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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정치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
1. 스리랑카의 헌법 및 정치제도
1) 스리랑카의 정치체재
스리랑카는 1972년 5월 22일 헌법개정을 통하여 영국연방 자치국에서 공화국으로 정치 체제를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상징적인 국가원수의 역할을 하고, 수상이 실질적 행정권을 장악하는 내각책임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독립 공화국 자격으로 영국연방에는 계속 남았다. 스리랑카는 1978년 9월 7일 헌법을 개정하고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했다.
2) 스리랑카의 헌법
스리랑카는 1972년 5월 22일 전문과 본문이 16장 134개로 된 헌법 안을 공포하였다. 1978년 9월 7일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하는 신헌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2001년 9월 제17차 헌법 개정을 통해 헌법위원회(Constitutional Council)가 설립되었다. 헌법위원회는 헌법상 주요 기관의 기능을 감시하고 주요 기관장 임명을 심의한다
3) 스리랑카의 정치제도
스리랑카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이며 국군통수권자이다.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임기는 6년이고, 1차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대통령 피선거권자는 30세 이상의 스리랑카 국민으로서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은 장관겸직권 및 국무회의 주재권, 고급공무원 임면권(수상과 각료, 대법원장과 대법관, 공소법원장과 공소법원판사, 검찰총장, 합참의장, 육군·해군·공군 사령관, 경찰총장 임면), 외교사절 접수 및 파견권, 국회해산권, 국회에서 거부한 법률안 또는 국가 중대사 국민투표 회부권 등이다.
당선연도 | 대통령 | 소속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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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 | 자예와르바르디네(Jayewardene) 당선 | 통일국민당(UNP)1) |
1982년 12월 | 자예와르바르디네(Jayewardene) 재선 | 통일국민당(UNP) |
1988년 12월 | 프레메다사(Premedasa) 당선 | 통일국민당(UNP) |
1993년 5월 | 프레메다사 대통령 피살로 국회가 위제퉁가(Wijetunga)를 대통령에 선출 | 통일국민당(UNP) |
1994년 11월 | 쿠마라퉁가(Kumaratunga) 당선 | 스리랑카 자유당(SLFP)2) |
1999년 12월 | 쿠마라퉁가(Kumaratunga) 재선 | 스리랑카 자유당(SLFP) |
2005년 11월 | 라자팍세(Rajapaksa) 당선 | 스리랑카 자유당(SLFP) |
2010년 1월 | 라자팍세(Rajapaksa) 재선 | 스리랑카 자유당(SLFP) 스리랑카의 대통령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 |
② 스리랑카의 내각
스리랑카 내각은 2010년 4월 기준으로 장관 38명(부장관 39명 별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의 수, 관할, 직무범위는 대통령이 수시로 조정할 수 있다. 수상(Prime Minister)은 현역 의원 중에서 국회의 신임을 받는 인물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수상과 장관(Ministers)은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장관과 부장관(Deputy Minister)은 대통령이 수상과 합의하여 현역의원 중에서 임명한다.
③ 스리랑카의 국회
스리랑카의 국회는 임기 6년의 단원제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196명과 비례대표제로 임명되는 전국구 의원 29명으로 총 225명이다. 국회의사당은 콜롬보(Colombo)시 동부 스리 자야와르데네푸라 코테(Sri Jayawardhanapura Kotte)에 있다.
정당 | 총선시기 | 득표율 | 의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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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196) | 전국구(29) | 총의석(225) | |||
통일인민자유연합(UPFA)1) | 2004년 8월 | 60.43% | 127 | 17 | 144 |
통일국민당(UNP) | 2004년 8월 | 29.43% | 51 | 9 | 60 |
타밀민족연합(TNA)2) | 2004년 8월 | 2.68% | 13 | 1 | 14 |
민주국가연합(DNA)3) | 2004년 8월 | 5.54% | 5 | 2 | 7 |
유효투표수 | 8,033,717 | 93.08% | |||
무효투표수 | 596,972 | 6.92% | |||
전체투표수 | 8,630,689 | 61.26% | |||
등록된 유권자수 | 14,088,500 [네이버 지식백과] 스리랑카의 국회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 |
스리랑카는 전국을 9개 주(Province)로 나누었다. 9개 주는 다시 24개의 행정구역(Administrative District)으로 구분된다. 각 주의 주지사(Governor)와 전국 24개 행정구역의 지방장관(District Minister)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 주마다 주의회(Provincial Council)가 설치되어 있다.
주(Province) | 인구(천 명) | 행정구역(Adminstrative Distric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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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Western) | 5,814 | 콜롬보(Colombo), 감파하(Gampaha), 카루타라(Kalutara) | |||
노스 웨스턴(North Western) | 2,320 | 쿠로네갈라(Kurunegala), 푸타람(Puttalam) | |||
우바(Uva) | 1,309 | 바둘라(Badulla), 모네라갈라(Moneragala) | |||
사바라가무와(Sabaragamuwa) | 1,926 | 라트나푸라(Ratnapura), 케갈레(Kegalle) | |||
센트럴(Central) | 2,660 | 캔디(Kandy), 마타레(Matale), 누와라 에리야(Nuwara Eliya) | |||
이스턴(Eastern) | 1,539 | 바티칼로아(Batticaloa), 암파라(Ampara), 트린코마리(Trincomalee) | |||
노던(Northern) | 1,187 | 자프나(Jaffna), 마나르(Mannar), 바부니야(Vavuniya), 무라이타부(Mulaitivu), 키리노츠치(Kilinochchi) | |||
서던(Southern) | 2,470 | 갈레(Galle), 마타라(Matara), 함반토타(Hambantota) | |||
노스 센트라(North Centra) | 1,225 | 아누라드하푸라(Anuradhapura), 포로나루와(Polonnaruwa) |
출처: 인구통계과(Department of Census & Statistics, 2009년, 2045만 명)
⑤ 스리랑카의 법원
스리랑카의 법원은 대법원(Supreme Court), 공소법원(Court of Appeal), 고등법원(High Court), 지역법원(District Courts), 치안재판소(Magistrates' Courts), 초급법원(Primary Courts)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은 스리랑카 최고의 사법기관으로, 대법원장과 6명~10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판결은 다수결로 결정한다. 대법원은 헌법소송,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관한 소송, 의회특권 침해에 관한 소송, 선거소송에 관한 관할권이 있다. 또한 하급법원에서 상고된 민사와 형사 소송의 최종심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공소법원은 원장과 6인~11인의 판사로 구성된다. 인신 구속영장 발부와 초급법원에서 상고된 소송심사를 관할한다
2. 스리랑카의 정당
1) 스리랑카의 정당제도
스리랑카 정당은 자유정당제이며 정당의 이합집산이 심하다. 2006년 2월 기준으로 스리랑카에 등록된 정당은 51개이다. 스리랑카의 양대 주요정당인 통일국민당(UNP)1)과 스리랑카 자유당(SLFP)2)은 스리랑카의 독립 이후 교대로 집권해오고 있다. 스리랑카 자유당(SLFP)은 1993년 5월 실시된 주의회선거 때부터 군소 정당들과 연합하여 선거에 참석하고 있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불교승려정치조직(JHU)3)을 포함한 10개의 정당은 ‘통일인민자유연합(UPFA)4)’을 형성하였다
스리랑카의 독립이후 집권정당 및 집권기간은 다음 표와 같다.
3) 스리랑카의 주요정당
스리랑카의 주요정당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스리랑카 자유당(SLFP)은 1951년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가 결성하였으며, 1970년 5월 총선에서 평등사회당(LSSP)1), 스리랑카 공산당(CPSL)2)과 제휴하여 집권하였다. 그리고 1971년 3월 극좌 인민해방전선(JVP)3)이 일으킨 무장 반란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7년 2월까지 국가비상사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비상사태의 장기 지속, 의원임기 연장, 경제난의 가중으로 국민들의 지지기반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1977년 7월 총선에서 168석 중에서 겨우 9석만 얻어 통일국민당(UNP)에게 참패하였다.
