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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5월 22일 수요일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카시아의 성녀 리타 수도자
말씀의 초대
야고보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주님께서 원하시면”하고 말해야 합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3-17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일이 제자들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금지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하는 일은 사실 빈번히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당함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자 제안된 것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야말로 하루빨리 배제하고 소외하여야 할 절대 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 또한 고착된 이념이나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허세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고자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교회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습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야고보서는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서간입니다.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가르침,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 과부들과 고아들, 병자들을 배려하자는 권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 혹독한 박해 시절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오늘 첫 번째 독서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가슴에 사무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야고보 서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생명, 차원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사라져갈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주님께만 기인합니다.
때로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가끔 거룩한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마다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정 첫날 앞에서 바라보면 수녀님들 얼굴이 엄청납니다.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반드시 성녀가 되고야 말겠다는 표정, 내 기도로 온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탁을 드립니다. “인생을 너무 그렇게 전투적으로도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삶을 만끽하시오. 피정도 기쁘게, 영적 생활도 기쁘게 하십시오.”
찰나 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삶의 우여곡절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기억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깨달음. 고통은 우리네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라는 깨달음. 고통은 잠시지만 고통을 넘어서는 데 따르는 은총과 축복은 영원하다는 깨달음.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나이에 반비례해서 좋은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결코 원치 않았던 것들이 슬슬 친구처럼 찾아옵니다. 병고나 노화나 그로 인한 부작용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측면의 기쁨을 추구해야 할 때로구나. 그것은 영적 생활 안에서의 기쁨, 포기와 물러섬 안에서의 기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기쁨, 그 기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웠던 속담 중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를 다니면서 이 속담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를 기어 다니는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그 애벌레들이 모두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풀잎에, 가지에 붙어서 죽은 것처럼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애벌레들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고치의 과정을 지내고 있는 애벌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거지왕자’라는 동화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궁궐에만 살던 왕자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 거지로 변장하고 궁 밖으로 나왔습니다. 왕자는 화려하고, 멋진 것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지지 못해서, 신분이 낮아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왕자의 옷을 벗고, 거지 옷을 입었지만 왕자는 비로소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1982년도에 신학생은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그만 두는 동창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독신의 의무를 지킬 수 없어서 그만 두는 친구,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했지만 신학교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현실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며 그만 두는 친구, 부제품을 받았지만 서품을 앞두고 그만 두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2023년 한국천주교교회의 통계자료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597만 675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비율은 13.5%입니다. 86.5%의 교우는 주일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팬데믹 이후 주일미사 참례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상황까지 회복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신앙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 구원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나비가 되듯이, 신앙인은 복음을 실천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시 "방랑자의 비밀" (The Riddle of Strider)”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네. 타버린 재에서 불길이 깨어날 것이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구치리라, 부러진 칼날은 새로이 제련될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
<우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
우리이지만
우리라는
울타리 허물어
우리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또 다른 우리
기꺼이 품어야
참으로 우리라네
오늘의 성인
성녀 리타(Rita)
신분 : 과부, 수녀
활동지역 : 카시아(Cascia)
활동연도 : 1380경-1457년
같은이름 : 리다, 리따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고원 남단에 위치한 스폴레토(Spoleto) 부근 로카포레나(Roccaporena)에서 태어난 성녀 리타는 어려서부터 수도성소에 관심을 가졌지만 부모의 반대로 말미암아 12세의 어린 나이로 원하지 않았던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두었지만 18년간의 결혼생활은 불행하였다.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어떤 사람과의 싸움 끝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후 두 아들마저 죽게 되자 성녀 리타는 카시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세 번이나 입회 신청서를 냈지만 미혼이 아니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강한 믿음과 인내는 결국 예외를 만들어 1413년 카시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의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녀는 지난날의 생활을 반성하며 자신처럼 불우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체험하였고, 1441년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과 꼭 같은 상처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카시아의 수도원에서 선종한 후 그녀의 성덕과 기적에 대한 평판이 높아져 성녀의 유해를 중심으로 새 성당이 건축되었다. 성녀 리타는 1626년 7월 16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00년 5월 24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봉사한 리타 성녀는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율리아 (Julia)
활동년도 : +5세기경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코르시카(Corsica)
같은 이름 : 줄리아, 쥴리아
전설에 의하면 카르타고(Carthago)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녀 율리아는 불행하게도 에우세비우스라는 시리아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를 데리고 프랑스 지방으로 가다가 코르시카 섬 북쪽의 케이프 코르소(Cape Corso)에서 하선하였다. 마침 이교도의 축제 기간 중으로 그 섬의 통치자인 펠릭스는 그녀의 주인과 그녀로 하여금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권하였다. 희생제물을 바치면 그녀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제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자 펠릭스는 성녀 율리아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심한 고문을 한 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녀는 코르시카의 수호성인이다. 일부 학자들은 성녀 율리아가 한 세기 또는 두 세기 후에 살았던 인물로 사라센족의 침입 때 살해된 것으로 믿고 있다.
