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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왕밤 할아버지와 달래
남진원
<1>
봄이라곤 해도 아직은 아침 저녁 콧잔등이 시린 바람이 붑니다. 연화산 언덕배기 양지쪽에는 ‘달래’라는 꽃씨가 땅속에서 싹이 틀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캄캄한 어둠 뿐인 땅속에는 아직 으스스한 추위만 감돌았습니다. 그러나 달래는 땅위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희망으로 가득 차서 조금은 기쁨에 들떠 있습니다.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습니다.
‘아휴, 갑갑해.’ 달래는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꼼짝 할 수 없습니다. 이러다간 여영 땅 속에 묻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야, 조급하게 굴 것 없다.”
달래의 쬐그마한 귓속으로 어디선가 훈훈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세요?”
달래는 어둠 속에서 소리나는 곳을 향하여 귀를 오무렸습니다.
“나 말이냐? 난 이곳 터주대감이란다. 이곳에서 살아온 지가 올해로 꼭 삼백년이 된다.여기서는 모두들 왕밤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왕밤 할아버지는 긴 뿌리를 약간 움직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달래는 자기 말고 또 다른 누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언제쯤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나요?”
달래는 하루 빨리 칙칙하고 습한 땅 속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이곳은 정말 달래에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전과는 달리 달래의 가슴이 점점 갑갑해져 왔고 숨이 찼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 오셨기 때문에 달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달래는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좀 해 주세요. 저는 언제 쯤 숨막힐 듯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한동안 무겁고 어두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다려야 하는 거야. 너처럼 그렇게 성미가 급해서야 될 일도 안 되지. 세상에 쉬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법이란다.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려무나.”
무조건 기다리라는 말에 달래는 화통이 터졌지만 꾹꾹 눌러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낼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달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도 달래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는 게 슬펐습니다.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마음이 좋아 보였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누가 이럴 때 아무 얘기라도 들려주었으면 갑갑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달래의 주위에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다리 같은 길다란 나무 뿌리만 이리저리 뻗어있고 칙치한 흙냄새만 풍겼습니다.
“아이, 속이 메스꺼워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현기증이 날정도로 정신이 어질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돼. 나는 새 잎을 틔워야 해.”
달래는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꼿꼿이 치켜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새 잎을 틔워 보기도 전에, 땅 위 세상에 나가 보기도 전에 영영 죽고 마는구나!’
달래는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엉엉 소리내어 울 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울려고해도 울 기운조차 이제는 없었습니다. 달래는 피곤해지는 몸을 가누지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릅니다. 달래가 잠에서 개어났을 때에는 연화산 등성이에 듬성듬성 버짐 먹은 얼굴처럼 붙어있던 겨울눈도 모조리 자취를 감춘 날이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연화산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파란 하늘을 물 밑에 곱게 깔아놓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달래의 눈앞에 보이는 건 캄캄한 어둠뿐 이었습니다. ‘내가 살아 있었구나!’ 달래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살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몸을 치켜들고 땅위로 솟아오르려고 했습니다.
‘나는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거야. 어둠 속의 세상은 싫어.’ 달래는 온 힘을 모아 뒤채었습니다. 흙벽에 자신의 몸을 부술 듯 흔들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 아팠지만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쾅!’ 가슴이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며 달래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
간 밤에 밤새도록 봄비가 내린 탓으로 연화산은 목욕을 한 것처럼 말끔했습니다.
올해 들어 유난히 포근한 아침 햇살이 연화산에 담뿍 쏟아져내리고 있습니다. 앙상했던 나무들은 생기있게 물을 빨아올리기 시작합니다. 남쪽에서 꽃 내음이 달큰하게 묻은 봄바람이 이곳 연화산에도 찾아왔습니다.
제일 먼저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개지가 흔들거리며 봄바람을 반깁니다. 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던 개구리도 햇살을 한입 물고 껑충껑충 뛰어 봅니다. 숲속에 숨어 있던 새들이 신이 난 듯 날개를 파득이며 푸른 하늘 속으로 솟구쳐 오릅니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맑은 공기 속으로 굴러 퍼지고 있습니다. 연화산 산 속 식구들은 모두가 즐거운 봄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도 큰 나뭇가지를 흔들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러나 몸이 전 같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늙었어.”