1980년 11월 반다라나이케 당수는 권력 남용죄가 적용되어 7년간 국회의원 자격과 참정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1986년 11월 참정권은 회복하였다. 그는 야당지도자(Opposition Leader)로 활동해 왔으며 아들 아누라 반다라나이케(Anura Bandaranaike) 의원과의 알력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아누라 반다라나이케 의원은 1993년 10월 스리랑카 자유당을 탈당하고, 1993년 11월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아누라 반다라나이케 의원의 탈당 후, 반다라나이케 여사의 딸인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서부 주(Western Province) 수상이 스리랑카 자유당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1994년 8월 총선에서 스리랑카 자유당이 주축이 된 정당연합인 인민연합(PA)4)이 승리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 대선에서도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1년 12월 총선에서 인민연합 정권은 총 77석을 획득하는데 그쳐 통일국민당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2004년 4월 총선에서는 인민해방전선(JVP)이 인민연합과 가세하여 만든 통일인민자유연합(UPFA)이 승리하였다. 이로써 통일인민자유연합 정권이 출범하였으며, 2005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도 통일인민자유연합의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0년 2월 육군사령관(참모총장)이자 대선주자였던 사라스 폰세카(Sarath Fonseka) 장군은 재직 중에 정치활동과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군수사기관에게 체포되었다. 2010년 1월 대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의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5)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재선했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은 내전의 승리와 대선승리의 여세를 몰아 약 2/3 의석을 확보하여 압승하였다.
스리랑카의 통일국민당(UNP)은 1946년 9월 서구화된 스리랑카 상류층이 모여 결성되었으며, 지지 기반은 온건 싱할리족, 불교도, 우파 온건 이슬람교도이다. 통일국민당(UNP)은 자유주의와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하며 스리랑카 독립 후 수차례 집권하였다. 통일국민당은1977년 7월 총선에서 압승한 후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 개정하였다. 1982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53%의 지지율을 획득한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가 재집권하였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은 서방제국과의 우호친선 관계회복, 외국원조 유치, 개방경제정책을 추구하였다. 1988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프레마다사(Premadasa) 수상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통일국민당은 2001년 12월 총선에서 총 109개 의석을 확보하고 압승을 거두면서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2004년 4월 총선과 2005년 11월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을 통일인민자유연합(UPFA)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2010년 1월 대선과 2010년 4월 총선에서도 통일인민자유연합에 대패하였다. 제1야당의 위치는 지켰으나 국회의석 60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스리랑카의 인민해방전선(JVP)은 1960년대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마오이스트(Maoist) 조직으로 시작하여, 1980년대 즈음 싱할라인들의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파시즘적 정당으로 변화하였다. 1989년 통일국민당(UNP) 정권 당시 군경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정책을 개정하고 정당 정치에 합류함으로써 2001년 11월 총선에서 총 7석을 획득하였다.
인민해방전선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인민연합(PA)과 연합하여 통일인민자유연합(UPFA)을 형성하여 승리한 후, 통일인민자유연합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2005년 6월 북동부 지역의 쓰나미(Tsunami) 피해를 지원하는 조직과 관련하여, 정부와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간의 합의에 항의하고자 통일인민자유연합 정부에서 철수하였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통일인민자유연합 후보가 당선하는 데 기여했으나 정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4석만 확보하였다.
스리랑카의 타밀민족연합(TNA)6)은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의 정치적 대변조직으로서 2004년 4월 총선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22석을 확보하여 제3당으로 약진하였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석 14석을 차지하는데 그쳤으나, 제3당의 위치를 지켰다.
스리랑카의 불교승려정치조직(JHU)은 정부가 불교계 현안에 소극적이라는 인식하에 승려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불교계의 입장을 반영하고자 구성되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후보 9명이 당선되었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UPFA) 후보를 지지하였으며, 통일인민자유연합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2010년 1월 대선과 2010년 4월 총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 소속당으로 활동하였으며 국회의석 2석을 확보하였다.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7)는 1988년 2월 정당으로 등록한 이슬람계 정당이다. 1994년 8월 총선에서 7석을 확보한 후 인민연합(PA)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아쉬라프(M. H. Ashraff) 당수는 인민연합 정부의 선박·항만재건설부 장관(Minister of Shipping, Ports, Rehabilitation Reconstruction) 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 이슬람회의는 2001년 12월 총선에서 5석을 확보한 후 통일국민당(UNP)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2004년 4월 총선에서도 5석을 유지하였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를 지지했으나 통일국민당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석 3석을 확보하였다.
스리랑카 세일론노동자회의(CWC)8)는 100만 인도계 타밀(Indian Tamil) 농원 노동자의 대표 조직이다. 정당 정책은 타밀 통일해방전선(TULF)9)과 비슷하다. 그러나 타밀족의 분리독립에 관해서는 온건 노선을 취한다. 1977년 7월 총선에서 손다만(Thondaman) 당수가 최초로 당선되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는 통일국민당(UNP)과 연합하여 공천하였다. 그러나 총선 후 통일인민자유연합(UPFA) 정부에 합류하여 장관직 1개와 부장관직 1개를 할애 받았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를 지지했으나 통일국민당 후보는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여당 연합인 통일인민민주연합 소속으로 지역구 3석을 확보하였다.
스리랑카 공산당(CPSL)은 1935년 결성된 평등사회당(LSSP)10)의 일부 인사가 분리 독립하여 1943년 창당하였다. 1981년 보궐선거에서 원내 1석을 확보하였으며, 1993년 5월 지방의회 선거 때부터 인민연합(PA)에 합류하였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여당연합인 통일인민자유연합(UPFA) 소속으로 지역구 1석을 확보하였다.
스리랑카의 민주국가연합(DNA)11)은 2010년 1월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였던 사라스 폰세카(Sarath Fonseka, 전 육군사령관)가 창당하였다. 2010년 4월 총선에서 당수인 사라스 폰세카가 군사재판을 받으며 구금된 상황에서 국회의석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스리랑카의 기타 군소 정당으로는 인민통일전선(MEP)12), 평등사회당(LSSP)13), 신평등사회당(NSSP)14)이 있다.
스리랑카는 2001년 12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7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통일국민당은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와 연정을 구성하여 통일국민전선(UNF)5) 정권을 출범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대통령 중심제이며, 스리랑카 헌법상 대통령은 총선 1년 후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당시 스리랑카 자유당(SLFP) 소속의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의 임기는 2005년까지 남아 있었다. 스리랑카는 대통령과 수상이 정책 협조가 원만하지 못할 경우, 헌정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전도가 불확실한 동거(cohabitation) 정부 시대에 돌입하였다.
전(前) 정권인 인민연합(PA) 정부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와의 교전으로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였다. 그에 따라 스리랑카의 실질성장률은 겨우 3%~4%에 머물렀으며, 국내외 경제 사정은 악화되었다. 잇따른 경제정책의 실패로 2001년에는 외환 위기, 경제성장률 둔화, 실업률 증가, 외국인 관광객 감소를 비롯한 경제적 위기가 계속되었다. 또한 1996년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전력난이 초래되었다. 통일인민전선 정부는 이러한 경제 상황을 회복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출발하였다.
신정부 출범 이후,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수상은 경제개혁 프로그램인 「스리랑카 재건(Regaining Sri Lanka)」을 통해 재정적자 감소, 외국인 투자유치, 행정개혁, 교육개혁을 비롯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6)과 세계은행(World Bank)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관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다.
2002년 2월 정부-LTTE 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LTTE와의 평화과정 진전에 힘입어 관광객과 외국인 투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2001년 사상 초유의 -1.4% 경제성장을 보였지만 2002년 경제가 회복하면서 4% 성장하였다. 2003년 경제성장률은 5.9%이다.
