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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광해군(光海君) 그리고 김개시
윤대화 추천 0 조회 3,185 12.09.24 16: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해군                  光海君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조선의 15대 왕으로 1608년 ~ 1623년까지 15년간 재위하였다.

이름은 혼(琿),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 공빈김씨(恭嬪金氏) '이다.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세자(世子)로서 임진왜란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 실리적 외교로써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교체기(交替期) 의 국제 정세에 잘 대처하였다. 그리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는 등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대북파(大北派)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세력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된다.

 

 

 

 

 

                 

 

 

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축출됨으로써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廟號)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국상(國喪)을 마친 뒤 신위(神位)를 종묘(宗廟)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의 사후(死後)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묘호'의 제정(制定)은 또한 제정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이다.

 

 

 

 

                                                묘호                 廟號

 

 

 

 

흔히 묘호(廟號)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게 마련이다. 태조(太祖)니 태종(太宗), 세종(世宗)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재위(在位)하였음에도 그는 왕자 그것도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君)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혹자는 그가 후궁 소생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후대(後代)이지만 장희빈 소생인 경종(景宗)과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英祖)는종(宗)과 조(祖)가 붙여져 있다. 단종(端宗)은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며 묘호(廟號)조차 갖지못하다가 사후(死後) 250년이 지난 숙종(肅宗) 때 묘호(廟號)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이후 어느 시기에도 그의 묘호(廟號)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    

 

                                     

 

 

           

                                                                   왕위 계승  ... 험난한 길 (1) 

 

 

 

 

 

 

선조(宣祖)는 아들이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正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의 소생은 없었다. 왕비에 책봉된 이후 계속 와병(臥病)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선조는 자신이 방계(傍系)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부담감과 자격지심에 적자(嫡子)가 나올 수 없는 상황임에도 계속 세자 책봉을 미루기만 하였다. '공빈김씨' 소생의 첫아들 임해군(臨海君)은 너무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이미 책봉이 보류된 상황이었다.

 

  

책봉을 미루기만 하다  선조(宣祖)의 나이가 40세를 넘기자, 당시 좌의정 정철(鄭澈)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등과 의논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합의하고, 선조에게 주청하기로 하였다. 이 때 동인(東人)세력의 거두 '이산해 (李山海)'는 합의를 해 놓고도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 즉 이 기회에 서인(西人)의 거두 '송강 정철 (松江 鄭澈)'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선조(宣祖)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김씨'를 찾아간다.

 

 

정철(鄭澈) 등이 광해군을 옹립한 후, 신성군(信城君) 등을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고 모함하고, 이를 알게 된 선조(宣祖)는 모략에 속아 진노하여 '정철' 등을 유배보낸다.이후 세자(世子) 책봉 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믿었던 신립(申砬)장군이 배수진을 친 충주 전투에서 대패(大敗)하여 선조(宣祖)를 비롯한 조정은 북쪽으로 피난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과 그의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의 묘소이다. 광해군은 초기에는 빈민구제와 국방에 주력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인조반정(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1623년 3월 광해군(光海君)으로 강봉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폐비 유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이배(移配)되었다. 

 

 

 

                                                    광해군의 묘 

 

 

 

 

    

 

 

 

 

 

 

 

 

 

 

 

 

 

 

 

 

  

 

1641년 7월 이배지(이配地)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지냈다가, 1643년 10월에 지금의 묘소로 천장(遷葬)하였다. '문성군부인 유씨(文城君夫人 柳氏)'는 지돈녕부사 자신(自新)의 딸로 1593년에 태어나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었고, 1609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 1623년 광해군과 함께 폐출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그 해10월 강화도에서 죽어 광주군 적성동에 장사를 지냈다가 광해군이 죽은 뒤 같은 묘역에 천장(遷葬)되었다. 묘는 쌍분(雙墳)이며, 곡장(曲牆),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다.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 ... 유언을 남기고 죽은 광해군(光海君) 그리하여 생모(生母)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묘가 있는 이곳 남양주로 천장(遷葬)하였으며, 강화도에서 사망한 부인 '폐비유씨(廢妃柳氏)'도 양주에서 장례를 지내고, 광해군 묘역으로 천장하였다. 따라서 광해군묘 인근에는 생모 '공빈김씨'와 친형 '임해군(臨海君)'의 묘가 있다.

 

 

이곳을 '송릉마을'이라고 하는데,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를 성릉(成陵)이라 이른데서 유래하였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왼쪽이 광해군의 묘이고, 오른쪽이 폐비 유씨의 묘이다. 상하(上下)의 질서는 능침에 누운 시신(屍身)의 좌우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 좌상우하(左上右下)가 되지만,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우상좌하(右上左下)가 된다.  

 

    

 

 

 

                                            왕위 계승  ...  험난한 길 (2)

 

 

 

 

 

 

선조(宣祖)는 40세가 넘은 나이도 있고, 비상사태에 조정을 분리하여 대비하여야 한다는 대신(大臣)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피난지 평양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미 총애하던 신성군(信城君)은 피난 길에 병으로 죽었고,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은 성격이 포악하여 세자의 대상에서 이미 제외된 형편이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명(明)나라가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거절한 것이었다. 불안한 지위의 세자 광해군 .. 그러나 그는 분조(分朝)의 소임을 다하여 백성과 조정의 신뢰를 받게 되고, 명(明)나라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대신은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분조(分朝)의 활동으로 임진왜란 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내심 세자(世子)의 자리가 굳건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항은 그렇지 못하여, 선조(宣祖)가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 선조 39), 인목대비(仁穆大妃)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였다.

 

 

더구나 평소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선조'이었기에 광해군의 세자(세자)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유영경(柳永慶) 같은 이는 세종(世宗) 때 고사(故事)를 원용하여 각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기도 할 정도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宣祖)는 간혹 자신의 의지(意志)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루는 병중(病中)에 있던 선조(宣祖)가 족자에 대나무를 그렸다. 하나는 바위 위에 왕죽(王竹)이 늙어 바람과 서리를 겪어 꺾이고 마르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악죽(惡竹)이 왕죽(王竹) 곁에서부터 뻗어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데, 긴 마디가 한치를 넘어, 너럭바위를 넓게 점거한 채 꾸불꾸불 서리서리 엉킨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 돌 위에 왕죽(王竹)의 원줄기로붙 ?혀 나와 어린 가지와 연한 잎이 비록 아직 장성하지는 못했으나, 싱싱하고 운치 있는 바른 죽순이 하늘을찌르고 달을 희롱할 기상이 있었다. 

