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진원 시집
어머니 물동이 길
시작하는 말, 말, 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고향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고향은 언제부터인가, 이야기 속이나 동화 속의 세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살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은 각종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컴퓨터나 스마트 폰처럼 전자 기계에 길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는 인간이 AI에게 매몰될지도 모른다. 나무와 흙, 풀 대신 딱딱한 콘크리트 벽에 갇혀 기계와 마주하고 기계에서 들려오는 음파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러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나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물과 바람의 이야기들이 살고 이웃 사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구수한 인정이 넘쳐흐르는 원색의 고향! 시의 아름다움을 꿈꾸게 하는 고향은 나에게는 값진 안주처이다.
기계에 매달리지 않고 물질에 섞여서도 오염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은 내 삶의 방식이다. 그 길의 하나가 고향을 찾는 것이었다. 고향 집과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님꽈 아버님, 사랑하는 동생들과 내 자녀인 소라와 대순이, 고향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가 살아가는 또 하나의 사랑법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이 시집을 돌아가신 할머님과 존경하는 부모님께 두 손 모아 바치며 서두를 맺는다.
고향을 생각하다
봄이면 산은 웃음을 쏟아냈다. 순정의 진달래 웃음과 찔레꽃 순백의 웃음, 모두 유년의 내 강기슭에 피어나고 있네.
어질디 어진 바람은
저녁 같은 따스함으로 불고
물결은 잔잔한 미소로 다가오지
흙냄새 진한 풀빛 마을, 고향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달큰하게 섞여 살았지.
그런 고향에는 정이 있고 마음 편한 어머니가 계셨지. 어디 그뿐이던가, 개구리 울고 황소의 큰 눈에 보이던 순한 모습이 스크린처럼 다가왔지.
그렇지, 사람살이는 情이 최고라,
인절미 한 접시 주고 받더라도
정이 철철 넘쳐나던 고향 마을
음식에 담긴 그 눈길 그 손길 …
돌아보니 눅눅한 눈물이 솟는다
인정이 그리운 오늘
고향 가는 길
우뚝 선 포플러 따라
황토길 굽이 굽이
아래로 젖줄 드러낸
시냇물이 따라오고
그 위에 물오리 몇 송이
꿈꾸는 듯 떠 있더니
소나무 자작나무
이끼 묻은 바위서리
초가집 매운 연기
고갯길 성황당
모두가 그리운 얼굴
이끼처럼 돋아난다.
가을 하늘
꼬리 빨간 고추잠자리
몸이 달아 자꾸 날고
호박덩이 여기 저기
제멋 겨워 누워 있던
그런 날 왜 또 하늘은
눈시리게 푸르렀다
고향길 들어서면
고향길에는
낯선 돌이 없다
언 듯 언 듯 스치는 모양새
그래, 몇 번 씩은 본 얼굴이다.
고향길에는 낯선 나무가 없다
소나무, 포플러, 미루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
흙속에 굳게 뿌리 내리고
똑 같은 얼굴로 반겨 준다
들과 산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그날 그 아이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운동장에서 공을 따라다니던 고함 소리와
유리창을 닦으며
깔깔거리던 웃음 소리
고향길로 들어서니
떼지어 선 코스모스
그리운 얼굴처럼 손을 흔든다
아프도록 손을 흔든다
고향에 찾아오니
미운 일곱 살이던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어 고향 마을로 들어서니
운동회 하던 날 코스모스처럼
키만 덩그라니 큰 코스모스가 온몸으로 반긴다.
학교는 폐교가 되어 덩치만 큰 꺼칠한 상자 같아졌다.
뭔가가 빠져있는 듯
허전한 느낌이었다.
초가집
그때 초가집
참 좋았다
노랑 볏집을 이은 지붕
멀리서 보면 황금 지붕이었지
겨울이면
주렁주렁
커다란 은색의 기둥
물의 나라에서 온
신비한 왕 고드름
따고 싶어서
손을 호호 불며 팔을 뻗으려 하면
“애야, 농사 망쳐진다.”
할아버지 음성이 지금도
말간 고드름 속에서 들려온다.
미루나무
신작로 양쪽에 줄지어 선 미루나무
고향을 묵묵히 지키고 섰다
옛 친구들은 다 어디 가고
오래된 할아버지처럼
미루나무들이 맞아주는구나
여름 한나절
그때처럼.
매미가 찾아와 목청 돋우다 가는
원시의 땅
미루나무 꼭대기엔
손님 같은 하얀 구름이 동동
고향 산천은
어린 날의 봉숭아 맨드라미 보이지 않지만
쓸쓸함보다
정겨움이 더해 오네
줄지어 선 미루나무들아
고향을 지키고 있어
고맙다.
(2023. 5. 13)
고향에 오니
피로가
단번에
풀린다
고향에 오니
얼마만 인가,
산밑 푸른 강물은
예나 이제나
그 빛을 잃지 않고
저녁노을
한 다발
떠가는 하늘
차에서 내리자
“ 야, 반갑구나!”
철수가 어른이 돼서
흙 묻은 굵은 손을
쑤욱 내민다.
고향 땅
귀엽고
정다운 것만
모여 산다
예쁘고
소란스런
새들의 지저귐
돌돌거리며 달려드는
물소리의
아늑함
생각에 잠겨
강둑에 선
누렁이 소
그 모두
내 마음에 닿아
따뜻한 것이 되던
고향
땅
고향집 밥상
가난에 힘겨운 날
우리 모두 그랬던 날
없어도 주고 싶은
웃음 하나 사랑 하나
호박을 쩍쩍 따개며
검정 쇠솥에 삶았지
보름달 등 삼아
마당에 자리하면
상위에 김 오르는
옥수수며 감자며
새큼한 물김치 맛도
꿀맛이던 그 시절
골지천
매미가 울음 떼를
한꺼번에 풀어놓고
웃음소리 얘기소리
찰방대는 물소리
여름엔 그런 빛깔로
싱그러운 장이 섰다
여울목 가로질러
송아지 풀을 뜯고
문래산 키가 자라
그림자 드리울 때
바위 틈 사이에서 피던
그 나리꽃
나리꽃
관준 네 배나무
관준네 배나무는
돌배나무 똥배나무
조막손 크기만한
돌배를 달았어도
봄날엔 눈이 부시게
꽃대궐을 이뤘지
바람 불면 눈꽃처럼
흩날리던 배꽃잎들
엄마 손 붙들고
배나무 옆을 지나다가
떨어진 배꽃을 들고
꽃잎처럼 웃곤 했지
새댁 때 큰 고모님은
그 배나무 아래에서
엄마 - 우리 할머니를
목청 돋워 부르셨다
조반을 준배해 놓으신 후
부르시곤 하셨지.
그때 그 고향집
어머니는 통통하게 살진 강아지보다 더 실한 호박을 반으로 뚝뚝 갈라서 검정 쇠솥에 넣고 쪘다. 박쥐가 후르르 후룩 어둠 속에서 날아다닐 무렵, 숟가락으로 호박을 떠 먹다가 입술과 코에 누런 호박을 붙인 채 잠이 들었다. 오박은 삭아야 제 맛이라고 어머니는 남은 호박을 광주리에 담아 뒤울안 장 단지 위에다 포실하게 얹어 두었다.
뿌옇게 동이 틀 무렵
제일 먼저 잠이 깬 매미가
이슬처럼 투명한 울음을
새벽 속에다 거미줄처럼 쳐댈 즈음
잠에서 깨어난 나는
광주리의 호박부터 찾았다.
눈을 비비며
광주리를 들여다보면
간밤의 어둠마저
단맛으로 섞여 있었지.
배가 통토아도록 먹다 보면
바람이 날 부러워하고
담장 밑을 휘돌아가던 구렁이도
날 부러워하였지.
정말
모두가 부러워하던
그 때 그 고향집.
가을 운동회
검정 팬티 런닝 셔츠
고무신을 신었어도
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에 들어서면
마음은 새보다 높이
날았어라 날았어라
그러다 싫은 것이
딱 하나 있었지
덤블링, 곤봉체조
신명나게 했었지만
뜀박질 고 건참으로
가슴부터 콩닥였다
장대에 매단 바구니
콩주머니로 후려친다
바구니 터뜨려지자, 큰 글자 ‘점심시간!!’
점심밥 먹을 생각에
들뜬 채로 환호했지.
가을빛 고향
파아란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날때면
해바라기
한나절
해 따라 돌고
채송화 곱게 핀
고향집 마당 앞에
봉숭아
손톱마다
꽃물 들였지
소꿉장난 하던
애들의 웃음소리
나비처럼 나풀대는
어린 날
꿈의
고향 시골집
고향집
문을 열면
앞산이
성큼 달려든다.
매미소리가
몇 줄기
대추나무에 걸린 채
푸르게 흔들리고
어머니 목소리에
반들반들 닳은
부뚜막
반갑지 않은 것이 있으랴
봇도랑 물소리가
저 혼자
뒹굴며 놀 때
음 메 =
송아지 목청이
더 없이 평화로웠다
뻐꾸기 우는 날
어릴 때 나를
찾아보고 싶어
어릴 때 살던 집을
찾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갔어도
고향집 풀포기는
그대롭니다.
배나무 집 순희는
시집을 가고 없어도
순희네 배나무엔
올해도 배꽃이 피었다 지고
산 너머
뻐꾸기만
외롭습니다
고향집 울타리
그땐 왜 그렇게 무서웠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글썽글썽 눈물만 고였다.
신 잃어버리고
꾸중 들을 일
무서워
울밖에 서서 울먹이다
눈물 젖은 얼굴을
울에 기댄 채
그냥 잠이 들기도 했지.
달님이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나는 지금
고향집 울타리를
만지고 섰다.
산촌의 밤
바람은 바람끼리
물은 물끼리
이때 쯤이면
귓속말을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은 꽃끼리
이때 쯤이면 서로
몸을 기댄다.
별이 몇 개
문을 열고
살며시 내려다보는
꿈을 꾸듯
조용한
시골 밤마을
달님은 혼자 화가가 되어
시골집 봉창에
밤 깊도록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여름날
한낮 긴 닭울음
떠돌다 잠들 무렵이면
여름 볕 무더기 무더기
마을에 쏟아붓는다
고추가 불을 뿜는다
고요마저 타던 불빛
무선전신국 언덕
중학생 시정, 고향이 그리워지면
무선전신국 언덕에 올라
‘고향아 !’ 하고 불러보았다.
첩첩이 둘러선 산
높푸른 하늘 너머
흰 구름만 뭉게뭉게 떠돈다.
채송화 맨드라미가
노을처럼 붉게 타는
시골 집
대추나무 잎 마다
매미소리 치렁치렁
휘어지고
고추잠자리
하늘 속을 들락거릴 때면
경수네 검둥 소는 앞 장광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었지.
하나 둘 셋 넷 …
무선전신국 언덕에 털썩 앉아
방학할 날 며칠인가,
손을 꼽아 보다가 내려왔다.
삽살개
쪼그리고 앉아도 편했다.
헛간 같은 변소
그래도 마음이 푹 놓였다.
문짝이 없어서
산도 보고 하늘도 보며
어른들은 농사일을 생각하곤 했지
겨울엔 불알이 알알하게 얼어도
삽살개란 녀석
뒤를 다 볼 때까지
밖에서 지켜주었지.
글 장군
할머니가 깨워서, 자다가 일어나 오줌을 눈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착하지”
쉬 …
오줌 줄기가 깡통에 수북이 고여지면
“우리 강아지 장군이네!”
엉덩이를 도닥이시던 할머니
지금은 안 계신
할머니,
“할머니? 나 장군 되었어.”
글 장군 되었지.
그해 설날
추녀 끝 고드름
눈이 부시다.
떡국 먹고
나이 한살 먹고
색동옷 입고 마을 어른들
세배 가는 길
집집마다 울타리에
웃음 넝쿨이 열리고
아이들 발걸음은
신나서
낭랑낭랑
마음
둥둥
꽃 풍선이었지.