생각해 보니 다른 산짐승이나 나무들 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지난 날의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연화산이 붉고 노란 단풍잎으로 꽃대궐을 이룬 어느 가을 날,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탐스러운 밤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습니다.
“야! 이 밤 송이 좀 봐.”
‘어휴, 세상에 이렇게 큰 밤송이는 처음 보겠다.“
다람쥐와 산토끼가 부러운 듯 저마다 한마디 씩 재잘거리며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햇볕에 잘 익혀서 산속 친구들에게 선물을 해야지.”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산속 친구들에게 주렁주렁 열린 왕밤을 선물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달님이 환하게 떠오르는 밤이면 왕밤을 잘 익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그 해 늦가을, 첫 서리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날 아침,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알밤을 하나, 둘 모두 산 속 가족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맛있다. 맛 있어.”
“이렇게 맛 좋은 알밤은 처음인 걸.”
다람쥐며 토끼, 노루들까지 우루루 몰려 들어 알밤을 까먹으며 좋아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일년 내내 익힌 알밤은 해마다 연화산 산속 가족들에게 햔겨울 동안 큰 식량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산짐승들은 커다랗고 우람한 밤나무 할아버지에게 ‘왕밤나무 할아버지’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참 즐거웠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베풀어주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인지를 전에는 몰랐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 재미있는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미 배에서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아기 토끼들은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응석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커다란 새들이 이곳까지 와서 어린 새들을 마구 잡아먹는 이야기이며 배불뚝이 총각 사슴과 곱단이 처녀 사슴이 결혼하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10여년 전부터 심한 병을 앓아오면서 전처럼 탐스러운 밤송이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할 기력조차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봄이 되면 어린 나무들은 힘차게 푸른 잎을 틔우는데 왕밤 나무 할아버지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팔이 아프도록 왕밤이 달리던 때는 다람쥐며 산토끼 사슴 너구리 심지어는 여우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며 아침 저녁 건강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한 해 두 해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자 산짐승들의 발걸음도 뜸해지더니 요 몇해 동안은 아예 발걸음도 안 했습니다. 행여 왕밤 나무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면 ‘흥, 이제는 대추씨 만한 밤도 안 열리는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었구나.’ 하는 눈빛으로 힐끔힐끔 보며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대마다 왕밤나무할아버지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요 몇 해 사이에 더욱 폭삭 늙어 쪼글쪼글해졌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이 온 모양이야.’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힘 없이 중얼거리며 바싹 말라빠진 자신의 몸을 찬찬히 어루만져 보다가 뿌리 밑둥 부근에 눈이 닿자,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요놈이 용케 땅을 뚫고 올라왔수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흙속에서 빠꼼이 고개를 내민 달래를 보았습니다. 연두색 몽당 크래용만한 새싹이 할아버지의 곁에 돋아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달래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향긋한 향기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살그머니 눈을 떴습니다.
“아이, 눈 부셔!”
눈을 뜨자 햇살이 잘금잘금 은가루처럼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연화산은 연두색 물감이 퍼진 듯 고왔고 땅속으로부터 아지랑이들이 시샘을 하듯 날아 오르고 있습니다. 들판은 지난 밤 봄비가 내린 탓으로 기름을 칠해 놓은 것처럼 윤이 났습니다.
“내가 땅위 세상으로 나왔구나!”
“어, 내 몸이 이렇게 예쁜 연두색이었구나!”
달래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땅을 뚫고 나왔지?’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으며 정신을 잃었던 달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달래야, 기분이 좋으니?”
고개를 들고 보니 하늘에 닿을 듯 큰 나무가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왕밤 나무 할아버지란다.”
달래는 아름드리 고목 나무가 바로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만 듣던 왕밤나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시무룩해졌습니다.
“그 동안 애 많이 먹었지?”
“ …… .”
생각하니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얄미웠습니다. 땅 속에서 어렵고 힘들었을 때에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도와주기는 커녕 참고 기다리라고만 하던 말이 새삼 떠올랐던 것입니다.
‘너, 나를 미워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너를 도와주고는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도 도울 수가 없단다. 누구든지 태어날 때는 그런 아픔을 겪는 것이란다. 그러니 그만, 오해를 풀려무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뾰루퉁해진 달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습니다.
풋풋한 흙냄새 속에 섞여 오는 봄향기가 달래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습니다.