 

 

며칠 뒤 선조(宣祖)는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유영경(柳永慶), 이홍로(李弘老) 등을 인견(人見)하고는 내시에게 족자(簇子)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며 이르기를 ' 내가 병중(病中)에 우연히 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어떠한가 ? '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항복(李恒福)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기함을 칭송하였을 뿐이었으나, 유영경(柳永慶)괴 이홍로(李弘老) 등은 선조(宣祖)의 의중(意中)을 간파하였으니,

 

 

이홍로(李弘老) 같은 이는' 전하의 오늘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죽(王竹)은 선조(宣祖)를, 악죽(惡竹)은 광해군(光海君)을,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비유한 것인데, 이홍로나 유영경은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었다. 심지어 선조(宣祖)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問安)하는 것을 아뢰면, ' 어째서 세자(世子)의 문안(問安)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臨時)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이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이 손을 들어 주어 큰 변화없이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이었다.       

 

 

 

 

 

                           영창대군과 광해군                     永昌大君과 光海君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선조(宣祖)의 계비(繼妃)가 되면서 상황은 또 바뀐다. 선조(宣祖)가 그렇게도 바라던 적자(嫡子)를 인목왕후가 낳은 것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다. 선조의 마음도 바뀌기 시작하였고, 이를 눈치 챈 대신들도 '광해군파(派)'와 '영창대군파(派)로 나뉜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少北派)는 광해군이 서자(庶子)에다가, 명(明)나라의 고명(誥命)도 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데,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비로소 광해군(光海君)에게 선위 교서를 내리는데... 이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이를 공표하지 않고, 집에 감추어 버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 이이첨 등은 선조(宣祖)에게 알리지만 宣祖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제 왕위 계승에 대한 결정권은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넘어 간다.  유영경 등 소북파(少北派)는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 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諺文) 교지(敎旨)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드디어 재위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다. 이 때가 1608년 2월2일로 광해군 34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믿었던 신립(申砬)장군이 충주.忠州에서 크게 패하자, 선조.宣祖는 명.明나라로의 망명(亡命)또는 귀순을 염두에 두고 신의주로 피난을 간다. 동시에 임해군(臨海君 ... 광해군의 同腹 兄)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함경도로 보내며 군사를 모으라고 하지만, 실은 왜군(倭軍)의 전력을 분산(分散)시켜 자신의 피난 길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 속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피난 길에서도 백성들을 약탈하고, 함부로 죽였다.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하였고, 드디어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 등은 '임해군'을 잡아 왜군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바치고 투항하였다. 후일 의병장(義兵將) '정문부장군'이 '국경인' 등 모반 세력을 체포하여 처형한다.

  

 

선조(宣祖)는 의주(義州)에 머물면서 明나라에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어 망명(亡命)의 허락을 요청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선조(宣祖)는 그저 사신을 다시 보내고, 그 사신들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리고 선조(宣祖)는 자신의 망명을 염두에 둔 조치를 내린다. 분조(分朝)의 설치이었다.

 

 

 

 

 

                                                       광해군 분조(分朝)활동의 기록

 

 

 

 

 

분조(分朝)는 선조(宣祖)가 중국으로 망명(亡命)하였을 때 조선에 남아 있을 작은 조정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다. 광해군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의병장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을 위한 위로 잔치를 벌이는 등 세자(世子)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백성들과 대신(大臣)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 효과는 그것 뿐이 아니었다.

 

 

7개월에 걸친 광해군의 분조(分朝)활동의 성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평안도,함경도,강원도, 황해도를 넘나드는  광해군의 활동은 조선의 건재(健在)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쪽의 백성들은 이미 나라가 망한 줄 알고 있었고, 의주(義州)에 머물던 선조(宣祖)는 서해 뱃길로 강화도를 통하여 겨우 남쪽의 소식을 들을 뿐이었던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광해군의 활약을 통하여 나라의 건재를 알았고, 충성을 바칠 대상을 찾은 것이었다.

 

 

 

 

 

 

 

 

 

 

분조(分朝)란 말 그대로 ' 조정을 나누다 '또는 ' 조정의 분소 '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와 평양(平讓) 등지에 상주(常住)하였던 선조(宣祖)가 있던 원래 조정과는 달리 전재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선조(宣祖)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嫡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世子)로 책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발발 몇 해 전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이 건저의(建儲義 ..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제기, 정치적 파란이 있기도 했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다급하였다. 

 

 

결국 부리나케 광해군(光海君)을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分朝)의 책임을 맡겼다. 분조(分朝)의 책임자인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들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軍糧)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분조(分朝)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선조(宣祖)에 의한 아들 광해군(光海君)의 견제

 

 

 

 

 

명나라는 선조(宣祖)의 귀순(歸順) 또는 망명(亡命) 요청을 모른 척하다가, 자신들의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마침내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조선을 지원케 한다. 이여송은 처음 전투에서는 쉽게 승리하였으나, 후일 왜군(倭軍)에게 대패(大敗)하고 나서는 조선에게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압박하였다.

 

 

이에 선조(宣祖)가 응하지  않자, 명나라는 선조(宣祖)를 폐(廢)하고 광해군(光海君)을 왕으로 삼겠다고 선조를 협박한다. 그 와중에 선조는 15번이나 왕위를 내 놓겠다고 나선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고 광해군을 비롯한 신하들의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한 노림수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났다. 어찌 되었건 왜군이 물러났으니 조선의 승리이었으므로, 임진왜란 중의 공신(功臣)을 책정하는데, 신하들이 광해군의 분조(分朝)활동을 들어 공신 책정을 건의하지만, 宣祖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광해군의 아침 문안 인사도 거절한다. 그러다 뒤늦게 태어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만들 생각만 하다가, 어느 날  아침 찹쌀떡을 먹고 체하여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된다.

 

 

 

 

 

    

 

 

 

 

 

                                     宣祖 .. 부끄러운 왕, 비겁한 아버지

 

 

 

 

 

 

어린시절, 광해군은 단연 다른 왕자들보다 빼어났다. 아버지인 '宣祖' 역시 광해군을 총애하였다. 이러한 부자간(父子間)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에 있었다. 선조 25년(1592),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하여 들어왔다. 조선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선조(宣祖)에게 서둘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왕의 권한 일부를 떼어주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피난가고, 광해군에게는 남(南)으로 내려가서 왜군의 공격을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왜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하였다는 소식에 선조(宣祖)는 마침내 피난길에 나섰다. 궁궐을 지키던 호위군사들마저 도망치고, 100여명의 문무대신들만이 선조의 피난길을 따랐다. 