고향 친구들
나른해져서
졸음 같은
봄날이면
은자 영자 선자 순희 옥희
바구니마다
아지랑이도 가득히
파릇한 달래도 가득히
그들 순한 눈빛은
달래 뿌리에서
뽀얗게 피어났다.
또 있지 또 있어, 맑은 웃음도
마구 냉이처럼 헝클어진 채
바구니에 담겼지
또 있지 또 있어
소 꼴 가득 베어 한 짐씩 지고 소나기 맞으며 들어가던 친구와,
논물 대러 가던 친구들 …,
고 애들
나처럼 홀딱
늙어가고 있겠지
아들 낳고 딸 낳고 말이야
시집 장가보내고
할배, 할매가 되어가겠구나, 우습다.
길쌈 하는 밤
등잔불을 켤 때면
옥수수 수염 같은 어둠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가는 슬며시 드러눕는다.
등잔불이 켜지고
어둠은
메주 덩이 뒷 쪽에 가서 거꾸로 매달리고
할머니
얘기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고
그런 어둠과 불빛이 만들어내는
어스름 속에서
길쌈을 하시는
어머님과 고모님 그리고 할머님은
한 폭의 수묵화였다.
우물가 집에서
쌉쌀한 날씨 때문에 모두들 몸을 웅크리며 우물가 집 문간방으로 모여들었지. 은자, 선자, 경수, 희영이, 부돌이, 장돈이, 동창이,...
동창이가 제일 먼저 얘기 주머니를 글러 놓는다. 히히히.... 귀신이 머리 풀고 나오는 열두대문 집 이야기, 아이들은 무서워서 서로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려고 난장판이 된다. 그때 쯤 진짜 귀신이 왔나 보다. 창호지 문에 후두두둑 모래알이 떨어지고 있었지. 아이고 무서워라. 모두들 이불을 둘러쓰고 엉덩이만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데 바깥에서 문구멍으로 살짝 들여다보던 대석이, 집으로 가며 낄길낄낄 혼자 웃고 있었다.
고드랫돌
딸그락 딱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는
소리에 맞춰
메주 뒤에 웅크린 어둠이
배밀이를 한다.
수줍은 무릎살 드러내는
호롱불
아랫목이 따끈따끈해진다.
그때
바람이
숯검정을 칠하여 돌아다녔다.
무성하게 자라는 건
동생의 잠이었다.
어머니 다듬이 소리였다
또
이따금 개 짖는 소리였다.
얼음판
눈을 쓸고 나니
쨍 -
눈부신 하늘색 얼음판
엉덩방아를 찧게 하고 팽이를 돌리게 하고
신나게 앉은뱅이를 타게 하고
그러면서 얼음판 위에 말간 웃음을
연신 미끄러지게 하였지.
굿
부엉이가 울고
무당 할멈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인다.
붉고 푸른 천 조각 사이로
하얀 언어들이 날아다닌다
징 ∼
어둠이 따라가고 있다.
끝내 일어나시지 못한 채
할아버지 혼이 뒤를 따라 나서고 ….
밥
귀한 손님이 오셔서
엄마는 하얀 쌀밥을 지으셨다
생일날이나 제삿날에야
맛볼 수 있는
군침이 도는 하얀 쌀밥
손님이 상을 물릴 때까지
멀찍이 앉아서 지켜보다가 …
밥이 줄어들고
밥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다
나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37
복주머니 찬 아주머니
듬성듬성 곰팡이가 핀 방에서
흥부가 덮었음직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누우면
자유의 벗으로 도배를 한 천장에서
복주머니를 차고 웃음 짓는 아주머니를 본다.
아주머닌 복주머니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잠자리에 들면
나는 복주머니를 찬 아주머니를 쳐다보고
아주머니는 복주머니를 흔들며 웃으시고
나는 조금씩 아주머니 웃음 속으로 들어갔다.
빨간 복주머니 속에도 들어갔다.
야옹!
뒤울안 툇마루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그래, 지금
행복하다고 여기는 건
그때 그 아주머니 복주머니 속에 있었기 때문이야.
38
꺽지 낚시
양짓말과 음달말을 사이에 둔
석둔 보에
얼었던 얼음이 모두 풀리면
물빛 검은 바위 밑에서
꺽지란 놈이 슬금슬금 얼굴을 내민다.
바람아, 콩 멈추어라
바람아, 콩 멈추어라
미기를 낀 낚시 바늘을 바위 밑에 들이대면
녀석은 주둥이로 툭툭 건들어보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돌린다.
바위를 옮겨다니며
부지런히 낚시 바늘을 던지가 보면
해가 살핏해지고
버드나무 가지에
꺽지를 한두름 뀌어든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개선장군처럼 어깨가 벌어졌다.
39
울뱅이
누가 건들기만 해도
눈물부터 글썽여서
울뱅이 울뱅이
심심하면 놀려대었다.
덩치 큰 대식이가
못살게 굴던 어느 날
마른 봇도랑에서
울음이 터지락하다가 싸움이 터졌다.
매일 얻어맞기만 하던 내가
그날은 돈키호테처럼 용감했다.
완투 스트레이트 아팟컷에다
레프트 훅을 퍼부으며 우라지게 쥐어 박았다.
억세게 얻어 터진 덩치 큰 대식이
다음부터는 꼼짝도 못했다.
야코가 폭 죽었던 기라.
끄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40
골방 쥐
큰 쥐는 징그럽지만
골방 쥐는 귀엽고 앙징스럽다
새까만 눈을 반들거니며
밉살스럽지도 않게 조르르르 돌아다니는 쥐,
국민학교 2학년 어느 공부 시간에
교실 바닥을 살금살금 기어가다가
“ 저 골방쥐 봐라, 골방쥐!”
방상용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대고
난 단번에 골방쥐란 별명을 얻었다
귀엽고 앙징스러운 골방쥐란 별명을.
41
소사 아저씨
아침을 먹자마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오늘은 웬일로
친구들이 안 보이나
교실도 텅 비고
운동장도 조용하다
너, 일요일도 학교에 왔구나
소사 아저씨가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42
산수 공부
아버지게서 날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산수문제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문제를 풀어주셔도
난 하나도 몰랐다.
그래도 아버지는 '알았어?'하고 물으면
나는 몰라도 '예'하고 대답했다.
다른 문제를 내 주시면
난 전혀 깜깜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으며
금세 불똥이 떨어졌다.
또 문제를 풀어주시면서 '알았어?' 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무조건 '예'였다.
몰라서 연신 두들겨 맞아도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켜도
'예' '예' 이 하나 만은 열심이었다.
43
지킴이
샘물터가 숨었다
싸리나무 울타리도 어디론가 숨고
눈 온 날처럼
어린 시절의 작은 길도 숨었다.
저기 쯤
여기 쯤
요기 쯤일 텐데
오래된 포플러 나무에 앉은 매미는
내 마음을 알았나 보다
어서 나와
어서 나와
목소리가 닳도록
그들을 불러내고 있다.
44
박쥐
등겨를 피운 모깃불이 솔솔 타오르고
자리 펴 논 마당 상머리에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그 때 즘,
박쥐야,
너는 어둠 속에 날개를 펴고
우리들 머리맡을 맴돌았지
삶은 옥수수와 호박 감자떡
거기에 박쥐, 너가 함께 하는 저녁이라야
맛났지.
휙 - 휙 -
너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너는 밤이면
내 부러움의 주인
용감한 흑기사
45
논두렁길
콩잎사귀를 뒤적이면서
바람이 지나간다
그 뒤를 메뚜기가 콩닥콩닥
나도 콩닥콩닥
설레는 마음끼리 뛰어다녔다
한웅쿰
손 안에 쥐어지는 건
메뚜기와 잎사귀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맑은 햇살이었다
고추잠자리 날개로
살금살금 내려앉는
파란 하늘 때문에
나는 동생과 저물도록 뛰어다녔다
46
나는 나는 너무 커서
초가집도
그대로
싸리울도 그대로
강가로 이어진
길도
그대로
모두 다
그대로
기다렸는데
나는 나는
너무 커서
어른이 됐네.
47
대추가 여물 때면
대추가 여물 때면
물소리가
더 파래진다
대추가 여물 때면
잠자리가
더 높이 날아다닌다.
대추가 여물 때면
코스모스가 더 맑게 피어나고
대추가 여물 때면
고향 마을 뒷산에는
통통한 보름달이 방글방글 떠오른단다.
48
추석
추석이면 고향에 간다
마음 속에서나 그리던 고향에 간다
울퉁불퉁 험한 산길이지만
시골 버스를 타고 가노라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
한폭의 그림처럼 벼가 익어가고
골짜기를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들
내 귀가 젖는다. 퍼렇게
순희, 영희 다 잘 있을까
소꿉친구들 지금은 무얼 할까?
그 옛날 그 집들은
지금도 그렇게
저녁 연기를 날리고 있겠지
숲속에선 새들의 노래소리 듣고
나무들의 키가 부쩍 자랐겠지
생각만 해도
그리운 고향
들여다보면
파란 하늘
가을이 익어가는 냇가에
서리 묻은 오후의 햇살이
한 두름씩 던져지고
오손도손 모인 아주머니들
통째로 뽑은 무를
여린 물살에 헹구는 고향은
지금쯤
하얗게 씻은 빨래를 들고
가을 하늘에 더욱 푸른
우리 어머니의 손, 손이
분주히 집 안팍을 돌아보고 계실
고향엘 간다
고향엘 간다
마음 속에서나 그리던
고향엘 간다.
49
뿌리 이야기
마을에 선 나무들이 푸른 잎을 드리우고
새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뿌리를 흙에 든든히 박았기 때문이다.
산이 우뚝 서서
마을을 지키는 것도
아랫도리를 땅에 깊이 감추었기 때문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도시로 나온 지금
어른들은 붙들게 없어, 뿌리 내릴 곳이 없어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붙들거나
PC방에 가서 게임기를 붙든다.
우리들이 마냥 푸른 하늘 아래
무청 같이 쑥쑥 자라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고향집을 꽉 붙둘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51
보리밭
기차를 타고 오다가 만났네
창밖에 보이는
고향 같은 마을
찬바람을 이겨내며 용케
고개를 들더니
어느새 어느새
푸르른 물결
저쪽 끝에 순이 얼굴, 머리카락만
나풀댔지
보리밭 이랑 사이
살금살금 스며들면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숨바꼭질도 아니지만
재미가 솔솔 나던....
보리밭 이랑 속에 드러누우면
대궁 사이로 비치던
파아란 하늘
뻐꾸기도 내 잠 속에 떠다니던
6월
기차를 타고 오다거 문득 만났네
창밖에 보이는
보리 핀 마을
52
삼나무 숲 새 둥지
삼나무 숲은 신비한 놀이터
들어서자마자 보물찾기가 시작되었지
씩씩한 병정처럼 줄지어 푸른 삼대궁 사이
요리조리 비집고 눈을 굴리면
어디에 숨었지?
노래만 들려주는 깔깔새
드디어 찾았다
깔깔새 둥지
어미새 없는 둥지 속엔
탐스럽고 뽀얀 새알 두어개
콜콜 잠자는 듯 누워 있었지
한참을 휘돌아나오면
낯선 세상에서 살다온 아이처럼
방향을 잠시 잃었지만
새 둥지를 들고
삼대밭을 나오면
전쟁에 승리한 장군처럼
뽐내었지
삼나무 잎이
무서운 대마초 잎인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
깔깔새 둥지를 숨겨놓고
우리를 꾀던 삼나무 숲
54
산제골 소沼
여름이면 산제골 소는
엄마처럼 가슴을 열어놓고
아이들을 끌어모았다
어쩌다 먼저 가서
혼자 멱을 감을 땐
검은 물빛에 맘이 켕기었지만
까르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뜨던 날은
방죽에서 소(沼)까지 한달음쳤지
햇살에 달구어진 건
우리들 몸만 아니었지
뱀장어와 자라를 감추어놓고
으스대던 자라바위는
물장구 소리에 가슴이 더 넓어지고
산나리꽃은 얼굴이 더 짙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산마루에 걸릴 때에야
풀을 듣넌 황소가
음 머 --
아이들을 하나 둘 집으로 불러들였지.