쿠마라퉁가 대통령과 위크레메싱게 수상은 통일인민전선 정부 출범 이후, 각종 국정운영과 LTTE와의 평화과정 추진 방식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위크레메싱게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을 때인 2003년 11월 4일 주요 안보장관직인 국방장관, 내무장관, 공보부장관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2004년 2월 7일 국회를 해산하였다.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은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수상의 통일국민당이 주도하는 국회를 해산하고 2004년 4월 2일 13대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스리랑카 자유당이 주축이 된 인민연합(PA)과 인민해방전선(JVP)7)의 연합체인 통일인민자유연합(UPFA)8)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통일인민자유연합은 신정부를 구성하고 2004년 4월 22일 국회를 개원하였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통일인민자유연합은 통일국민당을 크게 이겼지만 국회 내 과반수 의석인 113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다. 제13대 국회는 ‘헝의회(hung parliament: 절대 다수당이 없는 권력 분점 의회)’의 취약점을 지닌 채 출범하였다.
2005년 11월 17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 후보(당시 수상)가 유효표의 50.3%를 얻어 48.4%를 획득한 야당의 라닐 위크레메싱게 후보(전(前) 수상)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라자팍사는 2005년 11월 19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인민해방전선과 불교승려정치조직(JHU)9)과 같은 국수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정치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향후 국정운영에 있어서 인민해방전선과 불교승려정치조직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2009년 5월 19일 라자팍사 대통령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26년간의 내전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된 국토의 재건정책과 민족화합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2010년 1월 라자팍사 대통령은 내전 승리의 후속 조치로 국가재건과 민족화합정책에 대한 대국민 신임을 묻기 위해 조기 대선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58%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40%를 득표한 사라스 폰세카(Sarath Fonseka) 전(前) 참모총장을 누르고 제6대 대통령으로 재선하였다. 재선 직후인 2010년 2월 라자팍사 대통령은 전후(戰後) 국정 쇄신을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4월 8일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여당인 통일인민자유연합이 국회의석의 약 2/3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스리랑카는 다수족인 싱할라족(74%)과 소수민족인 타밀족(약 18%)간의 인종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타밀족은 스리랑카 동부와 북부 지역에 밀집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상업에 종사한다. 그들은 스리랑카 정부가 차별대우한다고 비난하며 독립국가(Eelam) 수립을 주장해 왔다.
영국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소수족인 타밀족을 우대하였다. 이에 싱할라족은 타밀족에 대한 증오심을 품어 왔다. 1948년 독립 이후, 타밀어 공용어화 문제를 중심으로 두 종족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83년 7월 24일 스리랑카 정부군 13명이 타밀분리주의자들에게 자프나 지역에서 피살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반(反)타밀 인종폭동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9만여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반타밀 인종폭동은 ‘검은 칠월(Black July)’이라고 불린다.
스리랑카 정부는 레피아(REPIA)1)를 구성하여 재해 복구지원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분리주의 운동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단일국가(Unitary State)에 충성선서를 거부하는 공직자에게 중벌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타밀통일해방전선(TULF)2) 소속 의원 16명이 선서를 거부하고 인도의 타밀나두(Tamil Nadu)주로 망명하여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야당 원내총무의 자리는 9석을 확보한 스리랑카 자유당(SLFP)3)의 아누라 반다라나이케(Anura Bandaranaike)가 차지하였다.
타밀 사태는 1983년 7월 인종 폭동을 기점으로 심화되었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게릴라 소탕 작전을 지속적으로 폈지만, 타밀 게릴라의 반정부 활동은 계속되었다. 1984년 11월이 되자 테러 활동이 더욱 격해졌다. 1985년 1월 14일 타밀 축제일(Thaipongal day)을 기하여 엘람(Eelam) 국가를 이루려는 타밀 게릴라들의 노력은 스리랑카 정부의 긴급조치와 통금실시로 실패하였다.
인도는 1977년 통일국민당(UNP)4) 집권 후 친서방 개방경제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스리랑카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인도는 타밀족을 이용하여 스리랑카를 내전 상태로 유도하였으며 스리랑카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 증대를 도모하였다.
스리랑카의 종족갈등 및 평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스리랑카와 팀푸 회담
1985년 4월 이후 타밀 게릴라들은 활동 지역을 북부에서 동부로 확산하였다. 스리랑카 정세는 게릴라군과 정부군의 교전 격화, 양측에 의한 민간인 대량학살 및 보복, 국방비 지출 급증으로 인한 경제악화와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 대통령의 계엄선포 시사로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5년 6월 인도·스리랑카 정상회담에서 인도가 스리랑카의 단일 국가성을 확인하고 타밀 인종분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중개노력을 결정함으로써 스리랑카의 국면이 전환되었다.
1985년 6월 18일 인도 정부의 중재로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주요 게릴라단체는 3개월간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양측 대표단은 부탄의 수도 팀푸(Thimphu)에서 1985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예비접촉을 한 후 8월 12일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협상에서 스리랑카 정부는 단일국가체제 아래의 지방분권 강화안을 제시하였고, 타밀 게릴라 단체는 북부와 동부지방에서 타밀족의 배타적 자결권을 주장하였다.
타밀 게릴라 단체는 1985년 8월 17일 스리랑카 정부군이 동부지방에 거주하는 타밀주민을 대량 학살한 것을 이유로 들어 회의를 결렬시켰다. 이에 인도 정부는 브한다리(Bhandari) 외무차관을 팀푸에 급파하고 회담을 계속하기 위해 막후조정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8월 21일 회담이 무기한 연기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인도 정부의 중개 역할에 회의를 품고 타밀 게릴라 단체가 정치협상에서 스리랑카 정부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보안군과 군장비를 강화해 왔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은 정치협상을 하는 동시에 군사적 해결을 병행하여 사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986년 4월 16일 스리랑카 정부는 북부와 동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협상 타협안을 하미드(Hameed) 외무장관을 통해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수상에게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도 정부는 타밀 게릴라 단체인 타밀통일해방전선(TULF)1)과 일람국민자유전선(ENL)2)에 협상 타협안을 전달하며 중개 역할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타밀측은 이람국(State of Eelam) 건국이 아닌 협상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시하였다.
1987년 초, 북부지방에 대한 경제봉쇄조치와 2월 정부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타밀 게릴라 단체는 1987년 4월 17일과 4월 19일 동북부 지역에서 150여 명의 싱할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또한 4월 21일에는 콜롬보(Colombo) 버스터미널을 폭발시켜 2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타밀 게릴라 단체에 대한 싱할라 주민들의 적대감은 고조되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즉각 통금을 실시하여 1983년 7월에 발생한 인종폭동 사태가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리고 타밀 게릴라가 장악한 북부요충지를 공중폭격하고 제한적 군사 작전을 펼침으로써 민심을 달랬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1987년 5월 26일 북부지방에 24시간 통금을 실시하고 주민에게 지정장소로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다. 타밀이 장악한 북부 자프나(Jaffna) 지역의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1987년 당시 최대 규모의 육해공 입체 ‘해방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스리랑카·인도 해협 연안 지방에 있는 타밀 게릴라 단체의 요충지인 북부지방을 장악하였다.