 

 

왕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를 터트리고, 궁궐을 불태웠다. 선조실록에 .. 수령에 모두 도망한 상태에서 난민이 벌떼처럼 일어나 관고(官庫)를 때려 부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 것이 바로 광해군의 활약이었다. 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하는 동안,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이천까지 내려가 지방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달래고, 의병(義兵)들의 전투를 격려하고, 군량을 보급하는 등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였다. 

 

 

많은 의병들이 광해군의 항전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호남 최초의 의병장인 김천일(金千鎰)은 광해군의 명령을 각지의 의병장(義兵長)에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며 광해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김천일은 강화도를 점령하여 의주로 가는 통신망, 또 의주에서 충청도,경기도,전라도로 오는 통신망을 확보하여 광해군의 효율적인 항전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광해군의 탁월한 활약이 明나라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明나라는 선조(宣祖)의 무능(無能)함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광해군에게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칙서를 보내온다. 부왕(父王)의 실패를 만회하여 종사가 보존되도록 하라 .. 선조실록.선조28년 3월27일

 

 

 

선조로서는 가볍게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제는 예전의 부자지간이 아니었다.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지 8년째 되던 해에 선조는 그토록 바라던 적자(嫡子)를 얻었다.  아들 광해군보다 무려 9살이나 어린 계비(繼妃)를 맞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은 것이었다. 선조는 자신이 서자(庶子) 출신이라는 열등감때문에 적자(嫡子)를 얻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컸다.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등장으로 광해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선조는 광해군의 아침문안 인사를 거부한다.  선조(宣祖)는 ..." 어째서 세자(世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마라..고 말하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광해군을 물리친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되지 않은 1608년 2월 선조는 점심상에 오른 찹쌀밥을 먹고 갑자기 죽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의 즉위를 지지하였지만,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은 3살에 불과하였다.

 

 

 

 

 

                                                   광해군의 옷들

 

 

 

 

 

 

 

 

 

 

1965년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의 장경판고(藏經板庫)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과 함께 의복들이 발견되었다.

 

  

 

 

 

 

 

 

 

 

 

 

 

 

 

 

 

                               계축화옥, 칠서의 난(亂),  그리고 영창대군의 죽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초당파적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등용하고, 전란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창건,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시 살리려 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왕권의 안정화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왕위계승 과정에서 선조(宣祖)의 지시를 감추고 계략을 부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유배보내어 처형하였다. 그 와중에 명(明)나라는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진상조사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첫 해에....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이 있음에도, 서자(庶子) 출신인 둘째 아들이 왕위를 게승하였다는 이유이었다. 물론 반대파가 명(明)에 요청 한 짓...이 것이 광해군의 생각이었다.

 

 

당시 임해군(臨海君)은 왕위를 동생인 광해군에게 도둑맞았다고 노골적으로 떠들고 다니며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에, 명(明)나라의 진상조사단도 와 있는 시점에서 집권세력인 대북파(大北派)는 임해군의 제거를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이를 반대하지만 결국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대북파의 의견을 들어 준다.  대북파의 권력독점에 대한 욕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때마침 칠서의 난(七庶의亂)이 일어 난다.

 

 

 

 

 

                                        칠서의 난                  七庶의 亂

 

 

 

 

 

세조(世祖)가 서얼(庶孼)의 관직 진출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자신의 라이벌인 정도전(鄭道傳)이 서자출신이었으므로... 광해군 즉위 초,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은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소양강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 곳에서 詩를 짓고 술을 마시며 함께 지내는데 스스로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 

 

 

이들은 광해군(光海君)에게 서자(庶子)도 관직에 나갈수 있도록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고, 이에 불만이 커진 이들은 나무꾼, 소금장수, 노비 등을 모아 화적질하며 재산을 모았다. 광해군 즉위 4년  1612년에  이들은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銀) 수백 냥을 강탈하였다가 모두 포도청에 체포되었다.

 

 

 

 

 

 

 

 

 

 

 

                                                               계축화옥                 癸丑禍獄

 

 

 

 

이에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는 잠재적 위험세력인 영창대군파를 모두 제거하려는 계획을 갖고있었는데, 그들은 이 칠서(七庶)사건을 이용하기로 모의한다. 즉, 이 칠서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국구(國舅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고 거사자금을 마련하려고 도둑질을 저지른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박응서(朴應犀)를 회유한다. 이대로 자백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이에 박응서는 시키는대로 거짓 자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 인목대비나 그 아버지 김제남의 광해군에 대한 저주나  반대행위는 있었어도, 칠서(七庶)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여튼 대북파의 의도대로 김제남(金悌男)과 그의 아들들이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했다가 9살에 죽음을 당했다.  이와 더불어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을 위시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정권은 대북파가 독점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너무 확대되었고, 이는 결국 후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불씨가 되었다.

 

 

               

 

 

 

 

 

             

 

 

 

 

                                                    영창대군의 죽음

 

 

 

 

광해군을 ?아낸 반정(反正) 세력들...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즉 생모는 아니지만 법적인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였고, 자신의 형과 동생인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이 어렸으나,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절대 폐하지 않았다. 다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을 뿐, 대북파의 처형 주장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광해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하여도 실록 등 기록에 네 가지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전해오고 있다.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증살(蒸殺 ...방에 불을 때어 죽인..) 그리고 양잿물을 먹여 죽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죽음에 관하여도 4가지의 틀린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통설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은  9살에 병(病)으로 죽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모두 반정세력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광해군(光海君)은 영창대군의 죽음에 이상한 소문이 돌자 직접 조사하였고, 혐의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후일 인조(仁祖)는 이러한 소문들에 대하여 은폐로 일관한다. 오히려 인조(仁祖)가 의심을 받고 있다. 인조(仁祖)는 병자호란 후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아들을 독살하였고, 며느리까지 죽인... 비겁한 왕이고, 아버지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왕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면서 왕권(王權)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선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重修)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등 전란(戰亂)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허준(許浚)을 지원하여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광해군 즉위 당시의 국제 정세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朝鮮)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實利外交)를 지향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朝鮮)을 둘러싼 정세(政勢)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동안 조선의 사대국가(事大國家)로서, 명(明)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派兵)으로 재정이나 군사력 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野人)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建州尉) 여진(女眞)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女眞族)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북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武器)의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용(龍)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리(實利)를 선택하였다.     

