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은 본래 삼한 시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다. 신라에 와서 고타야군(古陁耶郡)이 되었다가 그 후 경덕왕 때 고창군(高昌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과 접전했을 때 김선평이(金宣平) ․ 권행(權幸) ․ 장정필(張貞弼)등이 왕건을 도와 승리함으로서 고려가 개국공신 김선평 ․ 권행 ․ 장정필을 태사로 삼았으며 그 까닭으로 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라 하였다.
그 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은 길주(吉州)로 고쳐 자사(刺史)를 두었고 현종 때는 안무사(按撫使) 및 지길주사(知吉州事)를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 때 남적(南賊)인 김삼(金三)․효심(孝心)등의 반란군이 주군(州郡)을 위협하고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그때 안동부가 공로가 있었다 하여 안동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신정 때에 와서는 경주의 야별초 이우(李佑)등이 무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킬 적에 안동도호부가 이에 대항 진압하는데 많은 공로가 있었으므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때는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고 그 후 공민왕이 홍건적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몽진, 이 고을에 머물렀을 때 안동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왕을 모시었으므로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조까지도 그대로 있었다.
조선 세조 때에 이 곳에 진(鎭)을 두고 부사(府使)로서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府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얼마안가서 부사(府使)는 폐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전국의 행정 구역을 23부제(部制)로 구분할 당시 안동관찰부를 설치하여 봉화 ․ 영주 ․ 의성 ․ 군위 ․ 영덕 등 9개 군을 통괄하고 있었으나 4년 후에 이를 폐지하고 안동 ․ 예안으로 분리하였다가 1941년 다시 두 군을 안동군으로 병합하였고 1931년 4월 1일 안동군 안동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2년 11월21일 신안동시로 승격되었으나 1963년 1월 1일 안동시로 개칭되었다.
1973년 7월 1일 풍산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4년 7월 1일 안동댐 건설로 월곡면 폐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와룡면, 남후면, 남선면, 임하면 일부가 안동시 로 편입(서지1․2리, 수상1․2리, 수하1․2리, 정상리, 정하1․2리, 송천1․2․3리), 1995년 1월 1일 안동시와 안동군을 통합, 안동시로 발족(1읍 13면 18동 3출장소)1998년 12월 1일 행정동 통합 1읍 13면 10동 3출장소를 관찰하고 있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둘러 싸여진 경상북도 북동부 낙동강의 상류에 위치한 영남분지의 중심지에 영남 산을 주봉으로 하는 산악이 호형(虎形)으로 시가지를 에워싸고 남으로 향하여 평야를 이룬 침식분지에 시가지를 이룬 안동시 남부에 낙동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일월산에서 발월한 반변천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송야천(松夜川)이 시가지 동부에서 낙동강과 합류하고 분지 지형과 대륙성 기후의 영행을 받아서 기온차가 심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에게 쫓기고 쫓기어 대구에 있는 팔공산(왕건의 여덟공신이 죽은 산이라는 데서 기인한 이름)에서 대패하고 계속 밀리고 밀리어 안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안동에 있는 영남 산에다가 진을 쳤습니다. 현재 안동 여고 자리부터 길원 여고 경일 고등학교를 지나는 무식하게 긴 방어 진을 구축하고서 견훤과 맞섰습니다.
당시 견훤군이 얼마나 활을 많이 쏘아 되었던지 지금도 안동 여고 뒷산엔 그 당시 화살촉이 발견된다는 소문이 돕니다.
그때 안동에 있던 세 청년이 고려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그들은 왕건이 자신의 나라인 신라를 구하러 왔다가 - 사실은 신라를 따 먹으로 온 거지만-- 왕건에게 당한다며 동네사람들 몇 백명을 끌어 모아 의병을 만들었습니다. 병력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정도의 전력이었지만 그들은 견훤군을 엽기적으로 격파하게 됩니다.
그들은 야습을 하기로 마음 먹고 -- 간도 크지 농사꾼들이 야습을... -- 밤에 견훤군을 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견훤군은 자신들의 적군은 오직 영남산에 진치고 있는 왕건군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야습을 당하자 당황하였습니다.
게다가 의병들은 칼을 휘두르기 보다는 북을 치고 꽹과리를 쳐 대군의 군악대 행세를 하였습니다. 이에 정말 당황한 견훤군은 칡흑 같던 그날 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워낙 어두웠던 지라 앞에 있는 아군을 적군인줄 알고 칼을 막 휘 두른 것이죠.
여기서 죽겠다 싶어 망연 자실해 있던 왕건은 견훤군이 서로를 죽이는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거의 자멸할 때 즈음 기습을 하여 견훤군을 박살 내버립니다. 실로 엽기적인 역전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날 안개가 자욱하던 새벽 왕건은 지원군을 찾아 보았습니다. 아무리 지원군을 찾아보아도 동네사람들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왕건은 그 세 청년을 불러 크게 칭찬하고 성을 하사하게 됩니다. 그 당시엔 일부 귀족들만이 성이 있을 뿐 평민들은 자신의 이름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 세 청년에게 왕이 직접 성을 하사한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은 말씀 안드려도 아시겠지만 그들은 자손대대로 강력한 파벌을 형성하여 조선 시대까지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서 고려와 조선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동 권씨, 김씨, 장씨의 형성 과정입니다. 조선 시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우셨으니 아시겠죠?
그리고 안동이 역사에 장식한 또 다른 분야는 학문 분야입니다. 1000원 권 지폐의 주인공 퇴계 이황 선생은 바로 안동 분이십니다.
이황선생은 관직도 마다하고 도산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 썼습니다. 이황선생은 제자들을 과거시험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학문을 가르쳐 그들을 조선시대 참 선비로 길러냈습니다. 나중엔 영남학파까지 형성되어 일본에까지 우리식으로 된 성리학을 알려 그들에게 제대로 된 학문이 뭔지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는 류성룡(두음 법칙에 따르면 유성룡, 탤런트 류시원 집안)이라는 훌륭한 제자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서애 류성룡 선생은 이순신장군을 나라에 적극 천거하고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에서 풀려 나는데 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와 외교를 하여 그들이 더욱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영의정까지 올랐던 서애 선생은 그 당시 조선의 군사력을 상당히 키운 문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