인도 정부는 1987년 초 스리랑카 정부군의 경제봉쇄와 군사작전으로 북부 타밀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거론하며, 경제봉쇄와 군사작전을 중지할 것을 스리랑카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제네바(Geneva) 국제연합인권위원회(UNCHR)3)에 스리랑카 정부의 행태를 문제삼아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1987년 4월 27일 인도 남동부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는 타밀 게릴라 단체를 원조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이어 6월 1일 인도의 중앙정부 역시 스리랑카 북부지방 사태는 인도의 ‘합법적 관심사항(legitimate concern)’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도는 타밀주민의 인도적 구호를 내세워 1987년 6월 3일 긴급구호품을 해상 운송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가 이를 제지하자 6월 4일 공군기의 엄호 속에서 구호품을 공중 투하하였다. 인도는 스리랑카 정부에 구호품 전달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스리랑카 정부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2차에 걸쳐 1200여 톤의 식량과 의약품을 해상 운송하여 북부지방의 타밀주민에게 배급하였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게릴라 침투 작전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정부 게릴라 활동은 인도 타밀나두(Tamil Nadu) 주의 지원 하에 계속되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국방비 과다 지출로 경제적 부담이 커지면서 인도의 개입 없이 사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인도의 타밀나두 주가 타밀 게릴라 단체에 무력을 지원함으로써 인도와 스리랑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인도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구심은 더욱 증대되었다. 인도는 집권당인 Congress(Ⅰ)당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외정책업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최대 현안인 타밀 사태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1987년 7월 29일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인도 수상과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 스리랑카 대통령은 타밀족 자치권 확대, 8월 초까지 타밀반군 무장해제, 분쟁지역에서 스리랑카 정부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평화협정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Colombo)에서 체결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지역을 단일행정구역으로 통합한 후, 단일 주의회(Provincial Council)를 설치하여 이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한다.
· 1987년 8월 15일까지 동부·북부지역의 비상사태를 해제한다.
· 협정서명 후, 72시간 이내에 스리랑카 전역에서 전투행위를 중지한다.
· 1988년 12월 31일까지 북부지역과의 통합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동부지역에서 실시한다.
· 인종문제로 구속된 자는 석방한다.
· 인도·스리랑카 양국해군 포크(Palk) 해협을 공동 순찰한다.
· 타밀어와 영어를 싱할라어와 함께 공용어로 인정한다
인도와 스리랑카의 평화협정에 따르면, 인도는 스리랑카의 주권과 독립보존을 인정하고 스리랑카는 타밀족 밀집거주지인 동북부지역의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협정을 시행하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가 요청할 경우, 인도는 인도평화유지군(IPKF)1)을 스리랑카에 주둔할 수 있다. 1987년 7월 30일 스리랑카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인도평화유지군은 스리랑카 동북부 지역에 진주하면서 타밀 게릴라 단체를 무장해제하기 시작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의 평화협정에 따라 타밀 게릴라들은 스리랑카 동북부지역에서 일부 무기를 인도군에게 인도하였다. 그러나 타밀 게릴라 단체의 완전무장해제는 불가능하였다. 특히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는 타밀족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평화협정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무기 반납을 거부해 인도 정부군과 직접 충돌하였다. 그 결과 양측뿐만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싱할라족 일부와 야당은 평화협정 자체가 실질적인 스리랑카 영토 분할이며, 인도에 주권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따라 스리랑카 전국에 걸쳐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인민해방전선(JVP)2)을 비롯한 극좌 단체의 암살 테러활동이 빈번해졌다. LTTE는 1987년 12월 타밀 지역의 선거 실시에 대비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타밀족 정적을 암살하고 테러 행위를 계속하였다. 그와 더불어 평화협정 자체를 수포로 만들기 위해 싱할라족 주민을 살해함으로써 긴장을 조성하는 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스리랑카 내부에서는 인도평화유지군(IPKF)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당초 예상과 달리 무장해제가 장기화되면서, 인도 정부는 1988년 4월 기준으로 7만 5000여 명의 인도평화유지군을 스리랑카에 주둔시키고 타밀 게릴라 단체 무장해제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른 재정부담, 인명손실, 야당과 타밀나두(Tamil Nadu) 주의 반대로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주의회 설립법과 헌법 개정을 통해 1987년 11월 12일 타밀자치기구설치법안을, 1988년 1월 22일 지방의회 선거법안을 각각 의회에 통과시킴으로써 평화협정이행을 위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수상은 타밀 분쟁이 인도와 스리랑카 양국 관계를 긴장시키는 요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인도남부 타밀족이 스리랑카 타밀족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위협을 느낀 스리랑카가 제3국과 제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밀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인도남부 타밀나두(Tamil Nadu) 주는 타밀족의 독립요구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LTTE가 지나치게 강경한 입장을 추구하며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타밀나두 주에서도 계속 테러를 자행하자 타밀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후퇴시켰다. 라지브 간디 수상은 1988년 4월 스리랑카 동북부 지역의 평화 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전망하였다. 그리고 LTTE가 무기를 버리고 인도·스리랑카 평화협정을 수락한다면 협상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타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적 해결 방식을 배제하고 정치적으로 협상할 뜻을 밝혔다.
1988년 11월 19일 스리랑카 동북부 주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엘람인민혁명해방전선(EPRLF)3)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1988년 12월 5일 동북부 주에서 지방의회가 최초로 개최되었다. 지방의회는 엘림인민혁명해방전선이 36석, 엘람민족민주해방전선(ENDLF)4)이 17석,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5)가 17석, 통일국민당(UNP)6)이 1석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타밀과격단체 중 하나인 엘람학생혁명기구(EROS)7)가 민정참여를 선언하며 엘람인민민주전선(EPDF)8)를 창설하였다.
1988년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프레마다사(Premadasa)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와 인민해방전선과 같은 반정부단체가 민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국내치안질서를 회복하고자 반정부단체에 대한 진압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반정부단체에게 의원직 할당, 인도평화유지군 완전 철수, 테러방지법 폐지를 약속하는 평화안을 제의하였다. LTTE가 평화안 제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자,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1989년 5월 11일 평화회담을 개최하였다.
1989년 6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스리랑카 주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인도평화유지군이 7월 31일 이전에 완전히 철군할 것을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자치권 이양을 비롯하여 인도·스리랑카 평화협정이 충분히 이행되지 않았으며, 동북부 지역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스리랑카의 철군 요청을 거부하였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국내적으로 야당과 인민해방전선으로부터 인도평화유지군의 철군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 받았다. 특히 인민해방전선은 국민의 대정부 불만과 반인도감정에 편승하여 6월 14일 버스와 철도의 대규모 파업을 선동하고 격렬한 테러활동을 전개하면서 사회불만을 가중시켰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6월 20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민해방전선의 반정부활동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1989년 6월 28일 LTTE는 대정부 적대행위를 청산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스리랑카와 인도 정부는 인도평화유지군 철군 일정에 관해 협상개시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9일 인도가 상징적 철수로서 평화 유지군 600명을 철수시킴으로써 스리랑카와 인도 정부간의 외교적 마찰이 해결되는 실마리가 보였다. 7월 29일 ~ 31일간 스리랑카 위제라트네(Wijeratne) 외무장관은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와 인도평화유지군의 철수 일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9월 18일 스리랑카와 인도 양국정부는 동북부 주의 평화회복을 위해 1989년 12월 31일까지 인도평화유지군의 전면철군 완료, 인도평화유지군의 군사작전 중단, 동북부 주 평화위원 구성과 안보조정위원회 구성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타밀 인종분규가 해결에 진척을 보였다.
1989년 11월 12일 스리랑카 정부는 로한 비제비위라(Rohana Wijeweera) 총책을 포함하여 인민해방전선의 핵심세력들을 제거하면서 발호하던 인민해방전선을 소탕하였다. 이로써 스리랑카 정세는 1989년 말부터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인도평화유지군의 조속한 철군을 위해 로한 비제비위라 외무장관은 1990년 1월 4일 ~ 6일간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 신정부와 회담하였다. 회담 결과 양측은 1990년 3월 말까지 인도평화유지군을 철군하기로 합의하였다. 1989년 12월부터 인도평화유지군을 철군하는 과정에서 주로 LTTE와 타밀민족연합(TNA)9)은 북동부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살육전을 벌렸다. 그러나 인도평화유지군 철수 지역은 주로 LTTE가 장악하였다.
LTTE는 1990년 1월 31일 동부 카산카디(Kathankady) 인근의 이슬람교도 마을에서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10) 지지자 약 90명을 납치한 것을 비롯하여 동부 지역 이슬람교도에 대한 테러를 전개하였다. 2월 12일에는 북동부 주의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북동부 지역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주민통제 방안을 도모하였다.