 

 

                                      

 

 

                                            광해군의 탁월한 실리주의 외교

 

 

 

 

 

그의 재위기간 중 특히 주목해야 할 업벅은 당시 명청(明,淸) 교체기(交替期)의 국제적 변화속에서 명분보다는 자주적(自主的)이고, 실리적인(實利的) 외교를 추진해갔던 점이다. 그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국방의 대비책으로 대포(大砲)를 주조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였다. 

 

 

한편으로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하여 원병을요청하자, 1618년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명의 군사를 주어 명나라를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나라가 패하자 강홍립은 부차(富車)전투에서 후금(後金)에게 투항한 뒤, 본의아닌 出兵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는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명분에 치우치지 않은, 실리(實利)를 택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지만, 또한 사대주의에 물든 반정세력들의 구실이 되고 만다.

 

 

 

 

 

 

 

 

 

 

 

강홍립이 후금(後金)에 투항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감사는 '강홍립'이 가족들을 모두 하옥시켰고,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투항한 강홍립과 가족들을 모두 주살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광해군은 그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와 물품을 하사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여 주었다.  

 

 

그리고 후금에 억류된 강홍립은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密書)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을유조약(乙酉條約)을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다. 이로써 광해군은 북쪽에서의 중국,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왜구(倭寇)들로 부터 국방에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천도(遷都) 계획 ... 파주 교하 

 

 

 

 

 

 

당시 일반에서는 이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 정씨왕조(鄭氏王朝) '가 들어 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이는 민심(民心)을 동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또한 서울이 전란으로 완전히 소실된 상태에서 그 복구에는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필요하였다.  광해군은 민간에 널리 퍼진 "정씨 왕조설"을 일소하고,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도성(都城)을 파주의 교하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철저한 실리적(實利的) 판단이었다. 파주 교하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사정에 어려움이 없었고, 또한 대평야로 둘러싸여 있어 식량에도 문제가 없는 곳이었다. 또한 주위의 낮은 산에는 산성을 쌓을 수 있었다. 한편 임진강을 통하여 중국과의 해상 교통도 가능하여 새로운 문물를 받아들이기에도 적당하였다. 물론 서해를 통한 중국의 침략이 우려되기도 하였지만, 광해군은 중국은 전통적으로 해전(海戰)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천도(遷都) 계획은 명나라에 원군을 파병하는 문제 등 다른 현안에 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한다. 축성(築城)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지는 결과만 낳았다.그러나 광해군의 천도계획(遷都計劃)은 기발한 착상이었다. 여러가지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하여 주는..그런 계획이었던 것이다.

 

 

 

 

 

 

                                      

 

 

 

 

                                 

                                          대동법(大同法) 등 광해군의 치적

 

 

 

 

 

정권을 둘러싼 갈등과는 달리 광해군은 전란의 복구작업에 과감한 조치를 취하였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금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재정확보 및 신정(新政)의 면모 쇄신을 위하여 먼저 기존의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1608년 호조참판  한백겸(韓百謙)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시행안을 받아들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할 것을 명하고, 이원익으로 하여금 시행세칙을 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선혜법(善惠法)으로 명명된 경기도의 대공수미제도, 즉 대동법(大同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인 조정의 대신(大臣)들과 방납(防納)하는 집단들이 끈질기게 반발함에 따라, 경기도 백성들이 열화같은 바램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저지되고 만다. 

 

 

수세(收稅) 및 역(役)의 공평한 시행을 위하여 호패법(號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하였다. 한편 선조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공사를 끝내고, 이어서 경복궁,인덕궁,자수궁을 중건하여 파괴된 수도를 복구하였다. 또한 신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 전쟁으로 없어진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고,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발간되었다.

 

 

 

 

 

 

 

 

 

 

                                                   왕권에 대한 위협         

 

      

 

 

 광해군시대에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가 왕위를 승계하여 방계승통(傍係承統)이라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시대'가 끝나고, '정씨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庶子)이었고, 세자 책봉과정에서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때문에 선조의 선위교서(禪位敎書)를 받지도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諺文敎旨)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이었다. 게다가 그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 그의 등극을 반대하던 西人, 少北세력은 명나라에서 사신의 파견을 요청하여  왕위세습과정의 진상을 조사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었고, 

 

 

더욱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였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이었다. 왕권에 대한 이와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政敵) 제거작업에 몰두하게 하였고, 광해군 지지세력인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여인들

 

 

 

 

조선시대의 대표적 개혁군주인 광해군 ..소수세력인 대북파(大北派)를 이끌고 조선의 변혁(變革)을 꿈꾼 광해군. 그가 얼마나 개혁을 갈구하고 얼마나 동지(同志)를 갈망하였는지는, 흥미롭게도 그의 여인(女人) 관계에서까지 드러나고 있다. 광해군과 가장 친밀한 여인들은 광해군 5년 12월 30일자 (1614년 2월8일), " 광해군일기 "에 의하면 궁녀 김개시(金介屎), 정소용(昭容 鄭氏), 임소용(昭容 林氏)이었다. 소용(昭容)이란 정3품 후궁에게 주어지는 작위이다. " 광해군일기"에서는 " 이 세 명이 후궁의 으뜸이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김개시(金介屎)는 후궁이 아니라 상궁에 불과하였지만, 광해군과 잠자리를 가진 승은상궁(承恩上宮)이라 하여 후궁의 대우를 받았다. 실록의 기록의 분위기로 볼 때, 셋 중에서 광해군과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김개시(金介屎)이고, 그 다음은 정소용이었다. 두 여인이 광해군과 각별하였던 이유는 독특하다. 임소용(林昭容)의 경우에는 미모가 특출하였지만, 두 여인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광해군은 이 두 여인의 어떤 점을 좋아했던 것일까?  