우람한 문래산이
우리들에게 선물로 준
제일 멋진 수영장이던
산제골 소(沼).
56
물레방아
뽀얀 쌀겨를 뒤집어쓴
물레방앗간이
논 가운데 있었지
허수아비 이따금
팔을 흔들면
참새들이 날아가다
쉬어가는 곳
옥색 하늘이 바퀴살에 감겨
곤두박질치는 동안
하얀 쌀알이 소르르 소르르 쏟아져 나왔지
두둥실
한가위 달이 뜨면
마을은 자르르 윤이 나고
떡을 담아 보내던
뜨거운 인정이
물살로 피어나던 마을
모두
물레방아 덕분이었지.
58
설날 아침
추녀끝 고드름
눈이 부시다
떡국 먹고
나이 한 살 먹고
색동옷 입고
세배가는 길
집집마다 울타리에
웃음 넝쿨이 열리고
마음
둥둥
꽃 풍선이다.
60
설날
어김없이 설날 무렵을 전후해 눈발이 내렸다.
설빔을 입고 세배가는 길
떡가루 보다 흰 눈을 밟으며
뽀드득
뽀드득
눈밟는 소리가 비누방울처럼 따라다녔다
큰 집 작은 집 할 것 없이
마을 어른들 집집마다 찾아
세배를 드렸지
올해는 더 튼튼히 자라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마을 어른들은 소원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덕담을 하셨지
희망을
떡 한 접시에 나누어 먹으며
기쁨을 과즐과 엿에 묻혀
주고 받으며
설날은 그렇게
마을 어른들과 마을 아이들이
모두 한 가족이 되었다
한 식구가 되었다.
61
밤길
캄캄한 밤
고갯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흠, 거 누구요!
아랫 마을 찬수 아비요, 댁은 뉘시오?
양짓말 사는 쇠북이 아범 올시다.
어둠 속에서 얼굴을 못 봐도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
성황당 마루턱에 돌 하나 씩 얹어놓고
담배를 한대 씩 피워 물며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인적 드문 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반가웠다.
사람이 참 귀한 세상이었지.
63
장설
배 고프지 않은지
힘들지도 않은지
지붕까지 차오른 후에야 조용해졌어
하늘은 인심도 좋지
풍년이 들라고
마을에 선물을 준거야
깨끗하고 정겨운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게야
우리는
두더지처럼 눈을 파내며
이웃집 문턱까지
굴을 뚫었어.
상상해 봐
뚫린 굴을 오가며
살찐 토끼처럼 다니는 길
눈 덮인 시골 마을의
밤은
마음 들뜬 우리처럼
뜬 눈으로 지새우고
땅은 두툼한 이불을 덮고
봄꿈을 신나게 꾸고 있었지, 뭐니.
64
폭우, 그 후
벼포기가 하늘을 향해 빳빳이 자랄 무렵 곡 한번은 폭우가 내렸다. 삽시간에 골지천은 황토색으로 변하고 물이 둑방의 윗부분까지 찰랑거렸다. 대청소가 시작된 것이었다. 손 닿지 않은 거리에 있던 물건들은 물에 의해 씻겨 내려가고 이쪽 저쪽 자리 이동이 시작되었다.
비가 와서 젖어 있는 마을, 젓은 골목 사이로 메밀전을 부치는 고소한 내음이 퍼져다니다 오디 나무 숲 사이로 맴돌았다.
치적대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구름을 걷어내기에 바쁜 날, 강에 나가니 청때 씻어낸 물이 그제서야 속을 훤히 내보였다. 우유빛과 곰 가죽 같은 색깔로 어우러진 조약돌들이 '갈갈갈갈,,,,' 그들 본래의 낮은 음표를 자유롭게 드러내놓고 그즈음 바람도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 햇빛에 섞여마을을 바삭바삭 말리기 시작했다.
며칠 새 더욱 실하고 굵은 벼 포기 사이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뭉클뭉클 터져나왔지.
66
깡통차기
깡통은
얄미운 정규다
못 살게 굴던 연철이다
술래가 없는 사이
뛰어나와서
뻥 -
깡통을 찬다
시원하다
답답하던 가슴이
확 트인다
끼니도 잊고
어두워질 때에냐
집에 들어가지만
신나게
깡통차기를 하고 온 날은
별 꿈을 꾼다.
67
고향집 유리창
밤새 잠든 사이
유리창에는
동장군이 그림을 그려놓고 갔다
창 너머 검정색 굴뚝도 보이지 않고
까치소리도 빨갛게 얼어버린
오늘 아침은
유리창에 신기한 요술 궁전 한 채가 또 지어졌다
동장군이 밤마다 새롭게 그려놓은
그림을 보며
나는 날마다 새로운 마법의 성에 사는
환상의 꿈이 커 갔다.
68
깊은 그리움
이끼들의 연두색 바람은
강인하였다
내가 당시 몰랐던 이유가 있었다
부드러움이
강인함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갓집 옆의 아람 나무들이 살던 늪
천년의 소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듯,
암벽 사이 어디엔가 젊음이 굽이치고 있었다.
늪의 바람 소리는 깊은 그리움
마력 같은 존재의 바다였다, 우주가 딛고 선
뿌리들
삶이 병드는 낯선 땅을
치유하는
살아있는
새벽의 손임을 뒤늦게 알았다.
69
겨울 아침 새소리
추울수록
더
눈부시다
추울수록 더
해맑다
사는 일도
이렇다면야 ….
70
공기 냄새
잠을 깨우느라고
새벽녘 할머니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털어내었다.
살찐 송아지 울음이 문 안으로 들어오고
발가락이 고운
새소리까지 들어왔다.
어머니가 끓이는 여물 냄새는
하얀 김과 함께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잉걸불에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일 즈음
문을 닫으시는 할머니
짚자리 깔아놓은 방안은
화로의 더운 불빛에 알맞게 데워지고
방에는
새 공기 냄새가 났다.
너무 좋았다.
71
비움의 絶學
연한 잎을 꺼내 들더니
무성한 초록 세상을 만들고
나무가 방그레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산과 들엔 온갖 곤충들이 찾아든다
녹색의 향기, 녹색의 향연에 모두들
초대받았구나
주위가 온통
和氣靄靄
어느새
실하게도 열매를 매달더니
첫눈 오기 전
모든 걸 내려놓는다
부럽고나,
비움의 絶學
나는 왜,
저 나무를 배우지 못하고
이제껏 살았는가.
72
폐달을 밟다
기상이변만
참변인가
몸이 사는 즐거움 때문에
생태교란
자연파괴
가속 페달을 밟았지
순식간에
전 지구적 재앙으로 가는
페달을
너도 나도
밟고 있는 줄을
알까
74
고향집 선자 아재 어머니
뙤약볕 아래에서
호미질로 늙으셔도
고향길 들어서자
반겨맞아 주시면서
더운 밥 지어 놓으시고
많이 먹으라 하셨지
일하시던 땀 닦으며
덥석 손을 잡으시고
지노이 많이 컸구나
핌들재, 공부하느라
인정이 단꿀로 흐르시던
선자 아재 어머니.
75
고향집 경수네 대추나무
한 아름도 더 되는
경수네 대추나무
살금살금 정지를 지나
울안으로 들어서면
나무엔 꿀따는 벌들
잔치 한창 이었지
서산 머리 해 기울 쯤
대추나무 아래에 서면
황금 날게 옷을 입은
매미들 둘 셋 넷 …
꿈꾸고 있는 것일까
쉬고 있는 것일까
심심하면 경수네 집
대추나무 밑에 가서
숨어 있는 매미들을
찾아보곤 돌아왔지
까마득 너무 높아서
목 아프던 그 시절
76
고향집 겨울 아침
고인 물을 떠내고
새 물을 담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터시는 할머니
살찐 송아지 뽀얀 울음도 들어앉고
발가락이 시린 새소리도 내려앉고
여물 끓는 냄새도
푸짐하게 들어찼다
잉걸불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여지면
그때서야
게으름뱅이 해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
해해해
밝은 웃음을 깔아놓곤 했다.
77
겨울 창가에서
방터골 추녀 끝엔
고드름이
달렸는데
진달래꽃이 달려와 안간다
눈을 감으니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고향의 봄 뒷동산
고요로이 일어서는
초록빛 산과 산
그 속에
어머니의 모습처럼
순하게 진달래 피어났지
한 줄기 두 줄기
녹색으로 번지는
바람소리
버들피리 소리
어디쯤에서 들려올 듯한
햇빛 부신 날
고향을 찾는 마음의 시냇가에는
벌써 지즐지즐
봄이 흐르는구나.
78
고향 그 옛강
얼음장을 깨고
겨울을 녹이는
빨래 방망이 소리가 커진다
산마다
새 움이
말간 울음소리처럼 돋아나고
봄 봄 봄
물소리가 흥겨워
골지천 강물
너래 반석 깊숙이
백 년도 더 묵은 자라를
전설처럼 키워가던
그 자라들이 지금도 있는지 몰라
여름철이면
밭이랑마다 익어가는
옥수수 향기도 떠내려와
그 속을 함께 흐르고 있는
아늑한 정
우거진 떡갈나무들이
거꾸로 잠겨
코를 대면
진하게 배어나오는
떡갈나무 냄새
산봉우리가 드리우는
산 그림자에
목화송이 같은
송아지 울음이 풀어지던
고향 그 옛강
80
문래산
투박하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럽다
세월이 가면
다들 떠나가는데
묵묵히 고향을 지켜가며
살아간다
산제골 옆에 강영감님의 토종 벌통
듬뿍 꿀이 들게
싸리꽃을 피워놓고
정화수 떠 놓고 비는
정이 어머니의 소원을 살펴보시려는지,
둥그런 달덩이 띄워 놓았다.
82
희영이네 밤나무 숲
내 살던 고향집 그 옆에 메밀밭
메밀밭 그 옆에는 아름드리 밤나무 숲
무서리 내린 날이면 쌀알 밤이 떨어졌지
그때는 잠귀도 밝아 이른 새벽 일어났다
풀숲을 헤치면서 싸락밤을 줍곤 했지
주머니 볼록해지면 부자 된 듯 그 기분
숨은 밤을 찾아 이리저리 거닐 때면
메밀밭 망가진다고 고함치던 희영이 할머니
지금은 어느 곳에서 메밀밭을 가꾸실까.
83
샘 물
대문을 열고 나와 울타리 돌아들면
미나리 파릇이 돋는 그 길 끝에 샘물터
우리네 삼백예쉰 날 젖줄 물린 맑은 샘
들찔레 꺾다가 하루 해 다 보내고
감자 섞인 보리밥 물에 말아 먹다 보면
길 앞에 훤히 보이는 우리 어머니 물동이 길
샘터에서 길은 물로 새해 새날 아침을 열고
때로는 소원성취 수명 장수 복도 빌고
마음에 묻은 땟자국도 정화수로 닦았지.
84
밤 길
친구와 늦게 놀다
집으로 가는 길
옥수수 밭속에서
우우우 수수수
머리 푼 처녀 귀신인가 봐
울음소리 들렸지
그 해 약 먹고 죽은
성자 누니 목소리
뒤에서 쫓아오는 듯
머리끝이 곤두선 채
말로만 듣던 도깨비 불
휙휙 날고 있었지.
