡목을 헤치고 진행해야 할 마루금을 잘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측으로 내려가니 잠시 멋진 활엽수 거목들이 등로 옆에 자라고 있어 눈 요기를 하면서 진행이 되지만 그것도 잠시 역시나 잡목들의 저항이 심해지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등로를 만들고 있다.
잡목을 헤치고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등로에는 활엽수 뿐만 아니라 멋진 소나무들도 꽤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소나무와 활엽수인 참나무가 조화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는 44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더 남기고 출발하는 시간이다.
무명봉을 지나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는 안부를 통과하니 다시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등로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낙엽들이 쌓여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잡목들의 저항이 심해지며 진행에 조금은 어려움을 느낄 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함께 정상을 지키고 있는 500 무명봉에 도착을 해 긴 심호흡 한번 더 하고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등로는 잡목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등로로 바뀌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우측으로 파란 단풍잎들이 한들거리며 가을날 단풍철에 오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알려주고 있다.
다시 안부를 통과해 진행하니 해발고도 504.7미터인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진 한장 남겨보는데 이곳도 역시 독립운동 기념산길 50 Km 종주 코스에 남산봉이란 종이코팅지를 붙여 놨다.
남산봉이란 종이코팅지가 붙어 있던 504.7미터의 삼각점봉을 지나 걸어가니 잡목의 저항이 더욱 심해지는데 특히나 가시가 단단해 무척 까다로운 산초나무들이 잡목속에 많이 섞여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래도 조심하며 조금은 천천히 진행을 하니 방금 전 조망되었던 185번 송전탑을 만나 그 옆으로 지나고 다시 잡목 능선으로 진입하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여전히 잡목들의 저항이 심한 능선으로 오르니 무명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는데 등로 주위로 많은 으름나무들이 보여 혹시나 하고 둘러보니 등로 옆에 잘 익은 으름 몇송이가 활짝 펼쳐져 있어 따 먹으니 맛은 좋은데 작은 씨가 너무 많아 그 씨를 발라내며 먹는 것이 더 힘든 시간이다.
으름은 으름덩굴과에 딸린 낙엽 덩굴 식물으로서 산기슭 숲 속에서 자라는 덩굴나무이며 우리 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잎은 손바닥 모양의 겹잎이며 줄기는 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초여름에 잎겨드랑이에서 보랏빛 꽃이 이삭처럼 피는데 꽃은 암수한그루로 향기가 있다.
열매는 으름이라 하고 긴 타원형으로 가을이 되면 검은 보랏빛으로 익어 저절로 갈라지고 열매의 생김새는 바나나와 비슷하고 맛이 달다.
줄기는 약용하거나 바구니 등을 만드는데 우리 나라의 황해도 이남에서 자라고 일본과 중국에 분포한다.
이 산객이 어렸을 적 시골에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는 아이들 간식거리로 자주 먹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갖다 줘도 잘 모르는 과일이 되어 버려 세태의 변화를 실감하는 과일이 되었다.
잘 익은 으름 몇송이를 따 먹고 주위를 살펴보니 아직 익지 않은 으름들도 꽤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주위가 온통 으름덩쿨로 가득하다.
다시 약간의 잡목들을 헤치고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고 이제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있는 배성고개에 도착을 한다.
배성고개(장고개)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와 충청남도 천안시 동면 덕성리 배성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장고개는 장과 고개로 나뉘는데 장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장고개는 진천읍 금암리에 서는 장을 정기적으로 보러 다니던 고개로 풀이된다.
배성고개는 장고개로도 불리는데 지명에서 배성이 전부 요소로 쓰인 예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아마도 배선에서 변화 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며 배선은 배산의 변화형으로 볼 수 있다.
배산골, 배산굴, 배산동, 배산말, 배산바우, 배산보, 배산삐뚜리 등의 전부 요소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고 이들 대부분은 배 모양의 형국을 지녔다거나 배나무가 있었다는 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배성고개는 배 모양의 고개나 배나무가 있던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이나 현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장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로 때로는 소 길마에 볏짐을 싣고 넘나들기도 하였으며 고갯마루에는 서낭당과 함께 참나무 고목이 있다.
지금은 천안시와 진천읍 사이에 국도가 개설됨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자연히 폐고개가 되었다.
잡풀이 무성하기는 하지만 비포장 임도가 나 있어 여전히 사람들의 왕래는 있는 듯 한데 실제 먹고 살기위한 목적보다는 임산물 채취를 위해 이용되는 고개처럼 보였다.