1990년 3월 1일 북동부 주수상인 페루말(Perumal)은 북동부 주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3월 11일 엘람인민혁명해방전선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하였다. 인도평화유지군은 인도와 스리랑카간의 철군 합의 시점이었던 3월 말 이전인 3월 24일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막후 정치협상을 벌였던 LTTE는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북동부지역 일부를 계속 장악하였다.
4) 인도평화유지군(IPKF) 철수 이후 스리랑카의 상황
1990년 4월 12일 스리랑카 정부 대표 하미드(Hameed) 법무장관은 자프나(Jaffna) 지역의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 리더인 프라바카란(Prabhakaran)과 최초로 장관급 공개협상을 하였다. 그 후, LTTE 대표와 수차례 회동하였다. LTTE는 스리랑카의 단일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정치활동금지를 서약하는 헌법의 6차 수정내용(1983년 도입)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동북부 주의회 재선거 실시, 정부와 LTTE 간의 회담 개최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각종 도발을 자행하면서 군사력을 보강하였다.
1990년 6월 11일 정부와 협상하던 LTTE는 동부지역 경찰서들을 일제히 습격하여 수백 명의 경찰관을 납치하였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군도 북동부 지역으로 전진 배치함에 따라 LTTE에 의한 게릴라식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무력충돌 지역에서는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으며, 난민들 중 타밀계는 인도 타밀나두(Tamil Nadu) 주로 피난하였다.
1990년 7월 7일 프레마다사(Premadasa) 대통령은 국회 법령 개정을 통하여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북동부 주의회를 해산시켜 LTTE와의 협상가능성을 보였다. 또한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무장해제를 유지함으로써 화전양면의 자세를 취하였다. 인도 타밀나두 주수상인 카루나니디(Karunanidhi)는 스리랑카 정부군의 타밀계 학살에 대한 항의로 7월 20일 동맹 운휴(Hartal)를 선포하였다. 또한 다른 6개의 타밀계 정당들은 같은 날 프레마다사 대통령에게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대화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1990년 8월 3일 LTTE는 동부 지역에서 예배하던 수백 명의 이슬람교도들을 급습하여 약 500명의 이슬람교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이는 이슬람계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또한 인도 타밀나두 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 인도가 사태에 간섭할 수 있도록 도모하였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1990년 8월 말 북부 쟈프나 지역의 캬트(Kayts) 섬과 만다이티부(Mandaitivu) 섬을 장악하였다.
1990년 9월 13일에는 LTTE에게 포위당해 있던 자프나 요새(Jaffna Fort) 군기지의 군경을 탈환하였다. 10월 하순에는 쟈프나 반도의 북부 KKS 항구를 장악하고 11월 초에는 북부 만나르(Mannar) 지역을 평정하는 전과로 대항하였다. 1990년 11월 말 LTTE는 북중부 교통요충지 만쿠람(Mankulam)의 군기지를 기습하여 정부군 약 100명을 살육하는 등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였다.
1991년 정초에 한 휴전 선언에 대하여 스리랑카 정부는 LTTE에게 1월 3일부터 1주일간 휴전한 후, 1월 11일 군사 작전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군부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었다. 인도 신정권의 슈클라(Shukla) 외상은 1991년 1월 말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계 난민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 유입문제를 협의한 뒤, LTTE가 인도 영토를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1991년 3월 2일 LTTE는 콜롬보(Colombo) 시내에서 위제라트네(R. Wijeratne) 국방담당 국무장관을 폭사시키고, 5월 22일 인도 타밀나두 주에서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수상을 암살하였다. 6월 15일 인도 총선에서 타밀나두 주 정권은 드라비다진보전선(DMK)1)에서 친 CONG(Ⅰ)의 전인도드리비다진보동맹(AIADMK)2)으로 교체되었다. 이에 따라 북동부 사태와 관련된 스리랑카·인도 양국간의 협력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타밀나두 주정부는 스리랑카계 타밀에 대한 무장 검거에 나섰다.
1991년 6월 21일 LTTE는 콜롬보 시내에 있는 군합동작전본부(Joint Operation Command)를 폭파하고, 6월 28일 동부 암파라(Ampara)지역에서 민간인 버스를 공격하였다. 또한 7월 6일 포론나루와(Polonnaruwa) 지역에서 주민학살을 비롯하여 갖가지 테러활동을 계속하였다. 7월 10일 북부지방의 엘리펀트 패스(Elephant Pass) 군기지를 기습공격하였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군은 8월초 엘리펀트 패스 군기지의 LTTE 포위망에 대한 섬멸격전을 전개하였다.
1997년 7월 하순 헤라트(H. Herat) 외무장관은 인도 신정권 수립 이후 최초의 각료급 사절로 인도를 방문하였다. 그는 북동부 사태와 관련해 정치적 해결의 필요성과 타밀나두 주로 유입한 스리랑카계 난민을 스리랑카 본국으로 조속히 귀환하기로 인도 신정권과 합의하였다.
1992년 말 스리랑카는 북동부 사태의 해결 방안을 심의하기 위해 국회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2월 27일 싱할라계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정치단체 사스(SAS)3)가 결성되었다. 1992년 1월 하순부터 인도 타밀나두(Tamil Nadu) 주로 피신한 스리랑카계 타밀 난민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스리랑카 정부가 군사적으로 평정한 동부와 북부 일부 지역에서는 정상상태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1992년 3월 말 가톨릭 대표단이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와 회동하였으며, 4월 하순 불교 대표단이 자프나(Jaffna) 지역을 방문하여 LTTE와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LTTE는 4월 10일 동부 암파라(Ampara) 시내와 콜롬보(Colombo) 인근의 마하라가마(Maharagama)시내에서 버스를 폭파하고, 4월 29일 포론나루와(Polonnaruwa) 지방 내 이슬람교도 마을을 습격하였다.
1991년 5월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암살의 배후로 인도 정부는 LTTE를 지목하고 수사하였다. 5월 15일 인도 국회는 LTTE를 불법화하고, 인도·스리랑카간의 해협에 대한 공동 수색 체제를 마련하는 것을 비롯하여 대(對) LTTE 지원을 막는 데 협력하였다. 또한 프레마다사 대통령이 서남아 제국을 순방하는 동안 10월 1일 ~ 3일간 인도를 공식 방문함으로써 양국간 우호협력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92년 8월 8일 북부 자프나 반도의 서쪽 캬트(Kayts) 섬에서 전선을 시찰하던 정부군의 중심 인물인 코브베카두와(Kobbekaduwa) 소장 일행이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다. 10월 15일 LTTE는 동부 포론나루와 지역에 있는 이슬람교도 4개 마을을 급습하여 약 150명을 사살하였다. 이슬람계 정당인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4)는 10월 23일을 ‘검은 금요일(Black Friday)’로 공표하였다. 1992년 11월 16일 출근하던 페르난도(C. Fernando) 해군 사령관은 콜롬보 시내에서 LTTE 자살 특공대에게 암살당하였다.
1993년 1월 16일 LTTE 군사령관을 역임한 핵심인물인 키투(Kittu)가 무기 운반선에 탑승한 채 자프나로 잠입하던 중 인도 해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1993년 3월 LTTE의 지도자 프라바카란(Prabhakaran)이 BBC와의 기자 회견에서 밝힌 입장은 다음과 같다.
· 국회의 북동부사태해결위원회는 주류가 싱할라인 정당이므로 타밀인들의 기본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 북부와 동부 주는 통합되어야 하며, 친정부 타밀계 정당들도 이를 선호한다.
· 북동부사태해결위원회가 제의하는 연방제가 타밀인들의 자치제를 인정한다면 검토할 용의가 있다.