85
노간주 나무
마을 뒤 언덕 위에
아람드리 노간주 나무
지나온 얘기들
나이테에 새겨놓고
다람쥐 오르락 내리락
무등을 태운다
팔 넣어도 닿지 않는
뚫어진 구멍 만큼
속 깊이 뿌리 내려
지켜온 고향 마을
산 함께 바위와 함께
흙에 뻗은 숨결을 보네.
86
버스가 들어오던 그때
어둑어둑 할 때면
요정처럼 나타났지
빨강 노랑 등을 켠
옛날 그 시골버스
촌놈인 우리들 눈은
화등잔만 해졌지.
앞머리에서 뒷 꽁지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신기하고 희한해서
또 다시 둘러보고
누런 코 질질 흘리며
가슴이 울렁 댔지.
또 있다, 또 있어
말쑥한 차장 누나
우리 동네 순데기 보다
몇 십배 더 예뻐 보이던
살결이 뽀얀 누나를
슬금슬금 훔쳐봤지.
오라잇! 신나는 차장 누나 목소리
그래서 우리 또래
말광량이 계집애들은
큰 꿈이, 제일 큰 꿈이
차장 누나 그거였지.
버스가 잠을 자고
다음 날 떠날 때면
머리를 빡빡 깎은
촌놈인 우리들은
손에다 침을 뱉어가며
뒤를 따라 달렸지.
벌써 60년도 더 된 일이구나.
87
팔베개하고 누우면
고향 생각을 하면 아름답기만 하랴
그러나,
팔베개하고 누우면
모여드는 생각들
예쁘고
소란스런
새들의 지저귐
돌돌거리며 달려드는
물소리
생각에 잠겨
강둑에 선
누렁이 소
장독대 옆
아련히 피어나는 봉숭아
,
진 외갓댁 할머니가
귀엽다고 애칭으로 부르던 갓난이 모습
팔베개 하고 누우니
모두
꽃밭에 숨은 아지랑이 같다.
89
꿈 상자
어린 날이 사는 꿈 상자였다
고향은,
아무리 열어봐도 지치지 않는 …
가만히
열어 본다
파란 하늘이
고추잠자리들을 마구 날려 보낸다
해 따라
도는
노랑 노랑 해바라기
뚜뚜뚜 뚜뚜뚜 …
마구 나팔을 불어대는 꽃 음악대
채송화 담뿍 피어나
더 예뻐진 마당
고우셔라,
물동이 이고 막
어머니, 들어오셨다 .
90
눈썰매
함지를 들고 눈 덮인 밭 언덕을 올랐다
함지 안에 들어앉아 내리달렸지
스르르르 내려가는 재미
뒹굴며 자빠지는 재미
눈 벌에 저만큼 뒹구는
함지 썰매 따라
웃음도 대굴대굴 구르며 따라갔지.
손이 발갛게 언 후에야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바지에 묻은 눈을 털며
야단치는 대신
감기 들까 걱정이 더 크셨다..
91
불장난
어스름 저녁 무렵
부엌에 들어와서
여물 끓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으면
소나무 타는 그 냄새
탁탁 튀던 그 불똥
부지깽이 요리조리
나무를 들쑤시면
인석아 오줌 싼다
말리시던 할머니
그래도 그냥 좋아서
불장난이 좋아서
불 장난 한 다음 날은
신기하다 신기해
요 위에 엉터리로
그려진 한국 지도
키 쓴 채 쑥스러워도
소금 얻으러 다녔지.
92
디딜 방앗간 옆 우물
누구네 집이던가, 집 앞
디딜 방앗간 옆에 커다란
마을 우물이 있었다.
긴 두레박줄이
한참을 내려가고 난 뒤에야
‘철렁!’ 소리가 들렸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닥은 안 보이고
시커먼 물만 흔들렸다.
이무기가 수염을 뻗으며 용이 되려는
몸짓을 하는 것일까
별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느 날은 우물 곁에
물에 씻은 하얀 떡쌀이 담긴
광주리가 즐비하였다.
그래, 마을이 안전하고
무병장수 건강한 건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는
이 우물 덕분일 거다.
고맙다
고맙다
93
길룡이 아저씨
길룡이 아저씨는
멀리서도 알아챘다
깊은 산 숲 머루 덩굴
귀신 같이 찾아낸다
그 뒤를 졸졸 거리며
내가 따라 다녔다
골짜기 더듬어서
찾아낸 머루 덩굴
나는 입이 터지게
움켜 넣고 쑤셔 넣고
그러다 멋쩍어서는
한번 씨익 웃었지
그럴 즈음 바위에 기댄
길룡이 아저씨는
지긋이 눈감은 채
두 손을 움켜 잡고
또 하나 뻐꾸기 소리를
산에 심고 있었다. .
94
길룡이 아저씨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린 갈잎들이 바람소리를 내는 산속에서, 떨어져 수북하게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우리는 숨소리도 죽였다.
털이 보송보송한 하늘이 낮으막하게 산위에 엎드려 망을 보고 토끼 옹누를 놓는 길룡이 아저씨 등 뒤로 바람이 불었다. 잿빛 바람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는 그믐날 저녁 길룡이 아저씨 손에는 서너 마리 토끼가 들려 있었다. 잿빛 토끼
태석이, 갑석이 아저씨, 동석이, 꼭지 아저씨 모두들 모인 할머님의 친정댁. 아래 윗방에 며느리인 산옥이 엄마는 연신 만둣국을 퍼날랐다. 만둣국처럼 따끈따끈한 이야기가 방에 피어날 때 밖에는 토기 가죽이 문기둥에 매달려 흔들리며 어둠 속에 잠겨가고 있었다. 잿빛 어둠
그날 밤 산에서 내려온 마른 나뭇가지 소리를 따라 눈발이 날리고 저들끼리 부딪치는 울음이 부엉이 꿈속에 빛났다. 잿빛 꿈.
95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
때맞춰 장작을 태운다
마른 장작 더미에서
불꽃이 튀면
좀 더 부푼 눈이 내리고
길에 선 나무들은 잠에 취한다
장작이 타면서 그 냄새에
눈도 취한다
소용없는 일들을 꿈꾸게 하여
더욱 들뜬 눈들의 축제
마을 길이 무너지면서
내 마음에
하얀 새길이 난다
하얀 길에
꽃사슴 발자국이 나고 있었다.
96
기다림
문설주에
그리던
엄마 얼굴
빼어 물고
골목길
가득 채우는
눈망울
장에 가신
엄마의 길은 멀고
가뭇가뭇
어둠만 쌓여가는데
동글동글 그리는
동그라미 따라
뱅글뱅글
따라 도는
엄마의 얼굴
1976년 『교육자료』3월호에 동시 ‘여름밤’이 초회 추천을 받을 무렵이니 이 작품 역시 1975년 여름 무렵에 써서『소년』에 응모작으로 보낸 갓 같다. 그러니 1976년 초 유경환 선생이 이 작품을 추천 후보작으로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추천작으로는 좀 못 미치나 버리기는 아깝다 싶었던 가보다. 이 작품을 읽은 조규영 선생은 아주 좋은 작품을 읽었다고 만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참 늘 고마운 분이시다.
97
井地
건강한 울음, 닭 소리가 어머니를 깨우셨다.
때맞춰 정지문이 열리면
갇혀 있던 어둠이 탈출하듯 빠져나갔다
어머니 손에서
불길이
당겨진다
나무 타는 냄새와
여물 끓는 수증기로 뿌연 모습이
마음에 든다
찰랑찰랑한
빗살무늬 같은 물동이,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과 함께다
식탁에 올려질
밥과 반찬들
분주하다
99
제삿날
제삿날이면 아이들은 좋아했다
맛있는 떡과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기 대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재잘재잘 아이들끼리 모여
방 한구석이지만
연신 떠들고 웃아도 이날만은 어른들이 아주 너그러우셨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연신 손놀림이 바쁘셨다
새벽 1시 제사 지내는 시각
그때까지 졸려도 이겨내야 했다
옛날 얘기며 우스갯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 찾아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곯아 떨어졌다.
“제사 지낼 시간이다, 얼른 일어나야지.”
할머니께서 깨우시면
그제사 눈비비고 일어나 세수하였다.
아이들은 닭우는 소리 들으며 제사상에 둘러섰다.
돌아가신 어른의 모습조차 몰라도
배불리 맛있는 것 먹게 하여 주신다고
자꾸만 절을 하면서 고맙다고 하였다.
100
등잔불
감실감실
방안에 퍼지는
따뜻한 빛
밝지 않아
정겹던
불꽃
어머니는
심지를 돋우시며
밤 깊도록 삼을 삼으셨지
삼 광주리에
수북수북 고운 삼이 쌓이면
불빛도 소복소복 함께 쌓이고
아랫목에 누운 나는
몽실몽실
꿈이 깊어갔다.
101
등잔불
어슴프레하다
이런 흐힛한 불빛이 있어서
편안해졌다
힘들었던 일에 묻어있던
피곤이
저녁상 위에서 모두 녹았다
잠시 후
흐릿한 불빛 따라
가물가물 잠자리에 든다
등잔불 아래
식구들 잠이 고요해진다
따스한
조용함.이다
102
母 情
등살 아린 삶에 겨워
함지 이고 나서던 길
무거운 여름 한낮
목청도 햇살에 타서
어머니 오는 저녁이면
길목마저 휘었다.
가난과 고초로
매운 세월 눈을 뜬 채
눅이신 속이야 또
삭아 몇 동이 되오리까
한세상 눈물로 굵은
힘줄만이 보입니다.
103
母 情
어머니, 오늘 아침도 새벽 같이 일어나셨지요
우시장 한 구석에 가게 문을 열어놓고
조반을 걸러 가면서 도마질을 하셨지요
이날 이때까지 아린 눈물 얼마신가요
그런 눈물조차 숨겨두고 사시면서
늘 젖은 어머니 손끝 마를 날은 어제인지.
( 1988. 11. 20. 『강원시조문학』)
104
母 情
나날이 당신 삶은 터지고 언 손마디
걱정 일천 동이 만근 쇠로 눌렀어도
옷깃에 다 젖어 배는 먹물 같은 자국들
오십 고개 넘으셔도 허리 크게 못 펴시고
열 번 천 번 터진 흠집 그런 살만 붙여 오신
속살로, 매운 속살로 끓인 국은 얼마던가
당신께서 선 자리는 자리마다 근심 방석
겨운 삶 얼마길래 꽃상여로나 가시고 싶다던 …
먼 훗날 저승 자리엔 둘레마다 꽃이소서.
( 1986. 6. 20. 『시조문학』 여름호 )
105
母 情
삼동 베개 밑에 홑이불 깔아놓고
심지 불 돋워가며 덥혀 둔 아랫목
훈훈한 사랑의 불길 아직 이리 따습니다
106
산골 아침
어머니는 눈에서
어둠을 뜯어내며
아궁이에
활활
새벽을 태우고 있다
보글보글
솥안엔
아침이 끓는 소리
그제사
잠꾸러기 앞산은
안개비ᅟᅵᆾ 하이얀 커튼을
말아 올리기 시작하고
울 가득히
쫑알쫑알 쫑알쫑알
아침 햇살을 쪼아먹는
산새들
형은
마당에 수북히 쏟아지는
산새 울음을
신나게 쓸어모으고 있다.
107
어머니의 굴뚝
회색빛 눈발이 내렸다.
이 때, 어머니의 굴뚝에서도 한 무리
회색 연기 무리가 올랐다.
소나무와 생 싸리나무와 밤나무 가지
냄새가 진하게 흩어졌다.
금세 길이 막히고
새소리가 까마득하게 떠올랐다.
여물 끓이는 아궁이 앞 불빛 덕분에
마구간 황소는
눈망울이 더 커 보였다.
눈이 휘날리는 때에 맞춰
어머니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무더기로 피어오르고,
당당하게 아궁이 앞에 앉은
어머니는 언제나 믿음직하셨다.
그 모습에 내 마음은
아주 안정되었다.