“비쭁, 호르르르.”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래는 뾰루퉁해진 마음도 봄눈 녹듯 슬그머니 풀렸습니다. 하늘엔 조약돌 같은 하얀 구름 떼가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땅 위 세상은 살기가 너무 좋구나! 여기에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왕밤나무 할아버지, 누가 저를 땅위로 끌어올린 거예요?”
달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것도 모르다니…. 바로 네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 온 거야. 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썼기 때문에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키가 큰 것이란다.”
‘내 힘으로 솟아 올랐다니….’ 달래는 잘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번 땅 속에서 답답하고 가깝하던 일과 머리가 깨어질 정도로 고통스럽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쇠망치로 얻어 맞던 것처럼 아프던 일도….‘
이 모두가 지금의 달래에겐 좋은 추억으로 여겨졌습니다.
“좋은 봄날이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중얼거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잎을 안 틔우세요?”
연화산의 나무들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서로 서로 잎을 피우느라 야단들이었지만 왕밤나무 할아버지 만은 큰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꺼칠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잎을 피워야지!”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뿌리에 힘을 주고 땅속 물을 빨아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너도 해 보렴.”
달래도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뿌리에다 땅 속의 수분을 모았습니다. 참 쉬웠습니다. 물 오르는 소리가 달래의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숨이 차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힘에 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힘이 안 드는데요? 오히려 신나는 걸요.”
“그럴거다. 나도 전에는 그랬으니까. 이제는 몸이 통 말을 안 듣는구나.”
“그래도 힘을 내세요.”
달래는 왕밤 할아버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는 밤알은 커녕 잎사귀 하나 제대로 피워내기가 힘들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왕밤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쳐져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달래는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주먹 같은 왕밤이 열리기는 틀린 거여.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왕밤을 주렁주렁 달아보아야 하는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다시는 왕밤을 맺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무척 섭섭하신 모양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좋은 수가 있을 거예요.”
“그래, 고맙구나.”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의 말을 듣고 대견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4>
이제는 달래도 몰라보리만큼 자라서 아기 손바닥 같은 잎을 너울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달래는 부지런히 땅속의 물을 빨아 올렸기 때문입니다.
연하ㅘ산을 휘돌던 바람이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칭칭 감고 맴을 돌았습니다.
“이 녀석아, 어지럽다. 그만 두지 못 해?”
“히히히 할아버지, 저는 신나는 데요?”
“이 노옴!”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노여움을 참지 못해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 꼬마 바람아? 어른을 그렇게 놀리다니….”
달래도 바람이 뺑뺑이를 도는 틈에 정신이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아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니, 뭐라고? 쬐끄만 게 누굴 보고 꼬마래.”
바람은 땅위에서 한창 자라나고 있는 달래를 보고 아니꼽다는 듯 쏘아붙였습니다. 달래는 그 말을 들으니 심술이 났습니다.
“너 때문에 나도 어지럽단 말이야. 이 꼬마 바람아.”
“아니, 또 꼬마라고..... 꽃도 피우지 못하는 주제에 참 별꼴이야.”
달래는 바람의 심술궂은 말에 한바탕 싸움을 벌이려고 하였지만 꽃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꾹꾹 눌러 참았습니다.
“꽃이라 그랬지?”
달래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래, 꽃이라 그랬다. 넌 꽃도 모르니? 내 몸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아 봐. 향긋한 냄새가 나지? 이게 다 내가 저쪽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이 내게 준 선물이야. 부럽지, 부럽지?”
바람은 달래에게 역을 올렸습니다. 달래는 바람의 몸에 커를 대 보니 정말 바람의 몸에서 난생 처음 맡아보는 달큰하고 기분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호 - ” 달래는 다투던 것도 잊고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꽃이란 건 어떻게 생겼니?”
“그것도 모르니, 넌 촌놈이구나. 그럼 내가 설명해 주지.”
바람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달래에게 꽃잎의 모양에서부터 여러 가지 빛깔들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신이나게 종알거렸습니다. 그리고 알록 달록 멋진 옷을 차려 입은 호랑나비 왕자가 찾아와서 삿갓봉 꽃님들을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며 귀여워한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바람으로부터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달래는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달래는 자신도 멋진 꽃을 피워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꽃을 피워야지.“
“흥, 네까짓 게 무슨 꽃을 피우니?”