비포장 임도의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몇 발자국 더 진행을 한 다음 우측 능선으로 오르니 거미줄이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하고 그 거미줄과의 전쟁은 산행이 마칠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등로는 다시 뚜렷해지는데 아마도 전주이공과 어부인인 밀양박씨 묘지를 가기 위해 낸 등로가 아닐까 생각되는 마루금이다.
전주이공 묘지를 지나니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더 통과하고 곧이어 잡목이 우거진 일반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을 하니 등로 옆으로 14번 송전탑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잡풀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면서 어렵게 진행을 하고 있다.
송전탑을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오르고 등로에는 여전히 으름덩쿨들이 보이고 약간의 잡목들도 눈에 들어 오지만 그런대로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등로 우측 아래 잡목 사이로 14번 송전탑이 다시 보이고 그 송전탑을 지나니 잡목 위로 우거진 칡넝쿨이 뒤덮으며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지만 그곳을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벌초가 된 묘지들이 나타나는데 벌초를 위해 오르며 등로를 정리했는지 그 다음부터는 다시 뚜렷한 등로를 따른다.
하지만 그곳 우측 묘지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누군가 선답자가 몽각분맥이라는 낡은 이정판을 걸어 놨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몽각산이 보이고 그곳으로 가지를 친 짧은 산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자료를 찾아 보니 몽각단맥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자료들이 보여 정리를 해 본다.
만뢰지맥이 만뢰산을 지나 내려온 진천읍과 천안시 동면 및 병천면의 삼면지점인 등고선상 390미터 지점인 질고개에서 서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천안시 병천면과 동면의 경계를 따라 사자골고개(310미터)에서 몽각산(403미터)으로 올라 또 한줄기를 동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서림산(316.8미터, 단맥)으로 가고 행암고개(250미터)에서 광덕산(290미터)와 두촌고개(250미터) 및 방고개(190미터), 동성산(237.8미터), 광터골고개(150미터), 21번 포장도로(탑원도로, 90미터)로 내려선다
유관순열사 생가 도로(70미터)와 매봉산(169.6미터), 596번 지방도로(70미터), 바라박산(250미터)을 지나 병천면 송정리 와촌마을 몽각산이 발원지인 녹동천이 병천천을 만나는 곳(50미터)에서 끝나는 약15 Km의 산줄기를 몽각단맥이라 부른다.
앞으로 다시 이곳으로 올라 저 몽각단맥을 따라 걸어 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산행 리스트에 적어 놓은 산줄기가 되었다.
몽각단맥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는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후 안부를 통과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사자골고개라는 곳으로 표기가 된 지점이다.
사자골고개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남산골마을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사자골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사자골고개는 사자골과 고개로 나뉘고 사자골은 다시 사자와 골로 나뉘는데 여기서 사자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는 사직의 변화형으로 사직에서 ㄱ이 탈락하여 사지가 되고 2음절 모음 ㅣ가 1음절 모음 ㅏ로 인해 사자가 된 것이며 최초의 어형 사직은 사직으로 사직단을 뜻하고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 지내는 단이다.
둘째는 새절의 변화형으로 새절이 골과 만날 때 ㅅ이 첨가되어 새젌골로 다시 ㄹ이 탈락하여 새젓골이 된 것이고 미파화와 연구개음화에 의해 새적골로 다시 모음 변동에 의해 새작골이 되고 ㄱ이 탈락하여 새자골이 된 뒤에 제1음절의 반모음 j가 탈락하여 사자골이 된 것이다.
따라서 사자골은 사직단이 있는 골짜기나 새로 지은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사자골고개는 남산골마을 사람들이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사자골마을(일명 찬샘골)로 가는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이나 현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자골고개는 진천읍 방면에서는 그리 가파르지 않으나 천안시 병천면 방면에서는 매우 가파른 고개이다. 예전에 소 등에 짐을 싣고 충청도를 넘나들던 길이었고 6·25전쟁 때는 피난길로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막혀 이용하지 않는다.
이제는 교통이 발달하고 차량을 이용하는 편리한 세상에 살다보니 예전에 사용하던 고개들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시간이다.
사자골고개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이곳까지도 으름 덩쿨이 소나무와 참나무를 휘감으며 제 세상을 만난듯 자라고 있어 살펴보지만 으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등로 좌측으로 진천읍 상계리 방향의 좁은 들판과 마을들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보일 것 같은 만뢰산은 다른 산줄기에 막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타고는 많이도 지나다녔던 진천이지만 이렇게 두발을 가지고 걸었던 기억은 별로 없었지만 오늘부터 조금은 친숙한 지역으로 되지 않을까 예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칡넝쿨들이 우거진 등로를 따르니 여전히 으름 덩쿨들이 눈에 보이고 있다.