108
어머니 물동이 길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새벽을 여는 어머니
어머니는 물동이를 이고 나섰다
어머니 물동이 길 끝에는
동그란 샘이 아기 웃음처럼 솟았다
길옆 도랑엔
자작하게 돋아나는 미나리들이 키를 재고
눈을 반짝이듯 빛났지
봄이 되자
소리 없는 아지랑이가
나풀거리고
멀뚱거리며 서 있는
고향 집의 옥수수 섶 울타리 뒤로
새소리가 더 맑아졌다
봄이 찾아든 어머니 걸음은
흙냄새가 더 진해졌지.
110
어머니가 장만한 우리 집 아침
새벽녘 잠결 속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상쾌하게 들리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세상이 편안해진다.
갑자기 후다닥 일어나
젖은
어머니의 손을 만져보고 싶다.
싱싱하게 일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날마다 제일 먼저
새벽 속으로 걸어 나가신 후
포름포름 새소리가 묻은 손으로
햇살을 담아
아침을 장만해 들어오시는 어머니
어머니 몸에서
떡갈나무 냄새가 나는 같기도 하고
어머니 몸에서
푸른 하늘 냄새가 나는 같기도 하다.
상 위에 무럭무럭 김 오르는
어머니가 만드신 음식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
온 식구가 밥상 가에 둘러앉으면
어머니가 샘물터에서 길어 온
마을 이야기로
꽃이 피는 밥상
아버지 숟갈을 따라 이야기가 넘어가고
새언니 젓가락을 따라 이야기가 넘어가고
이야기는 어느새
삼촌 국그릇 속에도 들어가 배었다.
정말이다. 뚝배기 장 그릇 속에도
물컹물컹 이야기가 고여
그 즐거움을 떠 넣고 있는
식구들의 아침 한때
모락모락 김 오르는 숭늉도
한 모금 씩 나눠 마시고 상을 물리면
어머니는 식구들이 비운
밥그릇을 모두 담아 들고
아침이 출렁이는 샘물터에 나와
밥그릇에 묻은 할아버지 웃음 소리를
간 그릇에 밴 할머니 웃음 소리를
반질반질 닦는다.
식구들의 아침을 닦는다.
111
가을 새벽, 어머니는 …
우리 어머니는 해가 숲속에 들어서기 전에 바람이 푸릇한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문을 열고 나와 공기를 깨우고 샘물을 푹 바가지로 떠서 물을 깨웠다.
가을날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아침, 물동이 인 어머니 걸음은 이슬에 젖은 파란색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어머니 치마에서 풋풋한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이즈음,
가을도 일정한 거리에 머문 채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집 앞 문래줄 숲 덩굴에서 몰래 몰래 다래가 익어갈 때처럼….
114
어머니의 굴뚝
한 무더기 곰이 하늘로 오르고 있다
하늘에 올라간 곰들은
다시
생 싸리나무 밤나무 가지 사이로
발톱을 뿌려댄다
회색빛 눈발
우리 어머니의 굴뚝에서
치솟는 연기는
하늘로 오르는 또 한무리 곰의 울부짖음이었다
회색빛 연기
눈이 쌓이고
길이 막히고
새소리가 까마득하게 뜬 겨울날
어머니의 아궁이는
싸리나무가 연신 불꽃으로 타고
밤나무 가지가 연신 불꽃으로 타고
하늘에 올라간 곰들은
다시
생 싸리나무 사이로
생 밤나무 사이로
내려왔다
회색빛 눈발
잿빛 토끼가 마구 날아다녔다.
115
어머니의 등잔불
책을 펴놓으면
등잔불이 글씨를 비추어주었다
졸음이 올 무렵
어머니 손에는
꿀물이 들려 있었다
얘야!
내 마음을 깨우는
어머니 음성
따스한 등잔불이었다.
117
어머니의 부엌
어머니 굽은 허리가 익은 무엌은
단맛 쓴맛도 골라 버무려놓고
매운 가난도 한 뭉텅이 장맛으로 삭혔습니다
땀띠 돋은 가슴이며 등허리 물큰 나날을
소금 절이고
배추잎 푸른 칼질을 하며
아침을 장만하셨습니다
보리밥과 숭늉과 된장찌개를
당신의 불꽃으로 끓이고 닳이고 졸이시던
어머니의 부엌은
이제 그 내음처럼
깊은 잠속으로 잠겨갑니다
아 아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118
어머니의 부엌
어머니는 이른 새벽 물을 길어왔다
솥에 물을 길어부을 때면
쏴 -
굴참나무 숲에 있던
바람이 들어왔다
가마솥에서는 소죽이 끓고
부엌과 마구간 사이로
따뜻한 평온이 서로 통하였다.
모든 게 어머니 온기 덕분이었다.
(2024. 2.)
119
산나물
해가 기울어야 묵직한 보따리를 이고 들어오시는 어머니, 작은 산을 이고 오시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산을 밟다가 오신 어머니 몸은 온통 푸른 산 냄새였다. 보따리에서는 깊은 산속의 참나물이 잠에서 깨어난 듯 와르르 쏟아져 나오고 나물 잎사귀에선 파릇파릇한 뻐꾸기 소리가 새어나왔다. 거기에 산의 싱싱한 기운이 안개처럼 퍼졌다. 나물 포기들 사이엔 어김없이 송구 몇개도 끼어 있었다. 동생과 나는 물오른 송구를 신들린듯 벗겨 먹었다. 산에서 자란 나무의 생기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몸이 간질간질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산나물 삶는 냄새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잉크 방울처럼 잠 속에 풀어지고 있었다.
120
인삼에 묻었던 꿀 같은....
꿀에 찍어 먹어도 왜 그리 썼을까 아침이 되면 강제로 먹어야 하던 인삼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를 달래시며 인삼을 먹이시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셨지. 허약한 체질이 그나마 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인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정말 호사스럽게 자랐는데, 그 뿐인가 암탉이 알을 낳으면 따끈따끈한 달걀은 내 몫이었지. 갓 태어난 달걀의 따스한 감촉이 지금도 손끝에 아리아리 느껴지고 인삼에 묻었던 꿀 같은 사랑이 늘 마음 한 쪽에 보름달로 뜨고 있다.
121
어머니 빨래 방망이 소리
어머니의 빨래 방망이 소리,
그 소리는
옥양목 색깔 같았다
소리는 점점 퍼져나가면서
얼음장 밑
봄을 깨우려나
차츰
온 마을을 들뜨게 하였다.
122
어머니의 기도
작은
물 한 그릇에
담긴
어머니
마음
장엄한
바다였다.
123
고향집의 겨울밤
-
등잔불 아레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던 날
그리워라
꿀물을 타 주시던
불빛처럼 따스한
어머니 손
어슴프레한 어둠이
너무 따뜻해
평화로움만 넘실대던 방 안
아궁이에선
탁, 탁
군불지핀 장작이 타오르고
부엉이 울음이
책갈피 사이로
가만가만 찾아들었던
가장 마음 편한 밤이 된 것은
어머니의 평화로움 때문이었다..
124
어머니의 저녁상
물놀이를 끝내고 들어오니 산 그림자가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삼촌들은 종일 논밭에서 검게 그을리며 고된 일을 하고도 집에 들어오면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늦게까지 일하시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셨다. 가장 힘들게 일하시더니 지구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상을 차리셨다. 저녁상 위에는 마을 소문도 풍성하였다.
어머니의 따뜻한 집안 살림으로 가족들이 모두 천하장사였다.
(2024. 3)
125
산나물
하루해 벗해가며
저물도록
부르트도록
나물 뜯던 우리 엄미
자욱자국 아린 손끝
얼마나 힘드셨을까
산보다 큰 보퉁이
나물 속에서 꺼내주시던
파릇한 송구 나무
입으로 벗겨내며
씹어보던 물맛 단맛
엄마는 땀을 닦으며 우리 보고 계셨재.
126
자는 척 하였지
“에미야, 애가 자는구나. 방에다 눕히거라.”
할머니 말씀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으면서 자는 척 하였다
엄마의 품속에 안겨 짐짓 잠자는 척 했던 거야
다음 날도 저녁 식사 후, 능청스레 멍석위에 누워있으면
엄마는 나를 안아다 요 위에 눕혔다
그것이 그리도 좋던 어린 날의 그 여름밤
127
꽁치
삼십 리 길, 장에 가서
콩 팔고 삼베 팔아
벼르고 별러 사 왔었지
숯불 석쇠 위에 올려놓으면
기름이 뚝뚝 물방울처럼
떨어지고
모처럼 맛난 저녁상 앞에
식구들의 이야기도
꽁치 두름처럼 이어졌지
엄마는 남은 도막 아껴두었다가
다음 날
보리밥 한 술에 고기 한 저름 씩
떠 넣어주면
꼭꼭 씹어 먹어라
할머니 훈훈한 말씀도 함께
꿀떡꿀떡 넘겼지
생선도 사람처럼
귀하기만 하던 시절.
128
만둣국 먹던 날
가랑잎을 밟으며 우리는 숨소리도 죽였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산 위에 엎드려 망을 보고 토끼 옹누를 놓는 아저씨 등 뒤로 잿빛 바람이 불었다.
며칠 후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던 날 저녁, 아저씨 손에는 서너 마리 토끼가 들려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들 모인 아래 윗방으로 어머니는 연신 만둣국을 퍼 담아내고, 만둣국처럼 따끈따끈한 마을 이야기가 겨울을 녹이며 피어났지.
그날 밤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눈발이 끼어들고 저들끼리 주고받는 소리가 부엉이 꿈처럼 빛났다.
129
어머니 손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던 병
어머니 손만 닿으면 금세 괜찮았다
사랑이 묘약인 줄을 어머니만 아셨지.
130
연세 요양병원에서
어머니 살아실 제 둘째를 먼저 보내고
집 나간 셋째 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얼마나 활화산 같은 그리움을 삭혔을까
눈감고 누운 어머니 맥박이 떨어진다.
이제 떠나시는, 먼 길 채비 하시는 어머니
맥박은 0을 가리키고 고요히 눈, 감으셨다
(2018. 1. 30.)
131
외갓집
뙤약볕 한낮에도 쉴 틈 없던 어머니
내가 방학하니 엄마도 방학이었다.
길 나선 엄마 발걸음 새 깃처럼 가벼웠다.
무더운 여름방학 황토 흙 삼십리 길
엄마의 손을 잡고 외갓집 향해 간다
그 먼 길 어린 나이에도 힘든 줄을 몰랐을까.
은고개 재 오를 땐 땀을 뻘뻘 흘렸지만
고개 마루 성황당 터 더위 씻는 綠빛 바람
돌탑에 머리 숙이고 엄마와 나 손 모았다
고갯길 돌아들면 외갓집이 드러나고
새 날개, 벌레 소리 눈과 귀에 익었구나
잡목과 짓 푸른 숲이 옛날처럼 반겼다
외할머니! 부르면서 마당에 들어서면
놀라서 맨발로 달려 나오시던 식구들
반기며 웃던 그 모습 지금 어디 계시나.
큰 산 밑 오래된 집 그곳이 내 외갓집
왕거미 은빛 그물에 저녁노을 짙어지고
고목의 사과나무에 붉게 익던 사과들아
이모와 외할머니 웃음이 피어나고
엄마는 오랜만에 마음 편히 누우셨다
방에는 실꾸리 풀 듯 이야기가 풀어졌다.
나는 마냥 좋아서 몰래 나와 쏘다녔다.
검은 돌 선담 밑 샘물을 마셔도 보고
淸凉한 이끼에 덮인 늪 사이도 살폈다.
늪을 빠져 나오면 검푸른 물, 너럭바위
바위 위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건넛산 녹음 속으로 돌을 던지기도 했지.
육십에 여섯 더한 이 나이 먹었어도
엄마와 외할머니 그때 그 외갓집
이제는 내 삶의 호흡, 일상 속의 法身이다.