바람은 빈정거렸습니다. 바람이 돌아간 뒤 달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어떻게 하면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만 머릿속에 꽉찼습니다. ‘옳지.’ 달래는 날이 밝으면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달래야, 잠을 안 자니?”
왕밤나무 할아버지도 잠이 안 오는 모양입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흔들고 있는 달래를 불렀습니다.
“예, 잠이 안 와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니?”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어요?”
“옳아, 그 일 때문에 잠이 안 오는 모양이로구나. 걱정할 건 없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꽃이 된단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버리면 자연히 아름다운 마음이 생기지.”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아가 바람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달래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아무 말이 없니?”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가 입을 꼭 다물고 있자, 또 토라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토라졌니?”
“그래서 그런 게 아니어요.”
“그럼?”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다그쳐 묻자, 그제서야 달래는 아까 바람에게 ‘꼬마’ 라고 한 말과 퉁명스럽게 바람에게 말대꾸한 것이 걱정이 되어 그랬다고 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의 말을 듣고 껄껄 웃었습니다.
“너는 참 마음씨가 착하구나. 자신의 잘못된 점을 뉘우치는 그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운 마음이란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달래를 칭찬했습니다. 처음으로 왕밤나무 할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또 멋진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움이 샘처럼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5>
달래는 날개가 있다면 어디든지 훨훨 날아가고 싶도록 기분이 좋습니다.
“나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지.” 그러면 틀림없이 삿갓봉 밑에 살고 있는 꽃들보다 훨씬 더 예블 것이라는 자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에게 말로만 들은 호랑나비 왕자님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벌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여름이 한창 익어갈 무렵 달래는 훤칠하게 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꽃 피우기에 마지막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 더운 날씨지요?“
‘덥다 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마치 고무풍선이 빠지는 듯 힘이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여름이 되면서부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눈에 띄도록 쇠약해졌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부채살 같은 잎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만은 거무스레한 나뭇가지에 겨우 몇 개의 잎사귀 밖에 달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왕밤을 달아보고 싶었는데....”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왕밤을 다는 게 이제는 소원이 되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달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대신 꽃을 피우면 되잖아요.”
“그래, 고맙구나.“
달래는 왕밤나무 할아버지에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즐겁게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화산 봉우리에서부터 산 밑까지 온통 초록색 크레용을 칠해 놓은 것 같은 여름 날, 달래는 도 한 번 심한 아픔을 느끼며 꽃을 피웠습니다.
“내가 드디어 꽃을 피운 거야.”
달래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멀지 않아 호랑나비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달래는 여간 즐겁지 않았습니다.
저쪽에서 초록 잎사귀를 밟으며 바람이 오고 있습니다. 달래는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얘, 바람아, 어때 멋 있지?”
달래는 바람이 칭찬해 줄 것이라고 짐작하고 으스대는 듯이 말했습니다. 달래의 말을 듣고난 바람은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야, 야, 배꼽이 다 아프다.”
바람은 제자리에서 곤두박질을 칠 듯 웃었습니다.
“요것도 꽃이라고 피웠니? 삿갓봉 밑에 가면 너 같은 꽃은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단 말이야. 나비 왕자는 너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거다.”
바람은 달래가 피운 꽃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습니다. 달래는 한꺼번에 품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어, 무슨 꽃이 요렇게 생겼어?”
다람쥐도 자나가다가 시큰둥하게 말합니다.
“쬐그만 게 볼품이라곤 없다. 그지?”
토끼도 지나다가 저희끼리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지나갑니다.
달래는 죽고 싶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예쁜 곷을 피울 수 있다던 말도 모두 거짓말 같습니다.
‘난 어쩌면 좋아?’ 달래는 점점 초조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하루하루가 달래에겐 지겹고 살아 있다는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습니다.
‘난, 미운 얼굴이야. 모두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런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땅 위 세상으로 나와 꽃을 피우기까지 애썼던 일들이 억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벌 한 마리가 날아와 달래의 꽃잎 위에 사뿐이 앉았습니다.
“넌 누구니?”
달래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난, 일벌이라고 해.”
달래는 일벌을 보아도 별로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몸집이라곤 콩알만한 것이 웬 목소리는 그리 큰지 작은 날개를 파득이며 날 때마다 왱왱 기분 나쁜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넌 여기 뭣하러 왔니?”
달래는 맥 빠진 소리로 물었습니다.