제법 많은 양의 낙엽이 떨어져 쌓여 있는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잘 관리되고 있는 벌초된 묘지 한기를 지나 다시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며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전진하니 지도 상 322.3봉에 도착을 하는데 봉우리라고 보기보단 일반 능선상의 높이처럼 보이는 봉우리인데 등로에도 아무 표식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무명봉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다시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들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간다.
다시 나타나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눈 앞에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는 장고개에 도착을 해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직진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장고개는 충청북도 진천군의 진천읍 금암리에서 천안시 동면 동산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현재 21번 국도가 개통되어 있으며 이 지명은 사료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나 도로가 표현되어 있어 조선 시대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준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성암천 상류부의 태랑사 창에서 목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목천에는 목천계 소탄 25리의 주기가 적혀 있다.
장고개 지명은 장을 보러가는 길목이거나 작은 고개를 뜻하는 잔고개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제 오늘 산행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간다는 느낌으로 속도를 조절해 보는 시간인데 산행 후 샤워를 하고 펜션으로 간다고 해도 늦은 시간일 것 같아 조금 더 진행하다 다시 속도로 내 본다.
장고개부터는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걷게되니 속도가 빨라지고 잠시 후 트럭 한대를 만나는데 송전탑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측으로 흐르는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인삼포와 논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제부터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도 들리기 시작한다.
잘 정리된 묘지들을 지나 자작나무를 식재한 듯한 등로를 지나니 정상에 웅덩이가 보이고 선답자들의 띠지가 걸려있는 304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능선을 따라 거미줄을 헤치며 걸어가니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방금 전 헤어졌던 소형 트럭을 다시 만나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전 사람들로서 송전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나면서 만났던 송전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인사 나누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는 여전히 평이한 잡목과 소나무들이 혼재된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약간은 붉게 변해가는 나뭇잎들을 살펴보며 빠르게 걸어가니 짧은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일시적으로 고갯마루에서 4차선이 된 21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장교현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데 그곳으로 내려가는 곳에 지독한 칡넝쿨과 잡목들이 자라면서 참으로 어렵게 내려 선다.
장교현(220미터, 21번 포장도로)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동남구 동면 덕성리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 경계의 국도 21호 2차선 포장도로 선상에 위치한 고개로서 장교다리고개 또는 장교티(치)라 고도 부른다.
팔도군현지도의 목천과 조선지도의 목천에 직산 및 안성과의 경계에 장교치가 나타나고 조선지형도에 덕유산 북쪽 동면 덕성리와 진천 금암리 경계로 장교현이 표기되어 있다.
1464년(세조 10) 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전국의 여러 명산대천을 찾아다녔고 그때 세조가 보은 속리산으로 거동하게 되었는데 진천의 길상산(467미터)에 충청도 군사 4만여 명을 모아가지고 큰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때 충청도 목천 서쪽에 있는 각 고을의 장교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쉬어 갔으므로 장교고개 혹은 장교다리고개 등으로 부른다고 하며 한편 장교 지명의 교는 다리의 교로 해석될 수도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곳에서 천안에서 쉬다가 온 옆지기를 만나 다시 성환방향으로 나가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약간은 막히는 도로를 따라 청주시 미원의 펜션에 도착을 해 매형과 매제 그리고 동생들과 즐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최근들어 산행을 하면서 오룩스 맵과 트랭글이란는 두개의 트랙을 이용하는데 이번 만뢰지맥 첫 구간의 트랭글 트랙은 엽돈재에서 산행을 시작한 후 500미터 지난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어 실제 걸은 거리보다 500미터 짧게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가족 모임을 핑계로 생객지도 못했던 만뢰지맥 첫 구간을 무탈하게 마치고 가족들과 만나 오랫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슬이 친구가 되다 보니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이제 곧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데 가까운 한북정맥 상 지맥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진행하다 중단된 수락지맥 한구간도 완성을 시켰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첫댓글 연일 이어지는 마루금 답사 여정입니다.
금북정맥하며 지났던 추억을 되돌려 보셨구요.~
다가오는 가을 모임에서는 산행담에 등장하는 회원님 모두 뵐 수 있으니 기대됩니다.
시간되시면 소중한 만남의 날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어지는 안전한 여정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