 

 

 

 

                                              문서 처리에 능한 정소용

 

 

 

 

광해군일기에서는 정소용이 애교를 잘 부렸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와 광해군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에 능숙하였다. 들어오고 나가는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대신하여 재가를 내리니, 왕이 갑절로 신임하였다. 정소용(鄭昭容)은 행정능력이 탁월하였던 것이다. 특히 문서 처리에 능했다. 광해군을 대신하여 공문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裁可까지 대신해서 처리하였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82조에서는 "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 "고 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문서 행정의 원칙은 조선시대에는 한층 더 엄격하였다. 중국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의 왕들은 기본적으로 문서로써 통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왕들은 문서처리의 부담에 항상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정소용을 가까이 한 것은 그가 자신의 업무부담을 덜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실무적 보조에 힘입어, 광해군은 개혁정국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에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뛰어난 계략, 김개시

 

 

 

 

김개똥 혹은 김가희라고도 불린 김개시(金介屎)는 상당히 못난 외모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녀의 외모가 역사기록에까지 남았을까. 1613년 9월24일, 광해군 5년의 광해군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상궁의 이름은 개시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 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凶鮎多巧計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남의 외모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외모를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개시의 경우에는 외모가 하도 특별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그 점을 사료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었기애 " 용모가 피지 않았다 "는 우회적 표현으로 그의 외모를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 김개시는 고운 마음으로 광해군의 관심을 끌었을까 ? 그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위의 광해군일기에서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기 " 때문에 광해군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 광해군일기"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지라, 이 책에서는 광해군쪽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쁘게 묘사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 "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정적의 외모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정적의 인간성만큼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외모의 비중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에 비하여 인간성은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패자의 인간성만큼은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표현은 승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므로, 이것은 중립적 관점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이 표현을 "영리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하였다"로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후궁자리를 거절한 김개시  

 

 

 

 

김개시가 이러한 두뇌를 바탕으로 광해군정권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개시는 핵심적인 국정 현안에서 광해군에게 조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쪽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궐 밖으로 자주 외출하였다. 그가 광해군 정권의 몸통이라는 점은,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서 김개시가 이 정권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김개시는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후궁 자리를 거절한 것은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이었다. 궐 밖으로 수시로 나가 광해군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광해군이 갈 수 없는 영역으로 가서, 광해군이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당시의 반대파들은 그가 궐 밖으로 남자를 만나러 다닌다고 손가락질하였지만, 그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흑색선전에 불과하였다.      

 

 

 

 

                                                     광해군의 고뇌

 

 

 

 

행정능력과 문서처리 능력이 출중하여, 임금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 중 하나이었던 공문 처리를 도운 정소용(鄭昭容), 교활하고 계략이 많은 덕분에 광해군을 위해 전략을 수립하고 조직활동을 벌인 김개시(金介屎) .... 이런 여인들이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광해군과 가장 친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개혁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일과 연애를 구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은 것을 보면 그가 개혁의 완성을 얼마나 갈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여인(女人)이 광해군의 정치적 동반자가 된 사실로부터, 우리는 광해군이 얼마나 동지(同志)를 갈망하였는지도 알 수있다. 주변에 얼마나 동지가 없었으면, 일 잘하고 머리 좋은 여인들을 애인으로 삼아 동지를 만들려 하였을까.  서자(庶子) 출신이라 설움 받고, 소수파 정권의 수장이라 설움 받은 광해군의 인간적 고뇌를 엿 볼 수 있다. 

   

  

 

 

                                         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새벽, 반정군(正軍)이 인정전(인정전)을 지나 창덕궁까지 쳐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광해군은 사태를 파악하고 곤룡포를 입은 채로 편전을 나와 대궐문을 뛰어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어느 집에 불쑥 들어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그 집은 마침 의관(醫官), 안국방(安國坊)의 집이었다.

 

 

그 때 안국방(安國坊)은 초상을 치루고 있었는데, 광해군에게 상복(喪服) 한 벌을 꺼내와 입히고, 다른 상주(喪主) 옆에 서도록 하였다.그러나 '안국방'은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후환이 두려워 반정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광해군이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알렸다. 광해군은 상복을 입은 채로 끌려가고 즉시 강화도(江華島)로 유배(流配) 당하게 된다. 그가 궁궐 담을 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 광해군 "이 되었고 폐주(廢主) 또는 혼군(昏君)이 되었다. 쫓겨난 임금, 어리석은 임금이 된 것이다.

 

 

 

  

                                           인조반정                    仁祖反正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1623년의 쿠데타를 보통 인조반정(인조반정)이라고 부른다. ' 반정(反正) '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발난세반제정 ..發亂世反諸正 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모의는 16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縝), 구굉(具宏) 등 무신들이 먼저 발의하고 김류(金류),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면서 급진전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모두 능양군(綾陽君 .. 후날 仁祖)의 인척들이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광해군 때 조정에서 쫓겨났던 西人의 명망가들이었다. 

 

 

 

 

                                        폐모살제                     廢母殺弟 

 

 

 

 

그들은 왜 정변을 기도하였을까 ? 인조실록은 '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반정의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 1613년 '은상(銀商) 살해 사건 '에서 비롯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곧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폐모논의는 그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不孝)의 극치이자 패륜으로 인식되어 광해군 정권에 치명타가 되었고, 반정(反正) 주도 세력들에게는 반정을 정당화하는 절호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거사(擧事)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고변(告變)때문에 거사 계획이 몇 차례나 누설되었지만 용케도 토벌을 피하였다. 1622년 가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이귀(李貴)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광해군의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겨우 무마되었다.

 

 

1623년 3월의 거사 계획도 마찬가지이었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12일, 북인(北人) 김신국(金藎國)은 자신이 입수한 서인들의 거사 계획을 정승 박승종(朴承宗)에게 알렸다.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ㅇ들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국청이 설치될 무렵,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려던 참이라 재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정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윽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해 있던 반정군은 3경 무렵 창의문(彰義門)을 깨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오합지졸, 反正軍

 

 

 

 

인조반정의 거사를 이끌었던 반정군의 전력은 사실 보잘 것 없었다. 병력은 1000여명에 불과하였다. 그 가운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가 이끄는 7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홍제원에 집결하였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그들이 기율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일사기문(逸史記汶)'의 저자는, 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반정군이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기율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장 이괄(李适)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려던 직전에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이귀(李貴)가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반정군의 지휘를 맡긴 것이다. 이서 등 몇몇을 빼면 백면서생에 불과했던 반정군 지휘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윈한 조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군이, 광해군에 대한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훈련도감(훈련도감)의 정에병과 대적하기는 무리이었다. 하지만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거의 무혈입성하였고, 광해군은 반역세력에 대한 진압 한번 시도하지 못한 채 궁궐의 담을 넘어야 했다.