· 인도 정부는 타밀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부당한 간섭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93년 5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이 노동절 행사 도중에 LTTE 자살특공대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암살당하였다. 1993년 6월 국회의 북동부사태해결위원회는 북부와 동부 주 통합에 관한 주민투표를 4개월 이내에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나 결국 실시하지 못하였다. 1993년 8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소수민족차별위원회는 (Geneva)
에서 스리랑카에 관한 결의안 초안을 채택하려고 했으나 스리랑카 정부의 반대로 채택하지 못하였다.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의 문제는 단순한 국내테러 문제이며 인종분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993년 9월 정부군은 대규모 군사 작전인 야르 데비(Yal Devi)를 북부 지역에서 전개하였다. 엘레펀트 패스(Elephant Pass)로 북상하여 자프나 호수 북쪽 키랄리(Kilali) 선착장을 파괴함으로써 물적 교류의 차단을 시도하였다. 1993년 11월 LTTE는 푸네린(Pooneryn)에 있는 정부군 군사기지를 기습 점령한 후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약 450명의 정부군이 전사하였으며, 정부군의 방어태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5) 스리랑카 인민연합(PA) 정부 집권시기(1994년 ~ 2001년 12월)
스리랑카 인민연합(PA)1)정부는 1994년 8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집권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무력충돌은 다음과 같다. 1994년 8월 총선 후,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신임 수상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 측에 대화를 통한 평화적 사태해결을 제의하였다. 이에 LTTE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민연합(PA) 정부는 자프나(Jaffna) 지역에 대한 물품반입 금지조치를 완화하였다. 그리고 8월 30일 군수품을 제외한 28개 품목의 반입을 허가하였다.
1994년 10월 13일과 14일 정부 대표단 4명은 자프나에서 LTTE와 제1차 예비회담을 개최하였다. 1994년 10월 24일 통일국민당(UNP)2) 대통령 후보 가미니 디사나여켜 디사나여켜(Gamini Dissanayake) 의원이 선거 유세 도중에 LTTE 자살특공대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암살당하였다.
1995년 8월 인민연합(PA) 정부는 타밀인종분규의 항구적 해결책으로 지방분권화계획(Devolution Package)을 제시하고, 타밀 정당과의 정치협상을 통해 인종분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지방분권화계획이란 현 정부 형태에 연방제 성격을 가미한 것으로 중앙정부는 외교, 국방, 국가기획, 금융에 관한 권한을 갖고, 지방정부는 보건, 교육, 농업, 관개, 어업에 관한 권한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LTTE는 인민연합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1995년 10월 유류저장고를 폭발시켰다.
1996년 1월 LTTE는 중앙은행 건물에 폭탄테러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맞서 스리랑카 정부도 LTTE와의 협상을 일시 중단하고 1995년 11월 이후 북부지역 LTTE 근거지에 대한 군사공격을 감행하여 1996년 6월까지 자프나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탈환하였다. 1996년 7월 26일부터 스리랑카 정부군은 물라이티부(Mullaitivu) 기지를 포기하였다. 대신 병력 5000명과 공군기를 동원하여 9월 29일 LTTE의 새 근거지인 킬리노치치(Killnochchi)를 함락하였다. 함락 과정에서 LTTE 700여 명과 정부군 250여 명이 사망하였다. LTTE는 패배를 만회하고 사기를 충전하는 차원에서 흩어지는 전술(hit & run)을 구사하며 후속 테러를 계속하였다.
1997년 4월 3일 영국 외무차관 라이언 폭스(Lian Fox)의 중재로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과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통일국민당(UNP) 총재는 향후 민족분쟁 문제에 관해 여야에 상관없이 초당적으로 대처하기로 합의하였다. 1997년 7월 LTTE는 북한의 모란봉호를 포획하여 1명을 피살했으며, 9월에는 중국화물선 진정호(Cordiality)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 정부군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모든 외국선박을 합법적인 공격 목표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1997년 10월 6일 스리랑카 정부군은 대반군 공세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정부군은 34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반군은 15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97년 10월 8일 미국 국무부는 LTTE를 테러단체로 규정함으로써 미국 내 입국, 선전활동, 독립자금 모집활동을 불법화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 정부군 병력을 훈련시킬 미군 요원을 콜롬보(Colombo)에 파견하였다. LTTE는 전세계의 타밀족들에게 매달 최소 1000만 미국달러 이상의 독립자금을 지원받아 주로 무기 구입을 비롯한 대정부군과의 전쟁경비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10월 15일 LTTE는 콜롬보 시내 중심가에서 차량폭탄테러와 총격전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0명이 사망하고, 외국인 62명(한국인 2명)을 포함하여 1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세계무역센터, 갈라다리호텔, 힐튼호텔이 파손되었다. 스리랑카는 외국인투자와 연간 약 40만 명의 관광객 유치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97년 10월 16일 코피 아난(Kofi Annan) 국제연합사무총장은 이 테러 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7년 10월 24일 스리랑카 정부는 중앙정부의 일부 권한을 지방정부에게 이양함으로써 타밀인들에게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하는 지방분권화계획(Devloution Package) 법안을 의회에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다음 날인 25일 인민연합(PA) 정부는 콜롬보 시내에서 LTTE 요원 색출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965명을 검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LTTE는 11월 9일 케라니티사(Kelanitissa) 발전소를 폭파시키고, 1998년 1월 25일에는 캔디(Kandy) 지역에 있는 「불치사」주변에서 폭탄 테러를 자행하였다.
1998년 1월 27일 콜롬보 고등법원은 LTTE 지도자 프라바카란(Prabhakaran)을 포함하여 78명에게 살인혐의와 1996년 중앙은행 폭파사건 혐의자로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1998년 3월 5일 LTTE는 마라다나(Maradana)역 주변에 폭탄테러를 일으켰으며, 4월 14일 자프나 시내에 폭탄테러를 일으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9년 5월 12일 인도 대법원은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전(前) 수상의 암살 혐의자 26명 중 4명에게 사형을 판결하였다. 7월 6일 LTTE는 웨리에야(Welieya) 지역을 시찰하던 라트와테(A. Ratwatte) 에너지 장관 일행에게 포사격을 실시하였으나, 라트와테 장관의 암살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7월 29일에는 온건파 타밀 의원인 니란 트루체르반(Neelan Tiruchelvam)을 암살하고, 9월 19일에는 암파라(Ampara) 지역의 민간인 54명을 살해하고, 물라티부(Mullativu) 해상에서 중국 상선을 공격하였다. 또한 11월 2일에는 자프나 지역의 일람민족자유당(EPDP)3) 소속의 나다라자(N. Nadarajah) 의원을 암살하는 등 끊임없이 테러 활동을 하였다.
1999년 12월 18일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은 LTTE 자살폭탄테러 요원에 의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또한 2001년 1월 5일에는 수상실 앞에서 LTTE 여자요원의 자살테러로 경찰관 9명과 민간인 4명이 사망하였으며, 바분니야(Vavuniya) 우체국 폭탄테러로 8명이 사망하고 73명이 부상당하였다.
2000년 2월 17일 스누트 볼레박크(Knut Volleback) 노르웨이 외무장관은 스리랑카에 방문하여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과 면담하였다. 그는 노르웨이 정부가 스리랑카 정부-LTTE 간의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2000년 3월 25일 LTTE는 스리랑카 정부에게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전제조건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과 국제사회 감시에 의한 정전을 제시하였다.
2000년 4월 28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정부군이 엘리펀트 패스(Elephant Pass) 지역에서 LTTE와 교전하던 중 후퇴한 것과 관련하여 대국민 연설을 하였다. 대국민 연설에서 스리랑카 정부는 LTTE가 평화를 피한다면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도모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5월 3일 스리랑카 내각은 LTTE에 대한 전국가적 임전태세를 발표하였다.
2000년 5월 17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는 망갈라라마야(Mangalaramaya) 사원 주변에 폭탄테러를 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민간인 22명과 군경 6명이 사망하였다. 2000년 5월 28일 유럽의회는 스리랑카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국가에서 스리랑카 내 테러행위를 지원하는 조직을 테러단체로 지정하기로 결정하였다. 2000년 6월 7일 클레멘트 빅터 구네라트네(Clement Victor Gunaratne) 산업개발장관이 LTTE 자살테러 요원에게 콜롬보 외곽에서 암살당하였다.