성녀 퀴테리아 (Quiteria)
활동년도 : +5세기경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귀테리아, 뀌떼리아
프랑스 남부와 에스파냐 북부의 많은 성당들이 성녀 퀴테리아에게 봉헌되었고, 프랑스 칼뱅파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들에 의해 그녀의 유해가 뿔뿔이 흩어지기 전까지 잘 보존되어 있던 가스코뉴(Gascogne,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남서부의 지방명)의 에르(Aire)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아왔다. 로마 순교록에 그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고대 전례력 어디에도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성녀에 대한 공경과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었다. 그녀는 에스파냐 갈리시아(Galicia)의 어떤 왕자의 딸로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고 결혼할 것을 강요당하자 왕궁을 뛰쳐나와 가스코뉴 교외 에르에 수도원을 짓고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보낸 수색자들에 의해 발견되어 그곳에서 참수되었다고 전해진다.
성 보보 (Bobus)
활동년도 : +985년
신분 : 은수자
지역 : 프로방스(Provence)
같은 이름 : 보부스
프로방스(프랑스 남동부의 옛 지방) 지방의 기사였던 성 보부스(또는 보보)는 사라센족이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로부터 침략해 왔을 때 용감하게 그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그 후 그는 오랫동안 참회와 속죄의 생활을 하며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로마(Roma)를 순례하러 가던 중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파비아(Pavia) 인근 보게라(Voghera)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프로방스와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보보(Bobo)로도 불린다.
성녀 후밀리타 (Humility)
활동년도 : 1226-1310년
신분 : 과부, 수녀
지역 : 파엔차(Paenza)
같은 이름 : 로산나, 후밀리따, 후밀리따스, 후밀리타스, 휴밀러티
이탈리아의 파엔차에서 어느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성녀 후밀리타(Humilitas)는 15세 되던 해에 우골레토(Ugoletto)라는 어느 귀족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두 자녀를 두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죽고 또 남편마저 병고에 시달리는 등 많은 고난을 받았다. 이윽고 두 부부는 서로 의논하여 고향 근방의 페르페투아(Perpetua) 수도원에 들어갔다. 남편은 평수사로, 그녀는 평수녀로 입회하면서 후밀리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성당에 딸린 방에서 12년 동안이나 은수자로서 생활하였는데, 발롬브로사(Vallombrosa) 수녀회의 지도하에 극도의 엄격한 생활을 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발롬브로사 총장의 제안에 따라 그녀는 몰타(Malta) 섬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을 세웠고, 또 얼마 뒤에는 피렌체(Firenze)에 제2의 수녀원을 세웠다. 그녀는 1310년 5월 22일 피렌체에서 운명하였으며, 로산나(Rosanna)로도 불린다. 그녀에 대한 시성은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