 

 

 

 

                                           무혈입성                   無血入城

 

 

 

 

 

왜 그랬을까 ? 문제는 항상 내부로부터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즉위 말녕의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정치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대북파의 핵심인 이이첨(李彛瞻)은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을 모두 축출한 이후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광해군 또한 권간(權奸)이 되어버린 그를 불신하고 견제하였다.

 

 

광해군은 폐위도기 전 6년 동안 자신의 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을 11차례나 교체하였다. 평균 1년에 두 차례나 바꾼 것이다. 제대로 믿을만한 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불신감의 표출이었다. 그같은 상황에서 거사가 일어날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은 반정군에 포섭되었다. 광해군을 배신한 이흥립은 반정군(反正軍)이 창덕궁을 난입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광해군은 또 말년에 김개똥(金介屎)라는 상궁을 총애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반정 주도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이귀(李貴)가 역모를 꾀한다 '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때문이었다. 말년의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분명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인목대비 앞에 무릎 꿇은 광해군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생모)는 부활하였다. 인조는 반정 성공 직후 덕수궁에 유폐되어있던 그녀를 찾아뵙고 반정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인조에게 옥새를 넘기고 그의 즉위를 선언하였다. 그로써 인조는 선조의 왕통을 잇는 계승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윽고 광해군이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원한은 처절하였다. 인목대비는 '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 '이라며 광해군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였다. 인조와 신하들은 ' 폐출된 임금이지만 신하들이 그에게 형륙(刑戮)을 가할 수 는 없다 '고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3월 14일 인목대비는 " 광해군의 죄악 " 10가지를 제시하고 그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당연히 폐모살제(廢母殺弟)가 먼저 언급되었다. 인목대비, 그녀는 이어 외교문제를 언급하였다.  선조는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명나라가 위치한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광해는 배운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케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역 때는 전군을 오랑케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케와 금수가 되게 만들었다 ..고 성토하였다. 한마디로 '재조지은'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광해군시절의 대북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거사가 성공한 당일, 인조가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에게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서쪽 관방인 의주와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나라 및 후금과의 외교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처형한 것은, 향후 인조 정권의 대외정책이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이었다. 바야흐로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나라,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인목대비 (仁穆大妃)가 열거하는 광해군의 36가지 잘못

 

 

 

 

광해군 15년 3월14일에 인목대비는 언문(諺文)으로 쓴 교지(敎旨)를 내려 광해군을 폐(廢)하면서 36가지의 죄(罪)를 열거한다. 대왕대비가 왕을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고 이질을 서인으로 삼고, 금상을 책명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그 교지는 다음과 같다.  

 

 

 

 

 

 

 

 

 

 

 

 

 

 

 

소성정의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고 임금을 세우게 하신 것은 인륜(인륜)을 펴고 법도를 세워, 위로 종묘(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선조대왕께서 불행하게도 적자(嫡子)가 없으시어 일시의 권도에 따라 나이의 순서를 뛰어넘어 광해(光海)를 세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동궁에 있을 때부터 잘못하는 행위가 드러났으므로 선조께서 만년에 몹시 후회하고 한스럽게 여기셨고, 그가 왕위를 계승한 뒤에는 도리어 어긋나는 짓을 그지없이 하였다. 우선 그 중에서 큰 죄악만 거론해 볼까 한다. 

 

 

내가 아무리 덕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필이 되어 일국의 국모 노릇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조(宣祖)의 아들이라면 나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는 1) 남을 참소하고, 2) 모략하는 자들의 말을 신임하고, 3) 스스로 시기하고 혐의하는 마음을 가져,  4) 우리 부모를 형벌하여 죽이고,  5) 우리 일가(一家)를 몰살시켰으며,  6) 품 속에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7)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치르게 하였으니, 8) 그는 인간의 도리가 조금도 없는 자이다. 그가 이러한 짓들을 한 것은 선왕에게 품었던 유감을 풀려고 한 것인데 미망인에 대해서야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는 9)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조카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10) 서모(庶母)를 때려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1)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12) 무고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고, 13) 민가(民家) 수천 호를 철거시키고 두 궁궐을 창건하는데 있어 토목공사의 일이 10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14) 그리고 선왕조의 원로대신을 모두 축출시키고, 15) 악한 짓을 권유하는 무리들만 등용하고 신임하였으며, 16) 정사를 하는데 있어 뇌물을 바친 자들만 기용하였으므로 무식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였고, 17) 금(金)을 싣고 와서 관직을 사는 자들이 마치 장사꾼이 물건을 흥정하는 듯하였다. 18) 그리고 부역이 많고 수탈이 극심하여, 19)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고난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으니,  20) 국가의 위태로움은 말 할 수 없었다 . 어디 그 뿐이겠는가. 우리나라가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온지 200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君臣)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父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왜란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21)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22)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케와 화친하였다. 23) 그리하여 기미년에 중국이 오랑케를 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24)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25) 끝내 우리 군사를 오랑케에 투항하게 하여, 26)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27)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사신을 구속,구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 하였고, 28) 황제가 칙서를 여러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29)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금수(禽獸)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30) 천리(天理)를 멸절(滅絶)시키고 인륜을 막아, 31)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32)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33)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써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34) 조정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하노라. 

 

능양군 이종(綾陽君 李倧)은 선조대왕의 손자이고, 정원군 이부(定遠君 李扶)의 첫째 아들인데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비상한 의표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시여 궁중에서 키우게 하셨고, 그에게 종(倧)자의 이름을 지어주신 데에는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이며, 용상에 기대어 계실 때에 그의 손을 잡고 탄식하시며 여러 손자들보다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대의를 분발하여 혼란스러운 조정을 토평하고 유폐되어 곤욕을 치루고 있는 나를 구해냈으며 나의 위호(位號)를 회복시켜 주어 윤기(倫紀)가 바르게 되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공덕이 매우 성대하여 신명과 만인이 그에게 귀의하고 있으니 보위에 나아가 선조대왕의 후사를 잇게 하노라. 그리고 부인 한씨(韓氏)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노라. 이리하여 교시하노니, 모두 알라.   같은 날 대왕대비가 다시 교지(敎旨)를 내려 광해의 죄목  36조항을 말하다... 35) 선왕의 병이 위중하였을 때 위협의 말을 하여 속히 돌아가시게 하고, 36) 부왕의 희첩을 간음하였다.....