(2018. 1. 30.)
132
깨어나서 울다가
한나절 잠 들었다가 깨어나 둘러보니
옆에 있던 엄마는 없고 덩그러니 혼자이다
울음을 돋우어가며 엄마만을 찾았지.
울음소리에 황급히 달려오신 우리 엄마
그때야 척 놓인 마음 울음을 그쳤더랬다
엄마는 내 마음속에 가장 커다란 우주였다.
(2018. 2. 1.)
134
마음 손
아파서 신음하던 어린 몸은 불덩이였지
뜨거운 열 식혀주시며 근심하던 울 어머니
눈물 빛 정성을 다해 밤을 꼬박 새셨다.
그 후로 병 안 걸리고 무럭무럭 자란 것과
국민 학교 중학교 대학까지 마친 것도
따뜻이 돌보아주신 어머니의 마음 손
(2018. 2. 1.)
135
봄에 茶를 마시다
겨울을 밀어낸 자리 봄볕이 찾아들면
어머니 바쁜 걸음 생각 속에 머무르고
그때 그 낙숫물 소리 찻물 보다 더 맑아라
고향집 민들레꽃 나비를 불러들일 무렵
온 집이 환해지던 어머니의 바쁜 걸레질
그때 그 진달래 꿈 잎, 찻물 위에 띄워본다
(2018. 2. 1)
136
어머니의 겨울밤
어머니는 등잔불을 켜셨다.
옥수수수염 같은 어둠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가는 슬며시 드러누웠다
등잔불이 켜지고
어둠은
메주덩이 뒷쪽에 가서 거꾸로 매달리고
할머니
얘기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고
그런 어둠과 불빛이 만들어내는
어스름 속에서
길쌈을 하시는
어머님과 고모님 그리고 할머님
한 폭의 수묵화였다.
윗방에서는
딸그락 딱
새벽까지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는
소리에 맞춰
무릎 살 같은 아랫목은
밤새도록 따끈따끈하였다.
가끔
개 짖는 소리
무성해졌지.
137
고기장수 아주머니
매일 이 시간이면
고깃비늘로 일어서는
목소리
골목 골목
바다의 큰 함성으로
아침을 깨운다
오징어 사세요
오징어 사세요
그 음성에는
오징어보다 싱싱한 삶이
살아 숨쉬고
저리 부지런히 살아 가시는 앞에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으랴
가난도 더러는
행복인 것을
지나온 날들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깊고 클 것인가마는
새벽을 함지에 이고
고기를 파시는 아주머니
어머님 얼굴처럼이나 낯익은 얼굴이다.
139
고맙지요
길거리에서
내 어머이 닮은
우리들의 어머이
오이 파 시금치 열무 단을 놓고
소금에 절인 주름살
햇볕에 그슬린 목소리도 펴놓고
더러
가을 꽃 같은
웃음 몇 송이 끼여 넣고ㅗ
앉아 계시는
아주머니들
고맙지요
그래, 고맙지요.
140
아버지
젊으실 때 아버지는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항상 바른 말에 이유도 당당하여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맹종으로 보낸 시간
국민 학교 입학한 게 내 나이 만 다섯살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공부만을 외치셨다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책상 앞에서 보낸 유년
(2024. 2. 6)
141
아버지
공부 공부 하시길래 어머니께 여쭤봤지
중학교 다니다 만 아버지이셨다고
아버진 하다만 공부 왜 내게는 닦달했나.
늘 하시는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어
대꾸도 거절도 감히 하지 못했어도
한편엔 뒤틀리는 심사 어쩔 수가 없었지.
(2024. 2. 6)
142
중학생이 되어 고향에 가니
누구 아들인가?
양짓말 기혁이 아들 아니우.
그놈 참 똑똑하게 생겼구나
어릴 때, 할머니 사랑도 듬뿍
동네 어른들로부터 귀염도 듬뿍
돌아보니,
아버님 덕에 행복한 유년이었던 걸
알겠다.
143
아버지
일찍 일어나 아버지 방문 앞에 가면 제일 먼저 들려오는 소리는 텔레비전소리였다.
세상의 소식을 일찍 듣기 위해 아버지 방은 새벽이면 떠들썩하였다.
아버지 방에서 들리는 TV의 뉴스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는 나를 안심되게 하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눈을 뜨면 세상사는 일들로 마음을 소통하신 것이다.
144
아버지
젊을 땐
너무 고생시킨 게 미안하신가 보다
어머님이 절에 가시는 날이면
일부러 승용차로 태워 함께 가셨다
절 문 앞까지 바래다 드리고는
절 밖에서
어머님 나오시길 기다렸다가
어머님을 태우고 오셨다
절 안에 부처님 안 계신 줄
아버님은 아셨던 거다
어머님을 배려하는 그 마음
바로 佛心이셨지.
145
아버님
한 세상을
아옹다옹 살 일 있는가
한 잔 두 잔
술로 달래시던
아버님의 세월
찾아뵈면
반기시던 모습
찌든 탐욕이 때라곤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던
아버님 얼굴
나의 부처님,
아버님
146
아버지와 의자
‘에이, 냄새 … ’
종일 엉덩이 냄새 맡아도 불평랗 것 같아도
불평이 없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칠 때에도 저런 모습이었지
공부하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의자는 허전해 한다
아버지가 쉬실 때에도
저런 모습이셨지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던 해님이
의자에서 뒹굴며 논다
이제 할아버지가 되신 아버지
손녀와 같이 있을 때
저런 모습이다
일 할 때에나
쉴 때에나
의자처럼 따뜻한 모습이다.
147
청량동 古家
외져서 아련한
산 아래 고갯길
한 구비 돌고나서
또 한 구비 내려가면
벚꽃 핀 꽃 대궐에서
환히 맞던 부모님
봄 4월 그늘진 뒷길
삶도 그리 뒷길 같다
어머니 아버지는
한낮에도 허기졌지
오늘은 청량동 古家
꽃보다도 어질다
148
^^^^ 미수록 작품
고향집의 겨울 아침
고인 물을 떠내고
새 물을 담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터시는 할머니
살찐 송아지 뽀얀 울음도 들어앉고
발가락이 시린 새소리도 내려앉고
여물 끓는 냄새도
푸짐하게 들어찼다
잉걸불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여지면
그때서야
게으름뱅이 해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
해해해
밝은 웃음을 깔아놓곤 했다..
큰고모님 댁
우리 집이야 부들로 엮어놓은 자리에다 흙벽에 신문자를 발라놓은 초가집이었지만 큰 고모님 사시는 집은 반듯반듯 알록달록한 도배지에 장판 방이었다.
그런 고모님 지벵 들어 앉으면 조곤조곤 잠이 들었다. 엄마가 잠든 나를 깨우는 게 뭣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잠에서 깨어보면 우리 집이 아니어서 화들짝 놀랐다.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올라치면 "아침 먹고 가거라!" 부엌 문 틈을 타고 들리는 큰 고모님 밀씀이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만큼 고맙고 또 고마웠다.
149
외할머니
삼척군 하장면 장전리 푸른 솔밭은
외할머니 이마가 보이는 길
멀리 돌아드는 솔숲 길 너머
외할머니 신발 소리 들리는 길
외할머니는
오늘을 사시면서
솔밭 속에서
옛날을 가구셨어요
때 묻지 않은 옛날의 노래를
부르셨어요
주루먹 가득히 바람을 지고
산을 오르실 때면
할머니 주루먹 속엔
햇살이 일렁이고
머루,다래, 풀잎까지 할머니의 친구였대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어둠은 조용히 비를 뿌리고
할머니는 눈 속에
가득히 새소리를 채우고 있었어요.
풀잎들의 웃음을 채우고 있었어요.
오늘은 새해
할머니 가신지 수년이지만
할머니의 따사로운 사랑을 머금은
장전리 푸른 솔밭은
한살 씩 더 먹은 나이 속에서
새 아침의 햇살을
할머니 무덤 위에
곱게 비춰드리고 섰습니다.
150
일원짜리 할머니
동냥을 다닐 때 일원만 주면 좋아하던 머리 허연 할멈이 있었다. 우리는 그 할멈을 일원짜리라고 불렀다.
피붙이 하나 없어, 늘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던 동네 애들이 뒤따라가며 일원짜리, 일원짜리 하며 노래를 불렀다.
마을 어귀에 보퉁이를 낀 할멈이 나타나면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모두들 몰려가 할멈의 뒤를 따라가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일원짜리 일원짜리 …
할멈이 뒤돌아보면 멈칫 섰다가는 또 다시 따라가며 노래를 불렀다.
일원짜리 일원짜리 …
지난 겨울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었다. 방 문고리를 마구 잡아 흔드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얼른 문을 열자, 문밖에 서 있던 일원짜리 할머니. 다음 날 아침 따뜻한 밥 한그릇을 비우고 보퉁이를 옆에 낀 채 문밖을 나선 할멈. 그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올 겨울엔 얼굴을 통 보기 힘들재 할머니는 쌉쌀한 눈발을 지켜보며 혼자 말씀을 하셨다. 마을 아이들도 심심해서 하늘에다가 돌팔매질을 연신 해댔다. .
152
대추나무집 할머니
서너 살 그때 쯤, 대추 꽃핀 어느 여름날이었지.
대추나무집 대추나무 밑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
꽃이며 잎이며 구경하며 지나가는데
마루 위에 앉았던 예쁘장한 대추나무집 할머니
반가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노이 어디 가나? 잠지 좀 떼어 먹자.”
그 말을 할머니께 나는 일러바쳤다.
다음 날도 대추나무 집 대추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그날도 대추나무집 할머니가
“지노이 잠지 좀 떼어 먹자.” 하시길래
나도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말하였다.
“ 봄지 좀 떼어먹자.”
이 말에 놀란 대추나무집 할머니가
“엣끼 놈!” 하시길래
나도 따라 옛끼 놈“하였지.
그 말이 퍼져 온 동네 할머니들에게 웃음바다가 되게 했다지
154
양밥
어릴 땐 자주 아팠다.
골머리를 앓으면.
어질어질
하늘이 흔들렸다.
어둔 밤 등잔불 아래
할머니는
산염불을 외셨다.
훠이 -
훠이 -
우리 손주 고뿔은 다 달아나거라
훠이 - 훠이 -
강릉 이통천의 집으로 다 몰려 가거라
머리를 질끈 동여맨 나를 데리고
할머니는 뒷산에 오르셨다.
거기에 밥을 묻으시고
칼을 던지셨다.
그리고 말슴하셨다.
됐다! 이제 안 아플끼다.
그래선가
참 건강하게도 자랐다.
155
나의 옥수수 섶 울타리
어린 날 공부를 가르치시다가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아버님은 회초리를 들었다
“잘 가르치면 되지, 매는 왜 대누?”
할머니는 치마폭에 나를 감싸다가 대신 맞곤 하셨다
나이 들어 고향집 울타리가 떠 올랐다
매서운 칼바람도 막아주던
고향집의 옥수수 섶 울타리
지금 생각하니
그때 할머니는
나의 옥수수 섶 울타리셨다.
157
그믐날 밤:
바람이 수수수수수수 …
한참 떠들며 지나갈 때였지
숯불에 올려놓아
노릇하게
구워지는 떡을 먹기도 하고
시렁에서 꺼낸
검정 조각 엿을 입에 넣고
할머니 무시시한 얘기에
웃고 떠들다가
그만 잠이 들었고나
엿처럼
달콤한 잠이 ….
158
오다리
걸어다니기 전까지
늘
할머니 등에 업혀 다녔다.
생일 집
잔칫집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군단 군사훈련을 받을때
'차렷' 자세 때문에 애를 먹었다.
할머니, 미워.
159
겨울 아침
내 잠을 깨우느라고
새벽녘 할머니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털어내었다.
그러면 살찐 송아지 울음이 문 안으로 들어오고
시린 발가락이 고운
새소리까지 들어왔다.
