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기의 미학
아청 박혜정
2008년 순수문학 등단
‘멍 때리기’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멍하다: 정신이 빠진 듯 우두커니 있다’라는 형용사와 ‘멍하니’ 라는 부사 밖에는 없고 ‘멍 때리기’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얼마 전 서울특별시가 운영하는 SNS에는 제1회 멍 때리기 대회(space-out competition) 현장 사진과 함께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멍 때리기 대회의 현장은 말 그대로 초점 없는 시선들로 가득합니다.”는 글이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50명이 참가할 수 있는 이 대회는 성별,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것이 우승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회 중에는 심하게 움직이거나 딴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심적으로도 제대로 멍을 때리고 있어야 한다. 주최 측은 8분마다 참가자들의 검지 끝에 측정기로 심박을 재고 심박 수가 심하게 오르내리면 탈락이라는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 심박 수를 측정한 결과 가장 안정적으로 측정된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첫 대회의 우승자는 9살 초등학생으로 선정이 됐다. 우승자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트로피가 수여되었다. ‘아직은 스트레스를 덜 받은 초등학생이었기에 우승이 가능했을 것 같다’라는 추측을 했었다. 그런데 수상 학생의 어머니의 말을 들어 보면 “개수를 밝히기 민망할 정도의 학원을 다니다 보니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어 과부하가 걸려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정신의학적으로 멍 때리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있을 때 업무나 학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멍 때리기를 하는 순간 뇌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멍 때리기를 습관적으로 자주 하게 되면 뇌세포의 노화를 빠르게 해 치매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장기간 지속되면 건망증이 심해지고, 불안, 분노, 근심 등의 표현이 잦아지며, 계산 능력과 판단력도 떨어지고,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멍 때리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앤드류 스마트의 '뇌의 배신' 을 보면 멍 때릴 때, 휴식을 취할 때, 빈둥거릴 때에만 뇌의 특정 부분이 활동하는데 그것을 DMN(default mode network) 라고 부른다. 그래서 휴식을 취해야만 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 진다고 한다. 멍 때리기를 통해 과도한 집착이나 불필요한 생각들을 의식 속에서 버리고 머리를 비우면 뇌에 휴식을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멍때리기가 습관적이 아니라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멍 때리기는 자유연상이라는 기법과 같아서 마음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면 무의식의 고민까지도 치유될 수 있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멍 때린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와 비슷한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은 머릿속이 생각들로 너무 꽉 차 있어서 멍하게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나의 경우에도 밤에 잘 때 가만히 누우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잠이 들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음악이나 라디오를 켜 놓고 그 소리에 집중해서 잠을 청하곤 한다.
멍하게 있어보려고 시도를 해 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서 ‘지식인’에게까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질문에 달린 댓글을 보니 “그냥 몸에 힘을 빼고 눈 풀린 것처럼 있으면 된다.” 라는 답변이 있었다. 하지만 이 때 허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자칫 잠을 자게 된다. 이렇게 멍한 상태가 되면 과부하에 걸린 뇌가 정리를 하게 된다.
가르쳐준 방법대로 시도는 해 보았지만 몇 분을 못 넘기고 다른 생각들로 머릿속이 차 버린다. 그런데 얼마 전 수영장에 가서 튜브에 몸을 맡기고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물위를 둥둥 떠다닌 적이 처음 있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멍한 순간을 느낀 후 복잡한 머리가 깨끗이 텅 빈 것 같이 느껴지면서 상쾌함까지도 느껴졌다.
정신 건강을 위해 멍 때리며 머리를 비우는 방법도 좋지만 때로는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며 채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의 경우 딸과 단 둘이 잠시 여유 있게 보냈던 휴가 등을 생각하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띄워지며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가끔씩은 바쁨과 짜증을 잠시 내려놓고 머리를 비울 때는 멍 때리기로, 머리를 채울 때는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정신적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