 

 

 

 

 

 

 

 

 

 

 

 

 

 

 

 

 

위에 적은 ' 광해군이 폐위된 36가지 죄목 '은 실록으로 순번을 임의로 정한 것이며, 다음의 기록은 일주일 뒤인 3월21일 계해정사록에 실린 인목대비의 비망기이다. 여기에는 죄목의 순서가 매겨져 있다. 3번과 33번은 처음 교지에는 없었으나 후에 추가된 것이다. 중복되는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인목대비가 실제 지목하였던 실제 죄목은 20여 가지로 보인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대동야승(大東野承)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일기체로 편집한 책이다. 이 책에는 서궁(西宮 ..덕수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시에 풀려난 인목대비의 비망기가  ' 大妃殿備忘記 '라는이름으로 실려 있다. 작자는 미상이다.

 

 

 

역적 괴수 혼(琿)은 천지에도 없는 대역무도로 하늘에 죄를 얻었으니, 죄 하나이다. 종묘사직에 죄를 얻었으니, 죄 둘이다. 군부가 병중인데 위협하여 죽였으니, 죄 셋이다. 형을 무참하여 대역으로 몰아 죽였으니, 죄 넷이다. 적자인 동기를 죽였으니, 죄 다섯이다. 모후를 유폐시켰으니, 죄 여섯이다. 화를 꾸미려고 간신들과 모책하여 모후를 협박하였으니, 죄 일곱이다.

 

 

부도한 마음이 날로 달로 더해져서 모후를 폐출하였으니, 죄 여덟이다. 여우같이 아첨하고 기망하였으니, 죄 아홉이다. 스스로 백가지 염고와 저주로 모후를 독해하였으니, 죄 열이다. 수화를 불통케 하고 군졸로 엄중 단속하여 모후를 죽이려고 대때로 공갈하였으니, 죄 열 하나이다. 모후를 죽이려고 도깨비 (귀신)을 궁중으로 쫓아 넣고 역질을 몰아들였으니, 죄 열 둘이다. 모후의 집을 적몰하였으니, 죄 열 셋이다. 국구를 대역으로 거짓 꾸며서 모후의 일문을 멸망하였으니, 죄 열 넷이다. 

 

 

하늘을 속이고 업신여겼으니, 죄 열 다섯이다. 천자를 기망하였으니, 죄 열 여섯이다. 예를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였으니, 죄 열 일곱이다.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었으니, 죄 열 여덟이다. 천도를어기고 인륜을 폐하였으니, 죄 열 아홉이다. 선을 버리고 악을 취하여 패륜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죄 스물이다. 조정의 큰 제도를 어겼으니, 죄 스물 하나이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으니, 죄 스물 둘이다. 선성을 능멸히 여겼으니, 죄 스물 셋이다.

 

 

옥사와 관직을 팔아서 뇌물을 공공연하게 행하였으니, 죄 스물 넷이다. 효경같은 마음으로 골육지친을 모두 제거하였으니, 죄 스물 다섯이다. 무고한 생령들을 살해하였으니, 죄 스물 여섯이다. 늘 토목의 역사를 그치지않아서 백성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 스물 일곱이다. 외척에게 현혹해서 종친을 등졌으니, 죄 스물 아홉이다. 음녀를 시켜서 모후를 궁중에 잡아놓고 곤욕을 한없이 하게 하였으니, 죄 서른이다. 

 

 

선왕의 후궁들을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하나이다. 부왕과 모후의 궁인을 무수히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둘이다. 선왕의 후궁을 강간하였으니, 죄 서른 셋이다. 중형의 죄수들을 수레로 실어다가 모후의 궁중에 끌어넣어 위협으로 곤욕보여 놀라게 하였으니, 죄 서른 넷이다. 선왕 능을 파헤쳤으니, 죄 서른 다섯이다. 모비의 젖먹이 어린것을 앗아다가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여섯이다.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나?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시키려 조작,왜곡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對明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정책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 못하고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반정세력이 주장하는 광해군의 잘못은 요약하여 두가지이다. 하나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大明事大)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인륜을 벗어난 패륜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두번째의 이유에는 왜곡이 있다. 인목대비를 죽이려는 대북파의 압력에도 그를 살린 것은 광해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죽임도 광해군은 끝까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이유...반정세력은 중국의 흐름에 둔감하여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하고 맹목적인 대명숭배(大明崇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청나라는 일어서는 나라이었다. 그들의 세력다툼을 이용하여 개국이후 지속되던 중국과의 君臣關係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이었고, 약소국 조선의 생존을 위하여도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최상의 것이었다. 바로 몇 년 후 조선의 仁祖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해군을 폭정이라고 하였다. 원래 폭정(暴政)이라함은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폭정이라 함이 옳다. 광해군은 오히려 민생을 위하여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적이 한번도 없다. 조선의 명군, 성군이라고 일컫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광해군은 오히려 인목대비를 살려 내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다만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권력욕에 눈 먼 사대부들에게 당했을 뿐인 불행한 왕이었다.

 

 

 

 

 

 

 

 

 

 

                                                  광해군과 김개시

 

 

 

 

 

장녹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나쁜 궁녀의 대명사로 불리는 김개시(金介屎 ... 여기의 屎는 똥 시이다.)는 장녹수와는 달리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장녹수는 예술적 재능으로 연산군을 사로 잡았지만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 취약하였던 것에 비해, 김개시는 정반대이었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김개시                 金介屎

 

 

 

 

실록에서 김개똥(金介屎)상궁이라 전하는 인물이다. 김개시는 어려서 입궁하여 상궁에까지 올랐을 뿐 정식으로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김개시는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에 천예(賤隸)의 딸이라는기록으로 보아 노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입궁한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입궁한 것으로 짐작되며,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개시는 처음에 훗날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하여,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그러다가 글을 알고 문서 처리에 능하였던 '김개시'는 선조(宣祖)의 나인(내인)으로 발탁되었고, 다시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대전의 지밀나인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 반정의 주도세력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 이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 '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때문이었다.

 

 

 

 

                                           아버지의 宮女를 선택한 광해군

 

 

 

 

비난을 무릎쓰고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宣祖)를 모셨던 궁녀인 ' 김개시(金介屎)'를 자신의 궁녀로 데려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예전 世子 시절에 맺었던 인연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궁중 안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김개시(金介屎)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김개시는 오로지 광해군만을 위하여 충성하여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온갖 악역(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되었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 인물은 인목대비 김씨이었는데, 김개시(金介屎)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하여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씌우기도 하였다. 1613년, 광해군 5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滅門)시킨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하였다는 사건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간 주동자가 바로 김개시(金介屎)이었다.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버린 김개시는 끈질긴 공작으로 기어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처사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반인륜적 만행의 중심에 있던 김개시는 결국 처형당하였다.          