어머니가 끓이는 여물 냄새는
하얀 김과 함께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잉걸불에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일 즈음
문을 닫으시는 할머니
짚자리 깔아놓은 방안은
화로의 더운 불빛에 알맞게 데워진
산 공기 냄새가 났다.
너무 좋았다.
160
겨울날
보리밥 시래기 국 앞에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가난한
살림에도
웃음이 솟고
숭늉그릇
모락모락
깊어가는 정
질화로에선
잉걸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싸락눈
사락사락
깊어가는 밤
호롱불 밝혀놓고
글을 읽다가
할머니 무릎 베고
잠이 들었지
161
할머니
저녁을 먹을 때
할머니는 내게 이르셨다.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저녁 잡수십시오' 하라고
그래서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 저녁 잡수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상이 차려졌을 때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서
'아버지, 저녁 잡수십시오.'
그렇게 하니 가족들이 마구 웃었다.
나는 자랑스러웠다.
163
할머니 품
어슴프레하게 밝아오는 새벽에
우리 강아지 잘잤나
일어나 쉬 해야지
할머니가 깨우셨다
아이구 오줌통이 가득 찼구먼
뽀송뽀송한 사타구니를 쓰다듬으시면
두 다리를 쭈욱 뻗고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꿀맛 나는 기지개를 켰던
할머니 품
164
고향집에서 나를 찾다
우리 어머니가 살던 고향 마을에 크고 작은 샘이 솟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고 오는 물동이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늘이 컴컴한 부엌 한 쪽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저녁이면 뒷산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물동이에 고인 하늘을 몰래 퍼나르고 어머니는 꿈속에서도 훠이 훠이 부엉이를 쫓고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살던 바람소리가 이따금 동구밖에서 들릴 때가 있다. 내 꿈 속에서도 가끔 낯익은 얼굴로 만나는 바람의 손, 고향 사람들은 잠 속에서도 바람이 앞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을 안다. 그런 밤이면 마을은 녹말처럼 가라앉았다.
송화가루가 뻐꾸기 울음처럼 날리던 날, 영자 누님은 보따리에 어머니 한숨을 싸 담고 떠났다. 다음 해 보리가 패면 돌아온다던 누님은 속초 어디에서 바다를 파는 비린내 나는 소문만 들려오고 산도라지처럼 뿌리 박고 살자던 할아버지는 대대로 함께 늙어온 고향 달빛을 지고 그해 가을 홀연히 운명하셨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어머니 고무신에 성황당 고갯마루 푸른 달빛만 쌓이고 쌓였다. 열병으로 죽어가는 막내 곁에 침묵으로 더욱 붉게 고이는 어머니 가슴앓이
날이 새자, 산 너머 쏟아져내린 생생한 햇살에 파랗게 잠이 깬 까치들이 소금처럼 익은 어머니 눈물을 고향 뒷산에 묻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눈은 대낮처럼 밝아 와도 저 벌판의 끝에서 맨살 떨고 선 나무들, 한 덩이 매운 맛으로 겨울 낮달이 뜬 채 그날 고향 어른들은 들새처럼 떠나가고 있었다.
165
그때, 시골의 고향집에서
깨꽃 같은 눈 잎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포옥 마을을 감싼다
나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빼꼼이 밖을 내다본다.
한 겹 한 겹 부침개를 부쳐놓듯이
눈이 자꾸 쌓인다
풍년 들라나?
윗방에서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시는 소리 옆에
할머니 목소리도
눈발에 쌓여갔다
그때, 시골의 고향집에서….
167
할머니
겨울이면 언 논바닥 위에서
얼음지치고
등성이 밭 아래로 눈썰매 타다가
들어오면
언 볼과 언 손
할머니 두 손으로
꼬옥 잡아 녹여주셨지
이불 속에 넣어두었던
밥그릇 꺼내놓으시고
“많이 먹어라.”
하시던 음성
묵 김치,
뚝배기 장맛
단맛 나던 음식들
오늘,
연이어 며칠 동안 내린 눈을 치우고
방에 들어와
차가워진 언 손 호호 불다가, 문득 떠오르는
유년의 겨울 할머니 모습
고향 생각을 하면
나는, 70이 된 노인이 되었건만
어린애처럼
어린 시절의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할머니
그리운 할머니
168
할머니
재미있는 꿈을 꾸면
깨어나고 싶지 않던데 …
머리가 하얀 우리 할머니
오늘은 굉장한 잠꾸러기가 되셨지
집안 식구들이 모두 할머니 잠 때문에
울면서 아우성이어도
할머니는 재미있는 꿈을 꾸나 봐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 앞에서 울어도
그 소리를 못 들은 체 한다.
할머니,
나처럼 개구쟁이구나
그만 자고 눈 떠 봐,
눈 떠 봐, 할머니.
170
술래잡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 손이 내 머리를
만져주시던
그때는
병균이 어디론가 숨어버렸어요
배가 고프다고 하면
눈물을 글성이시며
배를 쓰다듬어주시던
할머니 손
그러면 배고픔이 어디론가
숨어버렸어요
울고 있으면
자장 노래 들려주시며
업어주시던 할머니 등
눈물이
그때는 어디론가 숨어버렸어요
이제는
할머니가 꼭꼭 숨으셨어요
아니 아니
할머니 환한 웃음도 따뜻한 손도
포근하던 등도
모두 함께 숨으셨어요.
171
할머니
세상에 천지 없다 우리 강아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시고
손길마다 뜨거운 사랑을 담아
둥기둥기 복 강아지 도닥이셨지
잔칫집에 가서도 할머니 생각
생일 집에 가서도 강아지 생각
집에 들어오실 땐 과일이며 떡
듬뿍듬뿍 쥐어 주며 기뻐하셨지
병이 나 아플 땐 밤 잠 못자고
뜬눈으로 옆에 앉아 돌봐 주시고
칠성님 산신님께 청수 떠 놓고
손 모이 빌으시던 우리 할머니
아들딸 6남매 기르시느라
매운 연기 터진 손등 얼마이던가
그래도 꿋꿋이 살아오신 한평생
몸 아파 마음대로 못 다니시고
우시장 한 귀퉁이 가겟집에서
숨이 안 떨어진다 걱정하시며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보시더니
이제 모든 짐 벗어놓으시고
잠자듯 누워 계신 할머니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골지리
할머니 꽃상여가 고향 마을로 들어서자
뒷산 둔덕에 잠들어계시던
할아버지 내려다보시며
자식 손자 키우느라 고생 많았네
이제는 나와 함께 편히 쉬세
할아버지 손짓하시는 걸
나는 보았지
할아버지 누우신 자리 바로 곁에
할머니 관이 내랴지고
흙이 덮일 때
못다 누린 복락 누리시라고
꽃잎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이 하늘과 땅이구나
그날,
내 눈에서 왈칵왈칵 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172
할머님 기일에
도포를 가지런히 차려입으신 아버님
제사를 주관하신다
늘 보면 의연한 모습에
절로 나오던 존경심
조상에 대한 ‘예(禮)’를 으뜸으로 치셨지
제사 상차림에 분주하셨던
어머님도,
아버님도
이젠
이 세상 분이 아니구나
일가 피붙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낸 후면
서로 안부를 묻고는
음식을 나눠 먹던 그 모습
이젠 다시 볼 수 없네.
174
할아버지 이야기
참 까마득한 옛날이구나
오줌이 잘금잘금 나오는 고놈 노랫가락이
어두컴컴한 마을을 휩쓸고 다녔쟤.
밭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 몸이 가려워져서 가설극장 안으로 모여들었지라.
마을도 사람도 잔칫날 처럼 들 뜬 채
짚더미나 가마니 뙈기에 앉아 홀라당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구마.
매일 저녁 귀경 했으면 배부르것다.
동네 아줌네들 욕심도 많으셨쟤.
뭐시더라 그 영화가
그렇쟤, 바보 온달과 평강공부
커다란 생마무를 터억 어깨에 메고 산에서 내려오던 온달, 공주는 봤던 기라.
산의 거대한 힘이 그 몸에서 푸릇푸릇 솟아나는 것을,
그래서 눈이 참시로 예쁜 평강공주 아닌가베.
그 다음 날부터 우리도 평강공주 하나 즘 찾아올 날을 꿈꾸기 시작했쟤.
까마득한 옛날 이구마.
175
할아버지 고드랫돌
할아버지는 방에 계셨지만 누가 봐도 조용하였다
방에서 들리는 건
달그락 탁 달그락 탁
천천히 고드랫돌 넘기는 소리 뿐이었다.
깊은 밤에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를 음악처럼 듣다가 잠이 들었지만
할아버지거 밤잠도 안 주무시고
밤새도록 자리를 매고 계셨던 것이다.
만약 저렇도록 사법시험 공부를 하셨더라면
우리 집안은 권력가 집안으로
떵떵거리며 살지 않았을끼
그렇지만 고드랫돌 넘기는 할아버지가 더 멋있다.
흙 파고 농사지으며 살아가시는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하였는지를 알 것 같다.
현실 앞에서 약삭빠르게 눈 굴리는 살아가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 분인가.
오늘도 할아버지 고드랫돌 소리를 생각하면
내 마음엔 깊고 넉넉한 평화가 찾아든다.
176
어물장수 명자
강릉 중앙시장 지하로 들어가는 시멘트 바닥 한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건어물 사라고 한다.
국민 학교 때도 야무지던 명자, 그 좋은 성격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웃음을 환하게 얼굴에 담고 고기 파는 모습을 보니 그냥 고맙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에 찌든 모습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억척스레 살아가는 거, 그게 우리네 삶인지도 몰라. 고향길에 피어나던 질경이 같이 외유내강의 인물.
자식 낳아 기르며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존경스런 마음이 든다. 기쁘다, 명자야. 잘 살아라!
177
나는 알지
3월이 끝나가는 무렵이면 오봉호엔 작은 기쁨이 도사린다 호숫가에서 사슴의 발처럼 뿌리를 내린 진달래가 순정한 꽃잎을 꺼내 보인다 누굴 기다리는 것도 아닌 듯 한데 ……
속절 없이 예쁘다
고향집에서 보던 그 순정한 진달래
나는 알지
순희의 볼에 물들던
부끄런
웃음 같던 … .
178
고목을 보며
백발의 머리카락
이빨 빠진 잇몸
쭈글쭈글한 목
저 노목을
빼닮았구나
마음은 아직도
물오르는 나무인데 …
아무려면 어떠랴
고목 등걸에 핀 매화
더 품격 있지
않던가
179
고무신
눈 비비고 나오니
이런,
신발장 한 구석에
흰 고무신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다니 …
하얀 고무신 신고
댓돌 위에 서니
퀄리티가 높아졌다
함께 다니는
좋은 친구인 줄
여태 내 몰랐구나
180
고요 곁에 앉다
난 화분 두서너 개 벗하여 두었더니
창가에 볕이 좋아 아린 맘도 삭는구나
茶器에 물 내리는 소리 한참 그냥 듣는다.
[시작 노트]
세상이 분분해도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있으면 평화롭다. 7여 년 전, 난 화분 하나를 들였는데 3개의 화분으로 늘어났다. 가끔 물을 주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푸르게 솟아 휘어진 난초를 보면 둥글게 사는 삶이 부럽기도 하다. 봄볕이 잘 드는 날, 방터골 방안에서 난을 들여다보다가 시상이 떠올랐다. 차를 마시기 위해 다기에 물을 내리니 그 소리가 아름답다.
