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고향 하늘로 달려 갑니다.
김유훈
일 주일에 5일을 세미트럭 (Semi Truck) 일을 하고 있는 나는 거이 매일 미국 국경을 넘나들며 일하고 있다. 내가 과거 유학생 시절, 국경 통과는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온 가족이 모두 차에서 내려 국경 사무실에 들어가 인터뷰 후 서류작성과 통과 비용을 내야 국경을 넘어가기에 나는 미국 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이제는 카나다 시민으로서 당당히 큰 트럭을 몰고 국경을 넘어 다니고 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서 그냥 고속도로 통과쯤으로 인식되고 또 가끔은 안면 있는 세관원을 만나 반갑기도 하다.
국경 통과에는 서류로만 그냥 보내 주기도 하고 약간 의심스러우면 X-Ray 통과라는 것을 거쳐서 보내기도한다. 그리고 의심스럽거나 혹시 정보를 미리 알았다면 덕(Duck)이라고 하여 트럭을 검색대에 대고 삿삿히 조사하는 경우도 하다. 이런 경우 시간이 서너 시간 더 걸려서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갈 길이 먼 우리에게는 답답하지만 미국의 정책이라 그냥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몇 년에 한번 정도있을 정도이고 대부분은 쉽게 국경을 건너간다.
이 과정만 지나면 바로 고속도로가 열려서 마음놓고 신나게 달려가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서부지역은 경치도 좋고 도로도 잘 되어 있어 나에게는 트럭보다는 드라이브 수준의 즐거움이 있다. 철 따라 변하는 4계절의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나는 자연과 더욱 친근함도 느끼고 누구로 부터 간섭도 없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 만의 세계를 열어간다.
서너 해 전, 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 들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한 밤중에 국경을 넘게 되었다. 마침 트럭 한 대도 없었고 조용한 국경에 내가 도착한 것이다. 내 트럭이 국경 트럭부스에 천천히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서류와 내 카드를 국경 세관원에게 건내 주었다. 그러자 그 세관원은 서류와 내 카드를 본 후 나를 쳐다 보며 물었다.
“너 카나다에 얼마나 살았느냐?” 고
나는 “ 14년이 지났다”고 했더니 “와우” 하더니 또 물었다.
“원래는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해서 나는 “Korea”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너 마지막 이름이 ‘Kim’ 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물었다.
“네 생각에 그러면 너는 한국인이냐? 아니면 카나다 인이냐?” 하였다.
그래서 “나는 절반 절반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더니
그는 다시 “ 아니 그것보다 더 네 가슴은 어느 쪽이냐?” 고 물으면서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까지 두드리면서 네 마음(Your Heart)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 나는 과거에는 한국인으로 살았고 지금은 카나다에서 15년이 지나 카나다인으로 살아서 카나다 인이고 앞으로 이곳에서 죽은 후 묻혀야 할 카나다 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또 묻는다. “그럼 예를 들어 카나다 하고 한국사이에 전쟁이 붙는다면 너는 누구 편에 서서 싸우겠는냐?” 하였다.
그래서 나는 “ Your Know? ” 하며 설명하였다. “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백만명이 넘고 맥시코계는 수 천 만명인 데 지금 그들 중 수 많을 젊은 이들은 미군( US Army)이 되어 이라크와 많은 곳의 전쟁에서 싸우다 목숨바치고 죽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그리고 “ 나도 같은 경우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세관원은 얼굴 색이 밝아지고 웃으면서 “You are so good man ! ” 하며
“ No X-Ray Today! ” 하며 무슨 큰 선심 쓰듯이 말하였다.
그래서 나도 “너 사회학 공부했느냐? 아니면 철학 했느냐?” 하며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Just Survey ! ” 하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도 “나는 과거는 과거 , 현재는 현재 그리고 미래는 아직도 나의 희망이다” 라고 하였더니 그는 다시 한번 더 “ You are so good man ! ” 하며 트럭 시동을 걸고 떠나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국경을 넘어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조금전 그 미국 세관원과의 대화를 곰곰히 새겨 보았다.
비록 나는 어쩌다가 이 외국 땅에 와서 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고국이 살아 있다. 그리고 집에서의 생활도 온전히 한국식이다. 어려서 이곳에 온 두 애들도
한글을 3년 간 더 가르쳐서 우리 말과 글을 잘 하고, 한국 음식 먹고, 신문도 한국것, 그리고 방송도 한국 위성 방송으로 고국 뉴스에 오락과 연속극까지 보며, 인터넷도 전부 한국 것으로 깔려 있다. 왜 이렇게 외국에 살면서 예전에 한국에서 살 때 보다 더 고국소식에 목 말라서 살고 있는 지 모르겠다. 연어가 죽을 날이 가까이 오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가 태어난 모천을 찿아 오듯이 나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국이 몸서리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다.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는 영어학원 다니고, A.F.K.N.영어뉴스 보고 외국영화 보고 토플에 목이 메어 영어 테으프 듣고 다녔다. 그러나 이런 노력 때문에 외국에 나갈 꿈을 갖고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실제 외국에서 살아보면 우리같은 이민자들은 영원한 변두리 인생이 되어 주류사회 속에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또 고국의 현실에도 잘 적응되지 않는 국제 고아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식구들의 생활은 모두 한국 식으로 하고 있기에 가끔 이곳이 한국인지 카나다인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심지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 마리는 원래 영어 알아듯던 개였는 데 이제는 한국말 알아 들어야 먹고 사는 한국 토종 강아지로 변하였다. 특히 우리 두 애들은 한국에서 연예인만 오면 어떻게 알고 뛰어나가서 만나고 온다. 이곳에 다녀간 연예인들 중 송혜교 ,송승헌 , 김민종,엄정화, 홍록기, 등등 그들과 만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진도 함께 찍고 싸인도 받고 와서는 얼마나 기뻐하는 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시절 거리응원 한다고 학교까지 빠지며 뛰어다닌 아이들이다.
비록 내가 세관원에게는 교과서적인 응답으로 말 할 수 있었어도 내 마음은 고국을 떠나 이곳에 묻힌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비록 몸은 외국에 나와 살고 있지만 마음은 늘 고국과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이민자들에게 든든한 고향, 모국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비록 고국 소식이 아무리 어지럽고 시끄럽다하여도 언제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해도 그래도 나는 가고 싶고 그 공해까지도 사랑하고픈 내 조국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동안 내 트럭은 어느새 벨링햄을 지나 산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래 전 내가 충남 서천에서 시무하며 서울을 오갈 때처럼 한 밤에 산 속 길 길을 달려가고 있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