“난 네가 좋아.”
“뭐라고?”
달래는 속이 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자기를 미운 얼굴이라고 했는데 일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자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 나를 못생겼다고 일부러 비웃는 거로구나.”
“아니, 아니야. 난 정말 네가 좋아서 내 마음을 그대로 얘기했을 뿐이야.”
“그래, 흥.”
달래는 그래도 일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나를 밉다고 하는데, 왜 너 만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
“그건 각자 보는 눈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달래는 일벌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벌의 눈이 특별하게 생겨서 그런가?’ 달래는 그날 밤 일벌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6>
어둠이 풀풀 날릴 것 같은 밤입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는 피곤한 지 벌써 깊은 잠이 든 것 같습니다. 풀벌레들이 여기저기에서 나무 잎사귀를 간질이며 사근사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야, 괜히 그런 거야. 일벌이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거야.”
달래는 도리질을 해 봅니다.
“괜히 그런 게 아니란다.”
‘누구지?“
주위를 둘러 봐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렴.”
어디선가 또 속삭이는 듯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아름답구나!”
달래는 놀랐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로 은구슬을 깔아놓은 듯 했습니다. 그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아기 별 하나가 달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달래야, 난 너를 밤마다 지켜 보았지.“
아기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달래는 아기별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 없는 꽃 같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넌 참 예뻐!” 아기별이 말했습니다.
달래는 이젠 아기별에게 까지 놀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가 일벌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니 너도 나를 놀릴 셈이로구나. ”
달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달래야,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름답다는 것도 일벌이 말한 것처럼 보는데 따라 다른 것이란다. 일벌은 원래 착하기 때문에 거짓말도 할 줄 몰라. 너도 남을 한 번 사랑해 보렴.”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미운 걸, 어떻게 남을 사랑하니?”
“그건 네가 바람과 토끼 다람쥐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일거야.”
“일벌은 멋있지도 않은데?”
달래는 심드렁해져서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그가짓 겉만 반지르르한 나비가 뭐가 좋으냐? 거기 비하면 마음 좋고 성실한 일벌이 네게는 훨씬 잘 어울린다. 우리 별나라에서는 겉 모양 보다 속 마음이 고운 별들 끼리 더욱 위해 주고 사랑해 준단다.”
달래는 아기별의 말을 들으면서 아기별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아기별은 바람이나 토끼 다람쥐처럼 남을 얕잡아 보지 않았습니다.
아기별과의 만남이 있은 후로는 달래는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심심한 밤이면 아기별이 내려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느 날은 달래의 꽃잎 속에서 꼬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야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일벌은 달래를 만나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찾아왔습니다.
달래는 어느 사이 큰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벌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기별로부터 좋은 얘기를 듣고 난 다음 날 부터는 일벌이 찾아와도 싫지 않았습니다.
일벌이 달래의 꽃잎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차츰 차츰 일벌을 만나면서부터는 달래는 세상이 무지개 색깔로 보였습니다.
이제는 호랑나비 왕자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호랑나비 왕자를 생각한다는 것조차 머리에서 지웠습니다.
달래는 일벌이 자주 찾아주는 것이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일벌 도령님, 나는 미안해서 어쩌지요? 도령님이 나를 이토록 생각해 주는데 나는 아무 것도 드릴게 없으니까요.“
달래는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사실은 난 달래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거라오. 내가 매일매일 찾아오는 건 달래가 예쁘고 귀엽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달래에게서 난 맛있는 꿀을 얻어가고 있는 거라오.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조금도 갖지 말아요.”
일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달래는 꼭 꿈속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달래는 일벌 도령에게 자신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쁨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습니다.
여름도 끝나가는 어느 초가을 밤이었습니다. 일벌은 달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일벌 도령님, 제게 줄 선물이 무엇이셔요? ”
달래는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일벌 도령은 싱긋이 웃기만 했습니다.
“벌써 주었는 걸?”
“뭔데요?”
“우리들의 아기.”
달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달래의 몸에서는 새로운 꽃씨들이 오롱조롱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래는 너무 행복하여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래야? 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꽃이 되었구나! 나도 아기별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어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도 행복하구나.”
달래는 왕밤나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달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왕밤나무 할아버지의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아기별들이 왕밤처럼 주렁주렁 열리고 있었습니다.
( 1985. 강원일보, [어린이강원] 신문에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