2000년 6월 28일 솔헤임(E. Solheim) 노르웨이 특사와 스리랑카 정부 지도자들은 LTTE와의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정부는 영토 내 테러 조직에 대한 불법테러단체 지정법률 「대터러법(Terrorism Act 2000)」을 통과시켰다. 2000년 12월 24일 LTTE는 1개월간 일방적인 정전을 선언하고, 이어 2001년 1월 23일과 2월 24일 2차에 걸쳐 정전을 연장하는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는 LTTE가 3개월간의 일방적인 정전 기간에도 동북부 지역에서 무력 행위를 35차에 걸쳐 계속 자행하였다고 밝혔다.
2001년 2월 21일 LTTE는 엘리펀트 패스(Elephant Pass) 지역에서 정부군과 대규모 전투 태세를 취하였다. 2001년 2월 28일 영국 정부는 지정법률 「대테러법(Terrorism Act 2000)」에 의거하여 LTTE를 국제테러단체 21개 중 하나로 지정함으로써, 3월 18일 LTTE는 런던 소재의 사무국을 스리랑카 북부의 와니(Wanni) 지역으로 옮겼다. 2001년 4월 7일 LTTE는 스리랑카 정부가 대(對) LTTE 제재 조치를 해제하지 않으면, 노르웨이가 참여하는 평화회담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존 웨스트보르그(Jon Westborg) 스리랑카 주재 노르웨이 대사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밝혔다.
2001년 4월 15일 스리랑카 정부는 싱할라와 타밀의 신년 기간 중 5일간 정전을 선언하고 LTTE 용의자 10명을 석방 조치하였다. 이에 대해 타밀계 정당들은 스리랑카의 석방 조치가 LTTE와의 평화회담이 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환영하였다. 2001년 5월 9일 안톤 바라신감(Anton Balasingham) LTTE 협상대표는 솔헤임(E. Solheim) 노르웨이 특사와의 회견에서 스리랑카 정부에게 정전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5월 14일 스리랑카 정부는 LTTE의 정전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5월 26일 평화회담이 개시되기 전에 LTTE에 대한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혔다. 5월 29일 타밀 바산 바부니야(Thamil Vassan Vavuniya) 지역의 타밀엘람인민자유조직(PLOTE)4)의 지도자가 LTTE로 추정되는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2001년 7월 4일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은 「테러방지법」에 의거하여 LTTE를 테러단체로 지정하였다. 7월 24일 LTTE는 스리랑카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국제공항을 습격하였다. 그 결과 민항기 6대와 군용기 8대가 폭파되고 민간인 13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스리랑카 관광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2001년 10월 5일 미국 정부는 「외국테러조직 26개」에 LTTE를 테러 단체로 재지정하였다. 11월 4일 영국 정부는 영국의 LTTE 재산을 동결하기로 하였다. 2001년 10월 30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LTTE가 무장해제하기 전이라도 LTTE와 평화회담을 개시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2001년 11월 27일 프라바카란(Prabhakaran) LTTE 지도자는 「영웅의 날(Heros’s Day)」연설에서 서방 국가들이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테러단체로 지정한 것을 해제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6) 스리랑카 통일국민전선(UNF) 정부 집권시기(2001년 12월 ~ 2004년 4월)
2001년 12월 21일 새로 출범한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정권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 측에 1개월간의 무조건 정전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2년 1월 21일 LTTE에 대한 정전을 1개월 추가 연장하였다. 이에 대해 LTTE는 킬리노치치(Killinochchi)에 수감되어 있는 정부군 10명을 석방하였다.
2002년 2월 22일 노르웨이 정부가 협상촉진자(facilitator)로 참여한 가운데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월 2일 런던에 거주하는 안톤 바라신감(Anton Balasingham) LTTE 협상대표는 북부 지방의 와니(Wanni)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3월 26일 LTTE는 스리랑카 정부와의 평화회담 개최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5월 15일 인도 정부는 LTTE에 대한 재제 조치를 연장하였다.
2002년 7월 24일 방미 중인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수상은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과 회담하였다. 회담에서 미국 정부는 위크레메싱게 정권이 추진하는 스리랑카 평화과정을 지지한다고 천명하였다. 8월 2일 미국 정부는 LTTE를 테러단체로 지정한 것을 연장하였다. 8월 14일 노르웨이 정부는 스리랑카 정부와 LTTE가 평화회담 개최에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
2002년 8월 22일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위크레메싱게 수상의 방미에 대한 답방차원에서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북부 지방의 자프나(Jaffna) 지역을 시찰하였다. 9월 4일 스리랑카 정부는 “평화회담 개시 1개월 전 해제” 방침에 따라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LTTE에 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였다.
2002년 9월 16일 ~ 18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제1차 평화회담이 타이 사타힙(Sattahip) 해군기지에서 개최되었다. 평회회담에서 LTTE는 “분리독립국가 건설” 요구를 철회하고, “자치”에 의한 권력이양방식(Devolution Package)을 확인하였다. 정부와 LTTE는 동북부지역에 합동기동부대(Joint Task Force)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2002년 10월 31일 ~ 11월 3일 정부와 LTTE 간 제2차 평화회담이 타이 나콤파손(Nakompathon)에서 개최되었다. 양측은 “동북부지역 긴급 인도적 지원 및 재건지원 소위원회(SIHRN)”, “정치문제위원회”, “분쟁완화 및 정상화 소위원회” 등 3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11월 25일 노르웨이 오슬로(Oslo)에서 개최된 스리랑카 원조공여국회의에서 국제사회는 약 7000만 달러를 스리랑카에 원조하기로 서약하였다.
2002년 12월 2일 ~ 5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제3차 평화회담이 오슬로에서 개최되었다. LTTE는 “하나의 스리랑카 하에서의 연방제적(federal) 구조”에 합의하였다. 2003년 1월 6일 대공포와 탄약을 운반하던 LTTE 트롤어선이 스리랑카 평화감시단(SLMM)에게 적발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 도중에 LTTE 요원 3명이 트롤어선을 폭파시키고 그 자리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03년 1월 6일 ~ 9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제4차 평화회담이 타이에서 개최되었다. 평화회담에서 양측은 자프나 지역 실향민이 재정착하는 데 지원하고, 동북부 지역에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한 제반 노력에 경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다음 회담부터 인권 문제를 의제에 포함하기로 합의하였다.
2003년 2월 7일 ~ 8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제5차 평화회담이 베를린에서 개최되어, 인권문제가 논의되었다. 회담 결과 LTTE는 앞으로 소년병 징집을 중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3월 10일 야당인 인민연합(PA)1)과 인민해방전선(JVP)2)은 콜롬보(Colombo)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평화회담에서 정부가 LTTE에 너무 많이 양보하고 있다며,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평화회담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날 스리랑카 해군은 동북부해상에서 무기를 운반 중이던 LTTE 소속으로 추정되는 화물선을 격침했다. 이에 대하여 LTTE는 강력히 항의하였다.
2003년 3월 18일 ~ 21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제6차 평화회담이 일본 하코네(Hakone)에서 개최되었다. 양측은 2003년 당시에 발생한 해상도발 사태와 관련하여 다른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해상활동지침을 마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정전협정을 준수하기로 하였다. 또한 앞으로 개최될 평화회담에서 하나의 스리랑카 아래 자치에 기초한 연방제적 해결에 관한 기본입장을 재확인하고 동북부 지역에서 지방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평화회담 기간 중인 3월 20일 LTTE는 물라이티부(Mullaitivu) 해안 북서쪽 해상에서 조업하던 중국선적 트롤어선을 격침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고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다.