 

                                 

 

 

 

                                             광해군 가족의 비참한 末路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위리안치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유배된 후 1년이 못되어 죽고 말았지만, 광해군(光海君)은 무려 18년을 더 살면서 67세를 일기로 천수(天壽)를 다하고 사망한게 된다. 그의 한 많은 인생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반정세력의 무모함과 이어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결과에 수 많은 생각들을 하였을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 부부 그리고 아들인 세자(世子)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다. 위리안치는 왕실 등 양반에게 주는 가장 가혹한 벌로 집 주위에 탱자나무 등 가시나무를 둘러쌓아 내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벌이었다.  

 

 

강화도에 유배시킨 이유는 광해군에 대한 감시가 편한 까닭이었다. 광해군 부부는 강화도 동쪽에, 아들 부부는 서쪽에 따로따로 각기 안치시킨다. 인목대비(인목대비)의 복수(복수)는 그만큼 철저하였고, 반정세력의 정치적 목적도 한 몫 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이들이 울타리에 갇혀 산지 두어 달 후, 폐세자된 아들은 사사(賜死)되었고, 며느리는 자살하게 되는 데 그 과정이 매우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아들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쪽과 내통하려 하였던 것 같다. 아들이 어느 날 담장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붙잡히는데, 그의 손에는 銀 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아마 추측컨데 은(銀)으로 뇌물을 써서 강화도를 빠져나가 자신들을 옹호하던 황해도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반정세력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는지.... 이에 인목대비는 결국 아들에게 사약을 내린다. 아들의 부인은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 나갈 때 나무 위에 있으며 망을 보고 있었는데, 다시 잡혀 오는 세자를 보고는 놀라 나무 위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광해군 부인 유씨의 죽음

 

 

 

 

이렇게 장성한 아들부부를 잃은 광해군은 1년쯤 후에 다시 부인 유씨와 사별한다. 폐비 유씨는 광해군의 중립정책(中立政策)을 비판하며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주창하기도 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에는 궁궐 안에 이틀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나름대로는 성리학적 가치관에 분명한 여인이었다.

 

 

 

 

 

 

                                 광해군 부인 유씨가 입던 당의 (해인사 보관)

 

 

 

 

 

그러나 유배생활이 시작되면서 홧병을 얻게 되었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생활  1년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한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부인까지 죽은 광해군에게 시집간 딸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에 임하면서 그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가지만,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그를 죽이지 못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고, 반정(反正)세력 마찬가지 이었다. 몇 번이나 광해군을  죽이려 하였으나 반정(反正) 이후 다시 영의정이 된 이원익(李元翼)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신하들에 의하여 살해 기도가 방해 받기도 하였다.

 

 

 

 

 

 

 

 

 

 

 

 

                                           광해군 부부의 옷 ( 해인사 보관)

 

 

 

 

 

 

 

                                        광해군 상궁(上宮)의 옷 (해인사 보관)

 

 

 

 

 

 

 

 

 

 

 

 

 

                                                

                                                               광해군의 파란만장한 유배생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험난한 길 그리고 왕위에 올라서도 역경의 길을 지내지만, 왕에서 물러난 뒤의 유배생활은 더욱 기구하기만 하다.

 

 

 

                                                  강화도에서 태안으로

 

 

 

 

1624년 ' 이괄(李适)의 난(亂) '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는 광해군(光海君)의 재등극(再登極)을 염려하여 광해군을 배에 실어 충청도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 이괄의 난(李括의 亂) '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왔다.

 

 

 

                                               다시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1636년에는 청나라가 침입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원수(怨讐)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그를 ' 강화도 교동 (江華島 喬洞) '으로 옮겨  안치시켰다. 이 때 집권세력은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오히려 광해군을 보호한다.

 

 

 

                                      

                                                           제주도

 

 

 

 

이듬해 조선이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하고 인조(仁祖)는 그의 복위(復位)에 위험을 느끼게 되어 광해군을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이배시킨다. 인조(仁祖)의 무조건적인 대명숭배(對明崇拜)가 빚어 낸 인조(仁祖)의 열등감(劣等感)과 두려움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19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67세에 생을 마감한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초연한 자세로 삶을 이어가는데, ' 연려실기술 '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別將)이 윗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侮辱)을 당하여도 묵묵히 의연한 자세를 유지한다.  그리고 심부름하는 계집 몸종이 " 영감 "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하여도 전혀 이에 분개치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 발치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고, 조정에서는 그 유언에 따라 이 곳 남양주 '공빈김씨' 묘 아래쪽 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광해군이 죽자 사관(史官)은 이렇게 글을 남긴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위리안치(위리안치)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예로써 염빈하였다고 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르다고 했으나, 식자(識者)는 옳게 여겼다. 그리고 광해군이 강화도 교동(교동)에서 제주도로 가면서 남긴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적어 놓았다.

 

 

 

 

풍취비우과성두    風吹飛雨過城頭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   위기훈음백척루    葦氣薰陰百尺樓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척으로 솟은 높은 누각   /   창노도내부기    蒼海怒濤來簿朞     창해의 파도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   벽산수색대청추    碧山愁色帶淸秋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   귀심염견왕손초    歸心厭見王孫草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   객몽빈노제자주    客夢頻駑帝子州     나그네 꿈 제주에서 자주 깨이네   /   고국존망소식단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기고   /   인파강상와고주    姻波江上臥孤舟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인조(仁祖)는 청나라가 칩입해 오자, 과거 청(淸)나라에 중립적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이 청나라와 연락이 있을까 두려어 강화도(江華島)에서 제주도(濟州島)로 유배지를 옮긴다.

 

 

 

 

 

 

 

 

 

 

 

                                    광해군, 제주 유배 중 남긴 詩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었네.  

 

 

 

 

 

 

 

 

 

 

                                              광해군 시대의 서양 역사

 

 

 

 

광해군시대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인도 등 전 세계적으로 변혁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사회,문화 분야에서 근대화를 시도하는 시절이었고,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융성하여 명(明)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세익스피어,세르반테스 등의 걸출한 작가들이 사망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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