181
고요한 평화
제주 견(犬0의 풍성한 털처럼 눈이 내린다
가까운 산을 오르는 중이다
구부러진 쇠꼬챙이 같은 마른 풀과
거끌거끌한 나뭇가지 들이
눈을 맞으며 둥글어지고 두툼해진다
절망과 고뇌도 여기에 오니 침묵할 수밖에 없나 보다
산을 오르는 길들은 눈에 덮여
편안한 와불이 되었다
천지간에 즐거움이 빠졌다
그저 할 일 없는 듯이 걷는 나처럼
눈도 할 일 벗는 듯
내 곁을 내린다 풀풀 내린다
182
고요한 평화
아침에 눈 뜨면
커튼을 연다
어둠으로 덮인 사물들이
보인다, 아니 눈을 뜬다
멀리 건너편
소나무 아래에 쌓인
눈(雪)을 보는 게
나를 새롭게 한다
쌓인 눈과 들판을 보는
이
즐거움
요즘은
그저 신기하지 않은 평범한 날이
귀한 벗처럼
이리 좋다..
183
커피를 마시며
햇빛이
종일
방에 드니,
창 너머 숲 사이
드문드문 쌓인 눈
내 눈을 맑게 한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한결 가벼워지는 몸
하얀 꿈의
겨울 동화 같은 곳이구나
이럴 땐
따슨 방에서
맛보는
커피 한 잔,
보배이지.
184
내게, 내일이 있는 삶이 있는가
저녁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나에게 묻는다
‘ 내게, 내일이 있는 삶이 있는가 …’
그러면, 자신 있는 대답 ‘그렇다!’
내일 아침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나서
먹을 수 있는
믹스 커피 한 잔에 대한 기대감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작은 일인,
식사 후 마시는
커피 한잔이지만
내게는,
‘내일이 있는 삶!’ 이구나
185
내 어느새 고희라는 칠십을 바라보니
내 어느새 고희라는 칠십을 바라보니
지나온 삶의 나날 한 순간의 꿈이었네
미련은 아직 버리지 못한 채 흰 머리만 늘었소만
아내여 우리 둘은 엇갈리는 삶이었네
죽음을 끼고서야 동행한 10년 전의 꿈 같은 나날들
그때는 생사를 잊었었지, 그대를 돌보면서 병상에서 함께 지내던 때가 정말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소
거리를 걷다 보면 무수히 스치는 사람들
다리에 힘 빠지고 삭막함만 더해지니
허름한 방에 동아와서 홀로 누웠음만 못하다오
내 이제 2020년 새해를 또 바라보네
그때는 자그마한 내 집, 토굴 하나 지어내서
책속에, 시속에 묻혀 남은 생을 보내려네
고요하고 무료할 땐 술 한동이 옆에 두고
햇볕 한 줌 달빛 한 줌 박주에 휘휘저어
세월의 거문고 현을 폭포수로 날랄 거니
내 어느새 고희라는 칠십을 바라보니
지나침 많은 한 생 그래서 더 의미 있고
괴로움 더해진 생활 그래서 더 보배롭네 이제는 자랑거리보다
내 모든 허물이 있어 삶이 그저 고맙고 바보처럼 살아가는 즐거
움이 있네.
186
눈 내리는 날
방터골 방안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오는 게 아니다
이리저리 천천히 …
멋대로라는 말이 실감나듯
내린다
눈이 참 평화롭다
눈이 평화로운데, 내가 한없이 평화로운 것도 평생 처음이다
188
느슨한 걸음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며
방터길을 달린다
한참 달리는 버스 안에 있는 나도
어디론가 마구 달려가는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니
순간
털썩
어느 혹성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그때 하늘을 보았다
오, 너희들이 있었구나
별을 벗삼아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로 몰려드는 어둠은
익숙하고 친근하다
인천집 집을 지나 방터골 다리를 건너면
의연히 눈에 다가온다
혼을 밝히듯 등을 겨고 앉은 우리 집
어둠 속에 선 커다란 감나무는
내 문학의 삶을 지키는 수문장
그래, 이 집에는
시간과 역사를 간직한 책속의 언어들이
사건처럼 뒹굴다가
언어의 뼈를 벼린 채 기다릴 것이다
고갯길 65년의
발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긴다
정겨운 풀벌레 소리들이 길을 열고
침묵이 낯설지 않게
길 아래 도란거리는 물소리들
나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
느슨한 걸음에 재미를 더하고 있다.
189
늙음에 대하여
(암, 건강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지내는 게 최상입니다.
그러나 점차 몸이 아프고 약해지는 걸, 살면서 느끼는 걸 어찌하나요. 그래서
말인데요 …)
친구들이여, 사랑하는 벗님네 들이여
늙음의 정상은 건강함?
아 〰 니오
늙음의 정상은
청년 같은 젊음?
아 〜 니오
늙어가며 생기는 주름살
늙어가며 몸에 생기는 병
어쩌면,
늙어가기에 받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
병이 들면 병과 벗하며 살아보세나
아프면 아픈 것과도 친구해 보세나
그러다 죽음이 찾아들면
몸과 혼백이
온전히 여행을 떠나는 날일지도 몰라
그건, 또 다른 시작의 날일지도 몰라
그러니, 늙어서
죽음이 찾아온다는 일
기쁜 일 아닌가, 좋은 일 아닌가.
그래, 우리에겐
늙을 수 있고 별난 친구인 죽음이 찾아온다는
이유가 있어
날마다 행복하게 살고,
그렇지 못한다 해도 행복해 하며
잘 살려고 하지 않는가.
친구들이여, 사랑하는 벗님네 들이여
191
아버님 가시던 날
아버님 가시던 時刻
바람 불고 비 오더니
천상의 길
오르시라고
마중하듯,
마중하듯,
드리워놓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고운 무지개
이승에서 거닐듯이
평화로워라
둥둥
꽃구름 타고 가시네.
잘 지내라, 잘 살아라
노래하듯 가시네.
193
어머님 가시던 날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가시는 어머님
점점 맥박이 느려지시더니
아버님
만나시려고
어머님,
평시처럼 조용조용 가시고 계셨다
곱디 곱게 가시고 계셨다
그날,
내게는 평생 한 번뿐인
가장 깊고 따뜻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194
그리운 동생, 진룡 아우야
동생이 임당동 천주교 부근 작은 사무실에서 부동산 가게를 할 때이다. 잠시 들렀더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 없었다.
형이 이번에도
큰일 하였어.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반색을 하며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면서
꼭꼭 숨겨두었던 수첩 뒤쪽에서 무엇인가 꺼내어 준다.
10만원 짜리 수표였다
돈도 돈이지만 그 마음 씀이
깊은 감동의 늪에 빠지게 하였다.
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건네는 수표가
100억짜리 수표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동생아,
너는 유명을 이미 달리했어도
늘 내 속에 살아있는 든든한 마음 기둥이란다.
그리운 동생아!
195
우리 아들, 남대순
내 몸 늙어가는 줄만 알았는데
어리던 네가 오십 줄에 가까워지는구나
서가에 있는 책을 꺼내다가
문득문득
서가를 쓰다듬어 본다
참으로 단단하고 튼튼하게도 만들었구나
이 애비 글 잘 쓰라고
네가 만들어 준
서가를 보면서
늘 느끼는 마음
놀랍구나, 대견스럽구나
이 말 뿐이다
유리 탁자 받침대도
미적 감성까지 곁들여
어쩌면 이리 잘 만들었는지 …
고맙구나, 아들아
네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지낸다
우리 아들, 남대순
너를 생각하면
늘 행복이 더해지는 시간이란다.
196
홀로 살고 있으니
바로 아래 진룡이 동생
착한 동생도 가고,
부모님 다 돌아가신 …
이후
세상과 뚝 떨어져 사는
고아가 되었구나
홀로 살고 있으니
모두 다 그리운 얼굴
아름답다고 여겼던 나무와 꽃,t 새소리 …
이들보다
피붙이 가족이 더 아름다운 줄을
이제야 알다니 …
다행히
사랑하는 여동생들이 있어,
큰 위안이 되는구나
동생들아,
고맙고
고맙구나.
197
삶, 2024 〜
사는 게
조금 불편해도
이 불편이 고맙고
외로워도
이 외로움이
덕스러워라
그러니,
2024년부터 살아가는
내 시간은
최상의
삶
198
허공 배,
남진원
산다는 것은
허공에
배 한 척 떠다니는 일이야
내 몸이란
허공 배
이리저리 힘줄 드러낸 채 노를 젓다가
풍랑에 꺾이기도 몇 번인가
만리 밖을 온 것 같은데도
돌아보니 제 자리라네
둘러보니
온 곳도 간 곳도 모르겠네
그렇네, 산다는 것은
허공에
배 한 척 떠 있는 일이라네.
(2024. 1. 3.- 1. 11.)
199
공
나는
공이다
둥글게
둥글게
부푼
꿈
처럼
튀어오르고
날아오르고
어디든 달려 나갈 수 있으니
얼마나 통쾌한가
또, 움직임을
멈출 때면
정지된 즐거움은
얼마랴
이,
無極의
자유로움.
200
독거 노인
혼자 있는 게
두려워,
밤낮
TV를 켜놓는단다
그러다가 전기세가 아까워
TV를 끄고
불도 끈 채
누워 있으니
갑자기
텅 빈
우주란다.
201
일요일 아침
가끔
일요일 아침에는
모든 소리 내는 기계를
꽉 걸어잠근다
차 한 잔
마시고
그저, 넋 놓은 사람처럼
앉아서
먼 산에 쌓인
눈을 본다
폭설같이 내리는 고요함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거다.
202
자연
그대 모습 보면
그냥 순하기만 한 데
설레는 이건
무엇 때문일까
다가가기만 해도
따스한 봄인 건
왜일까
스스럼없는
이, 절정
전설로만 듣던
사랑이구나
203
난리 났다오
사람은 도시로 떠나가도
산골짜기 마을이
좋다고
풀들이, 나무들이
모여 살아간다오
지금, 맑은 물 옆으로
옹기종기
꽃들이
만발했다오
시끌벅적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
와 보시오
앳되지만 풀들의 미소
좀 보시오
나무들의
푸짐한 웃음
좀 보시오
난리 났다오.
204
아무도 모를 거야
겨울을 견뎌내더니, 드디어
작은 풀들이
미소 같은 꽃을 피웠다
새 몇 마리
소리 내며
하늘에 예쁜 금을 긋는다
나무들은
참 보드라운 잎을
꺼내놓는다
저들의 몸짓은
가장 사랑스런 말을
전하고 있는 게야.
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205
현장학습
TV에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광고가 이어진다
재미없는, 아예 도움도 안 되는
저런 광고들
전에는 채널을 바로 돌렸지만
‘세상은 흥미 없이
다 이런 모양이야’
그냥 보고 또 본다
이건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이해력 기르기!
또는
무심한 상태 배우기’ 라는
현장학습이다.
206
책 맨 앞장
■ 남진원(南鎭源. 1953 - )
1975년 강원아동문학회, 『강원아동문학』 3집에
동시 ‘호수’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
1976년 『샘터사』, 샘터시조상, 1980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1977년 『아동문예사』, 아동문예 동시 추천
1983년 『강원일보사』,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6년 『문예한국』, 문학평론 신인상 당선
2015년 - 2018년. 강원아동문학회 회장
2019년 – 2020년 강원시조시인협회 회장
2021년 – 2024년 한국문인협회 강원특별지치도 지회장
2024년 – 2025년) 서울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시, ‘커피 한 잔’ 게시
• 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2023)외 다수.
•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문래리 출생
책 맨 뒷장
남진원 시집 - 어머니 물동이 길
발행일 : 2024년 5월 5일
지은이: 남진원
인쇄:
주소:
전화
E-mail.
ISBN 979 -11- 987638 – 0 - 8
정 가 : 20,000원
이 책의 출판과 출판권, 저작권, 판매권은 저자에게 있음.
연락처 및 구입처 동우재 출판사
(출판 신고 번호: 제420 – 2024 – 000008 호 ):
남진원 저술 비평 …
(사업자 등록번호: 550-99-01191)
주소: 강릉시 왕산면 방터길 53-20.
휴대폰 010-3643-6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