2003년 4월14일 스리랑카 평화과정 지원 세미나가 도쿄(Tokyo) 원조공여국회의보다 먼저 워싱턴에서 개최되어 스리랑카 원조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었다. 그러나 LTTE는 미국 국내법상 불법테러단체이기 때문에 세미나에 초청받지 못했다. 이에 4월 21일 LTTE는 당분간 평화협상에 참가하지 않으며, 도쿄(Tokyo) 원조공여국회의에도 불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2003년 5월 17일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수상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가 협상을 재개하고 도쿄(Tokyo)회의에 참석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안톤 바라신감(Anton Balasingham) LTTE 협상대표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는 LTTE가 도쿄(Tokyo)회의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양측 대표가 참여하는 임시위원회 소집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5월 21일 LTTE는 임시위원회 소집 제안을 거절하였다. 대신 LTTE는 동북부 지역의 정책결정, 개발과 재건 프로젝트 이행에서 주도적인 역할 수행, 국제사회 원조의 사용과 분배에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 임시행정기구(Interim Administration) 설치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5월 29일 스리랑카 정부는 LTTE의 제안이 스리랑카 헌법에 위배된다며 거절하였다. 대신 LTTE가 국제사회의 원조를 분배하는 과정과 동북부 지역을 재건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절충안의 주요 내용은 최고정책결정기구(Apex Policy Making Body), 행정 또는 집행기구(Administration or Implementing Body)를 설치하고 최고정책결정기구에 타밀의 진정한 대표가 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5월 30일 LTTE는 정부가 제시한 절충안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우선 LTTE가 제시한 임시행정기구 설치안과 차이가 크며, 두 번째로 LTTE에게 행정권과 조직원 구성권이 없으며, 세 번째는 타밀의 진정한 대표라는 표현에서 LTTE의 대표권이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2003년 6월 9일 ~ 10일 스리랑카 원조공여국회의는 LTTE가 불참한 가운데 도쿄(Tokyo)에서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51개국의 원조공여국과 21개의 국제기구가 2003년~2006년간 약 45억 달러를 스리랑카에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한편, 위크레메싱게 수상은 5월 9일 기조연설에서 LTTE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잠정행정기구(Provisional Administrative Structure) 설치안을 제시하고 협상테이블로의 복귀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LTTE는 잠정행정기구 설치안이 지난 5월 29일 스리랑카 정부가 제안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수용을 거부하였다.
2003년 6월 23일 안톤 바라신감(Anton Balasingham) LTTE 협상대표는 런던에서 솔헤임(E. Solheim) 노르웨이 특사와 면담하였다. 협상대표는 면담에서 평화협상의 개시조건으로 북부 자프나(Jaffna)의 보안구역 해제문제와 실향민 재활문제, 동북부 잠정행정기구의 구조, 법률, 권한, 독립성, LTTE의 우월적 지위를 협의한다면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리랑카 평화과정이 지나치게 국제화되면서 스리랑카 정부와 LTTE 간 파트너십이 무너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003년 6월 24일 위크레메싱게 수상은 1주일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하여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와 회담하였다. 회담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는 위크레메싱게 수상의 지혜와 용기를 평가하고, 스리랑카 평화과정에 최대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7) 스리랑카 통일인민자유연합(UPFA) 정부 집권시기(2004년 4월 ~ 2010년 4월)
2003년 11월 쿠마라퉁가(Kumaratunga) 대통령은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수상이 이끄는 통일국민당(UNP)1) 정부가 주도하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약어)와의 평화협상이 LTTE측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이유로 2004년 2월 국회를 해산하고 4월에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인민자유연합(UPFA)2)이 다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대통령이 평화협상을 주도하게 되었다.
2004년 노르웨이 정부는 스리랑카 정부와 LTTE간 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중재노력을 계속하였다. 평화협상 의제와 관련하여, LTTE는 의제로 임시자치기구 설치 문제 하나만 다룰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정부는 임시자치기구 설치 문제를 비롯하여 종합적인 최종 평화안에 대한 협상을 주장함에 따라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04년 12월 26일 스리랑카를 덮친 쓰나미(Tsunami)로 평화협상 논의가 중단되었다. LTTE의 실질적 영향권 안에 있는 북동부 쓰나미 피해 지역에 대한 복구재건 사업추진을 위해 정부와 LTTE간 공동조정기구(P-TOMS)를 설치하는 문제가 주요 국정 현안이 되었다.
2005년 6월 24일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공동조정기구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인민해방전선(JVP)3)과 불교승려정치조직(JHU)4)은 대법원에 제소하였다. 인민해방전선은 정부의 공동조정기구 설치 서명에 대한 반발로 6월 16일 통일인민자유연합 연립정부에서 탈퇴하였다. 7월 15일 대법원이 정부의 상기 양해각서 서명은 합법적이나 공동조정기구에 나타난 기금 관리, 지역위원회 소재지, 지역위원회 권한을 비롯한 주요 사항에 대해서는 잠정유예판결을 내림으로써 공동조정기구 시행에 제동이 걸렸다.
2005년 8월 12일 카디르가마(Kadirgamar) 외교부장관이 LTTE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테러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탄이 확산되었다. 그 후에도 LTTE는 군인, 경찰, 언론인, 학교교장을 비롯하여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였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의 실효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5년 11월 대통령 선거 후, 12월과 2006년 1월 LTTE는 끊임없이 무력도발을 일삼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스리랑카 정부와 LTTE에게 평화협상테이블로 복귀하라는 압력이 국내외적으로 가중되었다.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2006년 1월 25일 스리랑카 정부와 LTTE는 스위스 제네바(Geneva)에서 정전협정이행을 강화하는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정부와 LTTE 양측은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제네바 정전회담을 2006년 2월 22일과 23일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2009년 4월 스리랑카 정부군이 LTTE의 최후저지선 안으로 진격함에 따라 LTTE는 협소한 지역에 포위되었다. 이는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하였다. 정부군은 LTTE가 억류하고 있던 약 10만 명의 시민을 안전지대로 구출하였다. 2009년 5월 17일, 1983년 이래 26년간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며 지속된 스리랑카 내전은 정부군이 LTTE의 장악 지역을 완전히 수복함으로써 끝났다. 락자팍사(Rajapaksa)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 승리를 선언하였다.
2009년 5월 18일 LTTE 지도자 베루필라이 프라바카란(Velupillai Prabhakaran)이 정부군에게 사살됨으로써, 스리랑카 내전은 군사적 의미에서 사실상 종식되었다. 5월 19일 라자팍사 대통령은 국회에서 내전 종식을 선언하는 대국민 연설을 하였으며, 내전 기간 동안 약 7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약 30만 명의 국내피난민(IDPs)5)의 인권과 구호문제, LTTE 장악지역인 동북부 지역의 지뢰제거와 개발문제, 타밀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에 대한 정치적 화해문제가 주요 과제로 부상하였다.
스리랑카의 내전이 종식된 후,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과 서방 국가들은 피난민들의 조기 정착을 스리랑카에 촉구하였다. 그리고 난민캠프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사례를 국제인권규범에 의거하여 지적하였다. 이로 인해 타밀족을 비롯한 소수인종에 대한 정치적 화해문제, 내전기간에 발생한 범죄문제, 언론자유를 비롯한 인권문제가 스리랑카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10년 1월 대선과 4월 8일 총선에서 라자팍사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인민자유연합(UPFA)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스리랑카는 동북부 지역의 재건과 피난민들의 재정착에 속도를 냈다. 또한 국내외 압력 속에서 지역간의 화합 정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은 테러방지법의 폐지,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구속자 석방을 비롯하여 인권과 관련된 15개 항목을 개선할 것을 스리랑카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 정부가 이행하지 않을 경우, 2010년 5월 15일부터 대(對) 스리랑카 일반특혜관세제도(GSP)6)와 특혜를 폐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국제연합(UN)은 스리랑카 내전이 끝날 때 즈음에 발생한 인권침해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합 사무총장 산하에 패널을 설치하였다. 이 일로 스리랑카는 서방 세계와 인권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